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린 그림은, 어떤 이의 초상화가 됐든, 빵과 꽃을 그린 정물화가 됐든, 산과 나무를 그린 풍경화가 됐든, 작거나 큰, 매우 작거나 매우 큰, 낙차를 갖는다. 이를테면, 55개의 식물들을 비롯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종이에 그린 그림들과 LINE bushes처럼 벽에 세워 캔버스에 그린 그림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물론 작은 캔버스, 큰 종이도 있다. 이 자유로운 크기의 낙차가, 그가 대상에서 발견했던 형태의 힘과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도 같은데, 나는 그 형태의 힘에 맞서 곧 출현하게 될 어떤 순간의 명료함을 그리기 위해 그가 시도했던 최대한의 힘이, 이 크기에서 상상되어진다. 이 덤불을 무뚝뚝한 선과 유연한 색으로 형상 짓기 위해, 그의 몸이 만들어 냈을 힘의 형태에 대해 말이다. 때문에, 그림의 크기와 형태가 가진 힘의 크기가 어떤 수학적인 관계 안에서 논리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도리어 이 길들여 지지 않은 힘은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태 안에, 형태에 비전을 제시해주는 신체 안에, 함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