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집 [연약을 위한 최저낙원], 공저 [은유로서의 똥]을 썼다.
2010년대 이후의 시가 보여 주는, 약한 것들, 희미하고 희박한 것들에 대한 감각은 모든 존재에 내재한 공통성의 사유로 이어졌다. 동시대 시에서 흔하게 목도할 수 있는 ‘유령’이 이 사회 속 개인이 가진 존재론적 불안에 대한 형상화인 것은 기존에 조망받지 못한 비가시적인 삶에 대한 연대의 표명이면서, 존재론적 지반이 희박한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실존에 대한 가시화이기도 하다. 불안한 삶의 현재에 대한 적시와 이 세계에 가장 연약한 실존들은 여러모로 유령을 닮은 작금의 시 안에서 만난다.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의 상실에 맞닿은 세계적 실존이 가진 비존재성인 것이다. ‘너’의 희미함을 빌어 ‘우리’의 연약함을 가늠하게 하는 그림자의 옅은 빛이 ‘유령’으로 시화(詩化)된 것이다. 무수한 ‘네’가 유령인 곳에서, ‘너’와 다르지 않은 ‘나’도 함께 유령일 수밖에 없는 비(非)존재들의 구체성은 역으로 세계의 위태로움을 가파르게 현전시킨다.
유령성에 대한 사유, 즉 현재의 시간성을 어긋나게 하며 틈입한 비(非)시간적, 비(非)가시적 존재가 가진 이질성의 작성은 비존재를 제거하는 자본주의 및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시적 문제 제기일 수 있었다. 유령성의 시학은 비존재의 희미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희미하지만 확실한 어긋남을 통해 현세에 존재하기 어렵던 것의 존재 증명이 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연약함에 대한 다른 증거로서 숱한 ‘비인간’적 존재들, 예컨대 기계류나 동식물류 혹은 비인간적 혼종들은 ‘인간’에 대한 보완과 증강이 아니라 ‘인간’의 결여와 결핍을 드러내는 또 다른 환유이다. 미래 부재의 전망과 세계의 (불)가능성 속에서 ‘인간’의 결여, 그 연약함이 ‘비인간’적 존재를 현시한다. ‘인간’을 유지하기엔 미래와 세계가, 아니 ‘인간’ 자체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애초 인간/비인간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서로의 결핍 속에 얽혀 있다는 전망만이 미래와 세계의 연약함을 겨우 지탱할 수 있다는 대답을 향해 나아간다. 팬데믹 및 인류세 담론의 증가세와 함께 뚜렷한 흐름을 가지는 이러한 시류(詩類)는 마치 이제 세계에서 가장 약한 것이 세계인 듯, 거의 희미하게 사라진 미래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와 이(異)세계를 서술한다. 다른 세계들의 이와 같은 생멸과 성패야말로 이 세계의 희미함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짊어져야 한다.
파울 첼란이 1970년에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저 구절을 보게 되면, 세계 상실의 상황에서 ‘내’가 ‘너’를 지탱하는 지반이 된다면, ‘내’가 디딜 세계의 지반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물음이 뒤따를 법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일단 미해결로 안고 있자. 이 미해결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지 모르니. 우선, 이때의 짊어짐, 즉 세계 없는 곳에서 ‘나’의 역할이란 다시 ‘세계’가 도래할 곳까지(다른 세계에 닿을 때까지) ‘너’를 운반하는 것이다. 이때 옮겨지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다. ‘너’를 지탱함으로써 ‘세계’의 도래까지 ‘내’가 옮겨진다. 그러므로 세계 부재의 상황에서 ‘나’와 ‘너’는 서로의 세계가 된다. 서로를 위한 세계 되기란 상실과 무(無)의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 무게를 더하듯 ‘너’를 업고서야 건널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의 짊어짐을 통해 지반 없는 세계를 건너가는 일에 있어, 상하의 위치는 역전된다. ‘나’는 ‘너’의 짊어짐을 딛고 부재의 세계를 지탱한다. 그러니까 끝없이 추락을 견디면서.
첼란은 시를 남기고 얼마 후 세느강에 몸을 던진다. 첼란의 투신이 세계 없는 세상에 ‘너’마저 부재했기 때문인지, 혹은 ‘너’를 짊어지고 아직 물속을 건너는 중인지(그래서 어떤 ‘세계’가 도래하면 다시 ‘너’와 함께 첼란이, 첼란의 시가 떠오를지) 알 수 없다. 다만 시는 이미 상실된 세계를 마감하지 않고 상실을 끝없이 반복하는 실패를 통해 세계의 짊어짐을 유보해 온 것이다. 마치, 첼란과 다른 시대이지만, 근래의 시들이 ‘나’의 연약함으로 ‘너’를 짊어지고, ‘너’의 희미함을 비춰 ‘나’의 희미함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