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궁이다.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연경당과 낙선재는 단청이 없는 궁궐속의 사대부가를 엿 볼 수 있는 왕의 침전이었던 공간이다.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궁궐속에 한옥을 지은 분의 뜻을 세기며 답사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맺으며
‘조선 순조 무자년(1828년)에 효명세자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여 연경당에서 잔치를 열었다.’
창덕궁 안에 조선 후기 상류층 사대부 가옥을 모방하여 지은 건축물 연경당에 관한 기록이다. 민가는 주로 덤벙주초 위에 지어졌는데, 궁궐 속 한옥은 잘 다듬어진 숙석 위에 지어졌다. 주초부터 그 위용이 남다른 이 한옥은, 오랜 세월 한옥을 주제로 촬영해 온 나에게도 쉽지 않은 대상이었다. 물리적인 접근에서도 사진적 표현에서도 그러했다.
실재하는 연경당의 보존만큼이나 기록의 중요성이 큰 만큼, 다른 어느 때보다 ‘구중궁궐 속 한옥’의 형태와 기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숙석 위에 지어졌듯이, 그 기초 위에 연경당의 아름다움을 세우고자 했다.
경사스런 행사를 연다, 연경당
궁궐 속 한옥인 이 독특한 집은 1827년 진장각 옛터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사대부가 99칸집의 구성을 잘 표현한 집으로 왕세자가 왕권강화를 위해 지은 연회용 공간이다. 1828년 호명 세자가 순원왕후의 40세 생신 축하연과 부친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맞아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다’는 의미의 연경당이다. 사랑채의 당호였으나 지금은 이 주위 건물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다. 단청을 하지 않았지만 남녀유별과 장유유서의 규율이 채나눔과 평면구성 등에 세심하게 적용되어, 사대부가 집의 원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고종 때에 가서야 완성되었고 대한제국 시절 외국사절단의 접빈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낙선재의 큰 특징은 건축주의 염원이 담긴 다양한 문양들이 있다는 것이다. 방문마다 다른 문양을 창호에 넣었는데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와 여인의 사랑을 의미하는 매화에는 경빈에게서 후사를 잇고 싶은 헌종의 염원을 담았다. 만(卍)자살무늬, 아(亞)자살무늬, 교살무늬, 정(井)자살무늬, 용(用)자살무늬, 숫대살무늬, 띠살무늬 등 창호의 무늬가 두루 다양하게 쓰였다. 그 외에 숨은그림 찾기를 하듯 화계와 꽃담, 기와, 합각, 난간, 굴뚝 등에 다채로운 문양을 장식해 넣었다. 거북이 등, 불로초, 목숨수(壽)자 문양은 장수, 공작새 문양은 덕망, 도깨비 문양은 벽사, 박쥐 문양은 다복(多福)의 상징이다. 낙선재 누마루 아래엔 빙렬의 문양을 넣었는데 함실아궁이가 바로 뒤에 있어 방화의 벽사를 위해 넣은 것이다. 화계 위에는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閑靜堂)이 있으며, 그 외에 상량정(上凉亭), 칠분서(七分序), 만월문(滿月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 등이 있다.
책도 이 수순을 따랐고, 구성 요소들을 빠짐없이 기록코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책자에 ‘구중궁궐 속 한옥’의 웅장함과 섬세함, 계절이 들고나는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이 책이 오래 한옥만을 바라기해온 한 사진가의 눈과 발을 빌어, 일반인들이 ‘연경당’과‘낙선재’에 보다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오래 머묾이 허락되었던 ‘연경당과 낙선재에서의 시간’에 감사한다.
동춘(東春). 이십여 년 동안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며 수 많은 한옥들을 찍다 보니, 택호를 연상시키는 이름 앞에 ‘한옥 사진가’라는 수식이 붙었습니다.
한옥은 자연과 닮게 지었습니다. 북풍을 막아줄 산이 있고 산 아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텃밭이 있어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로 손쉽게 식수를 해결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집터라 했습니다. 선조들은 이런 조건을 갖춘 장소에 가능한 남향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산을 깎거나 댐이나 다리를 놓지 않고 돌을 이용해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다녔습니다. 집터에 굴러다니는 돌도 나무 한 그루도 자연에 있는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흔히들 집을 지을 때 동서양을 막론 하고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기초가 주초석인데 일명 모퉁이 돌이라고도 합니다. 집을 지을 때 양쪽 벽면이 직각으로 만나는 곳 아래엔 주초석이 있습니다. 민가나 서원 향교 등에는 그 주초석을 가공하지 않은 집 주변의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모서리에 세워지는 기둥 아래에 놓이는 주초석은 집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다가 (기둥과 돌의 면이 당연히 수평이 맞지 않기에) 그랭이 질로 돌의 모양대로 나무 기둥을 끌로 깎아 돌 위에 세우게 되면 돌과 나무가 하나인 것처럼 빈틈없이 기둥이 돌 위에 세워지는 데 이때 사용되는 돌을 덤벙주초라 합니다. 주춧돌위에 세워질 나무 기둥을 한 번에 깎아 맞출 수가 없기에 깎고 세우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이때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목수의 실력이 재평가됩니다. 그랭이 질 하여 주춧돌 위에 돌의 모양대로 다듬어 세운 기둥위에 상량문을 적은 대들보를 얹으면 집이 완성된 것처럼 지신밟기를 하며 고유제를 지냅니다. 완성된 집의 대청마루는 언제나 반질반질한 것이 어릴 적 양말을 신고 발바닥에 구멍 나는 줄도 모르고 미끄럼 타기 놀이를 한다고 장난치던 기억이 날 정도로 늘 사람의 손길이 배 있습니다.
긴 시간 이 집을 지켜온 주인분들께 그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문화가 이렇게 스러지는 것이, 특히 우리 고유의 건축미학이 고스란히 담긴 한옥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이 속상하고 애달팠다. 더 늦기 전에 한옥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해남, 강진, 보성, 안동, 경주, 보은, 강릉, 북촌 등 한옥의 정취가 살아 있는 지역의 고택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예안파 광산김씨 종가가 있는 오천군자마을의 후조당, 탁청정, 설월당, 산남정, 읍청정, 양정당, 침락정, 계암정 등의 아름다움에 홀려 안동을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한 지 벌써 4년째. 도산서원과 지례종가, 하회마을로 이어진 촬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한옥은 우리가 흔히 살아 왔던 집이다. 불과 40-50여 년 전까지는 말이다.
나도 한옥에서 태어나 한옥에서 자랐다. 어릴 적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나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처마를 맞댄 한옥들 사이의 골목엔 또래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제 도시에서 한옥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산이 많이 황폐해진 까닭에 좋은 목재를 구하기 힘들어진 탓이다. 산업화가 시작되며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자, 좁은 땅 위에 여러 세대가 살 수 있는 주거 문화가 필요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살던 한옥이 헐려나간 자리에 이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골목에서 놀던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에 뿔뿔이 흩어졌고, 옛 일을 추억할 장소도 사라졌다.
안동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우리 유교문화의 원형을 보며, 그 문화를 고집스레 지켜온 어른들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전국을 다니며 일관성 있게 작업해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에 우리가 옛날부터 살아오던 ‘한옥’에 집중하고 있다. <행복이 가득한 집>에 연재한 한옥 사진도 그 기록 중의 일부다. 어릴 적 한옥에 살던 추억을 떠올리며 한옥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늘 좋았다. 이렇게 촬영한 시간이 20년이 되었다.
한옥을 촬영하면서 늘 궁금했던 것들이 있었다. 대문을 들어간 후에도 왜 중간 중간 문이 있는 걸까? 웃방, 윗방, 상방 등 못 듣던 방의 이름은 무엇을 뜻하나? 집집마다 창호의 형태, 난간의 모양이 왜 다르지? 편액과 주련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 걸까? 궁금한 것은 책을 찾아봐도 너무 어렵게 설명이 되어 있었고, 이 책 저 책을 모아 놓고 찾아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한옥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샌가 마음에 자리잡았다. 그러다 홍형옥 교수님을 만났고, 의기투합하여 이 책이 탄생했다. 촬영해 놓은 사진이 많았기에 ‘그냥 그 사진을 사용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원고 내용에 맞는 사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일두고택에서 정려기가 있는 대문을 찍어둔 것이 있는데 정작 정려기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결국, 필요한 사진을 찍으러 고택들을 거듭 찾아갔고, 그렇게 다시 찍고 찾은 사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옥 . 보다 . 읽다>가 한옥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한옥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전국 곳곳에 그 집안만의 전통과 개성을 담은 멋진 한옥들이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