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학도이던 시절, 나는 어느 산골 초등학교에서 햇병아리 교사로 몇 년을 일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시 내가 겪은 일 한 가지를 거의 그대로 소설 형식에 담아본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선생은 바로 나이며, 홍연이라는 이름의 여학생 역시 실제 인물이다. 그 여학생이 나에게 혈서를 보낸 것 도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대체로 다 그렇듯이 나 역시 처음에는 시를 쓰려고 했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6·25를 겪고 난 뒤부터는 서정의 샘이 메말라버렸는지 도무지 시가 씌어지질 않았다. 세상과 인생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추악한 것으로 비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는 잔인한 손길은 말하자면 나의 사고의 세계까지 할퀴고 휘저어서 뒤바꾸어놓은 셈이었다.
시를 쓰는 대신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전쟁을 겪은 암울한 한 시대를 증언하는 그런 소설을 써야만 될 것 같았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 아니라, 어두운 한 시대를 증언하는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나의 문학적 진로를 수정했던 것이다.
<수난 이대(受難二代)>는 그렇게 해서 씌어진 나의 처녀작인 셈이다.
이 작품을 쓴 50년대 중반 무렵은 휴전이 성립된 뒤여서 많은 상이군인들을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다리가 하나 잘려 나간 사람, 팔이 하나 떨어져나간 사람, 혹은 얼굴이 형편없이 뭉그러진 사람……. 그런 인간 파편 같은 전쟁 피해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작품을 구상했던 것이다.
최근대에 우리 겨레가 겪은 역사의 큰 회오리바람은 6·25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 속에 그 두 개의 전쟁을 가져와서 부자 2대에 걸친 수난을 민족의 운명 같은 것으로 상징해 보았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때, 징용으로 끌려가서 팔을 하나 잃고 돌아온 아버지가 6·25의 싸움터에서 다리를 하나 잃고 돌아오는 아들을 마중 나가서 귀로에 냇물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팔 하나 없는 아버지가 다리 하나 없는 아들을 업고 건너는 두 불구 부자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들 불구 부자로 하여금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지게 할 것인가, 무사히 건너가게 할 것인가 망설였었다.
떨어지게 하는 것은 수난을 강조하는 의미가 되어 주제를 더욱 짙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고, 무사히 건너가게 하는 것은 그런 수난 속에서도 삶에의 의지라 할까, 집념이라 할까, 그런 것을 잃지 않게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떨어지게 하는 것은 절망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건너가게 하는 것은 절망의 극복을 상징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절망을 디디고 넘어서려는 의지, 강인한 삶에의 집념 쪽을 택해서 그들 불구 부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가도록 결말을 지었다. 이 땅과 이 겨레의 암담한 운명의 극복을 희원(希願)하면서 말이다.
1957년 《한국일보》의 신춘문예에 이 작품이 당선되어 작가의 길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기념이 되는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린 넋>과 <여제자(女弟子)>는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흥미를 가미한 작품인데, <여제자>는 내가 겪은 사실을 거의 그대로 소설화한 것이다.
세 편의 작품 내용이 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다가 뿌리를 뻗고 있는 것 같아 그때를 잘 모르는 지금의 젊은 독자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 궁금한 일이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