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AKKYO KARA NO SHIGOTOGAKU by Kang Sang-jung
Copyright ⓒ 2016 Kang Sang-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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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불확실한 시대와 인문 지식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생각할수록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게는 가정이 있고 배우자가 있고 돌봐야 할 아이들과 부모님도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입이 필요합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저는 일합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는 분도 스스로의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든 못 느끼든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벌어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은 개인의 인격 형성이나 정신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매우 섬세한 것입니다. ‘사는 보람’, ‘개성의 창조’ 혹은 ‘나다움의 표현’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일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나 어떠한 이유로든 지금 하는 일에 답답함을 느끼는 분, 혹은 일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일하는 방법, 즉 ‘하우투howto’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 일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이나 즉효성 있는 약 같은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일을 하다 맞닥뜨린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관점이나 힌트, 혹은 일의 질을 높이고 삶의 방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실마리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에 관해 생각할 때는 시대 상황과 그러한 시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일의 의미와 가치가 시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우리가 일하는 환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또 불확실해졌습니다. 성장이 지속되던 좋은 시절은 버블경제의 붕괴와 함께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기업은 끝없이 밀려오는 호황과 불황의 파도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합병이나 통폐합은 이제 일상다반사가 되었습니다. 계약직이나 파견 노동 같은 비정규 고용이 늘어가기만 합니다. 정규직이라 해도 종신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고용의 유연화 또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2008년 미국발 리먼쇼크가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발전하여 일본 경제 또한 커다란 타격을 입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후로 몇 년에 걸쳐 경제가 정체되면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거나 폐업하여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 다른 나라의 경제 위기가 커다란 파도가 되어 일본을 덮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2016년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EU 이탈을 찬성하는 표가 과반수를 넘겼습니다. 그 직후 전 세계의 주가가 폭락했지요. 영국의 EU 이탈, 즉 브렉시트Brexit가 일본과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직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국 경제의 장래를 걱정하는 목소리 역시 이전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중국 경제보다는 오히려 엄청난 부채를 끌어안고 있는 일본 경제야말로 장기적으로 고용과 복지가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우리는 안정과는 아주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셈입니다.
지금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라면,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좋을지, 어떤 일이 내게 맞을지 고민하고 있겠지요. 이미 취업하여 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매일 하고 있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는 물론 앞으로 회사에서 내가 발전할 수 있을지, 혹은 회사나 업계가 순조롭게 성장하여 나와 내 가족을 받쳐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한편 자연재해 또한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2011년 3월 11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규모 9.0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거대 지진이 발생했고, 이어진 쓰나미가 수많은 존엄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생존자들은 생활의 기반을 잃었으며, 복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제게 충격적이었던 일을 하나 더 들자면 바로 2016년 4월에 일어난 구마모토 지진입니다. 2016년 1월부터 저는 제 고향 구마모토의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 겸 이사장을 맡아 도쿄와 구마모토를 오가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큰 지진이 일어난 4월 14일, 구마모토 시내의 한 호텔 10층에 있던 저는 지진이 나자마자 서둘러 비상계단으로 1층까지 뛰어 내려가야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일 때문에 도쿄로 돌아갔지만, 지진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틀 뒤에 본진本震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로도 구마모토에는 장기간에 걸쳐 군발지진群發地震(비교적 소규모의 지진이 무리지어 일어나는 것-옮긴이)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재민들의 피난 생활이 장기화되고 큰 비까지 잇달아 내리는 바람에 복구가 늦어지면서 지역의 경제 활동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일본 특유의 자연 환경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지진과 태풍, 국지적인 호우 같은 수많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겠지요. 일부는 극심재해激甚災害(대규모의 태풍, 호우, 지진 등에 의한 재해로 정부의 극심재해법에 의거한 도움이 필요한 심각한 재해-옮긴이)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각오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 역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상시非常時’가 일상화된 사회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이제 일에 관한 기존의 ‘매뉴얼’을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시대 인식을 위하여 우리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새가 부감하듯 시대를 바라보지 않으면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과거를 한번 돌아봅시다. 저는 1970년대에 20대를, 1980년대에 30대를 보냈습니다. 그때는 비록 두 자릿수의 경제 성장은 끝났다고 해도 여전히 안정적인 성장이 지속되던 때였습니다. 아직은 모두가 풍요로운 소비 생활을 만끽하던 장밋빛 가득한 시절이었지요. 2장에서도 말씀드리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자이니치在日’라는 출신이 문제가 되어 직업을 얻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1970~80년대는 일할 사람이 부족한 시대였습니다.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일본의 실업률은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작은 문제들은 있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경제가 줄곧 성장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다들 표정이 밝았고 낙천적이었습니다. ‘내일이 있잖아’라면서요. 오늘은 상황이 안 좋아도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라고 모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내일이 있잖아’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엄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근심을 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정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나 봅니다.
이렇게 상황이 180도로 변해버린 이유는 바로 버블경제의 붕괴 때문입니다. 버블이 꺼진 것은 쇼와 시대(1926~1989)가 끝나고 헤이세이 시대(1989~)로 접어들던 무렵이니 벌써 4분의 1세기가 지났네요. 그로부터 약 25년 동안은 전후의 풍요로운 사회가 막을 내리는 과도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변화 중 하나로 ‘학력 사회 모델’의 종언을 들 수 있습니다. 학력學歷이란 교육기관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그 학생이 필요한 학습 능력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이는 누구든 노력하면 유명 대학의 간판을 딸 수 있다는 일종의 평등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가문이나 혈통 같은 배경과는 상관없이 학력이라는 필터만 통과한다면 누구나 사회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일종의 신화가 예전에는 살아 있었던 것이지요.
이 학력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 바로 취업입니다. 학력이 있으면 취업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내 부모보다 한 단계 위의 생활을 원한다면 유명 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직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과연 내게 어떤 의미인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취업을 목표로 삼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한다면, 결국에는 내 생활이 풍요로워질 거라 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후 일본에서는 학력이 높은 노동자가 늘어났으며, 노동 인구 또한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1차 산업에서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과 서비스업 중심의 3차 산업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버블경제의 붕괴로 이러한 ‘학력 사회 모델’이라는 프레임이 무너졌습니다. 취업 활동의 형태 역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사한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합병되거나 흡수되어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또 자연재해나 전 세계적인 불황에 갑작스레 휘말려 회사 매출이 곤두박질치고 결국에는 도산에 이르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학력을 쌓아 취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지는 못하는 상황입니다.
또한 ‘개인 경력 모델’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제 기업은 학력이 높은 사람보다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어떤 상황에든 유연하게 대처하며 스스로 자기 활동을 적절히 운영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즈니스 퍼슨 businessperson’은 개개인이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갈고 닦아 자신의 가치를 계속 높여가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변했기에 우리는 더더욱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나 유명 기업에 취업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알기 쉬운 목표가 사라진 오늘날,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비칠까’가 아니라 ‘나에게 과연 일이란 무엇일까’를 물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일과 마주하면 좋을까요? 저는 이 책에서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가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처방전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일을 할 때 특히 중요한 자세이자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요점입니다. 그 세 가지란 바로 ‘일의 의미를 생각해볼 것’, ‘다양한 시점을 가질 것’, ‘인문학을 배울 것’인데,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일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예전에는 일의 의미를 묻지 않아도 나름대로 괜찮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고, 정년도 보장되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높은 급여와 안정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내가 그 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저는 일이란 ‘나다움’이나 인생 그 자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일에 쏟고 있으며 직장 동료들은 개인의 인격이나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일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은 삶의 보람이기도 할 터입니다. 또 일을 통한 자신의 성장 역시 기대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일을 그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 일에 임할 때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이 일을 통해 나는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지, 또 사회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매일매일 원점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질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직종에 취업하여 무슨 일을 하든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복안複眼의 시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제언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히치콕 감독의 좀 오래된 영화 〈새〉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새〉는 단순한 오컬트나 스플래터 무비SplatterMoive(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로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영화-옮긴이)가 아니라 인간의 생리적인 공포를 그려낸 상당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시골 항구 마을을 무대로 하는 이 영화는 어떠한 조짐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흉포해진 까마귀, 참새, 갈매기 등 새떼의 습격을 받는 주민들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새들이 흉포해진 까닭은 밝혀지지 않은 채 그저 새들의 인정사정없는 파상 공격만이 계속되어 관객을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이 훌륭한가 하면 바로 종횡으로 교차하는 새의 시선입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마치 그동안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분명 관객의 한 사람으로 스크린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새의 시선으로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면이 바뀌면 또 다른 새의 관점에서 주인공들을 바라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저 멀리 높은 곳에서 패닉 상태가 된 마을을 내려다보았으며, 어떤 순간에는 전화 부스에 갇힌 주인공의 몸에 부딪혔습니다. 또 어떤 순간에는 새까맣게 지면을 덮듯이 땅 위에 내려앉아 떨리는 발걸음으로 지나가는 인간들을 냉담하게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새가 저 또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여 오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사물을 보는 눈은 결코 하나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또 여러 각도와 고도, 거리에 따라 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관점을 갖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할 때 혹은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상황을 타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종교나 철학, 사상처럼 예전에는 눈길을 받지 못했던 어려운 책에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점의 경제・금융 서적 코너에는 주식투자나 재테크에 관한 책뿐이었는데 지금은 마르크스나 케인스 같은 고전을 비롯해 피터 드러커나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두꺼운 책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에게는 어려울 것 같은 책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열대에 쌓여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일본 경제가 너무나 복잡기괴하여 이해하기 힘들고, 또 세상이 급격히 변화했기에 많은 이들이 가능한 한 예전과는 다른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어쩌면 다소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사회 현상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편견 없이 대상을 본다는 뜻이며, 이는 곧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눈은 두 개뿐입니다. 이 두 개의 눈은 주관적인 눈입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 번째 눈, 네 번째 눈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쉽지 않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눈을 가지려 노력하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제언은 바로 인문학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불경기가 지속되고 고용의 유연화가 진행되는 이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눈앞의 숫자에만 급급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 눈 앞의 숫자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좋은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거시적인 시야가 없다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비관적이 되거나 단편적인 행동을 취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역경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는 고전이나 역사 같은 인문학에서 배워야 합니다. 인류가 지나온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전해진 고전을 읽어보면 분명히 현대에도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예지와 교훈이 가득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문학은 매우 긴 시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물건과 사람, 돈이 매일같이 움직이는 유동적인 비즈니스 세계와 긴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인문학의 세계는 언뜻 보기에는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은 변해도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유형이나 패턴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고전 작품 속에는 지금 일본이 처한 상황이 특수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시기를 어떻게 뛰어넘었는지 혹은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유용한 힌트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괜찮아 보이던 것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언뜻 보기엔 아닌 것 같아도 결국 역사 속에서는 옳았음이 밝혀지기도 합니다.
고전과 역사를 보면 궁극적으로 ‘이 사회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게 됩니다. 시대와 장르는 달라도 동서고금의 인문학은 바로 이 주제에 전력을 다해왔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에서 학자라 불리던 이들은 모두 바로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니 불확실한 현재의 상황, 그에 따른 불안으로 고민하는 우리의 물음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이지요.
또한 인문학은 무엇보다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법칙에 의해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분명한 답이 있는 분야에 유효합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판단력과 구상하는 힘構想力 같은 창조성과 관련된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현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때일수록 비즈니스 퍼슨은 더욱더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 이 곤경을 마주하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으면 합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인문학에서 배운다는 것은 앞서 첫째로 꼽은 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것, 둘째로 꼽은 다양한 시점을 갖는 것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의 기반을 꿰뚫는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하우투 북’과 달리 즉효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잔재주를 부려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얼핏 보기에는 길을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인문학을 통해 탄탄한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면, 현재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적확하게 분석하여 앞으로의 행동에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현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의 의지에 기초해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장부터는 일에 관한 제 나름의 의견을 풀어보겠습니다. 1장과 2장은 말하자면 기초편으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나’를 잃지 않고 일할 수 있을지를 고찰하겠습니다. 동시에 계속되는 역경 속에 있던 제가 과연 어떻게 일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소개하려 합니다. 3장과 4장은 실전편으로 역경의 시대에 고전과 역사 등 인문학을 어떻게 일에 활용할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앞으로의 일하는 방식에 관해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통해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이라도 성장했다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제게는 단순히 나태함을 경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이란 삶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한편 ‘침식을 잊고 일에 몰두한다(폐침망찬廢寢忘餐-옮긴이)’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침식을 잊고 놀이에 몰두한다’라고는 하지 않으니 사람이 마음속 깊이 몰두하는 것은 역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일’은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왜 사람이 일을 하는지,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정식으로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 답하면 좋을지 몰라 곤란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돈을 위해서’라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은 ‘아니, 잠깐만. 정말로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람은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해 보이나 실은 간단하지 않고, 누구나 아는 듯하나 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역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의 의미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1장에서는 ‘사람은 왜 일을 하며, 또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을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정치학 연구자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제 전공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원래의 출발점은 정치학 중에서도 동서고금의 정치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정치사상사’였습니다. 정치학이란 정치에 관해 사고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저는 정치가들처럼 정치 그 자체를 행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20년 전만 해도 정치학은 학문으로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 경제가 ‘일류’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일본의 정치는 삼류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세계적인 시각에서 보아도 일본 정치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문으로서 정치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정치’와 ‘경제’를 한데 묶어서 보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만, 실제 학문적으로 보면 둘은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경제학은 과학적으로 수량화하여 분석할 수 있으나 정치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학은 아날로그적인 학문이므로 경제학과 달리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초한 예지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용無用의 학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실은 저 또한 젊은 시절에는 ‘정치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현실과 칼싸움을 하듯 접전을 벌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정치사상을 연구하는 것이 마치 생명의 반짝임이 없는 ‘고고학’처럼 여겨져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그 위상을 잃고 현재의 모습에 모두가 의문을 품게 되자 경제학의 인기는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정치학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최근에는 전에 없을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 경제가 깊은 미궁으로 떨어져버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