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육체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몸이 너무 뚱뚱하거나 혹은 너무 말라서 불만스러워하고, 피부색이나 머릿결, 머리의 크기, 팔다리의 길이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때로는 특정 부위가 너무 약하거나 너무 과하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불평불만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몸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몸만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몸과 분리된 마음 혹은 영적인 존재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몸을 지니고 있을 때와는 동일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몸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이자, 소중한 자원이다. 이 책은 인간의 몸이 인간의 존재를 떠맡은 귀중한 바탕이라는 관점에서 쓰였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우리의 몸을 제대로 보살필 필요와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는 말처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인간의 몸을 노리고 있으며, 인간 스스로도 종종 자신의 몸에 부담을 지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몸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에서는 인간의 몸을 노리는 외부 침입자들을 다룬다.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처럼 인간의 몸을 생활 터전이자 먹잇감으로 여기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작은 침입자들에서부터, 별다른 의도를 지닌 것은 없지만 인간의 몸에는 해악을 미치는 화학물질들―이들 대부분이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까지 폭넓게 다룰 것이다. 이들이 매순간 인간의 몸을 공격하는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지금처럼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제대로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외부의 침입자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도 인간의 몸에 걸리는 부하는 결코 ‘안전’ 수준으로 줄어들지 않는다. 끊임없이 뛰어야만 하는 심장에서부터, 에너지원인 포도당과 지방을 꽁꽁 붙들고자 하는 세포의 몸부림, 끊임없이 분열하여 다른 조직까지 침범하는 암세포, 더 이상의 분열을 거부하는 신경세포들까지 인간은 몸 안의 변화로 인해 생기는 각종 질환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우리가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헛된 것이 아닐까 하는 절망감조차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우리의 몸을 공격하던 다양한 위협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왔는지를 다룬다. 항생제, 항바이러스제, 소독약, 진통제, 장기이식, 줄기세포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노력들이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봄으로써 새삼 우리가 가진 ‘몸’의 존재에 고마워하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함부로 여기는 일이 줄어들기를 소망해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 ‘사이언스올’에 기고한 칼럼들을 바탕으로 했으며, 이 글이 묶여져 세상에 나오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지면을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1821년 여름, 조선에는 정체 모를 역병(전염병)이 창궐했다. 평안도 지역에서 시작된 역병은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이전에도 역병이 유행한 적은 많았으나 그것들과는 양상이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알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죽어갔다. 처음에는 가벼운 배앓이와 설사를 했다. 그 정도야 흔한 일이었기에 색다를 것이 없었지만, 문제는 그 속도와 양이었다. 일단 설사가 시작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환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몸 안의 수분을 쏟아냈고,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탈수로 기진맥진한 채 죽어갔다. 가족의 삼일장도 치르기 전에 또 다른 가족이 숨을 거두는 지경이었기에 약도, 굿도 쓸 시간이 없었다. 또한 치사율은 어찌나 높았던지 병에 걸린 이들 중 열에 여덟 내지 아홉은 숨을 거두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질환을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호랑이가 살을 찢는 듯’ 무섭고 고통스러운 질환이라는 뜻이었다. 호열자의 기세는 좀처럼 꺾일 줄 모르고 지속되었다.
호열자가 유행하자 사람들은 집집마다 대문에 커다란 고양이 그림을 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무서운 질병을 쥐 귀신의 행패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쥐 귀신의 난동으로 호열자가 발생하므로 대문에 쥐를 잡는 고양이 그림을 붙여두면 이를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질병을 귀신의 장난질로 여겨 귀신을 달래거나 겁을 주어 쫓아내고자 하는 벽사(툪邪) 의식은 예전부터 있었다. 마마(두창)가 유행하면 ‘마마 귀신’을 달래고자 ‘마마 배송굿’을 벌였던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양이 그림을 진짜처럼 멋지게 그려 붙여도 호열자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없이 많은 고양이 그림을 뒤로 하고 그렇게 호열자는 조선 팔도를 휩쓸며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보이지 않는 병원체의 습격
고양이 그림이 호열자를 막는 데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은 질병의 원인을 애초부터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호열자라는 이름은 ‘호랑이가 살을 찢는 듯한 고통을 주는 병’이라는 뜻을 지니기도 했고, 콜레라(cholera)를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용어이기도 하다. 콜레라는 콜레라균에 의해 일어나는 소화기 전염병으로, 오염된 물을 통해 전염된다. 즉 콜레라균으로 오염된 물을 마셨을 때, 콜레라에 걸린다는 것이다. 호열자의 원인은 쥐 귀신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세균이기 때문에 고양이 그림은 아무런 영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콜레라는 콜레라균에 의해 발생한다. 콜레라균에 감염되면 별다른 복통 없이 구토와 설사가 시작되는데, 설사의 색이 쌀뜨물처럼 희멀건한 것이 특징이다. 콜레라는 별다른 치료 없이도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낫는 질병이지만, 문제는 지독한 설사로 체내의 수분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탓에 수분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으면 탈수로 인해 발병한 지 하루 이틀 만에 사망할 수 있다. 최근 콜레라로 인한 사망률이 급감한 것은 콜레라균을 없앨 수 있는 항생제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부족한 수분을 혈액 내로 빠르게 공급해주는 수액제, 즉 링거를 이용한 수분 공급법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라나 세균성 이질처럼 급격한 구토와 설사 증상을 일으키는 소화기 전염병은, 질병 자체의 독성보다는 구토와 설사에 따른 수분 손실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토하거나 설사를 하면 이를 멎게 하려고 환자에게 아무것도 먹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대처는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탈수 증상을 더욱 악화시켜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19세기는 콜레라가 조선을 비롯해 전 세계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콜레라는 원래 인도의 풍토병이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인도에 발을 들인 이후 전 세계로 퍼졌다. 대양을 항해하던 배들은 사람과 물자만 옮긴 것이 아니라, 질병과 고통도 같이 옮겼다.
콜레라가 순식간에 전 세계를 휩쓸면서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인류에게 이런 경험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은 인류보다 훨씬 이전부터 지구에 존재했으므로, 아마도 인류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려왔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도록 질병이 ‘왜’ 생겨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귀신 혹은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설, 공기 중에 섞인 독기(毒氣)에 의한 것이라는 설, 체액이나 기(氣)의 흐름에 교란이 일어나서 발생한다는 설 등이 질병의 원인으로 제시됐지만 어느 것도 질병의 결정적인 원인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은 인간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더라도 나타나는 현상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이는 있었다. 이탈리아의 의사였던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8~1553)는 ‘전염의 씨앗(seminaria contagium)’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질이 질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는 전염병이란 ‘전염의 씨앗’이 급속히 증가함으로써 발생하며, 직접적인 접촉, 흙이 묻은 옷이나 천 같은 매개체, 공기 등 세 가지 경로로 병이 전파된다고 생각했다. 프라카스토로의 이론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이지만 당대에는 ‘주장’으로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전염의 씨앗’을 본 적이 없었고, 구체적으로 전염의 씨앗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서양에서는 인간의 체내에 존재하는 네 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질병이 발생한다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신체 외부에 존재하는 ‘전염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망하고 100년 쯤 후에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훅(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이 현미경으로 연못 물을 관찰하면서 미생물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생각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생물속생설을 증명한 루이 파스퇴르
레이우엔훅이 발견한 기묘하고 작은 생물과 질병의 연관관계가 밝혀지기까지는 다시 20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862년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저 유명한 구부러진 백조 목형 플라스크(Swan-necked flask)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증명한 이후이다.
여기서 잠깐, 생물속생설(生物續生說)이 어떻게 질병과 미생물의 연관관계를 설명해주었는지 살펴보자. 생물속생설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미생물처럼 작은 생명체는 ‘저절로’ 생겨난다는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저절로 발생하는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질병의 원인이라면 특정 질병이 특정 지역에서만 유행하거나 환자와 접촉한 사람에게만 병이 전염되는 것 등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스퇴르 이후 생물속생설을 통해 모든 생명체는 어미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고, 그전까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던 부패나 발효 과정이 미생물의 생명 활동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환자의 체액이나 감염된 상처 부위에서 일반인에게는 없는 미생물이 발견되면서 미생물이 질병의 원인이며, 질병으로 인한 각종 증상은 인간의 몸속에서 미생물이 증식하면서 빚어진 결과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질병이 한 지역에서 주변으로 번지는 이유와 환자와 접촉한 사람이 질병에 감염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고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병원균의 정체를 밝혀라
아이가 전화를 받다가 재채기를 한다. 곧이어 동생이 전화기를 만지려고 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엄마가 재빨리 수화기를 빼앗아든다. 엄마는 항균 스프레이로 전화기를 소독하고 나서야 안심이라는 얼굴로 아이에게 수화기를 건네준다.
TV에서 자주 등장하는 항균제 광고의 한 장면이다. 최근 신종플루의 유행으로 개인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와 유사한 광고들이 TV의 황금 시간대를 점령하고 있다. 이런 광고에서 사람들은 ‘세균’이란 ‘불결하고 더럽고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자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파스퇴르 이후 결핵균을 발견하고 ‘세균병원설’을 제창한 독일의 의학자 로베르트 코흐(Heinrich H. Robert Koch, 1843~1910)의 영향이 시간을 거쳐 증폭된 결과다.
코흐는 각각의 질병은 특정한 병원균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환자에게서 분리한 미생물을 병의 원인이라고 판단하려면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반드시 만족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균병원설의 원칙(코흐의 4원칙)
1. 병원균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동물에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2. 병원균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동물로부터 분리되고 배양되어야 한다.
3. 배양된 병원균을 건강한 실험동물에 접종하면 동일한 질병을 일으켜야 한다.
4. 실험적으로 감염시킨 동물로부터 동일한 병원균이 다시 분리·배양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병원균이 질병의 원인이라고 못을 박는 내용이다. 따라서 질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병원균이 인체로 침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병원균을 사람을 아프게 하는 절대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항균’에 솔깃해 하는 것도 아이를 질병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보호본능이 발동한 탓이다. 그런데 엄마들이 알고 있는 ‘병원균’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는 모호한 개념이다. 병원균은 생물학적으로 계통이 전혀 다른 박테리아, 바이러스, 원생생물, 진균 등을 모두 혼합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몸속에 침입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지만, 구분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생물학적 특징이 다르다는 것은 대응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질병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것은 흔히 세균이라 불리는 박테리아(bacteria)다. 박테리아는 원핵세포 하나로 이루어진 단세포생물이다. 원핵세포란 세포핵이나 미토콘드리아 등과 같은 세포 내 소기관이 없는 세포로, DNA와 여러 효소들이 세포질 속에 흩어져 있는 세포를 말한다. 박테리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인간은 오래전부터 박테리아와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다. 6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성인의 경우, 약 1킬로그램은 인체에 공생하는 박테리아의 무게라고 할 정도로 인간과 박테리아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들 인체 공생 박테리아는 피부와 장 점막 등을 빽빽한 균층으로 코팅해 해로운 박테리아의 침입을 막고 인체가 합성하지 못하는 비타민 등을 합성하면서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한다. 문제는 모든 박테리아가 인간과 공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인간을 기름진 먹잇감으로 여기고 덤벼드는 악당도 존재한다. 병원성 박테리아는 세균성 이질과 세균성 폐렴, 패혈증과 파상풍, 요로 감염과 티푸스를 비롯해 각종 종기와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호열자로 부를 만큼 무서웠던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Vivrio cholera)라는 박테리아가 일으키는 전염병이고,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던 페스트는 페스테렐리아 페스티스(Pesteurella pestis)가, 창백한 죽음의 신으로 불렸던 결핵은 투베르클 바실러스(Tubercle bacillus, 결핵균)라는 박테리아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질환이다.
‘염증’이라는 이름이 붙은 많은 질환은 박테리아가 원인이기 때문에 박테리아의 체내 유입을 막거나 유입된 박테리아를 박멸하면 질병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하다. 수술이나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멸균 소독하고, 주사를 맞기 전에 알코올 솜으로 해당 부위를 닦는 것은 피부의 상처로 박테리아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침투한 박테리아를 소탕하기 위해서이다(항생제를 비롯한 다양한 항균물질은 3장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이처럼 수술 및 상처 치료 기구를 소독하고 항생제로 박테리아를 잡을 수 있게 되면서 감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골칫거리도 있다. 병원균의 종류는 세균 외에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간염에 걸린 사람에게 항생제를 주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간염의 원인은 주로 바이러스인데, 바이러스는 박테리아와 생물학적 특성이 전혀 달라서 아무리 뛰어난 항생제라 하더라도 바이러스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유전물질(DNA 또는 RNA)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로 구성된 아주 단순한 유기체로, 독립적으로는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하고 숙주가 되는 세포에 유입되어야만 복제와 증식을 할 수 있는 기생체다.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환은 세균에 버금갈 만큼 많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쓰러뜨리고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몰살시켰던 두창(천연두는 일본식 표기임)을 비롯해 홍역, 수두, 풍진, 간염, 감기와 인플루엔자는 대표적인 바이러스성 질환이며, 입술 주위에 물집이 잡히는 헤르페스와 일부 식중독·폐렴·구내염 등을 일으키는 것도 바이러스다. 원인이 바이러스이므로 바이러스성 질환을 치료할 때는 항생제가 아닌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한다. 2009년 신종플루의 유행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타미플루와 릴렌자가 바로 항바이러스제다. 최근 들어 다양한 종류의 항바이러스제가 개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항생제에 비해 종류가 적고 효력도 떨어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항바이러스제가 항생제에 비해 효과가 떨어지는 것은 바이러스가 인간의 세포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체의 세포에는 해를 주지 않으면서 숨어 있는 바이러스만 골라서 퇴치하려고 하니, 인체 세포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퇴치하는 것에 비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많은 바이러스성 질환은 백신 접종을 통한 예방 효과가 뛰어나다. 따라서 바이러스성 질환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백신 접종을 통한 예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백신의 보급으로 인해 두창은 1979년 이후 전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질병이 되었다.
박테리아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원생생물도 있다. 원생생물은 한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단세포생물이지만 박테리아보다는 발달해 내부에 단순하지만 생명 활동을 하는 기관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유글레나는 내부에 수축포와 식포라는 주머니 모양의 구조물이 있어 수분을 조절하고 먹이를 소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안점을 통해 빛을 인식하는 능력도 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원생생물을 원충이라고 부르는데, 말라리아 원충에 의해 일어나는 말라리아, 트리파노소마(Trypanosoma)에 의해 일어나는 수면병, 톡소플라스마(Toxoplasma)에 의한 톡소플라스마증 등이 대표적인 원충성 질병이다. 이에 대한 치료제로는 항말라리아제인 퀴닌(quinine)류와 수면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트리파사마이드(tryparsamide) 등이 있다.
인간을 괴롭히는 미생물에는 진균류도 있다. 균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포자로 번식하는 진균류는 다른 생물에 얹혀사는 기생생물로, 종종 인간에게 기생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진균성 질환은 칸디다(Candida) 균류에 의한 아구창(칸디다에 의해 발생하는 구강 내 궤양, 주로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에게 발생한다)이나 칸디다성 질염, 백선균류에 의해 발생하는 무좀과 백선(피부가 비늘처럼 하얗게 일어나고 두꺼워지는 현상, 흔히 버짐이라고 한다) 등이다. 진균류에 의한 질병은 치명적인 경우가 많지 않지만, 완치가 더디고 만성적으로 재발해서 속을 썩이는 경우가 많다. 진균증에는 암포테리신 B(Amphotericin B), 아졸(Azole)계 항진균제가 사용된다.
이 밖에도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물질로는 소에게 광우병을 일으키고 사람에게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과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을 일으키는 감염성 단백질 프리온, 각종 중금속, 살충제, 독성화합물, 흔히 환경호르몬이라 부르는 내분비계 교란물질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박테리아, 바이러스, 원충, 진균류 등 ‘살아 있는’ 물질이었지만, 최근 들어 다양한 항생물질의 개발로 이들의 위력이 약해지면서 오히려 각종 중금속이나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인간이 만들어냈거나 인간이 과다하게 사용한 물질이 다시 인간의 몸속으로 유입되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 과욕이 불러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미생물은 꽤 비중 있는 역할을 해왔다. 미생물에 의한 질병은 강한 전염성을 가진 경우가 많아서 때로는 집단 전체로 퍼져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심지어는 특정 집단이나 국가를 붕괴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특히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며 정착한 이후 전염병이 대유행할 때마다 인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이로 인해 기존의 사회체제가 몰락하거나 새로운 제도가 생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인류가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시기에도 전염성 질환은 있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흑사병이나 신대륙의 두창처럼 대규모로 전염병이 번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구수가 적고 집단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인류는 탄생 초기부터 집단생활을 했지만 집단의 수는 많아야 수십을 넘지 않았고, 각 집단은 흩어져 살았기에 전체 인구 집단의 크기에 영향을 미칠 만큼 유행하는 전염병은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류가 농경사회를 이루고 한곳에서 자리를 잡고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전염병도 대형화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효율적으로 식량 생산을 하기 위해 모여 산 것이 병원성 미생물에게는 퍼져나갈 수 있는 숙주의 수를 늘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간의 집단생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염병의 유행을 쉽게 만든다. 그중 하나는 사람들이 많고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다. 미생물에게 인간은 맛 좋은 먹이이자 살아가는 집이다. 그런데 수렵채집사회처럼 집단의 규모가 작고 서로 고립된 경우에는 우연히 운 좋은 미생물이 한 인간에게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집단의 구성원이 적기 때문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집단이 크고 구성원이 많아지면 미생물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수월하게 옮겨 갈 수 있기 때문에 삽시간에 전염병이 대유행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산불로 비유해 설명한다.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면 산불이 나곤 한다. 이때 번개는 빽빽한 숲 속의 나무나 민둥산에 홀로 서 있는 나무에게 동일한 확률로 떨어지지만, 이로 인한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민둥산의 독야청청한 나무는 홀로 타버리고 끝나지만, 빽빽한 밀림 속에 떨어진 번개는 순식간에 산 전체를 태우는 큰 산불로 번지기 마련이다.
또한 큰 규모의 집단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 쓰레기와 분뇨의 배출량이 늘어나게 되고, 이를 먹고 사는 쥐나 바퀴벌레 같은 작은 생물들이 모여들게 된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쓰레기가 있는 곳이라면 쥐나 벌레가 나타나니, 고대인이 쥐나 벌레는 곡식 자루나 썩은 고기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믿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인구가 증가하면 이, 벼룩, 모기, 빈대, 진드기 등 인간을 ‘먹고 사는’ 동물 역시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들은 인간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악마의 메신저’이자, 병원성 미생물에게는 다른 인간 숙주에게로 옮겨주는 ‘초특급 셔틀’로 기능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규모 집단 전염병은 대부분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도시에서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이전까지는 대부분의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인구 유입이 없었다면 인구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유행하는 전염병이 도시 인구의 증가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구가 밀집된 도시를 휩쓴 전염병은 순식간에 인구밀도를 낮추고는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사라진다. 전염병의 대유행으로 인구가 줄어들면 미생물들 역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대개 한 번 질병을 앓았다가 나은 사람들은 이 전염병에 면역력을 갖게 되므로 미생물은 화려했던 때를 뒤로 하고 사그라드는 것이다. 인간 집단이 다시 면역력 없는 ‘살기 좋은 숙주’로 충분히 늘어날 때까지 말이다.
인간의 농경과 정착이 전염병을 쉽게 유행시키는 또 다른 이유는 가축 때문이다. 인간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삼았는데, 이 과정에서 동물에게만 기생하던 미생물이 인간에게 옮겨졌다. 인류를 괴롭혀온 많은 질환들이 원래 동물의 질환이었지만 인간이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로 옮겨져 더욱더 잘 적응한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홍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원래 소의 우역 바이러스에서, 말라리아는 조류에서, 두창은 소의 우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 기생하던 종보다 새로 자리 잡은 숙주에게 더 잘 적응해 인간의 홍역 바이러스는 더 이상 소에게 이상을 일으키지 못하고, 소의 우두 역시 인간에게 두창을 일으키지 못한다(하지만 면역은 가능하다. 이 이야기는 뒤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처럼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이 좀 더 안정적인 먹을거리와 노동력을 얻기 위해 시도한 행동이었지만, 이로 인해 동물만을 생활 터전으로 알고 있던 미생물에게 인간이라는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생물은 절대로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생물은 생태계를 이루며, 생태계 내부의 생물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생태계를 이루는 하나의 요인에 변화가 일어나면 연관된 모든 생물이 영향을 받게 된다. 변화는 큰 파장 없이 사라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야생동물의 가축화로 인해 일어난 변화는 인간과 일부 동물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동물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맺자 동물에 기생하던 미생물도 변화의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개 미생물은 특정한 숙주를 선호하지만, 항상 대세에 역행하는 ‘튀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이 과정을 통해 일부 미생물들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 인간에게 넘어오는 데 성공한 일부 미생물들은 그들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 인간의 면역계는 이들 미생물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침입자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학자들은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바로 동물에게서 넘어온 새로운 미생물이 인간에게 아주 잘 적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미생물의 성공은 곧 인간 집단의 와해를 가져왔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테네는 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는 역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해서 국가의 기반이 무너져내렸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작은 침입자들의 공격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서양에서 중세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한 것은 유럽 인구의 4분의 1을 죽게 만들었던 페스트가 유행한 다음의 일이며,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 철저히 사라진 것도 서양의 정복자들이 범선에 묻혀 가지고 온 두창 바이러스와 그 밖의 다른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미생물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고, 그들의 번성에 따라 힘없이 자신의 역사적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인간 집단이 지나치게 늘어나거나 혹은 새로운 환경을 접할 때마다 미생물은 인간의 지나친 확장에 제동을 걸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도태시키곤 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미생물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미국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M. Diamond)는 이런 관점의 역사관을 사회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환경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하며 그중에서도 ‘군사력, 전염병, 철기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97년에 출간된 『총, 균, 쇠』(1998년 퓰리처상 수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서 잠시 미생물에 의한 전염병이 어떤 방식으로 인류 역사를 바꾸어놓았는지를 추적한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을 따라가보자.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저 바다 건너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신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황금과 은이 넘쳐나는’ 신대륙을 향해 탐욕스런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만 ‘신(新)’대륙일 뿐, 선사시대 이래로 그곳에 거주해왔던 원주민에게 그곳은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그 땅에 터 잡고 살고 있었던 원주민이 외부에서 그들의 것을 빼앗으러 온 자들에게 순순히 집과 땅을 내줄 리는 없을 터였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대규모 충돌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 대결은 어이없을 정도로 외부 침입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신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은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영토를 내주고 노예가 되었다. 심지어 종족 전체가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은 중앙아메리카 문명의 몰락이다.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아스텍 문명은 에스파냐의 무법자 코르테스가 도착한 지 겨우 2년 만에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2천만 명으로 추산되던 거주민은 모두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그저 찬란했던 문명의 잔재만 남아 있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1519년 코르테스가 처음 아스텍 제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가 거느린 부하들이 겨우 600여 명뿐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창과 활로 무장했던 아스텍 주민에 비해 총과 대포로 무장한 코르테스 일행의 화기가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화력이 600명과 2천만 명의 차이를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침략자들의 몸에 붙어 있던 초대받지 않은 작은 손님들, 즉 미생물의 영향이라고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설명한다.
이미 유럽은 오래전부터 두창, 페스트, 콜레라, 홍역, 인플루엔자, 결핵 등 각종 전염병의 유행을 겪은 바 있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홍역과 비슷한 전염병의 유행으로 무너진 것처럼, 유럽 국가들은 이미 미생물의 공격으로 매우 큰 피해를 입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해당 미생물이 일으키는 질병에 저항력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코르테스가 아스텍으로 건너갈 즈음에 배에 탔던 이들은 대부분 이런 미생물이 일으키는 질환에 저항성을 가진 상태였다. 그들이 멕시코 연안에 상륙하는 동시에 본국에서 묻혀온 두창, 홍역, 인플루엔자, 페스트, 결핵, 콜레라, 말라리아 등을 일으키는 세균들도 상륙했다. 그런데 이런 세균들을 접해본 적이 없었던 아스텍 주민은 이들 질병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코르테스가 아스텍 주민과 정식으로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먹잇감을 찾은 미생물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아스텍 주민은 힘없이 쓰러져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쓰러졌는지 16세기 초반 2천만 명에 이르던 아스텍인이 1세기 뒤에는 10분의 1도 안 되는 겨우 160만 명 남짓만 남았을 정도였다.
역병의 공격은 아스텍의 인구를 격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치 역병이 아스텍인만 골라 공격하는 모양새를 띠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기 저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아스텍인의 눈에 비친 모습은 알 수 없는 괴질이 흰 피부의 백인은 놓아두고 검은 피부의 아스텍인에게만 죽음의 형벌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신마저 저버렸는데 싸워서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결국 코르테스는 전염병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텅 빈 도시를 ‘손 안 대고 꿀꺽’ 할 수 있었다.
세균이 정복자를 도운 것은 아스텍에서뿐만 아니었다. 잉카 제국, 북아프리카의 인디언 부족지,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점령할 때에도 일어난 현상이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든다. 도대체 왜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은 그동안 유라시아 대륙에만 있었던 것일까? 왜 신대륙에는 이런 전염성 미생물이 적었던 것일까? 정말로 병원성 미생물이 유독 유럽인만 편애(?)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세균에는 눈이 없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그저 시간과 환경의 차이였다.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가축을 키우던 유라시아 대륙민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오랜 세월 다양한 병원균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생명을 잃었고, 그 뼈아픈 경험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대륙민은 병원균에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축을 거의 기르지 않았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이런 미생물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익숙한 적보다 낯선 적이 더욱 싸우기 어렵듯, 인간의 면역계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대처가 서툴다.
만약 아스텍이나 잉카의 주민에게 두창이나 페스트 등에 대한 면역력이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애초에 페스트가 유럽의 인구를 그토록 감소시키지 않았더라면,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노예의 필요성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고 세계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유럽에서 페스트가 지독하게 유행한 것이 아프리카인의 오랜 오욕을 불러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흑인 노예제도의 시작이 유럽의 페스트에서 기인했다면, 노예제도의 폐지에는 아프리카의 황열(黃熱)●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원래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던 황열은 흑인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에서 다른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두창이 백인을 비껴서 아메리카 원주민만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황열은 흑인 노예를 놓아두고 백인에게만 덮치는 것처럼 보였다. 노예상과 노예주가 황열로 쓰러지자 흑인 노예는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한 움직임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 국가들은 마지못해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의 남북전쟁과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은 이미 붕괴되고 있던 노예제도에 공식적인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흑인 노예무역의 시작과 끝에는 인간을 교묘하게 조종했던 작은 미생물이 존재했던 것이다.
●황열(yellow fever)은 황열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모기를 통해 전염된다. 고열과 오한, 두통과 요통, 혈액이 섞인 구토 등이 나타난다. 황열은 유행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사망률이 15~80퍼센트에 이르는 무서운 질환이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노예무역을 통해 아메리카로 퍼져나간 황열은 수많은 사망자를 냈다. 이미 수에즈 운하를 개통시켰던 레셉스가 파나마 운하 건설에 실패한 이유가 황열 때문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황열은 특별한 치료약이 없으나 한 번 앓으면 면역력이 평생 지속되므로, 이를 이용해 백신이 개발되었다. 현재 발생 빈도는 매우 낮아졌다.
질병은 때로 인류 역사를 뒤바꾸는 원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의문이 하나 든다. 앞에서 유라시아 대륙민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