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1932년 미국의 워싱턴 주 이스트 스탠우드에서 태어나 몬태나 주의 캘리스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서 철학(B.A.)을, 뉴욕 신학교에서 신학(S.T.B.)을 공부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셈어 연구로 석사학위(M.A.)를 받은 뒤 미국 장로교단(PCUS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9년 뉴욕 신학교에서 성경 언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한편 교회에서 파트타임 목사로 일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오로지 생계를 위해 시작한 목사 일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목회 소명을 깨닫고 목회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3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릴랜드 주의 작은 마을 벨 에어에서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를 시작해 29년간 목회했다. 이후 피츠버그 신학교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 칼리지에서 13년간 재직하면서 영성신학을 가르쳤고, 2006년 은퇴한 후로는 몬태나 주의 시골 마을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목사와 작가라는 두 가지 소명을 깨달은 뒤로 평생 그 소명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일을 추구하며 걸출한 저작들을 남겼다. 성경을 이 시대에 맞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12년간 몰두한 끝에 2002년 《메시지》를 출간했고, 《한 길 가는 순례자》,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 책을 먹으라》, 《그 길을 걸으라》, 《비유로 말하라》, 《부활을 살라》 등 30여 권의 책을 썼다.
옮긴이 | 양혜원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 라브리 협동 간사로 섬겼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유진 피터슨》, 《현실, 하나님의 세계》(공역), 《이 책을 먹으라》, 《그 길을 걸으라》, 《비유로 말하라》, 《부활을 살라》(공역) 등 유진 피터슨의 주요 저작을 비롯해 《사랑이 이긴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라브리 이야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외 다수가 있다.
추천의 말
‘분주함’과 ‘산만함’과 ‘피상성’이 특징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목회자는 수많은 일들로 허둥대며 영적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공한 목회자들은 거대한 추문을 만들어내고, 실패한 목회자들은 패배감의 늪에 빠지며, 이도저도 아닌 목회자들은 매너리즘에 포로가 됩니다.
이 책에서 피터슨은 성공주의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고 목회의 본질에 충실하게 사는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한 목회자가 삶과 목회를 통해 스스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행복을 유통하는 내면의 길로 안내합니다. 내가 목회자로서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 중 하나이기에 이 책을 기쁜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김 영 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목회자의 사부師父는 말하기를, 목회자는 영적 기술자가 아니라 영적 예술가라고 합니다. 목회자는 일상에 흐르고 있는 삶의 리듬을 발견하여 그것을 다양한 변주곡으로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분주함 가운데 고요함을, 고요함 가운데 꿈틀거림을, 꿈틀거림 가운데 묵시적 시대의 환상적 도래를 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유진 피터슨은 영적 방향 설정의 중요성을 예술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적입니다. 그의 필치는 포근하면서도 간결하며 그의 언어는 절제의 미덕과 자유로운 영혼을 투사하는 그림의 세계입니다. 이 책은 온 입안을 향기로운 육즙으로 가득 채워주는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목회자들의 목민심서입니다.
류 호 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차 례
추천의 말
서문
1부 목사, 다시 정의하다
1. 벌거벗은 명사
2. 바쁘지 않은 목사
중요한 일을 둘러싼 소동 | 여백으로 가는 수단
3. 전복적 목사
목사의 특이한 위치 | 전복자 예수 | 전복자의 가정 | 전복의 도구
4. 묵시적 목사
묵시적 기도 | 묵시적 시인 | 묵시적 인내
2부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
1. 살아가는 일 한가운데서 사역하기
2. 영혼 치료하기: 잊어버린 기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주도권 | 언어 | 문제들
3. 눈뜨고 기도하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통로 쪽 좌석 | 팅커 개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계 | 성경의 세계 | 교회 안 세상 | 기도: 눈을 뜰 것인가, 감을 것인가?
4. 첫 언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나의 교육 임무는 무엇인가? | 유용한 도움 | 세 종류의 언어 | 언어 전환
5. 성장은 결단인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 교차로를 살펴보다 | 일: 부정적 능력 | 언어: 중간태 | 사랑: 의지적 수동성
6. 잡담의 사역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평범한 것에 대한 조급함 | 잡담: 목회의 기술
7. 죄를 경험하는 새로운 형식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사람들을 죄인으로 보는 시각 | 죄의 특정 형태를 분별하는 것 | 청소년기의 사건들 | 부적절하다는 느낌 | 역사적 기억 상실 | 신속한 신학적 안목
8. 돛대에 단단히 묶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직업의 위험 | 잔해 속으로 들어가기 | 구분된 백성으로 살아가기
9. 사막과 추수: 안식 이야기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안식년을 부추긴 자극 | 안식년을 위한 구조 | 사역을 위한 재정비
3부 새롭게 된 말씀
1. 시인과 목사
2. 시
인사 | 나무 | 별 | 초 | 시간 | 꿈 | 요람 | 고통 | 전쟁 | 캐럴 | 잔치 | 춤 | 선물 | 헌물
일러두기
본문에 인용한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개역개정판을 따랐다.
서 문
유진 피터슨은 장로교인이 아니었다면 수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길 가는 순례자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에서부터 《자유Traveling Light》, 《땅과 제단Earth and Altar》(《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Where Your Treasure Is》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책들은 전부 기독교 영성의 실천을 다룬다.
게다가 유진은 수도원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한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머리가 벗어졌으며 마른 체구이다. 조용하면서도 쉰 듯한 목소리는 마치 영혼의 어두운 밤을 여럿 헤쳐 나온 사람의 목소리 같다. 그에게는 침묵과 고독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한 데서 나오는 안정적이고도 고요한 분위기가 있어서, 다소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말들이 진정한 깊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러한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제쳐둔다면, 그는 메릴랜드 주 벨 에어Bel Air에 있는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의 목사일 정도로 철저한 장로교인이다. 그는 성도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교회의 목사는 하지 않기로 일찌감치 결심했다. 그와 그의 아내 잰은 약 3백 명이 모이는 그리스도 우리 왕 교회를 26년간 섬겼다.
특히 《한 길 가는 순례자》를 출간한 1980년부터 유진은 영성 훈련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전수할 줄 아는, 사려 깊고 표현이 분명한 목사로 (화려하지는 않으나) 폭넓은 명성을 얻었다.
성경의 언어를 마스터했고, 권위 있는 윌리엄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 밑에서 박사 학위 수준의 공부를 한 그는 학문적 배경에서 글을 쓰고 목회를 한다. 그러나 그의 학식은 결코 전시용이 아니다. 사실 피터슨은 자신의 책에 대해 계속 질문을 받는 것을 불편해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표는 그저 신뢰할 수 있는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화려한 겉치레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상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정직, 단순함 그리고 본질을 장려하는 데에 자신을 바쳤다.
1987년 9월에 나는 피터슨 부부와 사흘을 함께 보냈다. 벨 에어가 아니라 북서부 몬태나에 있는,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 집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만났다. (이 책 2부 9장에 이 안식에 대한 유진의 성찰이 나온다). 플랫헤드 호숫가에 자리 잡은 그 집 뒤로 16킬로미터를 뻗어 있는 그 호수는 마치 하늘을 투영하는 푸른 거울과도 같았다. 하얀 봉우리의 로키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그곳을 유진이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부엌에 서 있는데 해가 낮게 지면서 천장 쪽에 반짝이는 호수 물결이 비쳤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곳의 감각적인 면이 정말 좋아요”라고 말했다.
피터슨 부부는 10월까지 몬태나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기도하고, 주변 산들을 걷고, 소리 내어 같이 책을 읽고, 눈 덮인 들길을 스키로 가로지르기도 했다. 유진은 글을 쓰고 잰은 연달아 완성된 두 책의 초고를 타자 치면서 보냈다. 어느 사역자 부부에게든 소중할 수밖에 없는 둘만의 시간에 이따금씩 자녀들이 끼어들었다.
9월은 인터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유진은 안식년을 보내며 재충전되어 있었고, 목회로 돌아갈 준비,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몇 시간을 녹음기 앞에서 보냈지만, 집 근처 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유진은 시간을 들여 그곳의 지질학적 형성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전나무 열매에 대한 인디언 전설을 들려주었으며, 보이는 족족 야생 동물을 알아채고는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대화의 방향을 어디로 틀든 결국 계속해서 돌아오는 주제는 영성이었다. 장소의 중요성, 창조성의 역할, 공동체의 중요성, 기독교적 전복의 필요성.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유진은 물수리가 날개 치며 만 위로 지나가는 그곳에서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Diary of a Country Priest》의 마지막 줄을 인용했다.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
영성과 장소
덕행의 씨앗을 심으면서 빠른 결과를 찾는…사람은 실망할 것이다. 내일 저녁에 감자를 먹고 싶다면 오늘밤에 정원에 나가서 감자를 심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파종과 추수 사이에는 오랜 어둠과 보이지 않음과 침묵이 있어서 그 둘을 갈라놓는다.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 경작하고 잡초를 뽑고 양육하고 또 다른 씨앗들을 심는다.
- 《자유》
목사님 책은 말 그대로 땅과 밀접합니다. 《땅과 제단》이라는 책 제목처럼 농사와 관련된 은유들이 있습니다. 이동이 빈번한 사회에서 살지만, 장소에 대한 인식,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나는 시인이자 농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책들을 즐겨 읽습니다. 그는 켄터키에 있는 땅뙈기를 취해서 존중하고 돌보고 거기에 자신을 굴복시킵니다. 마치 예술가가 자신이 쓰는 재료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듯이 말입니다. 나는 베리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농장’과 ‘땅’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 자리에 ‘교구’라는 말을 대신 집어넣습니다. 그가 농장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내가 교인들에게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것들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의 특별한 면 중 하나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던지는 질문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내가 이들과 어떻게 함께해야 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대로의 모습을 갖출까?” 하는 것입니다. 내 직업은 그냥 그곳에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그들에게 정직하고, 성령께서 그들 안에 형성하시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아닌가? 기꺼이 하루를, 일주일을, 일 년을 침묵할 수 있는가? 웬델 베리처럼 이 땅을 개간하며 50년을 보낼 수 있는가? 이 사람들과 함께?
기독교 영성이란 복음의 성숙한 온전함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자녀, 배우자, 직장, 날씨, 소유물, 관계 등 인생의 모든 것을 믿음의 행위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재료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재료를 믿음의 행위로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의 전제는 하나님이 언제나, 내가 알기 전에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임무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인식해서 거기에 반응하고 참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교구 목회에 몰두하다 보면 종종 사람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놀라며 집에 오곤 합니다. 그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죄도 짓고 반항도 하고 어리석은 일도 합니다. 그러나 거의 날마다 용기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을 하다 보면, 그러니까 멀찍이서 바라만 보지 않고 내 환경에 뛰어들다 보면, 궁극적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하시는 일에 대한 경외심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 사건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레이랑 조 핍스가 생각나네요. 레이는 막내아들이 1학년 때 선생님이었는데, 잰이 그 선생님의 보조교사를 했어요. 한번은 잰이 그 선생님에게 교회에 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지요. 레이는 갈 수도 있지만, 옷을 차려입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일요일은 청바지를 입는 날이라는 거지요. 잰은 청바지 차림으로 교회에 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만나면 악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잰은 식료품점에서 레이를 만나면, “청바지를 빨아놓으셔야겠어요”라고 말을 건넸지요. 하지만 레이는 한 번도 교회에 오지 않았어요.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딸 카렌이 도자기 공예를 배웠는데, 그 반에 레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레이는 카렌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었지요. 하지만 계속 같은 동네에 살고는 있었어요. 그러다가 2년 전에, 20년을 기도하며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일이 생겼습니다. 레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조 핍스는 레이랑 같은 학교를 다녔고 오래전부터 레이가 좋아한 사람이었어요. 두 사람은 사귀다 말다 했는데, 그 남자의 인생이 좀 꼬였지요. 마약에 손을 댔고 결국 마약 밀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인생 중반에 회심을 경험했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구하며 레이에게 와서 말했지요. “이 일의 의미를 모르겠어”라고요. 그래서 레이는 자기가 아는 목사가 있다면서 그를 내게 데려왔어요.
결국 레이와 조는 결혼을 했습니다. 내게 자기들 결혼식 때 잰과 함께 <더 가다 보면>이라는 노래를 밴조를 연주하며 불러달라고 했어요. 레이와 조의 결혼생활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조가 아직 형을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자기 이름을 “조 ‘더 가다보면’ 핍스”라고 써 보내곤 한답니다.
목사로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은혜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내 직업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은혜를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 전체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고 도움만 잘 받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요. 사실 성경에 보면 행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쁨, 평화,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기 삶에서 갖는 의미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영성이 하는 일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삶의 특별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셔서 내가 배우자를 바꾸거나 배우자나 자녀를 없애는 대신에 나를 바꾸고, 이 고통과 고난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을 내 인생에서 하시려는 것인가?”
때로 내가 목사로서 하는 일은 한 번도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말해진 적이 없는 상황,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기쁨은 그 이름을 듣고 하나님이 이곳에 계심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흥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고, 비록 대단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영성과 창조성
죄인을 용서하고, 다친 사람을 돕고, 개인적 책임을 지는 일상의 일 가운데서도 진정한 은혜의 작용이 가능하다.…창조성은 계속된다. 이 세상의 길거리와 밭, 가정과 시장은 문화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자유》
누구나 창조적으로 살도록 태어났다고 쓰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은 어렵습니다. 창조적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 정의상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확신 없는 어떤 것의 언저리에서 삽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거의 확실히 실패합니다. 내가 아는 모든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많은 것을 내다버립니다.
우리가 창조적으로 살게 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어쩌면 창조성에 대한 이해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술가나 소설가만 창조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사실 대부분의 창조성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좋은 운동선수가 될 몸이나 화가가 될 예술적 조합을 타고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사람에게 창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재료가 다를 뿐이지요. 재료는 자기 인생입니다.
은혜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잰이 시애틀에 있는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를 조금 전에 읽었는데, 그들은 1년 전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2-3주 후엔가 그 아기가 앞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디는 십대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루디의 남편 데이브 때문에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활달하고 야외 활동을 좋아합니다. 그는 오대륙 곳곳에서 3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을 올라본 사람입니다. 그는 깊고 조용한 영성의 소유자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부부인데, 자식이 앞을 보지 못합니다. 내 첫 반응은 말도 못하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데이브와 루디에게 일어날 수 있지?” 하는 반응이지요.
그런데 어제 루디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이렇게 말하더군요. “인생에서 대단한 경험을 많이 했지만, 엄마가 되는 것만큼 대단한 경험은 없었어요.” 그리고는 우리가 데이브와 그 아이 케언을 한번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돌을 갓 넘긴 케언은 올림픽 반도, 캐스케이드 산맥, 로키 산맥, 그레이트스모키 산맥에 있는 봉우리들을 다 올라가 보았다고 합니다. 데이브가 산행을 갈 때마다 딸을 데려간다는군요.
그 아기가 이들 부부에게서 최선의 모습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케언이 어떠한 상태이건 그 아이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조적으로 사는 부부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은혜와 구원의 삶으로 끌어왔으니까요.
영성과 공동체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당연한 결과이다. 인간에게 가족이 없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면서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는 없다.…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구원이라는 구조의 한 부분이다.
-《한 길 가는 순례자》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기도를 공동 기도나 예배 중의 기도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개인 기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보면 그러한 경향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요.
불편합니다. 기도의 전형은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기도입니다. 본질적이고 성경적인 맥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가 바로 기도의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복음의 깊이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맥락이지요.
그 말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기도를 배우고, 홀로 하는 기도는 공동체의 예배에서 가져오는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누가 내게 와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저는 “일요일 아침 9시에 이 교회에 오십시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도 기도는 계속되고 다른 형식을 갖출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둘의 순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긴 역사에서 볼 때, 공동체 기도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개인 기도입니다.
공동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한 가지 우리가 배우는 것은 기도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자신이 주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게 어떤 필요가 있다거나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기도를 합니다. 그때의 강조점은 자신이고, 그렇게 기도할 때 내가 무엇인가를 시작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가면 어떻습니까? 나는 앉아 있고 누가 내 앞에 서서 말합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내가 시작하지 않았고, 나는 반응할 뿐입니다. 이 말은 내가 겸손해졌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내 자아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가장 기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응답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이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회중, 즉 읽고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성례전으로 그것을 축하하는 회중이 바로 내가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실천하는 장소입니다. 바로 그곳이 내 기도의 중심지입니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 골방으로 가거나 산으로 가서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두 번째로 이야기할 것은, 회중 안에서 기도하면 내 감정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중으로 들어갈 때 아무도 내게 “오늘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어떤 것에 대해서 기도하고 싶으십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따라서 회중 가운데서 기도가 내 감정에 좌우되거나 내 감정의 인증을 받는 것이 아님을 서서히 배웁니다. 내 느낌으로 기도를 평가하고, 어떤 느낌이나 영적 집중력, 평화 혹은 그 반대로 괴로움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기도를 파괴하는 것은 없습니다.
혼자서 이것을 배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회중 안에 있으면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혹은 심지어 기도 시간 내내 졸더라도, 기도는 계속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배우게 됩니다.
영성과 체제 전복
기도는 전복적 활동이다. 현 체제의 어떠한 주장에 대해서든 다소 공개적 저항 행위를 하는 것이다.…[우리가 기도하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문화도, 가족도, 정부도, 직업도, 심지어 폭군 같은 자아도, 하나님의 주권의 조용한 권능과 창조적 영향력에 맞설 수 없게 된다. 가족과 인종에 대한 모든 자연적 유대와 사람과 민족에 대한 모든 의지적 헌신이 마침내는 하나님의 통치에 종속된다.
-《네 보화가 있는 곳》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변의 문화가 기독교적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문화에서 우리 문화로 온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보고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들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솔제니친이나 투투 주교, 혹은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온 대학생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국가와는 반대되는 것을 봅니다.
욕심 많고 교만한 모습을 보고, 희생하는 삶과 사랑이 특징인 성경적 기독교 공동체의 미덕은 거의 하나도 없는 기독교 공동체를 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감정과 느낌에 지나치게 빠져 있고, 탐욕스러울 만큼 만족감을 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의 표면적 언어 너머를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앞에 쳐놓는 기독교 언어의 이면을 보는 것이지요. 외부인들에게 미국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영성이 아니라 물질주의입니다. 이제 막 이 나라에 온 난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동차와 텔레비전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을 쫓아오지 않습니다. 부와 안락을 약속하는 것으로 그 복음을 해석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교인들에게 그렇게 설교합니까?
예, 합니다.
어떻게 설교하십니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종류의 집에서 살고, 같은 종류의 차를 몰고, 같은 가게에서 장을 봅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다 같은 처지인 것이지요.
몇몇 사람들이 사회에서 벗어나 일종의 돌격부대처럼 사회에 도전하기 위해서 집단 거주지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소명이 아닌데다가, 모두가 직업이 있고 사회에서 제자의 자리를 찾고 거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회중에게 분리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하면 신용을 잃게 됩니다. 일요일에 쓰는 언어와 월요일에 쓰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보다도 제 자신 안에서 개발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바로 전복적 정신입니다. 전복적인 사람이란, 적어도 겉으로는 문화적 색채를 취하는 사람입니다. 그 색채를 잃어버리면 효력을 잃습니다. 전복적인 일은 조용히 숨어서, 인내하며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문화를 이기셨다는 사실에 전념하여 작은 일도 기꺼이 하려 합니다. 전복적인 사람은 결코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비밀 메시지를 지니고 다니면서, 문화가 궁극적이라고 제시하는 것 너머에 무엇인가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심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적 전복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평범한 기독교적 행위들입니다. 희생적 사랑, 정의, 소망의 행위들이지요. 여기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개발하고, 이러한 일들을 부수적으로가 아니라 핵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의식을 키웁니다. 그러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