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CKED SPINE
Text Copyright ⓒ 2016 by Paige Shelton-Ferr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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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감사의 말
희귀본 살인사건
옮긴이 후기
먼저, 스코틀랜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나의 동료 작가 리사 섀퍼, 너무 고마워요. 에든버러와 스코틀랜드의 온갖 지도를 보내주고 통찰력을 빌려주어서, 그리고 나의 정신 나간 질문들에 모두 대답해주어서(아직도 해주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리사, 당신의 도움과 우정에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어요. 아니, 더욱 좋았죠. 특히 알렉산드리아 깁슨과 그녀의 엄마에게 감사해요. 사랑스러운 이 두 여성은 내가 자신들의 시골집을 마구 돌아다니며 구조를 확인하고 벽에 설치된 희한한 전력 기계를 살펴보도록 허락해주었어요. 가이드 관광 때 만난 버스 기사와 동료 관광객들은 내가 질문을 하고 메모를 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보여주었죠. 나를 참아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상황이 여의찮아 우린 처음 예약했던 스코틀랜드 여행을 가지 못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계획을 잡아 마침내 도착했을 때 처음 들른 곳이 여행사 ‘카디스 앤드 위처리 투어즈(The Cadies and Witchery Tours)’였죠. 우리가 놓친 여행 이야기를 듣더니 우리 이름 옆에 표시를 하고 다시 돈을 받지 않았어요. 늘 손님들에게 그런 배려를 베푸는 것 같았어요. 그들의 세심한 관심은 우리의 여행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답니다. 공연 예술에 가까운 그들의 설명도 너무 즐거웠어요. 감사합니다.
『희귀본 살인사건』의 무대가 된 동네에 책방이 하나 있었어요. 소설에서처럼 ‘갈라진 책’이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내부 장식은 조금 참고했지요. 그곳의 주인은 너무 좋은 분들이셨어요.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요청에 바로 허락해주셨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작은 펍인 ‘조그마한 펍(Wee Pub)’도 그래스마켓(Grassmarket)에 있어요. 이름과 위치를 모두 가져왔지만 그 밖의 것은 거의 창작이에요.
에든버러에는 서점이 참 많아요. 그중 많은 곳을 둘러보았는데 모두 구경하기에도, 사진 찍기에도 좋더군요. 나의 자료 조사를 수월하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희귀본 살인사건』은 허구의 작품이지만 나는 실제 장소와 이야기들도 엮어 넣으려 노력했어요. 그래도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움과 그곳 사람들의 친절함을 충분히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 불찰일 겁니다.
구인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거지 같은 이들이 사용해온 책상 앞, 편안하고 안전한 자리에 앉아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대담한 모험가를 찾습니다. 책과 희귀 원고를 취급하는 소박한 서점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찾아내고, 갈 곳 잃은 물건들을 올바른 주인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도와줄 예리하고 지적인 조사관을 구합니다. 이 다중 직책은 당신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으로 데려가줄 겁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킬 준비가 된 사람만 지원하세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근무하는 자리임에 유의하시고요.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지기 위해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작동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캔자스 대학에서 문학과 역사로 석사를 받고 쭉 일해온 캔자스 주 위치타의 작은 박물관에서 해고 통지를 받았을 때, 나에게는 모험이 필요했다. 나는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히 그 구인 광고를 보았을 때 생각할 것도 없이 즉각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일 분 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운 상사가 될 에드윈 매컬리스터라는 남자와 한 시간 반을 통화했다. 그의 가벼운 스코틀랜드식 발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뭐, 아주 막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단어들을 점점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야’는 ‘예’를 의미한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몇 번 ‘예’라고 하기도 했지만. 알아듣지 못한 단어도 있었으나 대서양을 건너온 전화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 통화는 술술 진행되어 어느새 나는 캔자스의 농장에서 자랐다는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농장은 너무 광활한 곳이어서 10대 때는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서도 참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농장을 떠나, 고등학교와 농장 일이라는 쉽고 지루한 세계를 떠나, 대학에 가서 실내에서 책에 코를 박고 있거나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벽을 좋아하게 됐을 뿐 아니라 갈망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매컬리스터 씨에게 고백했다.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쌓아 놓고 몇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고 읽거나 역사적 유물이 가득한 대학 자연사 박물관 지하에서 무언가에 깊이 매혹되어 있을 때가 최고의, 그리고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벽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편안하고 아늑했다고. 도서관과 지하에서의 시간을 경험한 후 캔자스의 농장들은 폐소공포증과 반대의 증세를 일으키는 원천이 되었다. 나는 매혹적인 물건들, 즉 책과 유물처럼 나를 매혹시키고 나에게 말을 거는 물건이 가득한 곳에 있어야 하고 그런 곳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매컬리스터 씨는 내 얘기를 좋아했고, 열심히 호응해주었다.
위치타의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보존과 관리 전문가 훈련도 받았다. 나는 작지만 재미있는 직장에서 생각도 못 한 방향으로 왕성하게 일하고 성장했다. 늘 새겨들으며 배웠다. 예산 감축으로 인한 뜻밖의 해고는 내 인생 최악의 사건이었다. 첫 직장에서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여기에 서명하세요. 이건 퇴직금이에요. 나갈 때 문 조심하고요.’
결국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 직장이나 구하고 싶진 않았다. 나 자신을 다시 쏟아부을 수 있는, 나를 손짓해 부르는 일을 원했다. 조금 지나친 소망이긴 했다. 오래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매컬리스터 씨에게 전화로 얼마나 많은 얘기를 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벽이며 책이며 유물이며 나의 꿈에 대해 모두 알려주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수많은 희귀 도서와 원고를 돌봐왔을 뿐 아니라 화석, 역사적 의상, 공예품 같은 유물들의 보존과 분류 일도 꼼꼼히 해왔다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버팔로 박제도 다뤄봤다고 하자 매컬리스터 씨는 한바탕 웃고 나서 내가 그런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했다.
당연히 나에 대해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다. 조금 남다른 면,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닐 때에도 아주 가끔 정신이 빠져나간 듯 보일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넌지시 언급만 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을 전화로, 더구나 새 상사가 될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비록 한 통의 전화로 친구가, 그것도 평소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절친이 된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색시, 정말 완벽하게 좋은 분 같아요.”
매컬리스터 씨가 아르(r) 발음을 스코틀랜드의 푸른 언덕들처럼 펼쳐냈다.
“당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싶은데, 받아주면 정말 영광이겠어요.”
그의 서점 ‘갈라진 책’은 희귀 원고와 오래된 서적을 다루는 전문점이며 에든버러 구시가 그래스마켓이라는 지역의 (그의 말에 따르면) 가장 매력적인 중심부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매컬리스터 씨는 웃으며 그래스마켓은 중세 때 시장이 있던 곳이고 공개 처형이 벌어지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문명화가 되었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신이 났지만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다. 대화 내용을 돌이켜보니 나 자신에 대해서는 많이도 말했지만 상대방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원래 선천적으로, 거의 강박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데, 질문도 하지 않고 메모도 하지 않았다니…… 참 드문 일이었다. 나답지 않게 직장 환경이나 업무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속에 결국 내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인지, 혹은 너무 깊이 파고들면 그의 스코틀랜드 타탄 무늬 치마에 찢긴 흔적이라도 있는 걸, 그래서 내 직장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게 두려워서인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매컬리스터 씨. 저도 그 일을 하고 싶어요.”
나는 대답을 한 뒤 내 삶 전체를 뿌리 뽑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로 이사 간다는 생각에 잔뜩 들뜨고 행복해졌다. 완전히 새로운 삶과 경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험이었다. 대담한 모험.
“정말 잘됐네요! 그리고 부디, 날 에드윈이라고 불러줘요. 나에게 악감정 있는 사람들 빼고는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고마워요, 에드윈.”
그때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경험은 할 수 있을 테지.’
합리적이고도 시의적절한 충고 한마디를 떠올리게 한 윌버 스미스의 『일곱 번째 두루마리』에 나오는 인물에게 조용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진한 독일식 발음이었지만 명징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말투였다. 이것은 내 습관들 중 하나로, 아빠가 ‘책벌레 목소리’라고 부르는, 좀처럼 남들에겐, 특히나 낯선 사람에겐 털어놓지 않는 습성이었다. 나는 딴생각에 빠져버린 걸 들키지 않으려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얼른 시작하고 싶어요.”
새로 닥칠 모든 것들 틈에 끔찍한 사건들도 끼어 있다는 걸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스코틀랜드가 아닌가. 셰익스피어의 맥더프 같은,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등장인물들의 고장이면서 독립과 자유의 기치 아래 컬로든과 배넉번 같은, 진짜 역사에 나오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1800년대에는 윌리엄 버크와 윌리엄 헤어가 흥청망청 살인을 벌인 뒤 시체를 해부학 수업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그래, 스코틀랜드는 모험과 잘 어울리는 곳이지만 사악한 기운이 떠도는 곳이기도 했다.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곧 직접 알게 될 터였다.
“어, 어.”
나도 모르게 낑낑거렸다.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휘저어보았지만 문 위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옆면에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옆의 문은 생소한 방향으로 열렸다. 나는 좌석에 앉아 흠칫거리며 어떻게든 발을 단단히 딛고 택시 안에서 튕겨오르지 않으려고 애썼다. 뒷좌석엔 안전띠가 없었다. 내 안전은 행운과 개인적 균형 감각에 맡겨졌다.
택시 기사가 말했다.
“거, 미안해요. 꽉 잡아요. 급커브가 저 짝에 또 있어서. 금방 닿긴 할 거예요. 그래스마켓으로 바로 가죠?”
적응이 덜 된 상태여서 억양이 짙은 택시 기사의 말을 알아듣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직 스코틀랜드 사람을 몇 명 만나지 못했지만,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과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슈렉 닮은 남자, 그리고 택시 기사의 억양은 활기차고 유쾌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지 겨우 한 시간 사십칠 분밖에 되지 않았다. 천천히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하지 않고서는 소통이 어려웠다.
비행기 바퀴가 에든버러 공항에 닿은 이래로 종이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보며 택시 기사에게 서점과 그래스마켓 호텔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이곳에서 살 집을 찾을 때까지 머물 곳이었다.
“서점 이름이 ‘갈라진 책’이에요?”
“네, ‘갈라진 책’이에요.”
“첨 듣네. 내가 꽤 떨어져 살긴 해요. 맑은 날엔 한참 어슬렁 걸으면 되고 버스 타면 금방이야. 맑은 날은 많이 보지 못할 거예요. 기죠? 아, 미안합니다. ‘기죠’는 ‘알겠죠’라는 뜻이에요.”
“고맙습니다.”
나는 백미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내가 책을 엄청 읽는 편은 아니라서. 거 우리 아줌씨가 그지. 하루 한 권은 읽을걸. 게스트하우스에서 힘들게 일해도 저녁엔 꼭 한 권씩 읽어. 우린 두 채 있어요. 게스트하우스 말이에요. 거 우리 아줌씨가 또 동네 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아이들에게 읽는 법을 알려줘요. 야, 책을 정말 좋아해. 내가 대신 넓적한 컴퓨터 기계로 읽으라고 하나 사줄까 했는데 전연 싫대. 그랬으면 이메일 정도는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택시 기사의 말을 훨씬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줘서 그런 건지, 내가 벌써 요령을 터득한 건지는 확실치 않았다. 스코틀랜드 말은 영어에 게일어가 조금씩 섞여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조사해보니 ‘스코츠’라는 말이 따로 있었다. 스코츠어는 게일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었다. 전연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택시 기사가 목에 건, 작은 비닐에 든 카드를 보니 그의 이름은 일라이어스였다. 카드 속 사진에는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지만 오늘은 적당히 바랜 얇은 검은 스웨터와 맞춘 듯한 뉴스보이 캡을 쓰고 있었다. 머리칼은 거의 없었고 귀 위쪽에만 회색 털이 복슬거렸다. 얼굴은 부은 듯했고 코도 너무 컸지만 보기 싫진 않은 모습이었다. 백미러로 쳐다보는 파란 눈이 내 눈과 자꾸 마주쳤다. 맑고 밝은, 행복해 보이는 눈이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믿음이 가서 다른 택시들보다 더 둥글고 땅딸해서 웃겨 보이는 그의 택시에 냉큼 올라탔다. 이 택시 기사는 토페카에 사는 나의 작은 할아버지 ‘모리’와 비슷하게 생겨서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믿을 만해 보이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좀 낯익어 보이는 얼굴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내 나라의 절반을 가로지른 후 또 대서양을 가로지른 비행기 여행을 한참 하고 났더니 흥분도 되고 불안하기도 했다. 실은 불안감의 구덩이가 깊게 파인 상태였다. 어쩌면 심해보다 더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장거리 여행에 시차도 있어 나는 기진맥진 지친 상태였다. 거기에 긴장감과 더불어 불안한 예감까지 추가되고 있었다. 혹시 이러다 사고가 나더라도 너무 심한 사고는 아니길 빌었다.
택시는 크라이슬러의 크루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폭이 약간 넓고 천장도 높았다. 세단이나 밴 같은 차보다는 좀 더 들창코 같은 모양이었다. 검은 차의 앞뒤 범퍼에는 찌그러진 자국이 있었다. 앞문에는 ‘매케너 택시’라고 적힌 광고판이 비뚤게 붙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를 닮은 친근한 눈매의 기사만 아니었다면 딱히 신뢰감이 갈 외양은 아니었다.
나는 용감하고 대담해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캔자스 주를 벗어난 처지라는 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른이었고 어떤 일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곳에도 도시가 있었고, 교통 정체라는 게 있었다. 에든버러 정도로 번화한 곳은 아니었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런 교통 정체는 없었지만. 더구나 뒤바뀐 통행 방향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 때문에 주눅 들거나 입을 닫고 있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택시가 좌회전을 하자 언덕 위의 성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나는 나의 새 동네에 대해 엄청나게 조사를 했고, 에든버러 성은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저거네.”
나는 차창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지금은 성의 뒷배경으로 엷은 회색 구름까지 드리워져 있어 장엄한 풍경에 불길한 기운을 제대로 더해주고 있었다.
“야. 저게 우리 성이죠. 가볼 만해요. 아마 우리 시에서 제일 관광객이 많은 곳일걸. 색시도 이번 여행 때 들를 게죠?”
“네. 하지만 저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이곳에 일자리를 얻었어요. 취업 비자 같은 것도 다 받았고요.”
“미국서 여까지 온 거예요?”
“네. 캔자스 주 킹맨이라는 곳 외곽의 농장에서 자랐어요. 일은 위치타에서 했고요.”
“야? 캔자스가 어디 있죠?”
“아, 나라 딱 한복판에 박혀 있어요. 사실 미국의 지리학적 중심이 캔자스의 레바논이라고 해요.”
“저런, 거서 예까지 오다니 엄청 반갑네요. 거 우리 아줌씨랑 나랑 저녁 초댈 해얄 것 같은데. 서점서 일할 거예요?”
“네.”
“근처에 살 거고? 호텔에서 살 건 아니죠?”
“아파트…… 그러니까 플랫(월세를 내는 다세대 주택을 미국에서는 아파트, 영국에서는 플랫이라고 한다 — 옮긴이)을 구하려고요.”
에드윈이 호텔 방을 예약해주었지만 되도록 빨리 내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순 없었다. 에드윈이 호텔과 서점이 가깝다고 했다. 나는 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서점으로 갈 생각이었다. 플랫은 주말에 찾아 나설 예정이었다.
일라이어스가 코를 찡그리고 그 밑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색시, 도움이 필요하겠네. 말만 해요. 내가 구경도 시켜주고 살기 좋은 데, 꼭 피해야 할 데를 알려줄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정말 괜찮은 곳을 찾으려면 많은 사람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할 터였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려는 거요.”
일라이어스가 백미러를 흘긋 보며 말했다.
“그럼 먼저 호텔에 들를래요?”
“네,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미국 말씨가 예쁘기도 하네요. 거 우리 아줌씨가 들으면 간지러워 죽으려고 하겠네. 어, 그, 우리 아줌씨도 색시처럼 새빨간 머리요. 지금은 백발 미인이지만 소싯적엔 꼭 그래 빨갰어요.”
“꼭 만나 뵙고 싶네요. 안 그래도 스코틀랜드가 나에게 좀 더 잘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캔자스에는 빨간 머리가 별로 없거든요. 물론 위치타에선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농장에서 자랄 땐 아빠가 멀리 지평선에서 내 머리가 불타오르는 걸 보고 집을 찾아온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일라이어스가 미소를 지었다.
“어이쿠! 색시, 그거야말로 미국 사람다운 생각이에요. 우리 스코틀랜드에도 저, 말하자면, 미국만큼이나 빨간 머리가 드물어요. 우리 고장에 다 모여 있는 게 아니에요.”
“정말요?”
“야, 정말이죠.”
저 옛날 스코틀랜드 공주와 똑 닮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터무니없는 희망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렇게 조사를 하고도 스코틀랜드에서 빨간 머리가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나는 눈에 확 띄는 머리색과 피부색 때문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불타는 빨간 머리, 누구보다 창백한 피부에 흩뿌려진 주황색 주근깨, 엷은 녹색 눈. 우리 농장이 있는 고장의 작은 읍내에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에 이골이 난 터였다. 보통은 화들짝 놀라며 작게 비명까지 질렀다가 그걸 감추려고 억지로 미소를 짓는 연쇄 반응이 이어졌다. 하지만 위치타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한 번 더 돌아볼 정도는 아닌 듯했다.
디즈니 만화 영화 같았던 공상을 하고 혼자 씩 웃은 뒤 뒷좌석에 기대앉아 옆의 차창으로 언덕 위의 성을 올려다보았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엄청나 보였지만 실제로 보니 더 인상적이었다. 위압적인 절벽에 요새를 이룬 갈색 화산암 성벽은 수 세기 전의 것이라고 했다. 잘 차려입은 귀족들이 치장을 한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성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지금 위치에서는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도사리고 앉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다시 구인 광고 생각이 났다. 왕과 왕비, 왕자와 거지 같은 이들이 사용해왔던 책상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정말 왕실에서 썼던 책상에서 일하게 된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수사적인 표현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어서 빨리 에든버러 구석구석을, 가능하다면 스코틀랜드 전체를 탐험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성은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적응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도로는 차들로 너무 붐볐고, 차들은 속도가 빨랐다. 다들 차들 사이의 공간은 필요가 없다는 듯 운전했다. 게다가 진행 방향도 반대였다. 일라이어스가 좌측통행으로 올바른 차선을 찾아 돌았는데도 나는 그가 반대 차선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줄 알고 기겁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나의 뇌가 좌측통행에 맞춰 재편성될까 걱정이 되었다.
차들만 서로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건물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은 골목이 나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속에는 대부분 하나의 높다랗고 아름다운 오래된 건물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수많은 특징을 한꺼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건물들은 중세에서 초현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과격한 커브 덕에 택시 안에서 약간의 무중력을 경험하며 버티고 있는데, 언뜻 오래된 건물에 네온사인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적인 네온사인과 고색창연한 돌벽이 어쩐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워 보였다. 개성적인 부분도 정말 많이 눈에 띄었지만 모두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있는 듯했다.
에든버러는 위치타와 전혀 달랐다. 이 단순한 네 마디로는 호기심이 가득한 나의 혼돈 상태를 표현하기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 생경함이 편안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예상치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래스마켓에 도착했습니다.”
일라이어스가 운전대를 왼쪽으로 휙 꺾어 어느 좁은 도로 가장자리에 택시를 세우며 말했다. 이번에도 몸이 붕 뜰 정도였지만 그럭저럭 버텨냈다.
네모난 광장이었다. 뭐, 그냥 좀 길쭉한 공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작은 시내 광장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었다.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 1층엔 작은 가게들이 자리 잡았고 그 가운데 공간을 자갈 포장된 도로가 에워싸고 있었다. 광장은 벤치들을 놓고 농부 장터 천막을 세우는 등 공동체 공간으로 좋아 보였다. 지금도 길쭉한 공간의 많은 부분을 농산물 판매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왼쪽으로 세 번째 집이 색시네 서점, 저 짝을 따라 쭉 가서 꺾어지는 데가 색시네 호텔. 거서 꺾으면 로열마일로 가는 언덕이 나와요. 그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성도 나오지. 성의 이름이 본래 캐슬와인드요. 올라가려면 꽤 숨이 차지만 금방 가요.”
‘갈라진 책’은 직사각형 광장의 좁은 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확연히 오래돼 보이는, 아주 귀여운 세 개의 상점 가운데 두 번째 집이었다. 서점 전면창 안에는 책이 높다랗게 쌓여 있어 상점 내부로 한 줄기 빛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맨 위 몇 센티 빼고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마구잡이로 쌓여 있어서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 기우뚱한 줄과 더미들을 바로잡고 제본이 망가졌을 것이 분명한 책들은 구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으리라.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긴 했지만 지금 그것부터 하겠다고 달려들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차근차근 하자.
서점 양옆에는 작은 가구점과 프랑스 제과점이 있었다. 가게들을 살펴보니 서점이 옆 공간까지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서점과 제과점 사이에 가게 자리가 하나 있었는데 간판도 없고 전면창도 불이 꺼져 있었다. 서점에서 쓰는 공간이라고 짐작할 근거는 없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제과점 창문 위에는 ‘파티세리’라는 간판뿐이었지만 창문 안의 선반을 보니 형형색색의 페이스트리와 과일과 크림을 채운 케이크, 대니시들이 놓여 있었다. 순간, 단 것을 참 좋아하는 내 입에 군침이 돌았다. 성보다 제과점에 먼저 가게 될 것 같았다.
가구점 전면창 뒤 받침대에는 낡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간판에는 ‘프레이저의 곱게 쓴 중고 가구와 커버 교체 가게’라고 써 있었다. 가게 앞면이 넓지 않아 간판은 두 줄이 필요했다.
서점의 빨간 알루미늄 걸이 간판에는 노란 글자로 ‘갈라진 책’이라고 써 있었고, 그 아래에는 ‘도서 공급처’라는 말도 써 있었다. 나는 도서 공급처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도로도, 인도도 상당히 좁았다. 누군가가 서점에서 나오면 잔뜩 긴장한 채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캔자스 출신 빨간 머리 여자와 눈이 마주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때, 거리 다른 쪽을 언뜻 보니 운명처럼 훈훈한 기운이 감돌며 나의 긴장을 누그러뜨려주는 곳이 보였다. 다른 전면창만큼의 넓이도 안 되는 좁은 가게 건물에 무늬를 새기고 녹색으로 칠한 나무틀이 둘러져 있었다. 가게 위의 간판에는 더욱 진한 녹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딜레이니의 조그마한 펍,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작은 펍’이라고 써 있었다.
내 이름도 딜레이니다. 저 사랑스러운 펍을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내 이름이 써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것이 옳은 결정이라는 또 하나의 징조를 찾은 듯했다.
주변을 얼른 둘러보니 다른 펍들도 눈에 들어왔다. 식당도 한둘 보였다. 작은 식품점들과 ‘테이크 어웨이(take away)’라는 문구가 붙은 가게도 몇 군데 있었다.
“테이크 어웨이라는 건 음식을 사서 테이크 아웃(take out)해 나와도 된다는 거죠?”
“야. 저짝에 캐슬록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피시 앤 칩스가 젤 맛있어요. 뭐 에든버러에서 형편없는 피시 앤 칩스를 찾기도 힘들지만.”
“알려줘서 감사해요. 그런데 가게들 위쪽 공간은 뭐예요? 플랫이에요?”
가게들 위로 높이 솟은 건물들의 상층부는 더 고색창연해 보였다. 세월에 낡은 돌벽과 좁다란 창문들. 제각각의 지붕들에는 뾰족탑과 피뢰침, 텔레비전 안테나들이 흩어져 있었다.
“야, 대부분 그럴 거예요. 비싸요, 엄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 살면 좋겠지만, 그리고 봉급도 잘 받을 예정이지만 아직 이곳의 물가를 모르니 비싸다는 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성 바로 옆에서 일하게 됐네요.”
나는 높이 솟은 화산암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야, 색시.”
일라이어스가 백미러로 미소를 지어 보냈다.
“호텔은 바로 저기라고요?”
“야, 바로 앞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일라이어스가 기어를 움직였다.
“부탁이 있어요, 일라이어스. 나 대신 가방만 좀 가져다주실 수 있어요? 도저히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래요. 체크인하는 시간도 아깝거든요. 서점에 바로 가보고 싶어요.”
나는 지갑을 열고 20파운드와 10파운드 지폐를 하나씩 꺼냈다. 미터기에는 19파운드가 찍혀 있었지만 가방을 옮겨주는 사례를 해야 하니까.
“그러죠.”
일라이어스가 돈을 받고서 코를 찡그리더니 10파운드는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꼭 전화해요, 자그마한 색시.”
일라이어스는 자신의 명함에 전화번호를 휘갈겨 주었다.
“명함에 있는 번호 말고 여기 써준 휴대 전화로 해요. 일단 가방 배달하러 갔다가, 다시 데리러 올게요. 다음에 갈 데도 어디든 태워줘야지. 거 우리 아줌씨가 틀림없이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 할 텐데. 전화만 하면 데리러 갈게요.”
나는 명함을 받아 들고 휘갈겨진 번호를 들여다보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행히도 일라이어스가 먼저 배려를 해주었다.
“전화하면, 아줌씨도 같이 데리고 나갈게요. 내가 무서운 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나는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후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오늘 밤도 그렇고요.”
일라이어스는 “야, 갈 데 있으면 그냥 전화해요. 저녁이야 언제든” 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겁주려는 건 아닌데, 여기는 괜찮은 도시지만 밤에 혼자 다니지는 마요. 누구랑 같이 다니든지 택시를 불러요. 내가 아녀도 괜찮으니. 조심하는 게 최고죠.”
“감사합니다, 일라이어스.”
“야, 별말씀을.”
택시 문을 열고 좁은 보도 위로 나가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일라이어스가 택시를 빼 저쪽의 낮은 언덕길을 향해 떠나가며 경적을 한 번 울리고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조금 후회가 됐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미소 지었다.
“왜 이래. 용기를 내야지.”
나는 핸드백을 고쳐 메고 새로운 모험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서점 문을 밀고 들어가니 문 위에 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나의 새로운 직장을 탐색했다. 서점엔 손님도, 직원도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잠시 혼자서 분위기를 만끽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작다는 펍의 이름 덕에 불안감이 좀 풀렸다면, 서점 내부는 운명을 확신시켜주는 듯했다.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와 있었다. 이곳은 엄밀히 말해 박물관은 아니었지만 박물관과 같았다. 책들의 박물관 같은 곳이니까. 좀 어수선했지만 진짜배기였다.
서점은 넓지도, 비좁지도 않았다. 그래도 모든 책장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책이 단정하게 쌓여 있는 곳도 있었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곳도 있었다. 나는 정돈해달라고 호소하는 책들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고 시선을 돌렸다.
왼쪽에는 계산대로 쓰는 책상이 있었다. 작은 현대식 금전 등록기와 신문 두세 부가 놓여 있었고, 서너 권의 책이 삐딱하게 쌓여 있었다. 그것들도 똑바로 정리하고 싶었지만 욕망을 억눌렀다. 컴퓨터는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서점은 4미터 정도 폭에 깊이는 10미터가 조금 못 되는 듯했다. 뒤쪽 벽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었는데, 천칭 저울 오른쪽에 동전이 쌓여 기울어진 문양이었다. 그 창 왼쪽 옆의 공간에서 빛이 들어왔다. 그 공간의 뒷벽에 위치한 유리문이나 긴 창문으로도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높은 천장은 아치형 몰딩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밝은 노랑이 칠해져 짙은 색 목재 책장들과 잘 어울렸다. 서점 가운데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탁자도 짙은 색 목재였다. 바닥은 누리끼리한 백색과 금색의 소용돌이무늬 리놀륨이었다. 아니면 대리석인가? 나는 쭈그리고 앉아 바닥을 만져보고 싶은 걸 참았다. 바퀴 달린 사다리가 높은 왼쪽 벽 책장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사다리가 없었고 벽이 뒤쪽으로 쭉 이어지지도 않는 듯했다.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한 발짝 떼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드릴까요?”
약간의 스코틀랜드 억양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심지어 문밖도 살폈다.
“어, 안 보이나요?”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일라이어스보다 억양이 덜할 뿐 아니라 훨씬 젊은 사람의 말투였다.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아, 거 오른쪽 조금 위쪽이에요. 조명 때문에 안 보일 거예요. 한 발짝 정도 움직이면 보일 거예요.”
나는 한 발짝 더 앞으로 가서 노란 천장에 매달린 오래된 황동 조명 불빛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복층 발코니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는 셰익스피어 시대 옷을 입고 커다란 책을 펴든 채 나무 난간에 기대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아 보였다. 머리도 길고 옷차림도 그래서 공연을 준비하는 중인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남자애가 다시 물었다.
“안녕하세요. 딜레이니 니콜스라고 해요. 새 직원이에요.”
“딜레이니? 내일 오기로 하지 않았나요? 미안해요. 잠시만요. 바로 내려갈게요.”
남자애는 책을 덮고 뒤쪽에 내려놓더니 짧은 계단을 내려왔다. 가만 보니 그 작은 발코니 뒤 책장에도 책들이 빽빽했다.
“난 햄릿이에요. 나도 여기서 일해요. 파트타임으로요.”
남자애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캔자스 출신으로서 악수를 주저하도록 배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나는 “이름이 햄릿이에요?” 하고 물은 뒤에야 겨우 친근하게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햄릿이 웃었다.
“야, 그래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에요.”
“잘 어울리네요.”
나는 레이스가 살랑거리는 그의 웃옷을 힐끔 보며 미소 지었다. 햄릿이 다시 웃었다.
“알아요. 황당하죠? 난 배우이기도 해요. 오늘 오후에 공원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할 거라서 이렇게 입고 있는 거예요.”
“그랬군요. 내가 맞춰볼까요? 공연에서 햄릿 역을 맡은 거죠?”
“아뇨, 오늘은 맥더프 역을 할 거예요. 왕을 죽여야 하죠. 왕의 이름을 말하면 운수가 나쁘대서요. 그래도 당신은 알죠?”(맥더프는 맥베스를 죽인 인물이다 — 옮긴이)
“그럼요. 어휴, 근데 방금 결말을 말했잖아요.”
햄릿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걱정하는 척하는 내 말을 일축했다.
“어쨌든 좀 모호한 결말이잖아요. 셰익스피어는 명확한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그래요.”
대화를 해보니 햄릿이 10대가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래에 비해 무척 성숙하고 귀여워 불안감 가득한 10대 소녀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마른 편에 기름한 검은 머리, 지적인 갈색 눈동자에서는 놀랍게도 예술가적 고뇌 같은 것도 약간 엿보였다.
“니콜스 씨, 에든버러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햄릿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곳에 오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내가 일찍 오긴 했죠? 서점을 둘러보고 싶어서 못 기다리겠더라고요.”
“언제든 환영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고 있나요?”
햄릿이 눈을 깜빡였다.
“모르겠네요. 에드윈이 곧 올 거예요. 홍차나 커피 한잔 드릴까요? 미국인들은 커피를 좋아하죠? 이곳 사람들도 그래요. 여기에도 좀 있는데 인스턴트예요. 얼른 옆집에 가서 원두커피를 얻어 올게요.”
“아니에요, 둘 다 좋아해요. 주전자 있는 곳만 알려주면 직접 가져다 마실게요. 방해하면 미안하니까.”
“이리 와요. 같이 끓여 마시죠. 제대로 구경도 시켜드려야 하니까. 에드윈 올 때까지 좀 절거릴 시간도 있고요.”
햄릿이 자기가 내려온 계단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내가 머뭇거리자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위로 올라가면 비밀 통로가 있어요. 여기가 예전엔 은행이었거든요.”
“비밀 통로 좋아요.”
나는 대꾸하며 ‘절거릴 시간’도 좋은 것이길 바랐다.
계단 뒤를 보니 서점의 오른쪽 벽은 일직선으로 뻗은 게 아니었다. 계단 뒤, 발코니 아래에 다른 방이 쑥 들어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 역시 책장들에 책이 가득했고, 가죽이 닳은 독서 의자 두 개와 나무 의자 네 개가 딸린 네모난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엔 책과 종이가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나는 햄릿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에서 왼쪽으로 돌아 좁은 발코니 옆의 짧은 복도를 지나갔다. 예전에 이곳이 은행이었을 때, 이 발코니는 경비원들이 사람들을 감시하는 망루 역할을 했을 것 같았다.
햄릿이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옆 건물이에요. 에드윈이 이 위쪽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죠.”
그러고는 문 너머 옆 건물의 1층을 가리켰다.
“우리 주방, 화장실, 그리고 에드윈의 창고가 저 아래에 있어요.”
“책 창고인 거예요?”
“어, 책만은 아니에요. 에드윈이 자기 수집품 얘기 안 했어요?”
햄릿이 물었다.
“네, 안 했어요. 솔직히 에드윈과 서점에 대한 얘기를 그다지 듣지 못했어요. 주로 내 얘기만 했죠.”
“그랬군요. 음, 직접 보면 반할 거예요.”
햄릿의 반응을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 같지 않았다. 에드윈이 창고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 내가 자세히 묻지 않은 것이 의아한 듯했다. 혹은 내가 창고를 보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햄릿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우중충한 천장에 달려 있는 알전구의 불을 켰다.
옆 건물은 서점 건물에 비해 그다지 쾌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또 다른 발코니와 계단이 나왔다. 그런데 햄릿은 2층 사무실은 안내해주지 않고 복도를 그냥 지나쳐 창문에 불이 꺼져 있던 1층으로 내려갔다. 바닥엔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이곳의 바닥이 대리석처럼 좋은 재질이 아니길 빌었다. 서점에 가득했던 오래된 책과 잉크 향은 사라졌다. 이쪽에서도 그 유쾌한 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퀴퀴한 냄새와 빵집에서 스며든 설탕 풍미 같은 것이 주로 배어 있었다. 그렇게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좀 의외였다. 오래전에 솜사탕을 팔던, 이제는 폐허가 된 놀이동산을 연상시키는 장소였다.
건물 중간에 또 다른 복도가 뒤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뒤쪽 벽에도 창문이 있었지만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니었다. 길고 지저분한 창에서 빛이 조금 들어와 복도를 밝혔다.
“오른쪽 첫 번째 문은 화장실이고 다음 방은 우리의 자그마한 주방이에요. 왼쪽 문이 창고고요. 잠겨 있지만 에드윈이 당신에게 열쇠를 줄 거예요.”
나는 창고 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것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위압적일 정도의 밝은 빨강에 화려한 소용돌이 장식이 조각되어 있었고, 다른 평범한 문들보다 조금 컸다.
“빨리 보고 싶네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햄릿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멋진 곳은 아니었다. 둥근 탁자와 의자 두 개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선반 몇 개와 작은 냉장고, 차와 커피 도구, 전기 주전자 두 개가 있었고, 창살이 쳐진 창문 아래에 개수대가 있었다.
“잠깐, 창문에 불 꺼진 가게 옆은 빵집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 벽에 어떻게 외부로 난 창문이 있죠?”
“야, 건물 사이에 골이 있어요.”
햄릿이 대답하며 주전자 하나에 물을 채웠다. 나는 그 옆으로 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골목이요?”
“야, 골목이지만 우리는 골이라고 불러요. 건물들이 너무 바짝 붙어 있어 공간이 별로 없거든요. 거기에 딸린 사연도 많아요. 이름도 다 있는데, 주로 오래전에 거기서 살았던 사람 이름을 따거나 거기 위치해 있던 가게 이름을 따요. 여기는 ‘소장 골’이에요. 아무래도 교도소 소장이 여기 살지 않았나 싶은데, 확실하진 않아요. 에드윈은 알 거예요.”
그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를 보았다.
“로열마일을 따라 나 있는 에든버러 구시가가 ‘도시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거 알아요?”
“무슨 말이에요?”
“에든버러 시 지하에 골과 굴 들이 미로처럼 엉켜 있어요. 여기 그래스마켓은 안 그렇고, 저쪽 구시가 밑은 그래요.”
햄릿이 성 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우리가 구경시켜줄게요. 직접 보면 이해가 갈 거예요.”
“흐음, ‘골’이라고요. 재미있네요.”
나는 다시 창문을 내다보았다.
“몰래 들어오려는 사람은 없나요?”
“에드윈이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써요. 창고도 그렇고 끔찍할 정도로 꼼꼼하고 각별하게 조심해요.”
“창고에 뭐가 있는지 얼른 보고 싶네요.”
“에드윈이 오면 바로 보여줄 거예요.”
주방에는 평범한 유리 조명이 켜져 있었지만 알전구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너무 많이 생겼다. 햄릿의 눈빛이 왠지 초조해 보이는 듯했지만 눈부신 조명 때문인지, 무슨 걱정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예요?”
내가 물었다.
“더 할 말 있는 거 아니에요?”
햄릿이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할 말이야 많죠. 하지만 에드윈이 해야죠.”
그러고 주전자 코드를 꼽고 머그잔 두 개, 티백 두어 개, 우유 한 팩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앉으세요.”
막 의자 하나를 꺼내 앉으려는데 종소리가 울렸다. 좀 떨어진 곳이라 내가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지만 독특한 소리였다.
“아, 에드윈일 거예요. 아니면 로지거나. 로지도 직원이에요. 손님일 수도 있죠. 에드윈이 창고에 있는 물건 때문에 약속을 잡는 경우도 있어요. 잠깐 다녀올게요.”
“나도 가도 돼요?”
“그럼요.”
우리가 미처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또다시 한껏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엠릿! 이리 와서 좀 도와줘.”
햄릿이 서둘러 올라갔고 나도 발맞춰 따라갔다. 한 여인이 가게 안으로 반쯤 들어와 서 있었다. 목에 색색의 목도리를 잔뜩 감고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있었다.
“로지, 잠깐만. 내가 들어줄게요.”
햄릿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아휴, 힘든 아침이었어. 지각해서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진짜.”
로지가 말했다.
“괜찮아요.”
햄릿이 무언가가 가득 담긴 쇼핑백 세 개를 받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여인의 팔엔 몇 개의 쇼핑백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로지가 내 쪽을 보며 “고마워, 자기. 야, 여, 이것도. 아,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지친 뇌를 억지로 돌려 햄릿보다 강한 그녀의 억양을 해석해보려 애썼다.
“손님 앞에서 너무 난리를 쳤네. 미안해요, 색시.”
“아, 전 손님이 아니에요. 여기서 일하려고 미국에서 온 딜레이니 니콜스예요.”
“그 캔자스 사람?”
로지가 말했다.
“네.”
“너무 반가워요. 정말 기다렸어요. 이런 기쁜 일도 생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