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구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제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디어 재단 TBS 과학 전문 기자. 저널리스트이자 지식 큐레이터로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부터 〈프레시안〉에서 과학·환경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황우석 사태 보도로 앰네스티 언론상, 녹색 언론인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과학의 품격』,『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세 바퀴로 가는 과학자전거』,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등이 있다.
권경애
“내 양심과 소신에 따라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한 지 12년 만인 1995년 졸업했다. 서울, 경기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WTO(세계무역기구) 쌀 협상 이면 합의 의혹 국정조사위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범국본 등의 활동을 했다. 2005년 참여연대, 2006년 민변에 가입했으나 2020년에 두 곳 모두 탈퇴하였다. 2019년 7∼11월에는 서울지방변호사회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및 검경 수사권 조정 태스크포스(TF), 2020년에는 경찰청수사정책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김경율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안 되듯
감시의 눈빛을 거두는 순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2020년 출범한 시민단체 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지 10년 만에 졸업했다. 경기 성남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8년 회계사가 되자마자 바로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해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 경제금융센터 소장을 지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 다스 비자금 사건 등 거대 권력, 경제 권력을 파헤쳤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8년부터 2019년까지이니 21년 동안 참여연대에서 청춘을 보냈다.
서 민
“사모펀드! 무지했는데,
대담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기생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생충의 세계와 사회 현상을 빗대어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이며, 강연을 통해 의학을 좀 더 재밌고 유쾌하게 알려주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서민 교수의 의학세계사』, 『서민의 기생충열전』, 『서민적 글쓰기』,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 『서민 독서』, 『밥보다 일기』등이 있다
진중권
“상식과 정의의 기반 자체가 무너졌어요.
이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미학자. 잠시 논객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언어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인문학이라는 올드미디어는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뉴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새로 정의해야 한다’라는 구상 아래 교육·연구·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미학 스캔들』, 『감각의 역사』, 『이미지 인문학 1, 2』, 『미학 오디세이 1, 2, 3』, 『서양미술사 1, 2, 3, 4』 등이 있다.
일러두기_기획의 경과
● 2020년 1월 28일 다섯 명의 대담 기획을 추진하기로 결정! 진중권 선생을 만났다. 대뜸 강양구 기자를 추천! ● 2020년 1월 31일 강양구 기자 오후 미팅, 참여하겠다 답하면서 넌지시 권경애․김경율․서민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 2020년 1월 31일 진중권 선생 저녁 미팅, 부분적 참여를 결정하면서, 권경애 변호사 적극 추천! ● 2020년 2월 3일 권경애 변호사 오후 미팅, 참여 승낙하면서 김경율 회계사가 함께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 2020년 2월 5일 김경율 회계사 오후 미팅, 흔쾌히 참여 결정해주었다. ● 2020년 2월 5일 서민 선생님은 문자 메시지로 소통, 네 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라는 답신을 주었다. ● 2020년 2월 5일 강양구․권경애․김경율․서민․진중권 다섯 분의 대담이 확정되었다. ● 2020년 2월 12일 서민 선생님 오후 미팅 및 인터뷰,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 집필하기로 결정하였다. ● 2020년 2월 12일 스태프 확정했다. 기획총괄-선완규 편집자|책임편집-김창한 편집자 |녹취-홍보람 편집자․안혜련 편집자
2020년 2월 29일 토요일 오후 3∼6시 첫 만남을 가졌다.
강양구․권경애․김경율․서민․진중권 다섯 명이 처음으로 만났다. 각자 SNS글로만 서로를 보다가 난생 처음 함께 대면하는 날이었다. 대담의 일정과 주제, 방식 등을 논의하였다.
2020년 3월 7일 토요일 오후 1∼6시 두 번째 만남부터 본격적인 대담을 시작하였다.
주제-미디어와 지식인|사회-서민|대담 강양구․진중권|김경율과 권경애는 참관하였다.
이 대담은 이 책의 1장과 2장이 되었다.
2020년 3월 14일 토요일 오후 1∼6시 세 번째 대담
주제-586의 정치와 신보수|사회-강양구|대담 서민․진중권|김경율이 참관하였다.
이 대담은 이 책의 3장이 되었다.
2020년 3월 21일 토요일 오후 1∼6시 네 번째 대담
주제-금융자본과 사모펀드|사회-진중권|대담 권경애․김경율|서민이 참관하였다.
이 대담은 이 책의 4장과 5장이 되었다.
2020년 3월 28일 토요일 오후 1∼6시 다섯 번째 대담
주제-정치와 정의|사회-강양구|대담 권경애․김경율․서민․진중권
이 대담은 이 책의 6장과 7장이 되었다.
2020년 5월 9일 토요일 오후 1∼6시 여섯 번째 대담
주제-총선 이후의 변화|사회-강양구|대담 권경애․김경율․서민․진중권
이 대담은 이 책의 6장과 7장이 되었다.
2020년 7월 18일 토요일 오후 1∼6시 일곱 번째 대담
주제-금융자본과 사모펀드 보강 대담|사회-진중권|대담 권경애․김경율|강양구․서민이 참관하였다. 이 대담으로 이 책의 4장, 5장이 더욱 또렷하게 정리되었다.
2020년 8월 15일 토요일 오후 1∼6시 최종 원고 검토를 마쳤다
2016년 10월,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이 드러났습니다. 대통령이란 작자가 자신을 뽑아준 국민의 뜻을 저버린 채, 측근 최순실에게 대통령 권한을 갖다 바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해 겨울, 촛불을 든 채 광화문에 나가 “박근혜는 물러나라”를 외쳤습니다. 국민의 뜻에 떠밀린 국회는 탄핵안을 가결시켰고, 이듬해 3월에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의 파면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사악하기 그지없던 정권이 드디어 종말을 고한 것이죠. 박근혜 대통령이 구치소에 가던 날, 박사모들은 구치소 앞에 모여서 통곡했습니다. “마마,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정권에 그 지지자라고, 우리는 그들을 마음껏 비웃었습니다.
두 달 후 치러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습니다. 취임사에서 문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지지를 바쳤습니다. 당시 최고의 유행어가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였을 정도였지요. 사실 문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것은 너무도 쉬워 보였습니다. 전임 대통령이 국가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쫓겨난 마당이니, 기본만 해도 ‘성군’ 소리를 듣게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문 대통령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지지층이 있었지요. 이제 정치는 그분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일터로 돌아가 생업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싶었습니다.
그 희망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부동산은 폭등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악화됐고, 미국과의 관계도 삐걱거립니다. 남북관계는 박근혜 정권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출산율은 기록적으로 떨어지는 중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가 무능하기는 해도 최소한 이명박-박근혜 정권보다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게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다른 영역에서 모자란 점이 있어도 얼마든지 양해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문 대통령은 입시와 사모펀드, 가족재산 형성 등에 숱한 의혹이 제기된 조국 교수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도덕이라는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뜨렸습니다. 취임사와 달리 기회는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으며, 결과는 전혀 정의롭지 않았던 것이죠. 유시민 씨와 김어준 씨의 사례에서 보듯, 여기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언론과 지식인들은 정권의 부역자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지난 정권에서 맹활약하던 시민단체들은 이제 정권과 한몸이 된 채 침묵하는 중입니다.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 소위 ‘문팬’이라 불리는 이들은 압도적 화력으로 인터넷을 점령한 채 정권의 모든 잘못을 비호하는 중입니다. 조국의 비리를 수사한다는 이유로 서초동에 모여 “조국수호”를 외치고, “정경심 사랑합니다”며 울부짖은 건 역사에 남을 희대의 코미디입니다. 검찰조사를 받으러 온 조국 전 장관의 차를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박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며 울먹이는 박사모들은 참 순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은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실현됐습니다.
정권을 비판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이때, 우리 다섯 명이 모였습니다. 김경율 회계사는 조국에 대한 참여연대의 침묵에 분노해 단체를 탈퇴했고, 권경애 변호사 역시 민변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해 정권 비판에 나섰습니다. 황우석의 음모를 밝혀냈던 강양구 기자는 이제 문재인 정권의 음모를 밝히고자 합류했고, 사회의 기생충을 알아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서민 교수도 문 정권의 대변검사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자진해서 무덤으로 들어갔던 미라논객 진중권이 조국과 그를 옹호하는 문팬들에 의해 풀려나왔습니다. 지난 시절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는 이제 이 책을 시작으로 현 정부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알렉터 군단과 싸웠던 독수리 오형제는 지구 모든 이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지만, 우리 다섯 명은 입법·행정을 장악하고 사법권마저 가지려는 초강력 정권과 싸워야 하는데다, 지구인을 가장한 수많은 문팬들의 음해와도 싸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 있습니다. 저들이 선전과 선동, 날조로 싸움을 거는 반면, 우리는 오직 팩트와 논리로만 승부하니까요.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조국 사태를 비롯한 현 정권의 치부를 알게 되길 빕니다. 진리를 깨우친 ‘우리’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면, 우리가 바라던 정의로운 세상을 앞당길 수 있을 테니까요.
2020년 8월 31일
한국 사회도 가짜 뉴스가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있는데요. 이 시대의 ‘미디어와 탈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 소비자로 이해합니다. ‘진·위’(眞僞)보다는 ‘핵잼·노잼’으로 평가의 기준이 바뀌죠.
지금은 자발적으로 댓글이나 검색어를 조작하면서도 여론 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시민의 힘’을 보여주는 시민 참여라고 생각하잖아요.
서 민 안녕하세요. 진중권 선생님, 강양구 기자님. 서민입니다. 지금을 객관적 사실보다 편향된 신념이 뉴스를 지배하고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 시대라고 합니다. 한국 사회도 가짜 뉴스가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있는데요. 미디어 대표 강양구 기자님과 지식인 대표 진중권 선생님과 함께 이 시대의 ‘미디어와 탈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진중권 제가 왜 지식인 대표예요? 아니에요.(웃음) 미디어 대표 강양구 기자라고 할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한테 지식인 대표라고 하니 굉장히 부담스럽네요.
서 민 진 선생님은 20년 넘게 우리 시대 대표 논객으로 활동하셨고, 디지털 미학의 관점에서 미디어 사상과 이론을 연구하고 계시죠. 강 기자님도 20년 가까이 언론 현장에서 기자로 활동하셨으니 그리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기레기’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언론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해 한국언론진흥재단이 공개한 「2019년 언론수용자 조사」를 보면, ‘언론을 신뢰할 수 있다’는 문항에 전체 응답자 중 28.1%만 긍정적으로 응답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조사를 보면,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발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19」에도 한국인의 뉴스 신뢰도는 22%로 38개국 가운데 꼴찌를 했습니다. 한국 언론은 2016년부터 이 조사에서 4년 연속 신뢰도 최하위라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10명 중 7~8명은 ‘한국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셈입니다.
게다가 종이신문과 공중파로 대표되는 레거시 미디어가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로 대표되는 뉴미디어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한국언론진흥재단 지난 해 조사에 따르면, 유튜브 등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은 47.1%의 이용률을 보여, 디지털 플랫폼의 급성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이신문 뉴스 이용률은 20대 2.5%, 60대 이상도 16.7%로 거의 바닥 수준인데, 모바일 인터넷 뉴스이용률은 20대 95.4%, 60대 이상도 44.3%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지금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먼저 이야기 나누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강양구 제가 오랫동안 미디어에 종사했으니 먼저 말문을 열어보겠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기자 활동을 시작했어요. 2000년에 〈오마이뉴스〉가 창간되었고, 그 다음 해 〈프레시안〉이 만들어졌습니다. 2002년에는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이 주도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기도 했고요. 그때는 인터넷 언론이 대항언론(Counter Media)으로 무척 각광받던 시대였습니다.
서 민 강 기자님은 〈프레시안〉에서 시작하셨죠?
강양구 네, 맞습니다. 당시 〈프레시안〉에 있던 저로서는 신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항언론이라는 이미지에 취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경향신문〉, 〈한겨레〉가 기존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올드미디어에 맞서 대항언론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포털 사이트였습니다. 그때 마침 포털 사이트는 미디어 플랫폼으로서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커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면, 뉴스 소비자들에게 제 기사는 언론사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중동’ 기사와 똑같이 경쟁하는 콘텐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다 포털 사이트 편집자가 제 기사를 비중 있게 편집해 주면, ‘조중동’ 기사보다 훨씬 더 많이 노출되고, 많이 본 뉴스가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당시만 하더라도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뉴미디어가 기울어진 공론장의 균형을 바로 잡아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여차하면 기존의 언론사 간 영향력 크기를 뒤집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에 저 스스로 취해 있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오히려 독(毒)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포털 사이트는 자신들을 언론이 아니라 콘텐츠 유통 플랫폼일 뿐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어요. 그 독은 여기서 발생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디어로서 공적 역할과 방향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자기들은 그런 고민을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어쨌든 수익을 내야 하니 여러 알고리즘을 만듭니다. 실시간 검색어,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많이 본 뉴스, 연령별 많이 본 뉴스, 섹션별 많이 본 뉴스 등 사람들이 주목하는 뉴스를 더 많이 노출시킵니다. 주목 경제 초기 버전이 그때 포털 사이트를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서 민 말씀하신 포털 사이트로 인한 그 독은 언론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강양구 ‘조중동’이든, ‘한겨레경향’이든, ‘프레시안오마이뉴스’든 간에 예전에 각 언론사는 저마다 고유한 어젠다가 있었어요. 사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저마다의 정치적 포지션이나 가치관에 따라 각 언론사들이 지향하는 나름의 어젠다를 갖고 있었습니다. 언론사 편집국은 그 어젠다를 세팅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취재 활동을 통해 다양한 뉴스들을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가 주목받는 뉴스와 그렇지 못한 뉴스로 큐레이션하면서 뉴스 콘텐츠들이 모조리 포털 사이트의 주목 경제 속으로 수렴되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들이나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는 데스크 모두, 뉴스 가치를 판단할 때 ‘이 기사를 썼을 때 주목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에 자신들의 모든 언론 활동을 맞추게 됩니다.
이때부터 낚시 제목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그런 기사들이 갈수록 점점 많아집니다. 제 스스로를 낚시꾼이라 비하하면서 저도 제 기사에 주목받을 만한 제목을 많이 붙였어요. 그런데 낚시 제목만으론 부족한 거예요. 왜냐면 내용부터 자극적이어야 자극적인 제목을 쉽게 붙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점점 더 대중의 눈길을 끌 만한 기삿거리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언론사 어젠다 세팅에 부합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볼만한 콘텐츠에 기자들이 눈길을 주기 시작하고, 데스크도 그런 기사를 발굴하라고 독려하면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 1970~90년대로 치면 〈선데이서울〉이나 스포츠신문을 정기적으로 보는 사람들이나 볼만한 기사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저는 스포츠신문을 제 돈 주고 사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미용실에서 기다릴 때나 지하철 짐칸에 누가 올려놓으면 보는 정도였는데, 예전에는 그런 매체에나 실릴 법한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해 버립니다.
진중권 아∼ 나만 봤구나. 〈선데이서울〉. 나름 정론지였는데, 그거 없었으면 고등학교 생활 힘들었을 텐데 그나마 그게 있어서 다행이었어요.(다들 웃음)
서 민 저는 야구를 좋아해서 〈스포츠서울〉, 〈일간스포츠〉 양대 스포츠신문을 매일 제 돈 주고 사서 줄 치면서 읽었어요. 학생 때 용돈이 5만 원 정도였는데 30%가 신문 값으로 날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강양구 두 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몇 마디 덧붙여야겠네요.(웃음) 그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그런 콘텐츠가 주류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B급 정서, 마이너 취향이었던 것들이 공론장을 압도하니까요. 이런 상황이 더 확대된 형태가 소셜 미디어나 유튜브 기반의 미디어입니다. 이 사회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는 데 도움되는 중요한 의제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초적이고 자극적이고 소소한 것들만 사람들이 쫓아가는 현상이 생겼다는 겁니다.
미디어 학자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을 빌려서 얘길 좀 더 이어가 보겠습니다. 닐 포스트먼은 1985년에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라는 책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방식입니다. 『1984』의 빅브라더는 모든 걸 감시하고, 모든 걸 억압하고, 모든 걸 통제하는 방식이에요. 닐 포스트먼은 ‘지금의 통제 방식은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1984년이 되고 보니,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 방식은 틀렸다. 오히려 지금은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멋진 신세계』 방식의 통제, 즉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사람들에게 놀거리를 주면서,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도록 만들어 통제하는 시대라는 겁니다.
잠깐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오웰은 우리가 외부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헉슬리의 미래상에선, 인간에게서 자율성과 분별력, 그리고 역사를 박탈하기 위한 빅브라더는 필요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고, 자신들의 사고력을 무력화하는 테크놀로지를 떠받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웰은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오웰은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지나친 정보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비현실적 상황에 진실이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 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 닐 포스트먼, 홍윤선 옮김, 『죽도록 즐기기』 , 굿인포메이션, 2009년, 9~11쪽.
서 민 저도 『1984』와 『멋진 신세계』를 읽었지만 이런 통찰을 할 수 없는 게 바로 젊은 시절을 스포츠신문 보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진중권 오웰의 방식은 낡은 산업사회 버전의 통제방식이고, 정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통제는 헉슬리의 방식에 가깝죠. 오웰은 ‘빅브라더가 너를 감시한다’고 말했지만, 정보사회에서는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가운데 외려 리틀브라더들이 국민을 감시하고, 국가는 투명한 척 뒤로 빠지고 시민들끼리 서로 감시하게 만들거든요. 요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시민들이에요. SNS를 뒤지고 구글링을 해서 남의 ‘신상’을 털잖아요.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더 무섭죠. 요즘 정치 팬덤의 극성들, 다들 경험하고 계시겠지만.
오웰은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비현실적 상황에 진실이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강양구 맞아요. 닐 포스트먼은 오웰식 통제 사회와 헉슬리식 통제 사회를 대비하면서 헉슬리가 옳았다고 손을 들어주고 있어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의 공론장 변화를 본다면, 지금이 전형적인 헉슬리식 통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착시 효과가 중간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착시 효과냐면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입니다. 그 기간 동안,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구태를 벗지 못한 통치 세력이 옛날 자기들이 했던 방식, 익숙한 통제 방식을 사람들에게 강요했죠. 그들의 통치 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짜증내고, 혐오스러워 했고요. 촌티도 나고요.
시민들이 그런 구태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다보니, 세상의 주된 흐름과 관계없는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이었을 뿐인데도, 그들의 행태를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본 것이에요. 마치 그들을 몰아내고, 구태로 인한 짜증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 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던 거죠. 그래서, 그 9년 동안 우리가 정말 깊이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할 문제들을 놓쳐버린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귀결이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처음 보는 세상’이 아닐까요.
진중권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은 한편의 에피소드입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도 하고, 개인, 회사, 학교, 단체 등을 탄압했지만 효과적이지 못 했습니다. 조지 오웰식 통치 방식이 먹히지도 않았고 욕만 바가지로 먹었죠. 자신들에게 익숙한 통제 방식이었겠지만 자기들 뜻대로 안 되었고요.
강양구 네, 세상은 이미 변했는데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이를 놓고서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집권 후에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How Democracy Ends)』이라는 책을 펴냅니다. 원제 ‘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가 이 책 내용을 더 적절히 표현해주는데요. 런시먼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박정희와 그 추종 세력이 1961년 5월 16일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찬탈했던 것과 같은 ‘눈에 보이는’ 쿠데타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쿠데타의 가능성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쿠데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부 권력집단이 민주주의 제도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행정권 과용, 전략적 선거 조작이 대표적인 방식이죠. 일부 엘리트 집단에 의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쿠데타가 점진적으로 진행 중인데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아무런 문제없이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심지어 반대자는 물론이고 그 당사자조차도 자신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지를 모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쿠데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겠죠.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연결시켜보면 헉슬리식 통제 사회에서는 쿠데타조차도 소리 없이 다가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명박-박근혜 9년 동안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지 못하게 하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진중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의 문제’는 실제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부터 계속 있었다고 봐요. 다만 그때는 지금의 집권 세력이 오포지션(opposition, 반대, 야당)이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들이 현재 주류 세력이 되면서, 내재해 있던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는 이들이 설사 잘못했더라도, 더 큰 악이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악과 싸우려고 눈감아 준 측면이 있었습니다.
강 기자님이 잘 말씀해주셨듯이, 포털 사이트가 뉴스 콘텐츠 유통을 독점하면서 데스크 권력이 무너진 거예요. 데스크 권력이 약해지면서 권력에 의한 언론 통제를 못하게 된 겁니다. 지난 보수 정권들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상황은 이미 권력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시장에 의한 통제로 넘어갔는 데도 말이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던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게 언론도 예외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기사 자체가 문화 콘텐츠화되어 버렸어요. 뉴스의 비판적 수용자는 사라졌고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 소비자로 이해합니다. ‘진·위’(眞僞)보다는 ‘핵잼·노잼’으로 평가의 기준이 바뀌죠. 이제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하는 기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말, 재미있는 말을 해주는 기사를 요구해요. 굉장히 감성적이고 감정적이고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죠.
설사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은 문화 콘텐츠잖아요. 예컨대 사극을 보면서 “이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비판하지 않잖아요. 극의 내용이 역사책과 다르다면서 화내지 않습니다. 이런 것처럼 거짓말해도 용서되는 거죠. 김어준 씨 같은 경우 온갖 음모론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습니까. 큰일 날 법한데도 그냥 넘어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구나” 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 탈진실 현상들이죠. 요즘 대중은 ‘독자’로서 신문기사에 진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비자’로서 자기의 니즈(needs)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거짓말이라도 듣기만 좋으면 되는 거죠. 이른바 ‘소비자 민주주의’ 현상인데, 이는 사실 민주주의라고 하기 힘든 거죠.
강양구 맞아요. 소비자 민주주의 시대. 진 선생님 말씀에 조금 덧붙이고 싶어요. 이런 변화를 낡은 감수성을 가진 이명박-박근혜 세력은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국가기관 국정원을 동원해 댓글 조작을 하려고까지 했잖아요. 국정원 댓글 조작이 얼마만큼의 효과나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보다 더 파워풀한 것은 자발적 댓글 조작, 자발적 검색어 조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댓글이나 검색어를 조작하면서도 여론 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시민의 힘’을 보여주는 시민 참여라고 생각하잖아요. 전도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소비자 민주주의적 상황을 날카롭게 포착한 상징적 인물이 김어준 씨를 비롯한 ‘나꼼수 멤버’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올더스 헉슬리 방식’을 선취했던 겁니다. 이제는 ‘옳다·그르다’가 중요치 않게 되었어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려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지 않습니까. 비판하고 따질 준비를 해야 하고, 과정 과정마다 토론이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옳다·그르다’에는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합니다.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이 그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이 옳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섬세한 독해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옳다·그르다’를 ‘좋다·싫다’로 바꿔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게 편하고 선명해집니다. ‘좋다·싫다’에는 중간이 없거든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명박-박근혜 집권 9년 동안 이것을 가장 잘했던 이들이 〈나꼼수〉입니다. 〈나꼼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공론장의 공적 토론에 붙이지 않았어요. 대신에 “저들은 나쁜 인간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기업인이다”, “박정희의 딸이다”, 이렇게 딱지를 붙였죠. 싫어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이들을 몰아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어줘야 한다는 ‘좋다·싫다’ 프레임을 짰던 것입니다. ‘좋다·싫다’에 버튼이 눌려지기 시작하면, 공적 토론이나 이성적 판단은 의미 없어집니다. 연예인이나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상황, 즉 팬덤화되는 거죠. 지금 정치의 장에서 정치는 사라지고 팬덤만 남은 것이 이런 현상들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서 민 저도 동의해요.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가 대세가 되면서, 지금은 논리적 사유 대신 조롱과 열광만이 판치고 있습니다. 2002년 대선 때 〈서프라이즈〉라는 사이트가 있었어요. 그곳에 올라오는 글 중에는 밑줄 쫙∼ 그어가면서 읽고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글이 많았습니다. 대표 필진들이 있었지만, 일반인이 쓴 것도 읽어볼 만했고, 의미 있고 감동을 주는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 ‘문팬’ 대표 사이트로 알려진 〈클리앙〉을 보면 감동은커녕 두려움만 느껴집니다. “아버지 집에 갔을 때, 아버지 몰래 조선일보로 접속되는 경로를 차단했다.”, “조카가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기에 어디서 그런 걸 배웠냐니까 학원에서 배웠다더라. 혼쭐을 내고 학원을 못 다니게 했다.” 이런 글이 베스트 추천을 많이 받습니다. 정경심 교수가 구속되었을 때도 논리적 반박보다는 ‘▶◀근조 사법부’ 이런 글들이 수천 개씩 올라왔고요. 문팬 사이트가 아닌, 다소 중립적인 곳에서는 친문 성향 네티즌들의 추천 조작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중 하나인 ‘엠엘비파크’(엠팍)에는 정부 찬양하는 글들이 늘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되곤 합니다. 알고 보니 몇몇 사람들이 짜고 추천수를 조작한 결과였어요.
네이버나 다음 사이트에서도 문팬들에 의한 댓글 조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이버야 사용자가 워낙 많아서 문팬들 뜻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다음 사이트는 문팬들이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민주당 소속 오거돈 부산 시장이 성추행으로 사퇴했을 때 “잘못을 시인하고 사퇴하다니, 미래통합당과는 클라스가 다르다”는 류의 댓글이 베스트 댓글이 되더라고요. 원하는 댓글이 베스트 댓글이 되도록 조작하는 이유는 네티즌들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베스트 댓글을 보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맞는 거겠지’ 지레짐작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집단 쏠림 현상인데요. 강양구 기자님이 쓰신 『과학의 품격』을 보면 여기에 관한 재미난 얘기가 나오죠. 스위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건수를 예측하는 이야기!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강양구 아∼ 그건 얀 로렌츠(Jan Lorenz) 박사팀이 집단 지성에 대해 연구하려고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실험이에요. 집단 지성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한국에도 꽤 많은데요. 제 앞에 있는 진 선생님, 서민 선생님은 요즘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받고 계시죠. 왜냐면 두 분이 민주주의와 집단 지성을 부정한다고.(웃음)
진중권 제가요? 저는 그들이 ‘집단’이라는 사실은 부정 안 해요. 그 집단이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만 부정할 뿐이지.(모두 웃음)
강양구 저는 이 실험이 지금 한국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진다고 봐요. 흥미롭습니다. 실험 설계를 굉장히 잘했거든요. 학생 144명을 모은 뒤, 금전적인 보상을 약속하고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답을 예측하는 실험을 한 거예요. “2006년 스위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수는?” 이 질문은 논란의 여지없는 답이 확실히 있어요. 통계 숫자이기 때문이죠. 우선 주목할 대목은 144명이 독립적으로 있을 때에는 정답에 상당히 근접한 답변들을 내놓았다는 거예요.
진중권 그게 집단 지성이잖아요.
강양구 네, 맞습니다. 고전적인 집단 지성이죠.
진중권 근데 그해 스위스에서의 살인사건은 몇 건이었나요?
강양구 2006년 스위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198건이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작용할 때, 그러니까 서로서로 다른 사람의 답변을 참고하게 하고, 토론하게 했더니 정답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이 실험 결과를 세 가지 함의로 나눠서 정리해 볼게요.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듣는 것만으로도 예측의 다양성이 감소해버렸어요. 처음에 제가 정답에 가깝게 “200건 아닌가요?”라고 예측하면, 옆에 있던 서민 선생님이 “야, 그게 어떻게 200건 밖에 안 되겠어, 800건 정도는 되겠지” 하면 “어어∼그런가” 이렇게 된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측이 한두 가지로 좁혀진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예측으로 좁혀지는 것이죠. ‘200건파’와 ‘800건파’로요. 그러다 ‘800건파’가 많아지잖아요. 그러면 그쪽으로 쏠림 현상이 생겨요. 처음에 200건을 예측했던 사람도 800건의 쪽수가 많아지면 “아, 800건이 맞나 보다” 그래서 오히려 다수의 틀린 예측이 소수의 정확한 예측을 압도해버립니다.
서 민 흥미진진한데요. 그럼 세 번째 상황은요?
강양구 세 번째는 가장 심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상황은 우리들이 많이 토론해봐야 할 문제인데요. 제가 혼자서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했어요. “200건 아닌가요?” 그 결과를 놓고서 다른 사람이 “정말?” 하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아, 너무 적은가? 진짜 정답은 뭐예요? 함께 찾아볼까요?” 이렇게 반응합니다. 자기가 정답을 이야기해 놓고도 자기 답을 확신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쪽수가 많아지면 자세가 돌변합니다. “800건 아닌가요?” 틀린 답을 내놓은 다음에 우기기 시작해요. 심지어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정답이 198건이라고 말해 줘도 “그렇게 적을 리가 있어? 통계가 잘못된 것 아닌가?”라고 반박한다는 겁니다.
진중권 지금 우리가 그런 초현실적인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강양구 맞아요. “증거 가져와 봐요, 증거!” 그러니까 144명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때에는 이른바 집단 지성에 걸맞게 비교적 올바른 판단으로 수렴되는데, 144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에서는 집단 지성이 나타나기는커녕, 개인의 판단보다도 못한 잘못된 결론을 내놓고도, 그것이 맞다고 우기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걸 보여주는 게 바로 얀 로렌츠 실험이에요. 이들에게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낸 사회학자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이 한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지, 저마다의 사실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중권 바로 그 쏠림을 만든 게 앞서 말한 〈나꼼수〉였고요. 지금의 〈알릴레오〉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쏠림 현상은 다른 의견을 내는 소수의 존재를 말살해버리거든요. ‘맘카페’, 〈클리앙〉 등등.
서 민 〈클리앙〉은 아예 신고를 해서 그 글이 없어지게 해요. 신고가 누적되면 글쓴이는 강제 탈퇴당하고요. 모두가 문 대통령만 사랑하는, 클린한 사이트가 만들어지는 거죠.
진중권 이런 현상이 실제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적 토론을 거치지 않은 ‘선포의 진리’잖아요. 누군가가 선포하면 신도처럼 따르는. 그러면서 집단은 점점 더 순수해지고, 점점 더 과격해지는 거죠. 그럴수록 집단은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요구하고, 선동가들은 거기에 맞춰서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는 사태까지 가버립니다.
강양구 저는 이런 메커니즘이 마녀사냥 메커니즘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유시민 씨나 김어준 씨 같은 경우, 그분들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객관적 판단들은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이해관계,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들이 설정한 방향이 맞지 않고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진영의 편을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로 선동을 하는 것이죠. 그들이 선동하면 쏠림 현상이 생겨 확∼모이고, 틀린 방향 혹은 틀린 답을 가지고 ‘이것이 맞다’고 우기는 거잖아요. 이 순간 정답을 말하는 사람,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을 얘기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지목하고 공격을 시작해요. 응징하는 것이죠. 응징은 대체로 메시지(message)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메신저(messenger)를 망가트리는 방식으로.
진중권 신상 털기가 시작되죠.
그들이 선동하면 쏠림 현상이 생겨 확∼모이고, 틀린 방향 혹은 틀린 답을 가지고 ‘이것이 맞다’고 우기는 거잖아요. 이 순간 정답을 말하는 사람,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을 얘기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그때부터 마녀사냥을 시작합니다. 지목하고 공격을 시작해요. 응징하는 것이죠. 응징은 대체로 메시지(message)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메신저(messenger)를 망가트리는 방식으로.
강양구 예∼ 그것부터 시작해요. 사안의 메시지와 전혀 관계없는 메신저의 과거 과오, 행적 등을 찾아냅니다. 그런 틈새와 허점을 드러내 메신저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그 사람만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마녀사냥의 가장 안 좋은 효과가 나타나요.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무서워서 침묵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의 다양성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지금 우리 상황이 이런 게 아닌가 싶어요.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극단의 목소리만 살아남고, 중간의 합리적인 목소리들은 거의 죽었거나 제대로 소리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2019년 조국 사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적 논쟁들이 항상 비슷한 패턴으로 가고 있습니다.
서 민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합리적인 의견 교환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면 거기에 대해 반박을 해야 하는데, 강 기자님이 지적하신대로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합니다. 예전에는 ‘일베’라고 했는데요. 지금은 ‘토착왜구’로 바뀌었더군요. 보수에서 ‘빨갱이’라고 했던 것과 같죠. 의견, 견해, 메시지를 반박하는 게 아니라 딱지만 붙입니다. 정부가 명백한 잘못을 했을 때는 잠깐 조용해요. 왜 조용하냐면 자기들이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싶거든요. 그러다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뉴스나 유튜브에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