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이 긴장하게 되는 이유들이 있다. 사랑은 그대의 ‘무의식’으로부터 나오지만, 그대의 모든 능력은 ‘의식’ 안에 있다. 그대가 가진 모든 재능과 지식은 의식 안에 있다. 사랑은 무의식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얼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사랑은 그토록 압도적이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아홉 배가 더 크다. 그래서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모두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정과 느낌을 겁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붙잡아두려 하고, 감정과 느낌으로 인해 혼란이 야기될까봐 두려워한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혼란은 멋진 것이다!
반드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꼭 혼란이 생겨나야 할 필요도 없다. 질서가 필요할 땐 질서를 활용하고 의식적인 마음을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혼란이 필요할 땐 무의식을 활용하고 혼란을 그냥 내버려두어라. 온전한 사람, 전체적인 사람은 두 가지 모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 의식을 무의식에 강요하거나 무의식을 의식에 강요하는 어떠한 간섭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대는 주의를 깊게 기울여야 한다. 절망감을 느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이 존재계를 설득해서 두 도시를 구해낼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수많은 하시드가 함께하고 있다. 모든 산야신이 하시드와 같은 존재이다. 존재계는 몇몇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이 세상을 파멸하도록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대가 그저 침묵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대는 자기 주변에 크나큰 사랑의 분위기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것이 방어막이 될 것이다. 그대는 춤추고 노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지구는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들, 수많은 노래와 음악과 창조성, 명상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이 정치인들이 알게 만들어라. 그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더 큰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사랑이 그 에너지를 줄 것이고, 명상이 그대에게 엄청난 힘을 줄 것이다. 그대는 미약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느낄 것이다. 그대의 사랑, 그대의 명상, 그대의 지복이 세상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그대가 가진 소중한 원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대는 전혀 들어본 바가 없기 때문에 무력감이 생긴다. 그대는 자신의 사랑, 침묵, 평화, 연민, 환희와 같은 원천들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그대는 자기 존재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음악과 춤으로 꽃 피어나고, 대지가 축복으로 가득 차면, 그 어떤 정신 나간 정치인도 이 세상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가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들과 대지를 파괴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대의 사랑, 그대의 침묵, 그대의 환희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 이상은 그대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줄 것이다. 그리고 걱정은 마치 흔들의자와 같아서 그대를 계속 흔들어주지만 사실 그대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일부 멍청한 사람들이 이 대지에 죽음을 마련해두었지만, 사랑과 환희와 아름다움과 황홀경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수많은 지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에너지장, 차크라 등 모든 비의학적 요소들은 경험을 통해 얻어져야 한다. 그대가 가진 모든 지식으로부터 마음을 비워야 기대감을 갖지 않게 된다. 어떤 경험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하고, 그런 차이는 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보자. 동양 사람들은 바닥에 앉는다. 추운 나라 사람들은 바닥에 앉을 수 없다. 의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그들의 등 관절과 척추는 바닥에 앉는 사람들과 다른 형태를 가지며, 그들이 경험하는 쿤달리니의 특질 역시 다를 것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사람들이 있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 이상으로 먹은 적이 없다. 남아프리카에는 24시간 동안 오직 한 번의 식사만 하는 부족들이 있다. 그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박장대소를 했다.
“이 멍청한 백인들은 하루에 다섯 번이나 밥을 먹는군! 아침식사breakfast. 온종일 멈추지 않고 먹으며 아침부터 먹어댄다. 하루 종일 그들은 커피타임, 티타임 등등 계속해서 이것저것 먹어댄다. 게다가 그들은 수시로 껌을 씹는다.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치러 왔다니, 정말로 미친 게 아닌가!”
어느 면에서는 그들의 말이 맞다. 그들은 비만이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 있고,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육체는 사슴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들은 사슴처럼 달린다. 사냥꾼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 그들의 눈은 매우 밝고, 시력이 좋다. 그들의 육체는 완벽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심리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는 서로에게서 다른 점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경전의 구절들을 외우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런 경전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환경, 특정한 사람들의 경험을 담고 있지, 그대를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대를 위한 경전은 오직 그대에 의해서, 그대의 경험에 따라 기록될 수 있을 뿐이다.
오쇼
말 잘 듣는 아이는 부모나 선생 같은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지만, 제멋대로 하는 아이는 욕을 먹는다. 그런 아이의 장난기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지만, 나중에 반항아로 성장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완전히 자유롭게 제멋대로 성장하게 내버려둔 아이는 결국 반항아가 될 것이다. 그런 아이는 쉽사리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며, 쉽게 군대에 보내져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반항적인 아이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에게 결혼을 하라거나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부모의 못다 이룬 꿈과 열망을 대신 성취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반항적인 청년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는 타인이 추구하는 이상ideal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품고 있는 열망에 따라서 삶을 살 것이다.
반항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복종하는 아이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항상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를 둔 부모는 너무나 흡족해한다.
인간은 이상한 질병에 걸려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통제함으로써 에고는 충족되고,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된다고 여긴다. 그 자신도 통제되기를 바란다. 타인의 통제 하에 있으면, 자기 자신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서, 인간의 장난기는 애초부터 질식하게 되고 짓밟히고 만다.
그대는 말한다.
“제 안에는 작고 귀여운 어린아이가 있는데, 저는 오랫동안 그 아이를 무시해 왔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개구쟁이이고, 호기심이 많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의 언제나 그 아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에 의해서 각인된 두려움이다. 늘 흐트러짐 없이, 규율을 따르고, 연장자를 존경하고, 성직자와 부모와 선생들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그대에게 무엇이 가장 옳은 일인지 다 알고 있다. 그대의 본성은 절대로 제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
그대는 차츰 자기 내면에 죽은 아이를 품고 다니기 시작한다. 그대의 품에 있는 이 죽은 아이는 그대의 유머감각을 파괴한다. 그대는 가슴 전체로 웃을 수 없고, 흥겹게 놀 수 없고, 삶의 아주 사소한 즐거움도 향유하지 못한다. 너무나 심각한 사람이 된 나머지 그대의 삶은 팽창하기보다 수축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기독교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종교 세력이 되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십자가와 예수의 처형이 너무나 슬프고 심각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도 그대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미소를 지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그 심각함, 그 슬픔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교회, 사원, 모스크, 예배당이 심각하지 않고, 더 흥겨워지고, 더 많은 진정한 웃음과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바란다. 그것은 인류에게 더 건강하고, 전체적이고, 통합된 정신을 안겨줄 것이다.
말 잘 듣는 아이는 부모나 선생 같은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지만, 제멋대로 하는 아이는 욕을 먹는다. 그런 아이의 장난기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지만, 나중에 반항아로 성장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완전히 자유롭게 제멋대로 성장하게 내버려둔 아이는 결국 반항아가 될 것이다. 그런 아이는 쉽사리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며, 쉽게 군대에 보내져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반항적인 아이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에게 결혼을 하라거나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부모의 못다 이룬 꿈과 열망을 대신 성취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반항적인 청년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그는 타인이 추구하는 이상ideal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품고 있는 열망에 따라서 삶을 살 것이다.
반항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복종하는 아이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항상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를 둔 부모는 너무나 흡족해한다.
인간은 이상한 질병에 걸려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통제함으로써 에고는 충족되고,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된다고 여긴다. 그 자신도 통제되기를 바란다. 타인의 통제 하에 있으면, 자기 자신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서, 인간의 장난기는 애초부터 질식하게 되고 짓밟히고 만다.
그대는 말한다.
“제 안에는 작고 귀여운 어린아이가 있는데, 저는 오랫동안 그 아이를 무시해 왔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개구쟁이이고, 호기심이 많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의 언제나 그 아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에 의해서 각인된 두려움이다. 늘 흐트러짐 없이, 규율을 따르고, 연장자를 존경하고, 성직자와 부모와 선생들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그대에게 무엇이 가장 옳은 일인지 다 알고 있다. 그대의 본성은 절대로 제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
그대는 차츰 자기 내면에 죽은 아이를 품고 다니기 시작한다. 그대의 품에 있는 이 죽은 아이는 그대의 유머감각을 파괴한다. 그대는 가슴 전체로 웃을 수 없고, 흥겹게 놀 수 없고, 삶의 아주 사소한 즐거움도 향유하지 못한다. 너무나 심각한 사람이 된 나머지 그대의 삶은 팽창하기보다 수축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기독교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종교 세력이 되었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십자가와 예수의 처형이 너무나 슬프고 심각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도 그대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미소를 지을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그 심각함, 그 슬픔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교회, 사원, 모스크, 예배당이 심각하지 않고, 더 흥겨워지고, 더 많은 진정한 웃음과 기쁨으로 넘쳐나기를 바란다. 그것은 인류에게 더 건강하고, 전체적이고, 통합된 정신을 안겨줄 것이다.
나는 평생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빛나지 않을 때, 그 책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나에게는 평생 단 한 명의 스승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스승들이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의 길이 아무리 멀고, 그 길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몰라도 나는 항상 나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일별一瞥을 담은 책들은 많지만, 그 이상의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책들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 책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으로 노래하는 진리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와준다. 그런 책들이 지금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나에게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의 매 해에 해당하는 책을 한 권씩 소개할 것이다.
진정한 반항아의 삶
반항아는 다면적인 특질을 갖고 있다. 우선, 반항아는 자기 자신의 경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그의 진리란 오직 그 자신이 경험한 진리일 뿐이다. 그 어떤 예언가, 메시아, 구원자, 경전, 전통도 그에게 진리를 부여할 수 없다. 그것들이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진리에 대해 온갖 주장을 펼칠 수는 있지만, 진리에 ‘대해’ 안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대해’라는 말은 주변부를 뜻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해 안다는 것은 진리의 주변부를 계속 맴돈다는 뜻이다. 주변부를 맴돌기만 해서는 결코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반항아는 유신론자나 무신론자, 힌두교나 기독교와 같은 어떤 신념 체계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탐구자이자 구도자이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반항아는 에고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에고주의자 역시 어떤 교회나 이데올로기, 신념 체계에 속하고자 하지 않지만 그 이유는 반항아와 전혀 다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어딘가에 속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에고를 갖고 있어서 혼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반항아는 에고주의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순진무구한 존재이다. 그의 무無신념은 거만한 태도가 아니라 겸허한 접근 방식에서 나온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 자신의 진리를 찾지 않는다면, 남에게서 빌려온 모든 진리는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은 나의 짐을 덜어주지 못할 것이다. 지식을 축적할 수는 있지만, 그러면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경험에 대한 진정한 주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반항아는 그 어떤 교회나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그는 모방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런 편견 없이 탐구하고 선입견 없이 열린 채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머문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허한 사람의 접근 방식을 택한다. 반항아는 자기 자신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다른 모든 사람의 독립성도 존중한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존중하며 우주 전체의 신성도 존중한다. 우주 전체가 그의 사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만든 작은 사원들을 떠난 것이다. 우주 전체가 그의 경전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기록한 모든 경전들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만함이 아니라 겸허한 구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반항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다.
반항아의 특질 가운데 두 번째는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살지 않으며, 주의력과 자각으로 현재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몽유병 환자처럼 살아간다. 반항아는 자각을 통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자각이 그의 종교이자 철학이며 그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세 번째, 반항아는 타인을 정복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류를 파괴해왔다. 그것은 인류가 더욱 창조적이고 아름다우며 건강하고 전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가로막아왔다. 온갖 갈등, 경쟁, 질투, 그리고 마침내 전쟁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모든 전쟁의 원인이다. 인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간이 인간을 서로 죽이는 전쟁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어쨌든 살상은 계속된다. 이유라는 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 인간은 살생을 즐기는 면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우화집이며, 매우 중요한 의미들을 간략하게 전달해 온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린 양이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몸집이 거대한 사자가 다가와서 그 어린 양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침식사를 먹을 시간이었지만, 사자는 구실을 찾아야 했다.
사자가 어린 양에게 말했다.
“너는 냇물을 더럽히고 있구나. 너는 내가 정글의 왕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그러자 불쌍한 어린 양이 대답했다.
“저도 압니다. 사자님, 그런데 계곡물은 당신 쪽으로 흐르지 않아요. 제가 당신 아래쪽에 있는데, 물이 더럽혀져도 결국 제가 마시게 되어 있잖아요. 물은 당신이 있는 위쪽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흐릅니다. 당신이 물을 더럽히고 있고 제가 그 더러운 물을 마시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당신의 논리는 옳지 않아요.”
사자는 어린 양의 주장을 듣고 매우 화가 났다. 그가 말했다.
“너는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없구나. 지금 나와 논쟁을 벌이겠다는 게냐?”
어린 양이 대답했다.
“저는 논쟁을 펼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당신도 냇물이 제 쪽으로 흐르는 걸 볼 수 있잖아요.”
사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했다.
“자, 명심해라. 너는 아주 못돼먹은 집안에서 자라났구나. 네 아버지가 어제 나를 모욕했다.”
어린 양이 대답했다.
“아마 다른 분일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이미 3개월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당신 뱃속으로 들어간 걸 아실 텐데요. 아버지는 더 이상 안 계세요. 당신이 제 아버지를 점심식사로 잡아먹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분이 어제 당신한테 무례하게 굴 수가 있나요? 아버지는 이미 죽었어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사자가 몸을 날려서 양을 붙잡았다.
그가 말했다.
“너는 예의가 없구나. 예의범절도 모르고 멋대로 구는구나.”
어린 양이 대답했다.
“사실 지금이 아침식사 시간인거잖아요. 그냥 저를 잡아먹으세요. 다른 구실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이솝은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냈다. 그는 우화를 통해서 인간의 속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반항아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도 정복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자각을 통해서 매순간의 삶을 살 뿐이다. 그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다. 그는 영혼의 과학자이다. 그것이 반항아의 네 번째 특질이다. 과학이 의구심, 회의론, 탐구의식을 사용하듯이 반항아는 자신의 내면세계에도 동일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과학이 객관적인 현실을 탐구하는 데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듯이, 반항아는 그런 방법들을 자신의 주체성을 탐구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의심과 회의를 비난하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무신론적 접근 방식과 불복종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과학적인 마음으로 자기 존재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의 종교는 미신적이지 않으며 과학적이다. 그의 종교는 신을 찾는 게 아니다. 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대가 이미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그대가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대의 탐구가 애초부터 오염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반항아는 자신이 무얼 찾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내면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자신의 지성을 계속 연마한다. 그는 자신의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자신의 명상을 더욱 진실하게 만들어서 자기 안에 숨겨진 모든 것이 자기에게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무얼 찾고 있는지에 대한 선입견이 전혀 없다.
그는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이다. 그 용어가 그의 기본적인 특질들 가운데 하나를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 용어를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신을 믿는 유신론자,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 그리고 ‘우리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찾을 것이고 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구석구석을 모두 들여다보기 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불가지론자가 있다. 그는 ‘나는 모른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소년이 가출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들한테 잡히면 우릴 엄청 때릴 텐데.”
“그럼 우리가 아빠들을 때리면 되지.”
“안 돼, 그럴 수 없어. 성경은 아빠와 엄마를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
“그럼 좋아. 내가 너희 아빠를 때리고, 너는 우리 아빠를 때리면 되겠네.”
아무런 문제없이 아주 간단하고 순진무구한 해결책이 나왔다!
반항아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삶을 산다. 그리고 순진무구함은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삶의 모든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오직 반항적인 사람만이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진실로 종교적이다. 그는 어떠한 조직이나 추종자를 만들지 않으며, 그 어떤 교회도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반항아들은 동료 여행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은 함께 있고, 함께 춤추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울고, 존재계의 광활함과 삶의 영원함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 누구의 개별성도 해치지 않으면서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반항아들이 모인 공동체는 오히려 모든 사람의 개별성을 더욱 새롭고 풍요롭게 만들며, 그런 개별성에 깊은 품위와 존경을 더한다.
오쇼
세상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암과 심장병과 고혈압과 광기가 생기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 극단적으로 움직이고 강요받아왔다.
조금만 더 바보스러워져라. 어린아이처럼 조금만 더 웃어라. 삶을 지금보다 조금 더 즐기고, 심각한 얼굴로 다니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자기 내면에 깊은 건강함이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는 건강함의 깊은 원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대는 바보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런 일은 없다. 나는 항상 바보가 미쳤다는 기사가 났는지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물론 바보는 미칠 수 없다. 미치기 위해서 그대는 매우 심각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보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소위 현명하다는 사람들보다 더 건강해지는 경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바보들은 소위 현명하다고 하는 자들보다 더 건강하다. 그들은 순간을 살며, 자신이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 걱정은 마음과 육체에 암癌적인 요소가 된다. 그들은 오래 살며, 마지막 순간에도 웃는다.
삶은 깊은 균형, 아주 깊은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때 그대는 중간에서 떠나게 된다. 에너지가 높게 치솟고, 그대는 위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남성이 되지 말고 여성도 되지 말라. 둘 다가 되어라. 그래야만 그대는 둘 다가 아니게 될 수 있다. 현자로만 남지도 말고, 바보로만 남지도 말라. 둘 다가 되어라. 그때 그대는 진정한 초월을 경험하게 된다.
항상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잠시나마 깊은 잠에 빠진 마음상태로는 어떤 일도 행해선 안 된다. 몽유병이 아니라 예리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라.
'마음'이란 바로 '그대가 부재한 상태'이다. 그대가 현재에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붓다들이 강조해온 바는 이렇다.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서 현존하라. 그러면 마음과 그 요소들-탐욕, 분노, 망상, 꿈, 환상, 야망-이 처할 공간은 사라질 것이다.
단 하나의 목적-진리-과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부른다. '명상'은 주의깊음, 자각,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엇을 행하더라도 기계적으로 행하지 말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하라.
저자 서문
자기 존재의 내면으로 더 깊게 들어가라. 의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지나쳐라. 그냥 거기에 놔둬라! 믿음으로 자신을 감추려들지 말라. 겁 많은 타조가 되지 말라. 의심을 마주하라.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으라. 의심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그대의 존재에게 어떤 순간이 온다. 내면의 가장 깊은 핵심, 바로 그 중심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의 깊은 핵심을 접촉하는 순간,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의심은 그저 멀리 사라진다. 그것은 아주 쉽게 떨어져나갈 수 있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서 어떠한 믿음에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 그저 그런 의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 그 의심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 의심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파괴해왔는지, 어떻게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좀먹어왔는지, 그런 의심이 자기 삶에 얼마나 해로운 독이 되어왔는지를 알면 된다. 의심이 독이 되어왔으며, 그대가 삶을 축하하고 만끽할 소중한 기회를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바로 의심을 떨쳐버리게 된다. 의심 대신에 믿음에 매달리게 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신뢰의 인간은 믿음을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신뢰한다.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안에 신의 왕국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왕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는 왕이 아니다. 외부에 세워진 그런 왕국은 마치 꿈속의 왕국과 같기 때문이다. 왕이 될 수는 있어도 그저 카드에 그려진 가짜 왕이 되거나, 기껏해야 허울 좋은 잉글랜드의 왕이 될 뿐이다. 별다른 가치나 소용도 없는 가짜 상징이자 무의미한 존재이다. 진정한 왕국은 내면에 존재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다. 그대는 자기 내면의 왕국을 완전히 망각한 채, 자신이 어떠한 보물을 품고 있는지 모른 채, 어떤 게 자신의 소중한 보물인지를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종교는 그 어떤 믿음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라는 존재의 가장 근원을 알려하고 그대의 존재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을 접촉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자기 존재계의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을 접촉하는 경험을 우리는 '진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진실로 실존적인 경험이다.
육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영혼이고,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육체이다.
육체와 영혼은 그 어느 곳도 둘로 나뉘지 않으며
서로를 일부분으로 포함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육체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육체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육체는 존재계에서 가장 복잡한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경이롭다!
경이로운 존재들은 모두 복되도다.
육체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라.
육체는 그대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체를 통해서 가장 가까운 본성이 그대에게 다가왔고,
육체를 통해서 가장 가까운 존재계가 그대에게 도달했다.
육체 안에는
대양의 물, 별과 태양의 불, 그리고 공기가 담겨 있으며,
그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다.
‘종교religion’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말은 ‘무지함으로 인해 흩어졌던 것들을 한데 모으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나왔다. 하나로 모으고 일깨워서 자신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나무 하나 꽃 한 송이도 상처 낼 수 없다. 그리고 자비심과 사랑은 원칙이나 훈육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원칙으로 굳어져버린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다. 훈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비폭력은 가짜 비폭력이다. 교육에 의해 베풀어지는 자비는 거짓 자비이다. 그러나 어떠한 억지 노력도 전혀 개입되지 않고 그런 일들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심오하고 은혜로운 모습을 갖게 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범죄가 저질러져왔다. 다른 누구보다 성직자라는 사람들에 의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왔다. 분명히 이 모든 종교는 거짓된 가짜 종교였다. 이제 진정한 종교성이 태동해야 할 것이다. - 저자 서문
명상은 기억, 상상, 생각, 욕망, 기대, 투사, 기분 등 마음이 가진 모든 내용물을 비우는 걸 뜻한다. 사람은 이 모든 걸 계속해서 비워야한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자기 안에서 밖으로 내던질 게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날이다. 이미 모든 걸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내면에는 오직 순수한 공空만 남는다. 그 공空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순수한 의식을 발견한다. 마음은 그 모든 것을 텅 비워야한다. 그러면 마음은 그대라는 존재로 가득 차서 흘러넘친다. 마음은 비어있지만 의식으로 가득 찬다. 따라서 '공空'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 공空은 항상 산처럼 육중한 장벽이 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의 불필요하고 낡은 습관의 짐에 반대할 뿐이다.
이 장애물이 제거되면 모든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끝없이 펼쳐진 창공처럼 무한한 존재가 된다. 신神의 경험, 불성佛性의 경험, 혹은 그 어떤 언어로 불러도 좋다. 법法, 도道, 진리眞理, 열반涅槃 모두 같은 의미이다.
다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면 창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는 모두 창조적이기 때문이다. 마음, 지식,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창조성이 가능해진다. 창조적인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로봇은 절대로 창조적이지 못하며 모든 것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라.
창조성은 그림, 시, 춤, 노래처럼 어떤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게 아니다. 창조성은 그 어떤 특정한 행위나 사물과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이 창조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특질을 모든 행위에 적용할 수 있다. 행위 자체가 창조적이거나 비창조적인 게 아니다. 그림을 비창조적으로 그릴 수 있고 노래도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다. 혹은 집안 청소를 창조적인 방식으로 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음식을 조리할 수도 있다. 창조성은 모든 행위에 적용할 수 있는 특질이다. 그것은 내적인 태도이며 내면의 접근방식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방식에 적용되는 특질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창조성을 어떤 특정한 범주에 가두지 말라는 점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걷는 모습에서도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창조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리수 그늘에 앉아있는 붓다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적 인간이었다. 자신이 창조적인 사람인지 비창조적인 사람인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화가가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화가가 된다면, 세상은 너무 추해져서 살아가는 게 어려워질 것이다. 모두가 춤꾼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창조적이 될 수는 있다.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행하고 애정을 갖고 행하고 오직 돈을 추구하며 행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창조적이 될 것이다. - 저자 서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것이 바로 존재계가 그대에게 바라는 삶의 방식이다. 어떤 나무는 키가 크고, 어떤 나무는 키가 작다. 하지만 키 작은 나무는 긴장하지 않는다. 키가 큰 나무도 에고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존재계는 다양성을 원한다. 그대보다 강한 사람이 있고, 그대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면에서 그대는 다른 사람보다 더 유능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라. 자연은 어떤 특별한 재능을 모든 개인에게 나눠준다. 그저 약간만 더 탐구하라. 아마도 그대는 나라의 대통령보다 피리를 더 잘 연주할 수 있다. 그럼 그대는 그가 대통령인 것보다 더 나은 피리 연주자이다.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비교는 사람들이 길을 잃게 만든다. 비교는 사람들을 끝없이 긴장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은 공허하기 때문에, 그 순간을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해 그저 생각만 하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을 거의 미친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럴 필요가 없다. 동물은 미치는 일이 없고, 나무도 심리분석가가 필요 없다. 인류만 제외하고 존재계 전체가 영원한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만 뒤처지고, 긴장하고, 걱정하며 살아간다.
짧은 삶을 그대는 놓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매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더 큰 불안을 야기한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제대로 삶을 시작하지도 못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 직전에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늦었다.
그저 이 순간을 살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에서 오직 차라투스트라만이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그의 종교는 존재계에 대한 축복과 감사의 종교이다.
그는 삶의 기쁨에 반대하지 않으며, 세상을 단념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 자극과 도전이 필요할 뿐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매한 경지에 도달할 때, 그대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대 안에 갑자기 거대한 자극이 일어난다.
‘뭔가 해야 되겠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고 진리를 깨달아가고 삶의 가장 위대한 축복과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는데, 나는 삶을 낭비하고 있다. 도대체 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나 줍고 있을 것인가?’
위대한 각자覺者들 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전체적으로 살고, 삶을 기쁘고 강렬하게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에서 오직 차라투스트라만이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그의 종교는 존재계에 대한 축복과 감사의 종교이다. 그는 삶의 기쁨에 반대하지 않으며, 세상을 단념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서의 기쁨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에서 오직 차라투스트라만이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그의 종교는 존재계에 대한 축복과 감사의 종교이다.
그는 삶의 기쁨에 반대하지 않으며, 세상을 단념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 자극과 도전이 필요할 뿐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매한 경지에 도달할 때, 그대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대 안에 갑자기 거대한 자극이 일어난다.
‘뭔가 해야 되겠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고 진리를 깨달아가고 삶의 가장 위대한 축복과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는데, 나는 삶을 낭비하고 있다. 도대체 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나 줍고 있을 것인가?’
위대한 각자覺者들 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 유일한 존재이다. 그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전체적으로 살고, 삶을 기쁘고 강렬하게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선택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에서 오직 차라투스트라만이 삶에 반대하지 않고 삶을 긍정한다. 그의 종교는 존재계에 대한 축복과 감사의 종교이다. 그는 삶의 기쁨에 반대하지 않으며, 세상을 단념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서의 기쁨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역사는 깨달은 붓다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붓다나 마하비라, 자라투스트라 등의 이름을 들으면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인 인물처럼 들린다. 실존했던 인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이 가공한 인물처럼 들린다. 인간의 꿈이 투사한 이상(理想)의 인물로 보일 뿐, 실존했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진실로 이 땅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그들은 너무나 진실하게 산 나머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땅을 떠났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찾아오면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떤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으면 죽음이 지금 당장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전적으로 죽음을 따라갈 준비가 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죽음이 무릎을 꿇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만 죽음은 패배하고 만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 즉 붓다가 된다.
모든 종교적 구도의 목표가 바로 이러한 '자유'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가 곧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바로 삶과 죽음의 굴레로부터의 자유이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가 그대로 하여금 우주의 빛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며 궁극의 황홀경이다. 이제 내면의 고향에 도착한 것이다.
명심하라.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삶에는 큰 문제라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큰 것들이 된다. 작은 행위는 선과 악으로 명백히 드러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은 미소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과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작은 꽃 한 송이는 화환이 될 수 없지만,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모두 모아야만 화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자신의 실패나 선행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나쁜 행위라면 그대는 고통에 빠질 것이고, 그것이 좋은 행위라면 그대는 삶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것만이 신이라는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바로 지복을 통해서 맛볼 수 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대가 환희로 넘쳐흐르고 기쁨으로 춤을 출 때 그 춤에서 존재에 대한 감사함이 저절로 일어난다. 진정한 감사, 진정한 기도가 탄생한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를 통해 그대는 다시 태어난다. 바로 그 기도로부터 그대가 다시 태어날 뿐만 아니라 신도 탄생한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모든 작은 것을 자각, 주의깊음, 각성을 통해서 아름다운 행위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때 평범한 것들이 특별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