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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임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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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867년 인천 영종도 주민들>

1867년 인천 영종도 주민들

발간사 영종도는 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해 있는 섬으로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영종도(원래는 자연도)와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사이의 바다를 매립하여(2001년) 하나의 큰 섬이 되었다. 국제공항이 들어서게 되면서 육지와 섬을 잇는 철도와 다리가 건설되고, 상업 및 주거 단지가 연이어 조성되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영종도로 들어와 2021년 5월 기준 주민수가 9만 5천여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영종도로 주민들이 대거 入島한 사례는 오늘날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도 육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입도하여 영종도 주민이 되었던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정부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통치의 절대 원칙으로 삼았고, 이에 세상만물을 ‘華’(문명: 向化의 대상)와 ‘夷’(야만: 敎化의 대상)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인식하고 그 인식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고 관례화하였다. 이러한 인식과 정책, 관례는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육지는 ‘華’였던 반면 섬은 임금(華)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 ‘夷’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夷’ 지역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거나, 스스로 살지 않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조선 초기까지 섬 지역은 倭寇가 수시로 분탕질을 일삼던 불편한 곳이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空島 정책을 원칙으로 삼아 國營牧場을 설치하는 것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서울 근방의 강화도·교동도, 남쪽 지역의 거제도·남해도·진도·제주도 등과 같이 郡縣을 설치한 큰 섬을 제외한 대부분의 섬에는 말을 관리하는 牧子 정도만을 최소 인원으로 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섬 지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인식 및 정책이 전면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을 겪고 난 17세기 중엽의 상황 때문이었다. 강화도를 ‘保障處’(유사 시 임금 등 국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피난처)로 삼으면서 그 주변의 섬들을 중심으로 海防 체제를 강화하였고, 해방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섬들에 水軍鎭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영종도는 해방의 최적지였으니 당연히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그 체제도 교동도에 두었던 京畿水營(종2품 水軍統禦使)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중앙 군영인 御營廳에서 직접 관할하는 ‘獨鎭’의 防禦營(종2품 水軍防禦使) 규모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수군방어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규모에 걸맞게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야 했다. 지휘관뿐 아니라 군졸이 상당수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수군진이 처음 들어선 1653년 이후 세금 감면은 물론 경작지 제공 등 여러 혜택을 주면서 육지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영종도로 입도시켰고, 그 결과 주민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에는 수군진이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국제공항이 계기가 되어 영종도는 주민수가 급증한 셈이다. 영종도의 원래 이름이었던 ‘자줏빛 제비’[자연도(紫燕島)]가 바다(수군진)와 하늘(공항)을 쏜살같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필자와 영종도와의 첫 인연은 憧憬에서 시작하였다. 어릴 적 만국공원(필자의 유년시절에는 ‘자유공원’이라 불렀지만, 이 명칭 대신 필자는 ‘만국공원’ 또는 ‘각국공원’을 선호하고 있다)에 오르면 먼발치에 바라보이던 제법 큰 섬, 어선과 여객선이 오고가며 한 폭의 그림 같은 정취를 심어주었던 섬, 어른이 되면 꼭 가봐야지 다짐했던 그런 섬이었다. 그 소원은 대학 초년 때 휴교령으로 원치 않던 휴학생의 처지가 되어 월미도 선착장에서 친구들과 배를 타고 영종도에 있던 친구의 외할머니 댁을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영종도 선착장(구읍터)에 내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비포장길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운서동 쯤 되었던 것 같은데, 1980년대 초 만해도 영종도는 아직 시골어촌이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대학 시절 M.T를 핑계로 영종도(사실 주로 을왕리 해변이었지만)와 몇 번의 인연을 더 맺었고 ‘이제 영종도는 내가 좀 알어!’라는 교만함에 영종도에 대한 매력이 사라질 즈음, 영종도는 놀러 다니던 장소가 아닌 연구해야할 대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영종도에 국제공항 건설 계획이 확정되면서 인하대학교 박물관과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수행한 지표조사에 연구원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조사를 계기로 주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집안 전승의 문헌과 고문서 등의 자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개발로 조만간 ‘전통’과 ‘전승’이 사라질 영종도에 대한 연구자로서의 연민과 애착이 은연 중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필자에게 겹겹이 쌓여가던 영종도에 대한 연구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인 것은 조선 후기에 작성된 영종도의 戶籍大帳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였다. 바로 이 연구 저서를 저술하는 토대가 된 “1867년 永宗鎭戶籍” 자료였다. 이 자료의 확인 및 입수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해야할 의무(?)가 있겠다. 2005년 일본 鹿兒島大學의 이노우에[井上和枝] 교수가 보내 준 『日本所在朝鮮戶籍關係資料解題』(재단법인 東洋文庫, 2004) 책자를 통해 일본 東京國立博物館에 1867년에 작성된 영종진(영종도·삼목도·용유도 등)의 호적대장이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일본에 거주하던 지인에게 부탁하여 이 호적 자료의 MF(마이크로필름)을 2007년에 출력하여 입수하게 되었다. 이 자료의 종이 출력본을 마주한 순간은 마치 140년 전에 살았던 영종도 주민들을 대면하고 대화하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조선시대 5백 년간 지속되어온 호적제도가 1896년 9월 1일자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전에 작성된 인천 지역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한 자료라는 가치 때문에 그 감격은 더하였다. 이에 필자는 이 자료의 존재를 인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에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정보를 제공하였고, 박물관에서는 소장처에서 자료를 복제하여 현재 원본과 거의 동일한 복제물을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인천 영종역사관에서도 이 자료를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비록 종이 책자에 문자로 담긴 내용이기는 하나, 그 의미는 옛 삶의 터전을 잃고 일본에 가있던 ‘19세기 중엽 영종도 사람들의 귀향’이었다. 필자는 자료를 입수한 후 곧바로 한 편의 논문을 생산하였는데, 바로 2008년 11월에 발표한 “19세기 후반 仁川 島嶼지역의 주민 구성-1867년도 ‘永宗鎭戶籍大帳’의 사례 분석-”(『한국학연구』 제19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이다. 이어 2008년 12월에 이 자료를 활자화하고 역주하여 『譯註 永宗鎭戶籍資料』(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로 발간하는 성과를 내었다. 그렇지만 이 자료를 분석한 연구논문은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소중한 자료를 확보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늘 마음을 짓눌렀다. 그러던 중 2021년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그동안 영종도에게는 미안함으로, 필자에게는 자책이 되었던 숙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저질러놓고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함부로 남에게 추천할 만한 말은 아니나 이번에 필자에게는 딱 맞는 말이 되었다. 저서 지원 사업에 신청을 권유한 (사)개항장연구소의 강덕우 대표와 인천여성사연구소의 강옥엽 대표, 부족한 저서 지원신청서를 선정해 준 심자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발간하기까지 많은 지원과 도움을 준 인천학연구원 조봉래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물론 원고의 편집과 인쇄를 맡아 주신 미소기획의 최한묵 대표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호적 자료를 분석하는 연구의 특성 상 <표>가 많아 편집의 수고스러움이 다른 책에 비해 몇 배는 더 하였을 텐데 불평 없이 제작에 임해 주셨다. 또한 이 책에 삽입한 사진 자료의 활용에 협조해 주신 인천광역시립박물관과 영종역사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의 기관에도 감사를 드린다. 조선시대 섬 주민생활사 주제의 책을 발간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빠뜨려선 안 될 분이 있다. 목포대학교의 김경옥 교수로 조선 후기 섬 연구의 체계를 세웠을 뿐 아니라 몇몇 주요한 史像을 정립한 연구자이다. 필자는 김 교수와 20여 년 가까이 학문적 소통을 하며 많은 교시를 받아왔는데, 특히 이번에 필자가 책을 저술하는데 적잖은 자극을 주었음을 밝힌다.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제1부(“영종도 戶籍 자료와 주민”)에서는 “1867년 永宗鎭戶籍” 자료를 분석하여 19세기 중엽 영종 수군진의 관할 지역인 자연도(현 영종도)와 삼목도·용유도, 그리고 월미도·신불도·무의도 등에서 거주한 주민들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살펴보았다. 제2부는 “1867년 永宗鎭戶籍”에 대한 교감 및 정서 부분이다. 이 자료에 대한 교감 및 정서(활자화) 작업은 2008년에 발간한 『譯註 永宗鎭戶籍資料』에서 수행한 바 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준비하면서 다시 원본 자료와 검토한 결과를 수정·보완한 내용이라 하겠다. 끝으로 마지막 부분은 <부록>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영종진(영종도)의 地理志 자료를 역주하였고, “1867년 永宗鎭戶籍” 자료에 수록된 주민들을 <표>로 정리하였다. 이 <표>에서 정리한 908戶의 주민 내역은 1867년 영종도에서 살았던 주민들의 후손이 선조를 찾아보는 이정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오히려 앞의 제1부와 제2부보다 <부록>의 주민 내역이 더 많이 활용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필자가 이 책을 기획하면서 내심 바라던 바라 하겠다. 특히 1875년 일본군의 영종진 포격과 焚蕩(‘운양호사건’)으로 영종진을 사수하던 주민들이 적잖이 死傷 당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때 사상된 주민들에 대한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그 伸冤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867년의 영종진 호적 자료는 영종진 포격·분탕이 발생하기 8년 전에 작성된 일종의 人名簿이다. 따라서 이 호적 자료에 등장하는 인물(가문)의 족보를 연계하여 분석한다면 1875년에 사상 당한 영종도의 주민들을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22.02. 작은 서재 ‘우림재’(禹林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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