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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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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교육과 수업>

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보통 ‘토키 강의’로 불리는 이 강의는 발도르프학교 건립을 준비하는 영국 초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1924년 8월에 이루어졌다. … 발도르프 교육은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 인식을 근거로 하는 실질적 교육 방법이라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 루돌프 슈타이너는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학교 교장으로서 교사 회의를 주재하는 등 교내 사항 전반을 조망한 5년간의 경험을 담백한 형태로 이야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앎』과 『발도르프 교육 방법론적 고찰』을 다른 각도에서 보충하고 사실상의 중점을 더 명료하게 부각한다. … 진정 인간다운 삶은 권위를 신봉하는 수동적 인간이 아니라 정신적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개인을 양성하는 것은 예술적 교육, 즉 개인의 자유를 전제하는 인지학적 교육 예술을 통해서일 뿐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예술가로서 교사, 예술로서 교육을 그대로의 의미와 무게로 배우고 이해해서 실천하는 것이 발도르프학교 교사의 소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괴테 동화 명상집

괴테 동화는 오이리트미나 연극으로 작업된 적은 있어도 진지한 조형 예술적 해석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재적 언어 예술가를 통해 축소 모형으로 드러난 형상적 상상을 다시 물질적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 위대성에 반비례하는 인간적 진부성으로 바뀔 것이 두려워서일까? 혹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면 조형 작품이 되기 보다는 너무 쉽게 삽화의 차원에 머물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내세우고 싶은 조형 예술가에게는 별로 매력 있는 일이 아니라서일까? 나도 괴테 동화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수많은 그림을 작품화하면 어떨까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내 그림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린게 아니라 파낸 것이다. 그런데 파내기 위한 판은 기존의 나무나 리놀륨 등이 아니라 내가 직접 한지를 겹겹이 붙여 만든 것이다. 일단 그림 크기에 맞춰 자른 한지를 장 마다 접착제와 물감을 섞어 칠해서 붙인다. 매일 일정 겹의 종이를 3~4주에 걸쳐 붙이면 대략 1,5cm 두께의 판이 된다. 이 판을 약 두달 정도 말리면 나무처럼 단단해져서 조각도로 파낼 수도 있고, 톱이나 칼로 절단할 수도 있고, 사포로 문지르거나 천으로 닦아도 되고, 동판화 펜으로 스케치를 할 수도, 물감으로 칠할 수도 있다. 종이의 원재료는 나무다. 내 방식으로 제작된 판은 종이를 원래의 나무 상태로 만들되 색깔이 있도록 변형시킨 것이다. 이 제작 방식은 2007년경에 내가 고안해 낸 것이다.

내 삶의 발자취

『내 삶의 발자취』는 루돌프 슈타이너 전집 350여 권 중에서 가장 두꺼운 책이다. 할 말은 전부 썼을 법한 두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긴이가 초고를 번역했을 적에 몇몇 부분에서는 극히 중요한 주제인 것 같은데 루돌프 슈타이너가 말을 아끼면서 아주 짤막하게 쓰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 해서 수수께끼처럼 남는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여러 해에 거쳐 해당 주제에 관한 다른 강의서를 읽은 후에야, 『내 삶의 발자취』가 원래는 주간지 『다스 괴테아눔』에 연재된 바 인지학 내용에 정통하지 않은 일반 회원들이 소화하기에 너무 벅찬 내용은 가능한 한 자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 수수께끼 같은 부분에 더러는 옮긴이가 각주를 덧붙였다. 이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지 독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화두로 삼을 계기를 주지는 않겠는가? 이 책에 많은 것이 옮긴이의 인지학적 배움을 풍부하게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옮긴이 영혼을 번개처럼 내리친 두 가지 관념이 있다. 관념의 생동성이 과연 어떤 모양을 띠는지 문자 그대로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만들었기에 옮긴이가 두고두고 마음속에 품고 다니며 인간 생활을 관찰하는 기준으로 삼는 그 두 가지는 물질주의적 사고 가치와 의지 가치다. <...중략> 『내 삶의 발자취』에서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주 고독한 심정을 토로한다. 자기는 친구들 영혼 속으로 가차 없이 뛰어들어 그곳에서 ‘집에 온 듯이 편안하게 느끼는데’, 친구들은 아무도 자기 정신세계를 방문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정신 속에서 사람을 만나기를 바랐다. 물질을 소비하는 데에 -즉 의지 가치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엄밀하게 숙고하도록 만드는 관념을 습득한 -즉 사고 가치를 살아내는- ‘인간’을 고대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인지학적 열매를 따 먹으며 그 단맛을 즐기기만 할 뿐, 힘든 사고 노동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 하지 않는가? 인지학이 이른바 친환경적으로 확장된 의지 가치 쪽으로, 더 정확히 말해 산업화된 국가에 중산층의 질적인 소비 성향을 강화하는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거의 오남용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신지학

이 책에는 옮긴이의 가슴을 울리지 않고 지나간 문장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서 처음 읽었을 적에 선명하게 흔적을 남겼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더 짙어지는 것을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이렇게 인간은 세 가지 세계의 시민이다. 신체를 통해서 지각하는 세계에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속한다. 인간은 영혼을 통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 두 세계를 초월하는 세계가 인간에게 정신을 통해서 드러난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과 느낌과 생각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평범하게 쓰인 듯한 이 문장의 무게가 -적어도 옮긴이에게는- 더욱더 비범하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육체를 나 자신이라 여기고, 눈에 보이는 저 바깥 세계만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저 바깥에서 오는 자극에 육체의 신경 체계가 반응해서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배우지 않는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찔끔거리듯 반응해서 생겨나는 느낌이나 생각은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고, 객관적 자연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 별 쓸모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가? 앞에 문장을 빌리자면, 오늘날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세계의 시민, 즉 ‘신체를 통해서 지각하는 세계의 시민’일 뿐이다. 영혼 세계와 정신세계는 개인의 주관적인 세계일 뿐이고 믿음의 대상이 되는 세계로만 남았다. 그 두 세계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낯선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낯선 것을, 알 수 없는 것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가? 호기심이 굉장히 강해서 낯선 것에 즐겨 다가가는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적대감을 내포하는 공포심을 느낀다. 현재 최고도로 낯선 수수께끼로 남았기에 인간이 형용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육체를 벗는 것, 즉 ‘죽음’이다. 죽은 후에 연옥이나 지옥이나 천당이 있다고 종교가 가르치기는 해도, 그것은 체험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에 담아 둔 지식일 뿐이다. 실제로 죽음을 면전에 마주 대하면 떠오르는 것은 ‘깜깜할 뿐’이다. 칠흑 같은 나락으로 뛰어내려야 한다는 느낌.

인간 자아인식으로 가는 하나의 길

우선은 ‘명상’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이미 읽고 이해하기 위한 내용은 아닐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명상은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 불교 명상에서는 화두로, 요가 명상에서는 특정 만트라로 주어지는 ? 어떤 것에 깊이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상을 통해 최상의 경우 깨달음을 얻은 명상자는 삶의 이치를 알아볼 수는 있지만, 그 어떤 것을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 여덟 편의 명상이 짧은 화두나 만트라가 아니라 조금 긴 단상으로 쓰였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그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죽음, 이는 곧 삶의 변화이니!

번역과 교정을 거치면서 더러는 삭제해야 할 정도로 같은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읽으면서 좀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그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단어에서 슈타이너의 끝없는 인간애를 느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다른 어떤 강연보다 이 강연을 더 애호한다.

청소년을 위한 교육 예술

이 연속 강의에서 루돌프 슈타이너는 오로지 물질에 집중하는 자연 과학으로 인해 너무 일방적으로 된 세계관으로는 육체뿐 아니라 생명과 영혼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교육할 수 없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 시대와 비교해서 이야기한다. 그리스인은 흙, 물, 공기, 불이라는 4요소를 질적으로 파악해서 에테르체의 활동성을 유의한 반면 현대 자연 과학은 수많은 원소를 발견하기는 해도 그저 죽은 물질로만 다루고, 그것을 근거로 세계관까지 형성한다...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구분하기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특정 권력 집단을 통해 기정사실로 제시된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무시되거나 범죄자로 취급되는바, 진실과 거짓을 구분했다 해도 공개적으로 드러내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극성 같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내적 용기를 북돋는 것이 바로 인지학이다.

초록뱀과 아름다운 백합

이 동화를 처음으로 읽으면 실제로 좀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쉽게 맥락을 놓칠 수도 있다. 커다란 강을 사이에 둔 두 세계 여기저기 사는 사람들과 환상 존재들이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이 굉장히 압축된 시간 안에 거의 시詩에 가까운 문학적 표현을 통해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괴테가 ‘형상앎’을 보여주려 했다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 동화에서 전개되는 과정을 영혼 앞에 형상으로, 그림으로 그려내서 그 ‘동화 공간’ 안에서 ‘동화 시간’에 맞춰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저 말로만, 개념으로만 읽으면서 이해하려 할 때는 지나치고 마는 것들을 곳곳에서 적잖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연습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의도하는 ‘형상적 상상’을 향하는 첫 걸음이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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