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앤더슨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어머니도 작가며 프러시아 출신 할머니가 직접 지어낸 이야기가 《닭다리가 달린 집》에 영감을 주었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호수 지역)에 살면서, 카누를 즐겨 타고, 산책과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소피는 잠시 짬이 나면 책을 읽고, 듣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피의 꿈은 아이들이 세상을 탐험하면서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될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이다.
김래경
경희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 《붉은 저택의 비밀》,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등이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동굴 밖을 올려다보며
깊이 숨을 들이쉰다. 나는 평생
나에겐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말을 들어왔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아니면
어떻게든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내 작은 비둘기들 니키, 알렉, 그리고 새미에게.
별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자신의 운명과 함께 춤추기를.
닭다리가 달린 집
초판 1쇄 인쇄 2018년 12월 20일
초판 1쇄 발행 2018년 12월 30일
지은이 소피 앤더슨
옮긴이 김래경
펴낸곳 B612북스
펴낸이 권기남
주소 경기 양주시 백석읍 양주산성로 838 - 71, 107동 602호
전화 031) 879 - 7831 / 팩스 031) 879 - 7832
E-mail b612books@naver.com
홈페이지 blog.naver.com/b612books
출판등록일 2012년 3월 30일(제2012 - 000069호)
ISBN 978-89-98427-21-4 (43840)
ⓒ B612북스, 2018. Printed in Seoul, Korea
*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CIP제어번호: CIP2018040383))
│목 차│
프롤로그
죽은 사람 인도하기
벤자민
너무 무거운 담요
울타리 너머
사막
니나
수영 배우기
세리나
조금만 더
바닷가
진실과 거짓
다음 수호자
고통스럽게 쪼개지는 소리
원로 야가 할머니
샐마
목차
뒤죽박죽
저택
팽창하는 우주
날카로운 말
불꽃이 튀다
유대감을 쌓는 의식
암흑
화재
눈의 나라
호수의 땅
저승문을 지나
씨앗 심기
성장
에필로그-야가와 야가 그 이상
마링카의 용어사전
소피 앤더슨과의 인터뷰
감사의 글
THE HOUSE WITH CHICKEN LEGS by Sophie Anderson
Copyright ⓒ 2018 by Sophie Anderson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8) by B612 Books
Cover and inside illustrations reproduced by permission of Usborne Publishing Limited, Copyrightⓒ 2018 Usborne Publishing Ltd. Front cover illustration by Melissa Castrillon
and inside illustrations by Elisa Paganelli.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대니홍 에이전시를 통한 저작권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B612북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일러두기 괄호 안의 * 는 옮긴이 주입니다.
우리 집에는 닭다리가 달렸다. 집은 해마다 두세 번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멀쩡히 잘 살던 곳을 떠난다. 백 킬로미터를 걷기도 하고 천 킬로미터를 걷기도 하지만, 멈춰 서는 곳은 늘 비슷하다. 황폐하고 쓸쓸한 문명사회 끝자락.
집은 출입을 금한 컴컴한 숲속에 둥지를 틀거나, 바람이 몰아치고 얼음으로 뒤덮인 툰드라에 터를 잡으며, 도시 변두리 허물어지는 폐허 속으로 숨어든다. 이번에는 높은 민둥산 바위투성이 절벽에 주저앉았다. 여기에서 지낸 지도 2주째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구경도 못 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당연히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죽은 사람들이 바바 할머니를 찾아오면 할머니가 그들을 저승문 너머로 보내준다. 하지만 진짜 살아 숨 쉬는 사람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저 아래 도시와 마을에서 산다.
여름이었다면 그들 중 몇몇이 야외로 나와 경치를 즐기려고 이 위까지 올라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을 수도 있다. 내 또래 아이들이 단체로 왔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냇가에서 쉬면서 더위를 식히려고 물장난했을 수도 있다. 같이 놀자며 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울타리는 다 돼 가니?” 바바 할머니가 공상에 잠긴 나를 깨우며 열린 창문으로 묻는다.
“끝나 가요.” 나는 나지막한 돌담 안으로 넓적다리뼈 하나를 더 꽂아 넣는다. 보통은 곧바로 땅바닥에 뼈를 박는데 여긴 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집을 빙 둘러 무릎 높이로 돌담을 먼저 쌓은 뒤, 돌담에 뼈를 꽂아 세우고 그 위에 균형을 잡아 해골을 올렸다. 그런데도 밤마다 울타리가 무너진다. 바람이 심한 건지 야생 동물이나 어벙하게 구는 죽은 사람들 때문인지 난 모르겠다. 어쨌든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 매일같이 어딘가 망가진 울타리를 손봐야 했다.
바바 할머니는 울타리가 죽은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산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해서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울타리를 고치는 건 그 때문이 아니다.
오래전 부모님이 울타리를 세우고 죽은 사람들을 안내하던 시절에, 두 분이 한 번쯤 만졌을지도 모르는 뼈를 가지고 일하는 게 좋아서다. 가끔은 차가운 뼈에 감도는 부모님의 온기를 느낀 것 같아서, 실제로 부모님의 손을 잡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본다. 그러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
집이 요란하게 삐걱거리며 내 머리 바로 위로 앞창이 올 때까지 몸을 계속 앞으로 기울인다. 바바 할머니가 앞창으로 머리를 쏙 내밀고 웃는다. “점심 먹자. 쉬랑 검은 베이글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렸다. 잭 몫까지 넉넉하게 준비했어.”
갓 구운 빵과 양배추 수프 냄새가 코를 스치자 뱃속이 요동친다. “대문 돌쩌귀만 손보면 끝나요.” 나는 발 뼈 하나를 집어 들어 제자리에 연결하고 잭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잭이 말라버린 야생화 덤불 아래에서 비바람에 부서진 바위 조각을 쪼아대고 있다. 딱정벌레나 쥐며느리 같은 걸 잡고 싶어서다. “잭!” 내가 부르자 잭이 고개를 갸웃하며 올려다본다. 은색 눈동자 한 쪽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인다. 잭이 어정쩡한 자세로 볼썽사납게 펄쩍거리며 내 어깨 위에 앉더니 귓속으로 뭔가를 쑤셔 넣으려고 한다.
“하지 마!”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귀를 덮는다. 잭은 항상 나중에 먹으려고 음식을 감춰둔다. 잭이 음식을 숨기는 데 왜 내 귀가 적당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내가 귀를 덮어버리자 이번에는 귀를 덮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그걸 밀어 넣는다. 뭔가 자그마하고 바싹 마른 것이다. 나는 손을 내려서 그게 뭔지 본다. 납작하게 찌그러진 거미다. “고마워, 잭.” 나는 죽은 거미를 주머니에 넣는다. 잭이 좋은 뜻으로 먹을 걸 나눠준다는 건 알지만, 죽은 거라면 주변에 널렸다. “가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쉰다. “바바 할머니가 잔칫상을 차렸대.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까마귀를 위해서.”
나는 돌아서서 저 아래 멀리 있는 도시를 바라본다. 옹기종기 가깝게 붙어 지내며 외롭고 추운 이곳에서 서로 이웃이 되어주는 집들. 우리 집이 평범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저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도 평범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닭다리가 달렸고, 우리 할머니는 야가로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저승문의 수호자다. 그러니 내 바람은 울타리 위 해골만큼이나 텅 빌 수밖에.
해질 무렵이면 나는 해골들 안에 촛불을 밝힌다. 텅 빈 해골 눈구멍에서 퍼져 나간 노란 불빛이 반짝이며 죽은 사람들을 부른다. 지평선 위로 안개처럼 뿌옇게 나타난 그들은 바윗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 모습이 또렷해진다.
어렸을 때는 그들이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았고, 무슨 반려동물을 키웠을까 맞혀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난 열두 살이고 그런 놀이는 지루하다. 저 아래에서 환하게 빛나는 도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로만 자꾸 눈길이 간다.
갑자기 잭이 어둠을 뚫고 나타나서는 내 옆 창턱에 앉는 바람에 내가 움찔한다. 잭이 발톱을 나무에 부딪쳐 딱딱거리면서 깃털을 곤두세운다. 그 소리가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같아서 나는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한다.
“잭, 내가 저 아래까지 날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잭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하룻저녁을 보내고 싶어.”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금 하고 있을지도 모를 온갖 일을 상상한다. 도시로 가서 책에서만 읽던 그 모든 일을 해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리기 경주나 다른 아이들과 시합하기, 따뜻하게 웃는 얼굴에 둘러싸여 극장에서 공연 관람하기 같은 것.
“마링카!” 바바 할머니가 부르자 창문이 껌뻑이다 닫힌다.
“가요, 할머니.” 나는 서둘러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문을 향해 달린다. 할머니와 함께 죽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할머니가 그들을 저승문 너머로 인도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 ‘막중한 책임’이니만큼 언젠가 혼자 할 수 있도록 ‘집중’해서 ‘절차를 익혀야’ 한다. 그날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바바 할머니는 내가 다음 수호자가 될 운명이란다. 그날이 오면 할머니를 저승문 너머로 인도하는 일이 내 첫 번째 임무가 될 거라고도 한다. 나는 가슴 속에 전율이 일어서 그걸 떨쳐낸다. 앞서 말했듯이, 그날에 대해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바바 할머니가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서 보르스치를 끓이느라 커다란 가마솥을 휘젓고 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신이 난 할머니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다. “우리 페치카 오늘 정말 예쁘구나. 준비는 다 했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억지로 웃어 보인다. 나도 할머니만큼 인도하는 일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저거.” 바바 할머니가 할머니 의자에 올려놓은 바이올린을 향해 눈짓을 한다. 최근에 줄도 조이고 윤도 냈다. “드디어 짬을 내서 바이올린을 손봤다. 죽은 사람들 중 누구라도 새로운 곡을 연주해주면 좋으련만.”
“그럼 좋겠네요.” 얼마 전이었다면, 나도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는 기대감에 들떴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바바 할머니가 어떤 옛날 악기를 준비해놓든, 죽은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보내는 밤은 그냥 다 똑같다. “크바스를 따라놓을까요?” 나는 땅딸막한 유리잔이 줄지어 놓인 탁자를 바라본다. 탁한 색의 톡 쏘는 맛을 내는 음료수로 채울 잔이다.
“그러렴.” 바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수증기를 헤치며 탁자로 가는 동안 할머니가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새빨간 비트 뿌리로 끓인 보르스치를 맛보려고 입으로 가져가는 숟가락으로도 리듬을 탄다. “마늘을 더 넣어야겠어.” 할머니가 중얼거리며 생마늘 한 주먹을 가마솥에 던져 넣는다.
나는 병뚜껑을 열고 크바스를 따른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고약한 발효 향이 코를 찌르는 보르스치 냄새와 아무렇지도 않게 섞인다. 나는 거무튀튀한 갈색 음료에서 크림색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와 톡톡 터지며, 표면을 덮은 도톰한 거품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모습을 구경한다. 밤이 끝날 무렵이면 전부 사라져버리는 죽은 사람들처럼, 거품이 한 방울씩 차례로 터지며 없어진다.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닌데 죽은 사람과 친해진다는 건 정말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이 저승문을 지나 별로 돌아가기 전, 그들과 이야기하며 추억을 곱씹고, 그들이 살았던 생을 기념하면서 마지막 저녁을 근사하게 보내도록 하는 게 야가의 집에 사는 우리 야가들의 임무다.
“그들이 왔어!” 할머니가 소리치며 두 팔을 앞으로 쭉 뻗고는 쌩하니 방을 가로지른다. 늙은이 하나가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력이 쇠한 데다 가냘픈 노인의 모습에는 꽤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기색이 역력하다. 노인은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고 쉽게 저승문을 통과할 것 같다.
내가 식탁을 차리는 동안 바바 할머니가 죽은 사람들의 언어로 노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식탁에는 푸성귀 한 바구니, 두툼한 검은 빵, 사워크림과 고추냉이 소스가 든 항아리, 버섯 만두, 그릇과 숟가락, 온갖 작은 유리잔들과 영혼 위안주가 든 커다란 병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들이 마시는 화끈한 음료를 위안주라고 부른다. 바바 할머니 말로는 여행길에 지팡이가 도움이 되듯이, 그 술이 저승길에 오른 죽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나는 죽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열심히 들으며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집중도 하고 노력도 하지만, 죽은 사람들의 언어가 나를 피해 다닌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죽은 사람들의 언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언어보다 훨씬 어렵다. 살아 있는 사람들 말은 누워서 떡 먹기다.
내 마음은 여전히 도시에 가 있다. 좁은 호수 어귀가 꺾어지는 곳이다. 오늘 아침에 두세 명씩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 작은 낚싯배를 타고 호수로 나가는 걸 봤다. 그런 배를 타고 친구와 노를 젓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다. 호수 한복판에 있는 섬까지 가서 함께 그곳을 탐험할 수도 있겠다. 모닥불을 피우고 별빛 아래에서 야영도 하고…….
바바 할머니가 노인을 의자에 앉히면서 나를 가볍게 쿡 찌른다. “손님께 보르스치 한 그릇 떠 드리겠니?”
죽은 사람들이 더 몰려온다. 상을 차리고 의자를 정리하고 방석을 내오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공상이 어슬렁거린다. 먹고 마신 데다, 타닥거리며 불꽃을 날름대는 난로 덕분에 따뜻해진 죽은 사람들이 이내 긴장을 푼다. 집이 주는 기운을 받고 죽은 사람들의 형체가 거의 살아 있는 것처럼 또렷해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의’다.
웃음소리가 서까래에서 메아리친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생전 있었던 자랑스럽고 즐거웠던 일을 추억하며 기뻐하고, 후회와 슬픔을 남긴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집이 만족스러운 듯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낸다. 집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바바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손님들 사이를 날아다닌다. 늙어서 굽은 할머니의 몸이 지금은 벌새만큼이나 재빠르다.
우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 집 가까이에 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바바 할머니더러 못생긴 흉측한 마녀라고, 괴물이라고 했다. 심지어 할머니가 사람 고기를 먹는다고 수군대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런 바바 할머니의 모습은 절대 보지 못했다. 죽은 사람과 춤을 추면서 그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할머니는 아름답다. 나는 넓적하고 삐뚤빼뚤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할머니의 미소와 사마귀가 돋은 할머니의 큼지막한 코를 사랑한다. 해골과 꽃무늬가 그려진 스카프 아래로 삐져나와 너풀거리는, 숱이 줄어드는 할머니의 백발을 사랑한다. 통통해서 편안한 할머니의 배와 뭉툭하게 휘어진 다리도 사랑스럽다.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할머니의 능력은 존경스럽다. 죽은 사람들은 길을 잃고 당황해서 이곳에 오지만, 떠날 때는 모두가 평화롭고 차분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여정에 오른다.
바바 할머니는 완벽한 수호자다. 나는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난 수호자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수호자가 된다는 건 저승문과 죽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 전체를 영원히 책임진다는 의미다. 게다가 할머니는 죽은 사람들을 인도하며 행복해하지만, 나는 매일 밤 모두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 더 외로워지기만 한다. 내가 뭔가 다른 것이 될 운명이면 좋겠다. 살아 있는 사람과 연관된 운명.
밤이 깊어지자 집이 자세를 바꾸며 천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섬광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머리 위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인다. “위안주!” 바바 할머니가 이렇게 외치고, 병에서 코르크 마개를 이로 잡아 뺀다. 매콤 달콤한 음료 향이 방안 가득 퍼지고 불이 더 밝게 타오른다.
난로 근처, 방 한구석에서 저승문이 나타난다. 커다랗고 시커먼 직사각형이다. 무덤 밑바닥에 깔린 어둠보다 시커멓다. 그 어둠은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래 바라볼수록 더 세게 끌어당긴다.
나는 쩍 벌어진 어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문으로 다가간다. 마룻장들이, 벌어진 저 틈으로 빨려 들어가 시커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곁눈질로, 텅 빈 저 깊은 곳의 빛과 색깔이 얼핏 보인다. 무지개가 완만한 곡선으로 휘어지고 성운이 반짝인다. 먹구름이 피어오르고 은하수가 호를 그리며 끝없이 펼쳐진다. 까마득한 저 아래에서 시커먼 바다가 숨을 쉬고, 파도가 유리 산에 부딪친다.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죽은 거미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다.
죽은 몸뚱이에서 빠져나온 거미 영혼이 당황해서 방안을 두리번거린다. 바바 할머니 말로는 동물이 인간보다 위대한 순환 고리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저승문을 지날 때 인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래서 거미는 자신이 왜 야가의 집에 있는지 의아해할 거다.
아무튼 나는 죽은 거미를 위해 저승길 고별사를 중얼거린다. 반은 기억이 나지 않고 나머지 반도 발음이 엉망이다. 지상에서 보냈던 시간에 감사하며 길고 험난한 여행길 힘내서 잘 마치라고, 별로 돌아가는 길 부디 평화롭기를 바란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거미는 오히려 더 헷갈린다는 듯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타고난 운명이란 게 정말 있을까 백만 번째 궁금해하며 한숨을 쉬고, 거미를 손으로 쓸어서 저승문 너머로 보낸다. 정말 수호자가 되어서 작별 인사나 하며 평생을 보내야 하는 걸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건 하룻밤 만에 끝나지 않을 우정인데.
바바 할머니가 노래를 시작하자 죽은 사람들도 따라 부른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커진다. 한 사람이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켜는가 싶더니 그 속도가 갈수록 빨라진다. 바바 할머니도 아코디언을 연주해서 화음이 더욱 풍성해진다. 집이 음악에 맞춰 들썩이고, 죽은 사람들은 발을 구르며 빙글빙글 춤을 춘다. 하지만 점차 피곤해진 죽은 사람들이 차례로 한숨을 쉬며 저승문을 향해 부유하듯 다가간다. 바바 할머니가 아코디언을 내려놓는다. 바바 할머니가 죽은 사람들 귀에 저승길 고별사를 속삭이고 양 볼에 입을 맞추자, 죽은 사람들이 미소를 띠며 저승문을 넘어 떠내려가듯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며 별빛이 희미해질 무렵, 죽은 사람도 이제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어린 소녀가 바바 할머니의 검붉은 숄을 두른 채 난롯불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저승문 넘어가기를 가장 어려워하는 건 언제나 젊은이들이다. 이승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을 살다 가는 게 불공평해 보인다. 바바 할머니가 말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게 사느냐가 중요해.” 할머니는 어떤 영혼은 무엇을 배우려고 이 땅에 왔는지 빨리 깨닫지만, 어떤 영혼은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고 말한다. 그런 가르침은 둘째 치고, 그냥 모두가 달콤한 인생을 오래도록 살다 가면 안 되는 걸까.
할머니가 설탕 바른 아몬드를 주며 아이를 바짝 끌어안더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아이의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결국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할머니 인도에 따라 저승문을 넘어간다. 소녀가 떠나자 한 줄기 옅은 황금빛 햇살이 천창으로 비치더니 저승문이 사라진다. 천창이 깜박이다가 닫히고 집이 한숨을 내쉰다. 바바 할머니가 눈꼬리에서 눈물을 찍어낸다. 하지만 나를 돌아볼 때는 벌써 웃는 얼굴이어서 할머니가 행복한 건지 슬픈 건지 잘 모르겠다. “코코아 마실래?” 할머니가 묻는다. 할머니는 아직 죽은 사람들의 말을 털어내지 못했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릇을 치우기 시작한다.
“그 천문학자 얘기 들었니? 자기 이름을 딴 별이 있다는 여자 말이야.”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오자 할머니의 얼굴이 밝아진다. “별을 관찰하던 사람을 별로 인도한 거야!”
나는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떠올리며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쓰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저에게는 죽은 사람들의 언어가 너무 어려워요.”
“코코아 마시겠느냐는 말은 알아들었잖니.”
“그건 다르죠.” 얼굴로 피가 쏠린다. “코코아는 한 단어잖아요. 죽은 사람은 다들 말을 너무 빨리해요.”
바바 할머니가 따뜻하고 달콤한 코코아를 컵에다 찰랑거릴 정도로 한가득 따라서 내게 건넨 뒤, 난롯가 할머니 의자에 앉는다. “오늘 아침엔 뭘 읽을까?”
나는 스카프를 미끄러뜨려서 벗고 바닥 위 방석에 앉아 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기댄다. 할머니는 우리가 아침잠을 자러 가기 전에 항상 뭔가를 읽어 준다. “책을 읽는 대신 부모님 얘기 해주면 안 돼요?” 내가 묻는다.
바바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떤 부분이 듣고 싶은데?”
“두 분이 만났을 때.”
“또?”
“네, 또 해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 어디 그럼.” 할머니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알다시피 너희 부모는 둘 다 원로 야가 가문 출신이었어. 두 집안 모두 위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초원The Stepps 시대의 초대 야가가 있을 정도로 오래된 가문이지.”
잭이 벌꿀 빵 조각을 내 치마 주름 사이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나는 보드라운 깃털이 돋은 잭의 옆얼굴을 쓰다듬어준다.
“네 엄마 집은 동쪽 거대한 산맥The Great Mountains에서, 네 아빠 집은 서쪽 뾰족한 산꼭대기The Jagged Peaks에서 줄기차게 뛰어오는 중이었어. 그러다 다짜고짜 두 집 모두 남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가라앉는 도시The Sinking City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거야. 발도 물에 담가서 좀 식히고.”
“두 집 모두 계속 달렸기 때문에 발이 너무 달궈진 나머지…….” 내가 다음 말을 재촉한다.
“물이 부글부글 끓으며 달빛 속으로 수증기가 피어올랐어.” 바바 할머니가 웃는다. “네 엄마는 창밖을 내다보다 아름다운 도시 풍경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지. 집에서 몰래 빠져나온 네 엄마가 어디선가 곤돌라를 구해왔어. 고요한 밤, 운하를 구경하고 싶었거든.”
나는 별빛이 흐르는 운하에서 엄마가 노를 젓는 광경을 그려본다. 잔잔하고 어두운 수면 위에 밤하늘이 비친다. 그 위로 엄마가 탄 곤돌라가 미끄러지듯 떠가고 물결이 뱃전에서 찰랑거린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바 할머니가 박자를 타듯 발로 바닥을 탁탁 친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취한 네 아빠 역시 지붕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지.”
내가 웃는다. “아빠는 그때까지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죠!”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네 엄마는 자신만의 야가의 집에서 벌써 몇 년째 혼자 살고 있었지만, 네 아빠는 여전히 야가인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지.”
“그러다가 아빠 눈에 엄마 모습이 들어왔고, 아빠가 엄마를 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기울이다가…….” 나는 바바 할머니가 문장을 마무리해주기를 기다린다.
아빠가 지붕 위에서 몸을 기울이듯이 바바 할머니가 내 위로 몸을 기울인다. “그만 발이 걸려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 바바 할머니가 놀란 척하며 장난스럽게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그대로 쭉쭉 떨어져서 운하에 빠지나 했는데, 우당탕퉁탕하며 네 엄마 배 위로 세차게 떨어진 거야. 배가 어찌나 심하게 흔들렸는지 네 엄마는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져 버렸어.”
“그래서 이번에는 아빠가 엄마를 구하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어요.” 내가 마구 서두른다. “그런데 곤돌라 밖으로 펄쩍 뛰다가 또 발이 걸려서 곤돌라에 머리를 부딪쳤고, 그 바람에 운하에서 정신을 잃고 말잖아요.”
바바 할머니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래서 결국에는 네 엄마가 아빠를 구해줬지.”
“그 뒤에 두 분은 사랑에 빠졌고, 나를 낳았어요.” 내가 웃는다.
“뭐 그야 몇 년 후 일이지만, 그래. 두 사람이 너를 낳았지. 마링카, 넌 두 사람에게 이 세상 전부였어. 네 부모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
나는 한숨을 쉬며 빈 컵을 내려놓는다. 난, 이 이야기가 정말 좋다. 달빛 비치는 운하나 지붕 위에서 추는 춤, 물속에 빠졌다가 구조된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 얘기들도 재미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엄마가 야가의 규칙을 어기고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한밤중에 곤돌라까지 훔쳐 탔지만, 나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난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난데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누군가가 또는 무언가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잭이 돌담 위에 앉아, 낑낑대며 넓적다리뼈를 제자리에 끼워 넣는 내 모습을 지켜본다. 잭의 잿빛이 도는 검은색 깃털이 바람에 물결친다.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렸지만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지난밤에는 울타리가 조금밖에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손이 꽁꽁 얼어서 생각보다 고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까아아아아아악!” 잭이 내 귀에다 대고 경고조로 울부짖는 바람에 내가 움찔하며 돌아선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나와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다. 나는 공상에 빠지는 횟수만 늘어난 게 아니라 현실감도 더해졌나 하고 의아해하며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흥분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아이는 진짜, 살아 있는, 살아 숨 쉬는 소년이다. 아이의 검은색 긴 외투는 앞이 열린 채로 조그만 새끼양이 소년의 겨드랑이 밑에서 코를 삐죽 내밀고 있다.
“으음, 그거 사람 뼈야?” 소년이 내 손에 들린 넓적다리뼈와 돌담 위에 세워놓은 갖가지 뼈들을 살핀다.
“응. 아니.” 나는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가까이에 있는 뼈를 아이가 못 보게 가린다. 누가 봐도 사람 해골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 가짜라고.” 나는 거짓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낀다.
“진짜 같은데.” 아이가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그저 호기심일 뿐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다.
“뭐, 그럼 진짜 뼈인가 보네.” 돌담 위에 넓적다리뼈를 올려놓는 내 손가락이 떨린다. 아이를 겁먹게 해서 떠나보낼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최근에 생긴 뼈는 아니라는 거야.”
아이가 눈썹을 치올린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죽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고.”
“아, 나도 네가 누굴 죽였다고 생각한 건 아니야.” 아이가 눈으로 담을 따라가다 그 너머에 있는 우리 집을 본다. 지금은 집이 다리를 접은 채로 밑에다 깔고 낮게 앉아 있어서, 그냥 작은 통나무집처럼 제법 평범해 보인다. “방학이나 뭐 그런 거야?”
“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우리 할머니랑.”
“전에는 여기에 이 집이 없었는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집이 걸어 왔어.”
사실대로 말했다고 바바 할머니가 혼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집이 걷는다고 하면 어차피 아무도 안 믿는다는 걸 이미 오래 전에 배웠다. 황당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보다 그게 더 쉽다. 집을 바라보던 아이가 나를 보며 짐짓 점잖게 웃는다. 내가 장난친다고 생각하는지 제대로 설명해주기를 기다린다.
“난 마링카야.” 나는 화제도 바꾸고 진짜, 살아 있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만지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손을 앞으로 내민다. (엄밀히 말하면 바바 할머니도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해당이 안 된다. 아무래도 나이가 너무 많다.)
소년이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지만 땀에 젖어 약간 축축하다. 얼굴 한가득 웃음이 번지는 걸 참아내느라 볼이 아프다. 살아 있는 사람을 만져보는 건 물론이고 살아 있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얘기해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최근 이래 봐야 1년 전이었을 거다. 내 또래와 얘기한 건 그보다 훨씬 오래 됐다.
“난 벤자민이야.” 아이가 손을 빼서 잠시 내가 손을 너무 세게 잡고 있었던 건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외투 밑에서 꼬물거리는 새끼 양 때문에 금방 잊어버린다.
“만져도 돼?” 내가 묻는다.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새끼 양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정말 작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됐어. 고아야. 내가 데려다 키울 거야.”
“좋겠다. 나도 새끼 양 키우고 싶어.”
벤자민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잭을 본다. 잭은 새끼 양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장 위에서 앞뒤로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있다.
“아, 잭이 새끼 양을 다치게 하진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 잠깐이지만 미심쩍어하며 내가 말한다.
“저 까마귀 네가 키우는 거야?”
“비슷해.” 내가 팔꿈치를 들어 올리자 잭이 그 위로 껑충 뛰어 오른다. “새끼 때부터 키웠거든. 얘도 고아야. 서 있는 돌들의 섬The Island of Standing Stones에서 발견했어.”
“거기까지도 너희 집이 걸어갔어?” 미소를 짓는 벤자민의 눈망울이 장난기로 반짝인다.
“집이 물 위는 걷지 못 하거든! 헤엄쳐서 갔지.” 나는 벤자민에게 이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까 해서 초조하게 웃는다.
벤자민이 새끼 양을 외투 안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고 하늘을 힐긋 쳐다본다. 벤자민은 이제 곧 떠날 거고, 그러면 난 다시 혼자가 된다는 생각에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며 두려워진다. 어쩌면 한동안, 적어도 수년 안에 산 사람과 말할 기회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크바스 마실래?” 내가 재빨리 묻는다.
“그게 뭐야?”
“그냥 마시는 거야.” 벤자민에게 다른 걸 권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입술을 깨문다. 우리는 대초원에서 멀리 떨어져, 바바 할머니가 호수의 땅The Land of Lakes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벤자민이 크바스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벤자민에겐 진짜 이상한 맛일 수도 있다. 새끼 양이 메~에 하고 운다. 작은 몸집 치고는 깜짝 놀랄 만큼 힘찬 소리다. “새끼 양이 먹는 거야!”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르자 내가 지나치게 큰 소리로 외친다.
“으으음. 난 그게 좀…….” 벤자민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집을 본다. 나는 집이 잠에서 깨어 자세를 바꾸거나 발톱이라도 내밀어서 벤자민을 놀라게 하지는 않을까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힐긋 돌아보니 아직 자고 있어서 마음을 놓는다.
“마셔봐.” 벤자민이 조금 더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 가슴이 조여 온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 이 마을을 알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벤자민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끝을 흐린다. 친근해 보이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다. 벤자민이 지금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내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래, 알았어.” 벤자민이 웃는다. “크바스는 내가 마실게. 양에게 먹일 건 따로 있으니까 따뜻한 물만 조금 갖다 주면 돼.”
나는 집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을 내딛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야가의 발걸음’ 놀이를 하며 놀았다. 집이 내 발걸음 소리를 먼저 듣고 나를 쫓아내기 전에,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 닭다리를 만지는 놀이였다. 그 덕분에 집에게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게 혼자 앉아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를 모조리 알아냈다.
바바 할머니는 난롯가 할머니 의자에 앉아서 자고 있다. 나는 코코아가 벤자민에게 더 익숙하고 마시는 데도 크바스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마음을 바꾼다. 일단 난로 위 선반에서 머그잔 세 개를 조용히 내려 두 개에만 코코아와 우유 가루, 설탕을 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불 위에 걸어둔 주전자를 내려 세 잔 모두에 따뜻한 물을 따른다.
잭이 쿵 소리를 내며 현관에 내려앉더니 나무 바닥에서 발톱으로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잭을 쏘아보며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댄다. 잭이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덤덤하게 미안하다는 듯 날개를 으쓱한다. 하지만 내가 머그잔을 챙겨 몰래 집밖으로 빠져나오자 잭이 심지어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크게 발톱 소리를 내며 따라온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가끔 잭이 내가 곤경에 빠지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벤자민이 바로 울타리 너머 계곡을 내려다보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다. 바위는 둘이 같이 앉기에 충분하다. 잠시 뒤면 진짜 살아 숨 쉬는 사람과 나란히 앉을 거란 기대감에 나는 온몸이 떨린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다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벤자민이 다시 나를 찾아올지도 모르고, 다른 아이들처럼 같이 산책하고 게임을 할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놀 것 같다. 그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머그잔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뼈다귀 문이 달그락거리며 집을 깨우곤 해서, 나는 울타리가 무너진 곳을 찾아 돌담을 넘어간다. 한줄기 차가운 돌풍이 부는 바람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나는 원래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되지만, 울타리를 넘을 때마다 더욱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몇 발짝 가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모든 것이 더 선명하고 환하고 다채롭게 보인다. 한밤중에 집을 나가 곤돌라를 훔친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코코아 냄새 같은데?” 벤자민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묻는다.
“아, 코코아야.”
“크바스 마시자는 것 아니었어?”
“이게 크바스보다 따뜻해.” 내 몫의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한 기운과 달콤한 맛이 흘러들어 뱃속이 요란하게 웅성거린다.
벤자민이 바위 끝에 머그잔을 떨어지지 않게 잘 놓고 주머니에서 병과 구깃구깃한 봉투를 하나씩 꺼낸다.
“양이 먹는 거야?” 내가 묻는다.
“응, 이건 특제 분유야.” 벤자민이 분유를 병에 조금 넣더니 따뜻한 물을 붓고 흔들어서 녹인 다음 젖꼭지가 달린 뚜껑으로 갈아 낀다. “네가 한번 먹여 볼래?”
“정말? 그럼 내가 해볼게.” 내가 머그잔을 내려놓자 벤자민이 새끼 양을 내 무릎 위로 옮겨준다. 숄로 양을 감싸주고 싶은데 양이 버둥거리며 사방으로 발길질을 해서 잘 안 된다. 결국 새끼 양이 불편한 자세로 내 무릎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벤자민이 내게 젖병을 건네준다.
새끼 양은 입가로 우유를 흘리면서도 게걸스럽게 젖병을 빤다. 잭이 괜히 깍깍거리며 시든 야생화 덤불로 활보해 가더니 돌을 뒤집으며 벌레를 찾는 척한다. 샘이 난 거다. 나중에 찬장에서 맛있는 거라도 꺼내 달래줘야겠다.
한동안 새끼 양을 지켜보던 벤자민이 다시 머그잔을 집어 든다. “그럼 넌 시내에 있는 학교를 다닐 거야?”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난 집에서 공부해. 이사를 너무 자주 다니거든.” 나는 집에서 다음 수호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언어와 저승길 고별사를 배워야 하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요리법과 그들을 저승길로 인도하는 절차도 익혀야 하니까. 바바 할머니의 지론에 따르면 살아 있는 사람은 이런 걸 알면 안 된다. 어쨌든 난 벤자민의 삶에 대해 말하는 편이 더 좋다. “넌 학교 다녀?” 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며,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노는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서 내가 묻는다. 나로서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평소엔 다녀. 근데 지금은 정학 당했어.”
“그게 뭔데?”
“1주일 동안 학교에 못 가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나쁘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야.” 벤자민이 재빨리 덧붙인다. “어떤 바보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좀 심해졌어. 누구도 그렇게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벤자민이 한숨을 쉰다. “그냥 내가 거기와 안 맞아. 뭔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학교와 맞는지 어떤지 알아볼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이사는 왜 그렇게 자주 다녀?” 벤자민이 묻는다.
“우리 할머니는 음악가야. 여행하는 걸 좋아해. 영감을 얻으려고.” 나는 새끼 양을 내 무릎 위에 그대로 둔 채, 빈 젖병을 벤자민에게 돌려준다. 양이 참 따뜻하다. 세상 그 무엇도 생명의 온기만한 건 없다. 내 영혼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다.
“부모님은?” 벤자민이 마지막 남은 코코아까지 꿀꺽꿀꺽 들이켠다.
“내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어.” 야가의 집이 매연을 없애려고 필사적으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광경이 떠오르며 내 마음을 온통 태워버린다. 나는 가슴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지우려고 애쓰며, 눈을 깜빡여서 그 장면을 떨쳐내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우리 엄마도 내가 아기였을 때 돌아가셨어.” 벤자민이 조용히 말한다.
공감이 만들어낸 파동이 내 갈비뼈에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참 슬프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벤자민과 공통점이 있어서 좋다.
“난 항상 엄마를 생각해.” 벤자민이 새끼 양의 젖병을 밀랍을 먹인 종이로 조심스럽게 싼다. “엄마 기억은 조금도 없으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부모님이 살아 있다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궁금해.” 곤돌라 도둑 엄마와 지붕 위의 무용수 아빠 생각에 다시 가슴이 조여 온다. 두 분은 내가 왜 수호자가 되기 싫어하는지 이해했을까? 내가 다른 꿈을 꾸는 걸 허락했을까? 나는 화재를 바꿨으면 하고 벤자민을 돌아본다.
“그러니까 너, 할머니, 까마귀, 걸어 다니는 집뿐이란 말씀?” 벤자민이 눈썹을 치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응. 그리고 이사도 엄청 다님. 난 학교 안 다녀. 덕분에 많이 외로워.” 전혀 웃기지 않은 얘기지만, 나는 소리 내어 웃는다.
“뭐, 학교에서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야. 심지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그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어떻게 외로워?”
“그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거나 너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나는 죽은 사람을 인도하면서 보낸 모든 밤과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느끼는 외로움을 떠올린다. 나는 그게 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살아 있는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