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Arnaldur Indriðason
1961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태어났다. 1997년 ‘형사 에를렌뒤르’ 시리즈의 첫 작품 『대지의 아들들』을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신문기자와 영화 평론가로서의 경력이 드러난 간결한 문체와,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아름다운 묘사가 눈에 띄어 호평을 받았다. 후속권이 나올 때마다 인기를 더해간 이 시리즈는, 인드리다손에게 북유럽추리작가협회가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유리열쇠상 2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겼다. 2017년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 외에도 영국추리작가협회 최고 장편소설상 등 세계 유수의 범죄소설상을 수상했다.
인드리다손은 북유럽 경찰소설의 시인이다. 인드리다손의 범죄소설은 ‘범인이 왜 그 범죄를 저질렀는가, 범인을 그래서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집중하기보다 범죄가 피해자 주변 사람에게 남긴 상흔을 아름다운 리듬감의 언어로 쫓아간다. 대표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저체온증』의 수사관인 에를렌뒤르 형사는 사람들의 삶에 불현듯 닥쳐온 살인 사건, 즉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다. 특히 아내와는 이혼하고,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자식들과는 관계가 파탄나는 등 그의 굴곡진 개인사는 작품의 중심에 놓인 범죄 사건과 절묘하게 얽혀 이야기를 한층 깊이 있게 만든다.
범죄가 일으킨 비극을 통해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만드는 작가 인드리다손의 주제 의식은 2008년 프랑스의 저명한 일간지 《르피가로》 인터뷰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공감할 굴곡이 없기 때문이다.”
Harðskafi (English title : Hypothermia)
by Arnaldur Indriðason
Copyright © Arnaldur Indriðason, 2007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7 by ELIXIR, an imprint of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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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language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Forlagið, Reykjavik through MOMO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모모 에이전시를 통해 Forlagið, Reykjavik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엘릭시르, (주)문학동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형은 동상에서는 회복되었지만
자신이 겪은 시련 탓에 침울하고
침잠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에스키피외르뒤르헤이디 황야의 비극’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마리아는 넋이 나가 있다시피 했다. 그녀는 발드빈의 손을 잡고 앞쪽 신도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을 뿐, 주변 상황도 의식이 치러지는 과정도 좀체 인식하지 못했다. 교구 신부의 장례미사 기도, 조문객들의 모습,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비애에 찬 후렴구 속으로 한데 뒤섞였다. 앞서 신부가 찾아와 적어 갔기 때문에 마리아는 기도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레오노라의 학문적 경력, 끔찍한 병마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기, 평생 사귀어온 각계의 친구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온 외동딸 마리아에 초점이 맞춰진 기도였다. 신부는 그 참혹한 가을날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증인 삼아 레오노라가 학문적으로 거둔 뛰어난 성과와, 우정을 가꿔나가기 위해 사람들에게 기울였던 정성을 간단히 언급했다. 조문객의 대다수는 동료 교수들이었다. 레오노라는 마리아에게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마리아는 모르는 척 넘겨왔지만 오만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마리아는 묘지의 가을빛과 무덤으로 이어지는 자갈길 위에 얼어붙은 물웅덩이들과, 운구 행렬의 발아래서 바지직 부서지는 살얼음 소리를 기억했다. 그녀는 쌀쌀한 바람과 어머니의 관 위로 성호를 긋는 자신의 모습을 기억했다. 병마가 어머니를 해칠 것이 분명해지고부터 마리아가 수도 없이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무덤 아래 놓인 관을 응시하며 마음속으로 짧은 기도문을 왼 후, 손을 내밀어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발드빈이 그녀를 이끌어 갈 때까지 미동도 없이 무덤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다가오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중에는 뭐라도 해줄 일이 없겠느냐며 도움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리아의 마음은 늦은 밤, 모든 것이 다시 잠잠해지고 스스로의 생각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 때에야 호수로 돌아갔다. 그제야, 모든 것이 끝나고 고단했던 하루를 되돌아보면서야, 그녀는 친가 쪽에서는 아무도 장례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 긴급구조센터 상황실에 휴대전화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불안한 목소리의 여자가 울먹이며 외쳤다.
“그 애가…… 마리아가 목숨을 끊었어요……. 저는…… 정말 끔찍해요……. 끔찍해요!”
“전화하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카…… 카렌이에요.”
“전화하시는 곳은요?” 상황실 오퍼레이터가 물었다.
“저는…… 여기는…… 그 애의 별장이에요…….”
“어딘데요? 어디 있는 겁니까?”
“……싱그바들라바튼 호수요……. 그 애의 별장이에요. 제발 서둘러주세요……. 전…… 전 여기 있을 테니…….”
카렌은 별장을 영영 못 찾는 줄 알았다. 그곳에 마지막으로 갔던 뒤로 어느덧 사 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마리아가 만전을 기하자며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었는데도, 카렌은 길을 가다 보면 기억이 나겠지 하는 생각에 한 귀로 흘려버렸다.
카렌이 레이캬비크를 떠난 것은 저녁 8시가 지나 캄캄하게 어두운 때였다. 그녀는 모스펠스헤이디 황야를 지났다. 도시로 가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간간이 그녀를 지나쳐 가긴 해도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단 한 대의 차만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녀는 동행에 감사하며 붉은 미등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어둠 속에서 혼자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업무가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좀더 일찍 길을 나섰을 터였다. 그녀는 대형 은행의 홍보부서에서 일했는데, 회의와 전화 업무가 끝 간 데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른쪽으로 그리만스페들 산을, 왼쪽으로는 스카울라페들 산을 지나쳐 가고 있을 터였다. 이어 그녀는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이 주를 보낸 적이 있는 빈다스흘리드 캠프로 빠지는 갈림길을 지나쳤다. 그녀는 편안한 속도로 붉은 미등을 따라갔고, 곧 두 차는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붉은빛은 속도를 높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 차가 칼디달뤼르 산길을 따라 북쪽에 있는 윅사흐리기르 통행로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자신도 종종 그 길을 이용하곤 했던 것이다. 그곳은 륀다레이캬달뤼르 계곡을 지나 보르가르피외르뒤르 피오르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칼디달뤼르 산길 중간에 있는 산드클뤼프타바튼 호수에서 보냈던 달콤한 여름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카렌은 우회전을 해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주위가 어둑해서 지형지물을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좀더 일찍 길을 벗어나야 했던 것일까? 갈림길에서 이쪽 길이 싱그바들라바튼 호수로 이어지는 길이 맞나? 방향을 다음 갈림길에서 바꿨어야 했나? 너무 멀리 온 건가?
그녀는 두 차례 길을 잘못 들어 되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했다. 목요일 저녁이라 별장들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그녀는 먹을거리며 읽을 책들을 가지고 왔다. 마리아 말로는 얼마 전 별장에 텔레비전을 들였다고 했다. 그러나 카렌이 이곳에 온 목적은 잠을 자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경영권 인수 실패로 은행 분위기는 흡사 정신병원 같았다. 그녀는 대주주들의 파벌 간 알력의 틈바구니에서 더이상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두 시간 간격으로 언론에 기사가 나갔고, 알고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특정 파벌이 해고시키려고 벼르고 있는 경영자 한 명에게 일억 크로나의 퇴직금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사회는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카렌은 그 뒤 몇 주째 상황 수습을 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자 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마리아가 별장을 며칠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카렌은 전화를 해보았다. “물론이지.” 마리아는 대번에 승낙했다.
카렌은 낮게 자란 관목들 사이로 난 인적 드문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고, 마침내 자동차 전조등이 호숫가의 별장을 비추었다. 마리아는 열쇠를 하나 주며 여분의 열쇠를 보관해두는 장소도 알려주었다. 별장에 여분의 열쇠를 숨겨두는 것은 종종 유용하기 마련이다.
그녀는 내일 아침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의 가을빛 속에서 깨어나게 될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기억하기로, 사람들은 가을이면 이 국립공원으로 모여들었다. 때를 다해가는 적갈색 주황색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득채우며 펼쳐지는 싱그바들라바튼 호숫가 이곳만큼 가을에 찬란한 빛을 뽐내는 곳은 드물었다.
그녀는 차에서 짐을 부려 문가의 데크로 옮겼다. 그런 다음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문을 열고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았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전깃불이 들어왔다. 그녀는 조그만 여행 가방을 집안에 들인 후 침실로 갔다. 놀랍게도 침대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마리아답지 않았다. 화장실 바닥에 수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부엌에서 불을 켠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닌데 갑작스레 몸이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거실은 컴컴했다. 창문 너머로 어둠에 잠긴 환상적인 호수 풍경이 보였다.
카렌은 거실 불을 켰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네 개의 튼실한 들보 중 하나에 누군가의 몸이 등을 보인 채 매달려 있었다.
충격에 사로잡힌 카렌은 엉망으로 벽을 향해 뒷걸음질을 치다 나무 벽에 머리를 쿵 찧었다. 주위가 캄캄해졌다. 가느다란 푸른 줄로 들보에 매달린 몸이 어두운 거실 창문에 비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한 발짝 다가갈 용기를 내보았다. 한순간에 적막한 호수 풍경이 잊지 못할 공포소설의 배경으로 둔갑했다. 모든 세부 사항이 그녀의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원래 있어야 할 부엌에서 떠나와 간소한 거실에 잘못 자리잡은, 들보에 매달린 몸 아래 모로 쓰러진 등받이 없는 의자. 푸른색 줄, 창문에 비친 광경,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의 어둠, 들보에 매달려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몸.
카렌은 조심스레 다가가 시퍼렇게 부풀어오른 얼굴을 흘깃 보았다. 그녀의 끔찍한 직감이 맞았다. 친구인 마리아였다.
2
카렌이 전화를 하고 나서 긴급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찰나의 시간이 지난 듯했다. 의사 한 명과 인근 도시인 셀포스의 경찰관 몇 명이 동행했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셀포스 범죄수사과에서 아는 것이라곤 자살한 여자가 수도 레이캬비크의 그라바르보귀르 만灣 가까이에 살고 있으며, 기혼에 아이는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별장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사람들로 들어찬 듯 보였다. 그들은 이 자리를 거북해하고 낯설어하는 사람들처럼 여기저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화 주신 분인가요?” 젊은 형사가 물었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라고 전해 들은 여자를 향해서였다. 그녀는 실의에 빠져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엌에 앉아 있었다.
“네, 제가 카렌이에요.”
“원하신다면 저희가 트라우마 심리 상담사를…….”
“아뇨……. 괜찮습니다.”
“잘 아시는 분인가요?”
“마리아하고는 어릴 적부터 친구예요. 제게 별장을 빌려줬어요. 전 여기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어요.”
“뒤쪽에 차가 있는 걸 못 보셨나요?” 형사가 물었다.
“못 봤어요. 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침대가 정돈되어 있지 않아서 이상하다 싶던 차에 거실로 들어섰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불쌍한 마리아! 우리 마리아 불쌍해서 어떡해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신 게 언제지요?”
“며칠 전이었어요. 별장 빌려주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본인도 이곳에 있겠다는 말을 하던가요?”
“아뇨.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물론 며칠 동안 빌려줄 수 있다고는 했어요. 문제없다고.”
“그분께서는…… 상태가 괜찮으셨나요?”
“네, 그렇게 생각했어요. 열쇠를 넘겨받느라 들렀을 때도 평상시와 달라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친구분께서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 말씀은…….”
“친구분께서 자기를 발견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지요.” 형사가 대답했다.
그는 카렌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녀가 그를 뚫어져라 보면서 팔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분을 발견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지만요.” 형사가 말했다.
“그 애가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요?”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맞는 말씀이긴 해요. 그 애는 내가 주말에 여기 묵으리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여기 온다는 걸 알았어요. 언제…… 그 애가 언제 그랬죠?”
“아직 정확한 사망 일시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의사 말로는 늦어봐야 어제저녁이었다는군요. 그러니 스물네 시간 전쯤이 되겠지요.”
카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세상에, 정말이지……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에요. 별장을 빌려달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애 남편에게는 얘기하셨나요?”
“경찰이 지금 가는 중입니다. 그라바르보귀르 지역에 살지 않나요?”
“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절대적인 절망감에서죠.” 형사가 의사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정신적인 고통. 그분에게서 눈치 못 채셨나요?”
“마리아는 이 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어요. 암이었죠. 그 애에게는 끔찍한 타격이었고요.”
“그렇군요.”
카렌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형사는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그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눠도 될 터였다.
형사가 별장 앞 진입로까지 그녀를 배웅하며 차문을 열어주었다.
“괜찮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네, 아마도요. 감사합니다.”
형사는 그녀가 시동을 걸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사람들이 줄을 자르고 시체를 내려 바닥에 뉘어놓은 상태였다. 그는 시체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죽은 여자는 흰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양말은 신고 있지 않았다. 날씬했고 홀쭉한 얼굴에 짧은 밤색 머리였다. 몸에도 집안에도 저항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들보에 올가미를 매기 위해 딛고 올라갔을, 넘어진 등받이 없는 의자가 전부였다. 푸른색 줄은 아무 DIY용품점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줄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산소 부족입니다.” 긴급구조대원들과 얘기를 나누던 지역 경찰의가 소견을 말했다. “불행히도 목이 부러지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좀더 빨리 숨이 끊어졌을 텐데 말이죠. 올가미가 목을 죄어 질식했어요. 시간이 좀 걸렸을 겁니다. 저들이 언제쯤 이송해도 되는지 묻는군요.”
“얼마나 걸렸을까요?” 형사가 물었다.
“이 분 정도. 더 짧았을 수도 있고요. 그러곤 의식을 잃었을 겁니다.”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훑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이슬란드 스타일의 별장이었다. 가죽소파 세트와 두 개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고, 신식으로 개조된 부엌에는 근사한 식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실 벽 쪽에는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보였다. 선반으로 걸어가보니 욘 아르나손의 『민화 모음집』 다섯 권의 갈색 가죽 책등이 눈에 띄었다. 유령 이야기로군, 형사는 생각했다. 다른 선반에는 프랑스 소설과 아이슬란드 소설 들이, 도자기 장식과 사진 액자들 사이사이에 꽂혀 있었다. 그중에 한 여자를 각기 다른 연령대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석 점이 있었다. 벽에는 그래픽 프린트들과 자그만 유화 한 점, 수채화들이 걸려 있었다.
형사는 침실로 보이는 곳을 훑어보았다. 침대 시트 한쪽에 사람 몸 모양의 자국이 나 있었다.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쌓인 책 중 맨 위로 파그리스코귀르 출신의 작가 다비드 스테반손이 쓴 시집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작은 향수병이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하는 집안 구경이 아니었다. 그는 저항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여자가 자발적으로 부엌에 가 의자를 들고 와서, 들보 아래 놓고, 그 위로 올라가 자기 목에 줄을 건 것이 아니라고 짐작할 만한 증거.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이라곤 견딜 수 없이 차분한, 나아가 점잖기까지 한 죽음의 흔적들뿐이었다.
셀포스 범죄수사과의 동료가 그의 생각을 방해하며 물었다.
“뭐가 있어?”
“전혀. 자살이야. 분명해. 다른 가능성을 암시하는 게 없어. 자살이 분명해.”
“그렇게 보이는군.”
“떠나기 전에 들보에서 줄을 끊어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남편이 있다면서, 그렇지?”
“그래, 그렇게 해줘. 곧 남편이 올 테니.”
형사는 바닥에서 올가미를 집어 올려 손바닥에 놓고 뒤집어보았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었다. 매듭이 서툴게 매어져 있어서 올가미가 부드럽게 당겨지지 않았다. 자기라면 좀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라바르보귀르 만 가까이에 사는 평범한 기혼 여성에게 흠잡을 데 없이 묶은 올가미를 기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목을 매달아 죽기 위해 특별히 방법을 연구하고 조목조목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차근차근 계획된 행동이었다기보다는 순간적인 광기의 결과이지 싶었다.
그는 바깥 베란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두 발짝 내려가 몇 미터만 걸어가면 호숫가였다. 지난 며칠 한파가 닥쳐 호숫가를 따라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바위 사이사이에 종잇장같이 얇게 얼어붙은 곳도 보였다. 아래에서 호수의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3
에를렌뒤르는 차를 몰아 그라바르보귀르의 태없는 단독주택으로 갔다. 그 집은 근사한 빌라들이 들어선 거리의 막다른 골목 끝에 뚝 떨어져 있었다. 하얀색이나 파란색이나 빨간색으로 칠해진 빌라들은 차고가 있고 차가 두 대씩 있는 비슷비슷한 모습이었다. 거리는 밝고 깨끗했고, 정원은 보기 좋게 가꿔져 있었으며, 잔디밭은 말끔했고, 나무와 관목 들은 깔끔하게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다. 보는 곳마다 네모반듯하게 손질된 산울타리도 있었다. 문제의 집은 다른 집들보다 오래되어 보였다. 내닫이창도 없고 유리온실도 없고 현관문 옆쪽으로 허세 부린 기둥도 없는 것이, 아예 스타일이 다른 집이었다. 거실에 멀리 코들라피외르뒤르 만의 북쪽 시작점과 에샤 산이 바로 보이는 넓은 전망창이 있고 평지붕을 인 하얀색 건물이었다. 집 주변으로는 딱 보기에도 잘 가꿔진, 조명이 아름답게 비추는 큰 정원이 있었다. 물싸리와 양지꽃, 해당화와 팬지 들은 가을을 맞아 모두 시들어 있었다.
북풍과 한파로 때아닌 추위를 맞이한 요즘이다. 마른 돌풍이 나뭇잎들을 길가로, 막다른 골목의 끝으로 휘몰았다. 에를렌뒤르는 주차를 마치고 집을 올려다보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주만 해도 벌써 두 번째 자살 사건이다. 어쩌면 가을이 시작되며, 곧 다가올 길고 음침한 겨울 생각이 늘어난 탓일 수도 있었다.
레이캬비크 경찰을 대표하여 남편과 접촉하는 것은 관례라도 된 듯 그의 몫으로 떨어졌다. 셀포스 경찰서에서는 이미 그 사건을, 소위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레이캬비크로 넘기기로 결정한 터였다. 사제 한 명이 남편에게 보내졌다. 에를렌뒤르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부엌에 앉아 있었다. 사제가 문을 열어주고 그라바르보귀르 교구의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부엌으로 에를렌뒤르를 안내했다. 마리아는 다른 성당에 다녔지만 그곳의 신부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호리호리하고 체격이 다부진,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남편은 부엌 식탁 의자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에를렌뒤르는 자기소개를 했고 둘은 악수를 나눴다. 남편의 이름은 발드빈이었다. 교구 신부는 부엌 문가에 서 있었다.
“별장으로 가야겠습니다.” 발드빈이 말했다.
“네. 시신은…….” 에를렌뒤르는 입을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듣기로는…….” 발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하신다면 저희가 동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시신은 레이캬비크로 이송되었습니다. 바론스티귀르 거리에 있는 대학 병원 영안실입니다. 셀포스에 있는 병원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리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시신 확인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겠지요. 물론입니다.”
“부인은 싱그베들리르에는 혼자 갔습니까?”
“네, 이틀 전에 일을 하겠다고 갔습니다. 오늘 오후에 돌아올 예정이었고요. 늦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주말에 친구에게 별장을 빌려주었습니다. 내게 거기 좀더 있으면서 친구를 기다려볼까 한다고 했어요.”
“부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카렌이라는 친구분입니다. 그분을 아십니까?”
“네.”
“선생님은 댁에 계셨습니까?”
“네.”
“부인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신 게 언제입니까?”
“어제저녁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요. 아내는 별장에 가면서 휴대전화를 가지고 갔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소식을 듣지 못하셨단 말씀이지요?”
“네, 전혀요.”
“싱그베들리르에서 남편분을 기다리던 게 아닙니까?”
“아뇨, 저희는 집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별장에서 친구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시기로는 마리아가 아마…… 어제저녁에…… 그랬다고…….”
“법의학자가 아직 정확한 사망 추정 시각을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발드빈은 침묵했다.
“부인께서 전에도 시도한 적이 있습니까?”
“시도라니, 자살 말입니까? 아뇨, 그럴 리가. 전혀 없습니다.”
“부인께서 심각한 상태였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많이 우울해하고 침체되어 있긴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이건…….”
그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신부가 에를렌뒤르와 시선을 마주치며 지금은 이 정도로 하는 게 좋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에를렌뒤르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얘기는 차후에 더 나누도록 하지요. 이곳으로 와 같이 계셔줄 분께 전화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심리 상담사라도. 저희가…….”
“아뇨……. 감사합니다.”
나오는 길에 에를렌뒤르는 커다란 책장들이 줄지어 선 거실을 지나왔다. 아까 진입로에 차를 세우면서는 차고 앞에 주차된 날렵한 SUV를 보았다.
왜 이런 집을 놔두고 죽었을까? 그는 궁금해졌다. 이곳에 의지하고 살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경험상 자살의 동기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개인의 재정 상황과도 관련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살은 남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다.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청소년, 중년층과 노년층.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오랜 우울증과 좌절된 시도의 전력이 있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친구와 가족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다분했다. “그 친구가 그런 감정 상태였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었겠어요?” 남겨진 가족의 심정은 처참했고, 그들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으며, 목소리는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감정과 공포로 얼룩졌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눈치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뭘 좀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남편은 에를렌뒤르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부인께서 어머님을 여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부인께서 심하게 가슴 아파 하셨습니까?”
“마음이 많이 상했지요. 하지만 이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최근에 많이 우울해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경찰에선 많이 접하시겠지요? 제 말은 그러니까, 자살 사건 말입니다.” 발드빈이 말했다.
“슬프게도 늘 있는 일입니다.” 에를렌뒤르가 대답했다.
“아내가…… 고통스러워했습니까?”
“아뇨, 고통은 겪지 않으셨습니다.” 에를렌뒤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의사입니다. 거짓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아내는 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달리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았지요. 도움을 받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녀의 마음을 좀더 살폈어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아내와 장모님은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마리아는 장모님을 잃고 쉽사리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지요. 장모님은 겨우 예순다섯 살이었습니다. 죽기에는 이른 나이였지요. 암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까지 마리아가 돌봐드렸고요. 아내가 장모님의 죽음이 남긴 상처를 극복했는지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무남독녀였어요.”
“견디기 힘드셨을 것 같군요.”
“아내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힘든 일이지만요.”
“물론입니다. 부인의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부인께 신앙이 있었습니까?” 에를렌뒤르가 현관 서랍장 위에 놓인 예수상을 보면서 물었다. 옆에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성당에 다녔습니다. 저보다 훨씬 신실했지요.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랬고.”
“발드빈 씨는 신앙이 없으십니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발드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네,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는 그럼 바론스티귀르로 가보겠습니다.”
“네, 경찰 소속 법의학자가 시신을 부검할 겁니다. 이런 경우에 거쳐야 하는 절차입니다.”
“이해합니다.” 발드빈이 말했다.
곧이어 집은 텅 비었다. 에를렌뒤르는 신부와 발드빈의 뒤에서 좁은 길을 따라갔다. 진입로에서 나오는 동안 백미러를 힐긋 보니 거실 커튼이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고 백미러를 응시했다. 창가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에를렌뒤르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다시 운전을 이어가면서 잘못 봤다고 판단했다.
마리아는 레오노라가 죽고 나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슬픔에 겨워 몸을 가누지 못했다. 방문은 모조리 거절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발드빈이 이 주 휴가를 내기도 했지만, 그가 뭘 해주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혼자 있겠다고 고집했다. 그가 무기력과 우울증에 도움이 되는 약을 어렵사리 구해주기도 했지만 그녀는 먹으려 들지 않았다. 그녀를 돌봐줄 만한 정신과 의사를 알아 와도 거절했다. 마리아는 혼자 힘으로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걸릴 것이고 좀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해내겠다고 했다.
마리아는 불안과 우울, 식욕부진과 체중 감소,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슬픔이라는 세계 이외에는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는, 정신이 마비되는 느낌에 익숙했다. 그녀는 그 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비슷한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머니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처음 몇 년 동안 마리아가 끊임없이 꾼 아버지 꿈은 떨쳐버릴 수 없는 악몽으로 변하곤 했다. 그녀는 망상으로 고생했다.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나 간혹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 건 아닌가, 죽지 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녀는 깨어 있는 동안 온갖 곳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느꼈고, 그의 시가 냄새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가 바로 옆에 서서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자신이 유일한 자식이라 아버지가 천국에 가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라 믿었다.
합리주의자였던 어머니 레오노라는 그런 이미지와 소리와 냄새는 슬픔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아버지의 죽음에 딸이 보일 수 있는 정신적 반응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너무 충격으로 다가와 그녀의 감각들이 그의 존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간혹은 이미지로, 냄새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레오노라는 그것을, 머릿속 심상을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내부의 눈이 불러오는 환상이라고 했다. 충격으로 예민해진 상태에다 그녀의 감각은 과민하고 유약하여,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비정상적인 현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말하는 내부의 눈이 아니면 어떡하죠? 아버지가 죽고 나서 내가 본 것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라면?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고 싶었던 거라면 어떡해요?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거라면 어떡해요?”
마리아는 어머니의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레오노라가 자신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으리란 것이 분명해지고 나서부터 모녀는 죽음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네가 가져다준 빛과 터널에 관한 책들을 다 읽었어. 어쩌면 사람들이 하는 말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영원으로 향하는 터널 이야기 말이야. 영생. 나도 곧 알게 될 거다.” 레오노라가 말했다.
“너무나 생생한 기록들이 많아요. 죽었다가 돌아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 말이에요.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경험들이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기록들이며.”
“이 문제는 자주 얘기를 했잖니…….”
“사실일 수도 있잖아요? 일부라도요.”
레오노라는 옆에 앉은 딸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딸은 마음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레오노라의 병은 그녀 자신보다도 딸인 마리아에게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했다. 레오노라가 죽고 없으면 세상천지에 그녀는 혼자가 될 터였다.
“나는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아.”
그들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였고, 레오노라는 삼 년에 걸쳐 싸우다 이제 마침내 패배하고만 암과의 전쟁 탓에 쇠약해진 몸으로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내가 너에게 신호를 보내마.” 레오노라가 반쯤 감은 눈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신호요?”
레오노라는 약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것으로…… 하는 게 좋겠지.”
“뭐를요?” 마리아가 물었다.
“그러려면……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해. 꿈이나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은 안 돼.”
“무덤에서 제게 신호를 보내겠다는 말씀이에요?”
레오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잖니?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사후 세계가.”
“어떻게 신호를 보내실 건데요?”
레오노라는 자는 것처럼 보였다.
“있잖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프루스트요.”
“그래……. 그 사람 책을…… 잘 보고 있도록 해…….”
레오노라는 딸의 손을 잡았다.
“프루스트야.” 그녀는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하고 마침내 잠이 들었다. 저녁 무렵 레오노라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틀 후에 세상을 떴다.
레오노라의 장례식이 있고 나서 석 달 뒤, 마리아는 아침나절에 벌떡 깨어나 침대 밖으로 나왔다. 발드빈은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갔고, 그녀는 악몽과 심각한 만성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에 시달려 무기력하고 지친 상태로 집에 홀로 있었다. 부엌으로 가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혀 주위를 돌아봤다.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거기 누구냐고 큰 소리로 외쳐 물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의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마리아는 정면을 응시했다. 어둑한 거실의 책장 곁에 서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움직여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응시했다. 그리고 레오노라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4
자기 아파트로 돌아온 에를렌뒤르는 부엌 불을 켰다. 둔중한 베이스 소리가 위층에서 쿵쾅거리며 들려왔다. 최근에 이사를 온 젊은 부부는 저녁마다 시끄러운 음악을, 가끔은 귀가 멀어버릴 크기로 틀어놓았고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다. 그들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새벽 시간까지 끔찍한 소음을 울려대며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부부는 같은 건물 거주자들에게서 불평을 샀고 조심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말에만 그치고 지금까지 지키지 않고 있었다. 에를렌뒤르에게 그 부부가 틀어놓는 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거친 울부짖음이 간간이 섞인 둔중한 베이스 비트의 무한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이 켜진 것을 봤어요.” 에를렌뒤르가 문을 열자 아들인 신드리 스나에르가 말했다.
“들어오너라. 막 그라바르보귀르에 갔다가 돌아온 참이야.”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요?” 신드리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있지. 커피 줄까? 아니면 뭐 다른 거 마실래?” 에를렌뒤르가 대답했다.
“물이면 돼요. 나 휴가야. 이 주 썼어요.” 신드리가 담뱃갑을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위층에서 울려대는 록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에를렌뒤르는 이제 신경도 안 쓰는 소리였다. “뭐예요?”
“새로 이사 온 사람들.” 에를렌뒤르가 부엌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에바에게선 무슨 소식 없니?”
“최근에는 없었어요. 요전날 어머니와 다퉜다던데.”
“어머니와 다퉜다고?” 에를렌뒤르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뭣 때문에?”
“아버지요, 들은 바로는.”
“둘이 나 때문에 다툴 일이 뭐가 있어?”
“직접 물어봐요.”
“그 녀석 아직도야?”
“네.”
“아직도 마약을 한다고?”
“아뇨, 그건 아니고. 하지만 같이 모임에 가지는 않아요.”
에를렌뒤르는 신드리가 단주 모임에 나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어린데도 신드리는 심각한 알코올의존증과 약물 의존증으로 고생을 했는데, 혼자 힘으로 새사람이 되었고 병증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단계들을 밟아나갔다. 누나인 에바는 최근에는 마약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으리란 믿음에서 치료와 모임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라바르보귀르에는 무슨 일로 갔어요?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어요?”
“자살 사건.”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그게 범죄나 뭐 그런 건가……?”
“아니, 자살은 범죄가 아니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범죄일지도 모르지만.”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내 주변에도 자살한 녀석이 하나 있어요.”
“그래?”
“심미라는 친구요.”
“누군데?”
“괜찮은 친구였어요. 위원회에서 같이 일했어요. 천하태평인 친구였지. 말은 별로 없었지만. 어느 날 그냥 목을 매어버리더라고요. 직장에서. 차고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목을 맸어요. 작업장 감독이 발견해서 내려줬죠.”
“왜 그랬는지 알아?”
“몰라요. 어머니랑 같이 사는 친구였는데, 한번 술을 같이 마신 적이 있어요. 그때가 살면서 처음으로 술을 먹은 거라 다 토해버리더라고요.”
신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데서 바보 같은 친구였구나.”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쾅쾅 울려대는 베이스 소리는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소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신드리가 천장을 힐끗 보면서 물었다.
“저 사람들, 누구 말도 안 들을걸.”
“내가 가서 한소리 하고 올까?”
“네가?”
“원하면 가서 저놈의 것 좀 꺼달라고 하죠.”
에를렌뒤르는 잠시 생각했다.
“한번 해보든가. 나는 귀찮아서 올라가지 않았거든. 그런데 에바와 너희 어머니가 싸웠다고?”
“난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자살 사건에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그라바르보귀르 일요.”
“아니, 그냥 비극일 뿐이다. 가장 안 좋은 경우지. 아내가 별장에서 자살했을 때 남편은 도시의 자기네 집에 있었거든.”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대요?”
“그랬다더구나.”
신드리가 나간 직후, 위층에서 들려오던 록 음악 소리가 멈췄다. 에를렌뒤르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런 다음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신드리 스나에르를 외쳐 불렀지만 신드리는 가고 없었다.
며칠 후 에를렌뒤르는 싱그베들리르 별장에서 발견된 시신을 부검한 법의학자의 보고를 받았다. 목을 매어 죽은 통상적인 자살 사건과 다른 특이점은 전혀 없었다. 신체 상해도 없었고 혈액검사에서 이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건강했고 병도 없었다. 생물학적 이유를 가지고서는 그녀가 삶을 끝장내기로 한 연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에를렌뒤르는 입수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남편인 발드빈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그는 점심을 먹고 그라바르보귀르 만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엘린보르그가 지원차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며 귀찮을 것 없다고 했다. 시귀르뒤르 올리는 감기 때문에 병가를 내고 집에서 자리보전중이었다. 에를렌뒤르는 슬쩍 손목시계를 보았다.
발드빈은 그들을 거실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무기한으로 휴가를 낸 상태였다. 그의 어머니가 와서 이틀 정도 머물다 갔다. 동료들과 친구들이 들르거나 위로의 전갈을 보내왔다. 그는 장례식을 준비했고, 몇몇 지인이 부고 기사를 준비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준비하면서 에를렌뒤르와 엘린보르그에게 이런 근황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모든 행동이 느릿느릿했지만 자신을 잘 추스르는 듯이 보였다. 에를렌뒤르는 부검 결과를 설명했다. 부인의 죽음은 자살로 판명됐다고 전했다. 그리고 재차 조의를 표했다. 엘린보르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와든 함께 계시는 게 좋습니다.이런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여동생과 어머니가 챙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고 싶은 때도 있으니까요.” 발드빈이 말했다.
“그럼요, 옳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최선의 치료책이기도 합니다.”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엘린보르그는 그를 힐끔 보았다. 에를렌뒤르는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고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 집에서 에를렌뒤르와 뭘 하는 걸까 싶었다. 아까 그는 법의학자의 보고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살한 여자의 남편과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앉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꾸 자책을 하게 돼요. 뭔가 했어야 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뭘 좀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발드빈이 말했다.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경찰 일을 하다 보면 흔히 보게 되죠. 이런 일이 일어날 때쯤이면 가족들은 대개 힘이 닿는 한 모든 일을, 거의 모든 일을 해본 상태입니다.”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정말로요. 지금껏 살면서 그녀가 그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 충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 기분을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저는 의사로서 다양한 상황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누구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발드빈은 말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지 아내와는 대학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리아는 역사와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그는 입시 준비 과정에서는 연기를 공부했고 한동안 연기 학교에 적을 뒀다가, 후에 방향을 바꿔 의학을 택했다고 했다.
“마리아 씨는 학자였습니까?” 엘린보르그가 물었다. 그녀는 지질학 학위를 땄지만 그쪽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네, 집에서 일했습니다. 지하에 서재가 있거든요. 가르치는 일도 좀 했고 연구소나 기업체를 위한 역사 프로젝트를 맡았지요. 연구를 했고 글도 썼습니다.”
“이 지역에는 언제 이사를 오셨습니까?” 에를렌뒤르가 물었다.
“죽 이 집에 살았습니다.” 발드빈이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아내와 장모님과 함께 이사를 왔죠. 마리아는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장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 집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지역에 개발계획이 세워지고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지어진 집입니다. 이 집이 다른 집들과 좀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건 알아채셨을 겁니다.”
“다른 집들보다 오래되어 보이기는 하더군요.” 엘린보르그가 말했다.
“장모님은 여기서 돌아가셨죠.” 발드빈은 말을 이었다. “이 집에 있는 침실에서. 암 진단을 받고 돌아가실 때까지 삼 년이었어요. 병원엔 들어가지 않으셨죠. 집에서 삶을 마치고 싶다고. 마리아가 내내 간호를 했습니다.”
“부인이 힘드셨겠습니다. 신앙이 있는 분이었다고 하셨지요?”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그는 엘린보르그가 시계를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네,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쭉 그랬습니다. 장모님이 편찮으시고 나서는 모녀끼리 종교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지요. 장모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열린 분이었지요. 자신의 병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어요. 그런 태도는 장모님이 슬픔을 견디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엔 죽음을 받아들이셨을 거예요. 어쩌면 그 상황에 처한 사람 누구라도 받아들이는 식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제 직업이 직업이라 익숙한 일입니다. 물론 누구도 다가오는 죽음을 진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기란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나 가족에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남기고 죽을 수는 있겠지요.”
“그분의 따님인 부인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에를렌뒤르가 물었다.
발드빈은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습니다. 누가 됐든, 그녀처럼 죽는 사람이 죽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부인분은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지요.”
“늘 그랬습니다.”
“장인은 어땠습니까?”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네, 그리 말씀하셨지요.”
“전 뵌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니까요.”
“어쩌다가?”
“여름 별장에 갔다가 호수에서 익사하셨다더군요.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에서요. 조그만 보트를 타고 나갔다가 호수에 빠지셨다고 합니다.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 본래 끽연가셨고 몸 쓰는 일 하던 분이 아니다 보니…… 익사하셨지요.”
“그렇게 어렸을 때 부모를 잃는다는 건 비극이지요.” 엘린보르그가 말했다.
“마리아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부인분이요?”
“겨우 열 살이었다는군요. 마리아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쳤지요. 아내가 그때 일을 전부 극복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장모님이 암에 걸려 돌아가시고 나니 이중으로 충격이 가해진 거지요.”
“견뎌야 할 것이 많았겠습니다.” 엘린보르그가 말했다.
“네, 그 사람이 견뎌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발드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5
며칠 후 에를렌뒤르는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오래된 실종 사건 파일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 누가 프런트 데스크에서 그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카렌이라는 여자라고 했다. 싱그베들리르의 별장에서 마리아의 시체를 발견한 친구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낸 에를렌뒤르는 프런트 데스크로 갔다. 갈색 가죽 재킷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킷 안에는 두터운 흰색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고 있었다.
“마리아 일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형사님께서 이 사건을 담당하고 계시죠, 그렇죠?” 인사를 나눈 뒤 그녀가 말했다.
“네. 하지만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뭣한 것이 이미…….”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아는 사이라고 하셨죠?”
“어릴 적부터 친구였어요.” 카렌이 대답했다.
“아, 그러셨지요.”
에를렌뒤르는 사무실로 여자를 안내했고, 여자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무실이 후끈한데도 여자는 가죽 재킷을 벗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그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그 애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요. 언제나 눈앞에 마리아가 보여요. 그 친구가 그래야 했다는 게 얼마나 충격인지 모르실 거예요. 그렇게 죽은 모습을 제가 발견해야 했다니요. 그 애는 무슨 말이든 다 했지만 이런 얘기는 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서로를 신뢰했어요. 저만이 마리아를 속속들이 알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카렌 씨는 친구분이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네.”
“그럼 어떻게 된 일일까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애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그냥 그런 확신이 들어요. 전 마리아를 알고 그 애라면 절대로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해요.”
“자살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마련입니다. 카렌 씨에게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해서 친구분이 자살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살이 아니라는 다른 암시도 전혀 없고요.”
“게다가 저로선 발드빈이 그 애를 화장했다는 것도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렌이 덧붙였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장례식이 치러졌어요. 모르셨어요?”
“네.” 그라바르보귀르 지역 외곽의 집을 처음 방문한 때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를 머릿속으로 가늠해보면서 에를렌뒤르가 대답했다.
“그 애가 화장을 원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요.”
“원했다면 카렌 씨께 말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두 분이서 장례 절차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습니까? 유품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아뇨.” 카렌이 완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실은 친구분이 화장을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네. 하지만 그냥 아는걸요. 전 마리아를 안다고요.”
“카렌 씨는 마리아 씨를 알았습니다. 이 사무실에 오신 이유가 친구분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하기 위해서입니까?”
카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 모든 일이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는 카렌 씨의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실질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신 거고요.”
“네.”
“그렇다면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분과 남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시는 게 있습니까?”
“네.”
“말씀해보시죠.”
“괜찮았어요.” 카렌이 주저하듯 말했다.
“친구분께 일어난 일과 남편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네. 어쩌면 누군가 싱그베들리르 별장 문으로 들어왔을 거예요. 그 주변은 온갖 사람들이 돌아다니니까요. 이를테면 외국인 관광객이라든가. 그런 쪽으로도 확인해보셨나요?”
“그런 추측을 할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도착하실 즈음에 친구분이 별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나요?”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그런 얘기는 없었어요.”
“남편분에게는 카렌 씨를 기다리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혼자 있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에를렌뒤르가 말했다.
“발드빈이 그 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말하던가요?”
“네, 어머니를 여읜 것이 친구분께 굉장한 상실감을 안겼다고 하더군요.”
“어머니와 마리아 사이는 아주 각별했어요. 제가 아는 어떤 관계보다 각별했죠. 꿈이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으세요?” 카렌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게 지금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에를렌뒤르는 강하게 나오는 여자의 태도에 놀랐다. 그러나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몰아가는지는 이해했다. 절친했던 친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행동을 저질렀다. 마리아가 불행한 일로에 있었다면, 카렌은 자기가 알아야 했고 뭔가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미 늦어버렸지만, 뭔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적어도 그 비극적 사건에 대해 일말의 결론이라도 가져야 할 것이었다.
“사후 세계는 어떤가요?” 여자가 물었다.
에를렌뒤르는 고개를 저었다.
“저로선 무슨 말씀을…….”
“마리아는 믿었어요. 그 애는 꿈을 믿었어요. 꿈이 자기에게 뭔가를 말해줄 거라고, 자기를 인도해줄 거라고. 사후 세계도 믿었고요.”
에를렌뒤르는 침묵했다.
“그 애 어머니가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어요. 사후 세계가 있다면 말이지요.” 카렌이 말했다.
“잠시만, 말씀하시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나눈 많은 얘기가 진실이라면, 어머니가 알려줄 거라고 했어요. 사후 세계가 있다면 어머니가 저세상에서 신호를 보낼 거라고요.”
에를렌뒤르는 헛기침을 했다.
“저세상에서 신호를 보낸다고요?”
“네, 사후 세계가 있으면요.”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어떤 신호를 보낼 거라고 하던가요?”
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받았다고 하던가요?” 에를렌뒤르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친구분이 저세상에서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를 받았나요?”
카렌이 에를렌뒤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카렌 씨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내용과 경찰이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사후 세계로부터의 메시지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