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키미
브랜더.
카카오 브런치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퇴사하면 한낱 미물이 될까 두려웠지만 스스로 브랜드가 되기로 결심한 뒤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모든 사람이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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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브랜딩에 대한 오해
내추럴 와인이 뭔지 알고 마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좋은 거라고는 하는데 정확히 왜 좋은지는 들어도 잘 모르겠고, 마셔도 알쏭달쏭한 와인. 근사해 보여서 한두 번 만나긴 했지만 왠지 친해지기 어려운 대상. 사람들에게 브랜딩도 그런 존재다.
브랜딩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실 오해 탓이 크다. ‘마케팅 비슷한 것’이라는 오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개념을 인지할 때 흔히 그렇듯, 기존에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개념에 빗대어 적당히 규격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브랜딩은 마케팅, 광고, PR과 더불어 ‘잘 파는’ 행위쯤으로 뭉뚱그려 인식된다.
엄밀히 말하면 ‘마케팅 비슷한 것’은 브랜딩의 목적 또는 결과다. 브랜딩을 목적으로 잘 파는 행위를 하거나, 잘 파는 행위를 한 결과 브랜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마케팅, 광고, PR과 브랜딩을 동일 레벨로 두어서는 안 된다. 브랜딩이 상위 레벨이다.
브랜딩에 대한 오해는 ‘브랜드 마케터’라는 나의 직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브랜드 마케터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잘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물론 잘 파는 일도 한다. 하지만 잘 파는 일은 브랜드 마케터의 일 중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카카오의 콘텐츠 퍼블리싱 플랫폼 브런치에서 나의 일은 브랜딩이 전부다. 브랜딩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일, 브런치 작가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을 명예롭게 하는 일, 좋은 글을 발굴하고 좋은 글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일 등이 그것이다.
‘마케팅’ 하면 으레 떠올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나 숫자로 증명하는 지표는 ‘브랜딩’ 과정 중 적재적소에 스밀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브런치를 알렸는가’보다는 ‘사람들에게 브런치가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잘 파는 데 치우쳐 브랜드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브랜드 마케터의 일을 ‘장인 정신과 상인 정신 사이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퍼스널 브랜딩이 부각되는 시대. 브랜딩에 대한 오해는 퍼스널 브랜딩도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은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마케팅 비슷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알쏭달쏭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마케팅을 하면 된다. 이때 ‘나를 잘 파는’ 행위는 필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는지가 더 중요하다면 ‘나를 잘 파는’ 행위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개인 브랜드는 장인 정신과 상인 정신의 비율을 스스로 조절하며 균형을 맞춘다. 중요한 건 SNS 팔로워 수 높이는 법을 고민하기 이전에 팔로워들에게 내가 어떤 이미지로 자라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고 싶은지를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다. 나다움에 대한 고민을 브랜드다움으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그 브랜드다움을 찾아가는 나의 실험 노트다.
브랜드의 레퍼런스는 브랜드여야 마땅하다. 내추럴 와인과는 친하지 않지만 브랜딩과 친한 나는 레퍼런스 브랜드들을 관찰했다. 브랜딩 잘하는 기업 브랜드들을 롤 모델 삼아 따라 하다 보면 나도 브랜딩 잘하는 개인 브랜드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했다.
훌륭한 기업 브랜드 전략에 ‘나’를 대입시키면 나라는 브랜드의 퍼스널 브랜딩 전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브랜드 중에서 스무 곳을 선정했다. 아마존, 애플, 인스타그램, 에어비앤비처럼 누구나 아는 브랜드와 매거진 <B>, 아무튼 시리즈, <뉴닉>, 츠타야처럼 이 책의 타깃 독자라면 알 만한 브랜드들이다. 그리고 각 브랜드를 분석하며 주요한 인사이트를 하나씩 도출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으로 브랜드명을 바꾼 왓챠, Not to do 원칙으로 한 세기 넘게 브랜드 소명을 지키고 있는 《미쉐린 가이드》, 브레인트러스트라는 피드백 시스템으로 세계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픽사 등의 스토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스무 곳의 브랜드 스토리에서 발견한 각각의 브랜딩 전략을 나에게 대입했다.
왓챠처럼 많은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으로 나의 필명 정하기. 미쉐린처럼 무엇을 To do로 두고 무엇을 Not to do로 둘지 기준을 정하고 실행하기. 픽사처럼 나만의 브레인트러스트를 만들어 피드백받기 등등. 덕분에 이 책의 초안을 쓸 때 피드백을 받으며 방향을 잡았고, 무수한 Not to do를 수행하며 단 하나의 To do였던 탈고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김키미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퍼스널 브랜딩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궁금하다, 빨리 읽고 싶다”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책 제목에는 ‘브랜드’나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안 그래도 어려운 퍼스널 브랜딩, 책까지 어려워 보이면 독자들이 다가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일리 있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제목에 기어코 ‘브랜드’를 끼워 넣었다. 책을 쓰면서 모든 사람이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려운 방향으로 한 스텝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믿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라는 나의 결심을 띄워 보낸다. 당신의 결심으로 전염되기를 바라며.
차례
프롤로그 브랜딩에 대한 오해
내 안의 브랜드 정체성 깨우기 |
01 브랜드 색안경 끼고 거울 보기 – 매거진 <B>
02 브랜드 정체성을 찾는 집착적인 질문법 – 파타고니아
03 브랜드 키워드를 정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 – 아무튼 시리즈
04 맥시멀리스트에게 추천하는 키워드 그루핑 – 아마존
05 1초 만에 떠오르는 브랜드 고정관념 디자인하기 – 시몬스
직업인의 브랜드 자산 키우기 |
06 가치 있는 브랜드 자산에 베팅하기 – 세이브더칠드런
07 강점에 집중해 브랜드 각인시키기 – 브런치
08 ‘하지 않음’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법 - 《미쉐린 가이드》
09 점에서 선으로 연결되는 브랜드 스토리 – 애플
10 브랜드를 규정짓는 직업 말 – 츠타야
관계 속에서 브랜드 인지도 높이기 |
11 효과적인 브랜드 네이밍의 조건 – 왓챠
12 나를 중심으로 브랜드 서클 멤버 모집하기 - <뉴닉>
13 경쟁 브랜드와 경쟁하지 않고 이기는 법 – 몰스킨
14 골수팬이 브랜드를 떠나는 이유 – 인스타그램
15 돈 들이지 않고 브랜드 광고하기 – 유한락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스킬 익히기 |
16 브랜디드 콘텐츠로서의 글쓰기 – 블루보틀
17 솔직한 피드백을 받기 위한 자세 – 픽사
18 유혹적이지만 저항해야 할 피드백 – 에어비앤비
19 네거티브한 피드백에도 가라앉지 않는 브랜드 – 마켓컬리
20 ‘내가 뭐라고’라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 클럽하우스
에필로그 시대의 흐름에 반응하는 올바른 감각
―일러두기
본문에 사용한 기호는 다음과 같이 원칙을 정해 사용했습니다.
•잡지, 영화, 뉴스 매체 < >
•단행본 《 》
•웹페이지 자료 및 기사 “ ”
―이 책에 삽입된 도판과 발췌문 중 저작권 사용을 허락받지 못한 부분은 추후 저작권법에 따라 계약을 진행하겠습니다.
01 | 브랜드 색안경 끼고 거울 보기 |
매거진 <B>
브랜드 마케터의 필독서
브랜딩하는 사람에게도 브랜드는 어렵다. 브랜드 마케터인 나는 일과 일상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매일 조금씩 브랜드를 배워가고 있다. 가장 확실한 배움의 보고는 뭐니 뭐니 해도 책. 경영서나 실용서도 좋지만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인사이트를 살찌우게 해주는 건 아무래도 잡지다.
매거진 <B>는 한 호에 하나의 브랜드만을 선정해 깊이 있게 다루는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이다. 2011년 창간호 프라이탁 편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찾아낸 균형 잡힌 브랜드를 소개한 지 10년째. 현재까지 85개의 브랜드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2021년 3월 기준)
브랜드 마케터의 필독서인 <B>는 뉴발란스, 러쉬, 레고 등 익숙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브랜드도 새롭게 들여다보게 한다. 구글,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온라인 플랫폼도 브랜드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광고하지 않는 뷰티 브랜드 이솝,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서점 츠타야, 힙스터들의 커뮤니티 에이스 호텔처럼 몰랐던 브랜드도 알게 한다.
<B>가 선정하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는 <B>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다.
브랜드특별시의 시민
2016년, 매거진 <B>는 50번째 브랜드로 서울을 택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 세계에서 찾아낸 균형 잡힌 브랜드로 줄곧 기업 브랜드만을 소개해 온 <B>에서 도시를 브랜드로 다룬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도 당신이 좋아하는 모 브랜드만큼 균형 잡힌 브랜드입니다”라는 관점으로.
서울의 패션, 서울의 라이프스타일, 서울의 주거 문화 등이 <B>에 의해 스타일리시한 브랜드 요소로 소개되었다. 서울의 전통 시장을 ‘도심 속 플랫폼으로서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곳’이라 정의했고, 서울의 카페는 ‘공간과 커피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로 해석했다.
이는 꽤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나처럼 <B>를 통해 브랜드라는 세계에 발 들여놓은 브랜드 키즈에게는 ‘브랜드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이 주어진 것과 같았다.
서울이 브랜드라면 대한민국도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광화문은 또 어떠한가.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한 통인시장도, 줄 서서 먹는 기름 떡볶이나 마약 김밥도 브랜드라면 브랜드. 바다 건너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도, 런던의 언더그라운드도,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도 이미 너무나 유명한 브랜드다.
브랜드에는 경계가 없다
브랜드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유연한 걸까?
브랜드(brand)라는 단어는 ‘불에 달구어 지진다’는 의미의 노르웨이 고어 ‘brandr’에서 유래되었다. 불에 달군 쇠붙이로 가축에 낙인을 찍어 소유물을 식별하던 일종의 표(標)가 오늘날 브랜드로 발전한 것이다.
식별의 기능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쓰였다.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상점마다 이름 대신 상점을 상징하는 그림이나 표시를 걸었다. 지금으로 치면 로고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만(卍)자, 국가의 국기도 식별 기능을 하는 브랜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브랜드는 다르다. 각각의 상점, 종교, 국가도 브랜드가 될 수 있다. 애플과 나이키 같은 거대 기업만 브랜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브랜드 전문가가 아니어도 알고 있는 사실. 오늘날 브랜드는 완전한 보더리스(borderless)의 영역에 있다. 기업, 도시, 단체, 인물 등의 고유명사는 그것이 무엇이든 브랜드가 될 수 있다.
브랜드는 날이 갈수록 더 광의적인 의미를 향해 간다. 더더욱 광의적인 의미로 넓혀간다.
브랜드 다음은 사람
매거진 <B>에서 다루는 브랜드적 관점도 한층 넓어졌다.
그 시작은 2019년 <B>에서 처음 내놓은 단행본 《잡스》 시리즈. 한 호의 매거진에 하나의 브랜드를 소개했던 것처럼 《잡스》에서는 한 권의 단행본에 하나의 직업을 다룬다. 직업인들과 나눈 대화가 담긴 직업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2018년 12월 매거진 <B>는 서울 편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개정판에서는 ‘Connections’라는 꼭지로 서울의 교통을 주요하게 다뤘다.
©김키미
언뜻 보면 새삼스러울 수 있다. 브랜드만 다루던 매체에서 왜 갑자기 직업 얘기를 하지? 《잡스》 기획 배경에 그에 대한 답이 나와 있다.
많은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브랜드에는 자신만의 직업의식을 지닌 매력적인 사람이 있고, 일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은 곧 브랜드의 철학과 정신으로 자연스레 이식됩니다.
_제이오에이치 편집부, 《잡스–에디터》
수년간 브랜드 다큐멘터리 매거진을 만들면서 그들이 발견한 가치는 ‘사람’에 있었다. 좋은 브랜드에는 반드시 좋은 철학을 가진 직업인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직업인의 이야기를 다룬 《잡스》 는 매거진 <B>가 지금까지 해온 브랜드 이야기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직업 세계를 알려주는 듯하다. 하지만 가까이 들어가면 직업인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들린다. 거기에는 직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포함돼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개개인의 ‘브랜드다움’으로 보였다. 매거진 <B>는 브랜드 다음으로 사람을 조명해 또 그 안에서 브랜드다움을 찾아냈다.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습관이나 관점들이 모여 한 사람을 이루고, 그 사람이 브랜드로 이어진다는 걸 독자들에게 은유적으로 설명한다. ‘직업인’이라는 단어를 빌려 한 명 한 명의 ‘브랜드형 인간’을 소개하는 것이다.
스스로 브랜드가 된 사람
브랜딩하는 사람도 ‘나’라는 브랜드가 어렵다. 그래서 이 또한 끊임없이 공부한다. 브랜드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브랜드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지려고 브랜드라는 색안경을 낀다.
브랜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무엇이든 브랜드다. 거울 속에 있는 ‘나’도 브랜드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잡스》 시리즈를 기획・제작한 손현 에디터도 일찍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잡스》시리즈.
지금까지 에디터, 셰프, 건축가, 소설가 편이 나왔다.
©매거진 <B>
손현에게 에디터 경력이 전무했을 당시, 그는 ‘<B>에서 글 좀 쓰고 이미지에 감각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자기 어필의 방법으로 그는 포트폴리오 제작을 택했다. 한 호에 하나의 브랜드만을 담는 <B>의 포맷을 빌려 ‘손현’이라는 브랜드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였다.
매거진 <B> ‘손현’ 버전이라고, 저를 셀프 브랜딩 해서 하나의 브랜드처럼 <B> 포맷에 담았어요. 판형이랑 종이 재질까지 똑같이요. <B>를 보면 유저 인터뷰가 세 개 정도 있잖아요. 자문자답하는 인터뷰 두 개 싣고, 친구한테 “나 좀 인터뷰해줘” 해서 그것도 싣고, 학생 때 했던 아카데미 워크 하나 넣고, 글 좀 쓰는 걸 보여줘야 되니까 제가 썼던 에세이도 다섯 편 넣고, 사진 찍었던 것도 넣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땐 인디자인을 다룰 줄 몰라서 포토샵으로만 만들었어요. 세 달 정도 걸려서.
그리고 그는 뒤표지 한쪽에 이런 문구를 적었다.
THIS IS NOT A PORTFOLIO.
THIS IS MY MAGAZINE.
제출이 목적인 포트폴리오였지만 그것 그대로 손현이라는 브랜드의 매거진이었다.
매거진 <손현>.
매거진 <B>와 나란히 세워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콘텐츠 구성과 디자인도 매거진 <B>의 특징을 잘 살렸다.
©김키미
그의 열정과 태도를 높이 평가한 <B>는 객원 멤버로 리서처 및 에디터 포지션을 제안했다. 정식 채용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얻은 귀한 기회였다. 당시 화학 공장을 설계하는 플랜트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에게는 그때가 커리어의 주요한 변곡점이었다.
그는 이후 퍼블리 초기 멤버로 합류해 본격적으로 에디터 커리어를 쌓았다. 그리고 2년 4개월 뒤 매거진 <B> 편집부에 정식으로 합류했다. <B> 취재와 《잡스》 시리즈 제작을 병행했다. 그리고 지금은 터전을 옮겨 에디터로서의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브랜드형 인간으로 살기
손현은 <에디터의 글쓰기>를 통해 매거진 <손현>을 만들면서 시도한 다섯 가지 자기 탐색법을 소개했다.
첫째, 직접 쓴 글이나 사진, 진행했던 프로젝트 등 나를 잘 드러내는 작업을 모아서 정리해 본다.
둘째, 스스로 기획해 자문자답하는 셀프 인터뷰를 진행해 본다.
셋째, 타인에게 내 인터뷰를 요청해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든다.
넷째,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에 대한 피드백을 수집해 내 이미지를 키워드로 정리해 본다.
다섯째, 살아온 과정을 특정 주제에 맞춰 시간순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인생 전반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해 본다.
이는 매거진 <B>에서 하나의 브랜드를 다큐멘터리화하는 과정과도 같다. 브랜드마다 특징을 잡아내어 정리한 기획 기사들, 브랜드 창립자 및 관계자의 인터뷰, 브랜드 팬들의 짧은 코멘트와 긴 인터뷰, 그리고 브랜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담아낸 브랜드 스토리가 그것이다.
지금의 브랜드와 비슷한 단어를 찾자면 거시기 아닐까. 브랜드와 거시기, 둘 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거시기를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할 때 쓰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학자들은 이 말에 대해 “확실한 뜻을 갖지 못하면서, 서로의 뜻을 가장 정확히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이라고 평가한다. 즉, 너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인데 아무도 정확한 뜻을 모르는 상황.
_손현, <에디터의 글쓰기>
브랜드는 ‘거시기’할 정도로 모호하다면 무척이나 모호한 영역이고 두루뭉술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누구나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브랜드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곧 브랜드다’라는 말이 있다. 나와 나의 동료, 나의 친구들, 그리고 당신처럼 평범한 개인도 브랜드가 될 수 있다. 브랜드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 같은 건 없다. 브랜드다/아니다를 감정하는 주체도 없다. 그저 스스로 브랜드가 되기로 결심하고 브랜드형 인간으로 살면 브랜드인 것이다.
“오늘부터 나는 브랜드가 되기로 했다” 하면 내가 살아온 삶은 브랜드 스토리가 된다. 나의 이름은 브랜드명이 된다. 나의 SNS는 브랜드 채널, 내가 만든 콘텐츠는 브랜드의 주력 제품이 된다. 나의 이름을 건 매거진 <B>를 만들 수도 있다.
브랜드 색안경을 끼고 보면 인생은 B(Brand)와 D(Daily) 사이의 C(Choice)다. 브랜드가 되기를 선택하거나 지금과 같은 일상을 살거나. 결정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달렸다.
참고 자료
- 제이오에이치 편집부, <매거진 B(Magazine B) No.50: Seoul>(2018.12), 제이오에이치.
- “브랜드란 무엇인가?”, 한국브랜드경영협회.
- 김키미, “에디터 ______의 일”, 브런치, 2018.11.25.
- 손현, <에디터의 글쓰기>, 폴인, 2020.12.30.
02 | 브랜드 정체성을 찾는 집착적인 질문법 |
파타고니아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
“퍼스널 브랜딩을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피커 분들은 어떻게 자신을 브랜딩하고 있나요?”
어느 강연 자리.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퍼스널 브랜딩이 부각되는 시대에 많은 사람이 하고 있는 고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는 4인의 스피커 중 한 명으로 참여한 터라, 답을 해야 하는 처지. 눈치를 보아 하니 다른 스피커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퍼스널 브랜딩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저도 알고 싶어요!’
어쩔 수 없이 나는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던 ‘자기 객관화’에 대해 언급했다. 다른 스피커들은 “‘이 일 하나만큼은 내가 했다’는 족적을 남길 수 있도록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려고 한다”, “하고는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모르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스피커가 이런 발언을 했다.
“브랜드라는 게 많이 알려져야만 브랜드인 건 아니잖아요.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도 있는 거니까요.”
당시 나는 퍼스널 브랜딩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 채 ‘꼭 해야 한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그날 강연 이후 확신은 의심으로 바뀌었다. 퍼스널 브랜딩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인플루언서’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라는 건 나의 선택지에 없었다. 브랜드라면 모름지기 유명해야 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 솔직하진 못했다. 뒤늦게라도 솔직해지자 싶어 나에게 물었다.
“왜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되면 좋지’ 정도의 생각. 뭐가 좋은지, 왜 좋은지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맹목적으로라도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영향력을 가져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목표를 그려본 적도 없었다. 사실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은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그러면, 퍼스널 브랜딩을 왜 하고 싶어?”
이 질문에는 열심히 답할 수 있었다.
‘나의 수식어에서 회사 이름을 떼어내는 날이 왔을 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꿈꾸고 있던 일을 하고 있으면서 역설적이게도 같은 이유로 불안을 느끼는 이 상황을 해결하고 싶어서. 왜인지 모르겠지만 퍼스널 브랜딩에 그 실마리가 있는 것 같아서. 해보고 아니면 다른 실마리를 찾아가면 되니까.
브랜딩에 대한 오해
왜 퍼스널 ‘마케팅’이 아니라 퍼스널 ‘브랜딩’일까?
마케팅은 타인에게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브랜딩은 타인으로부터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둘의 차이는 크다.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직접 알리는 행위’가 마케팅이라면, 브랜딩은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게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마케팅과 브랜딩은 하나로 퉁쳐지는 경향이 있다. ‘홍보 방법’ 정도로 뭉뚱그려 해석된다.
마케팅과 브랜딩의 차이는 SNS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SNS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를 말한다. 누구나 마케터가 될 수 있고, 모두가 마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마케터에게서는 일관성이 엿보인다. 무작정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를 말하는 게 아니라, 팔로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스며들도록 SNS를 디자인한다. 한편 어떤 이들은 확성기에 대고 큰 소리로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거나,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로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면서 노이즈를 만든다.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언팔로우를 당하게 된다.
마케팅은 나에게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브랜딩은 상대의 인식 속에 생겨나는 것이다. 마케팅을 통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린다 한들, 상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브랜딩은 실패다.
그렇다면 스팸이 아닌 마케팅으로,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타인에게 심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에서 ‘좋은’에 해당하는 나의 정체성을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이란 바로 그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정체성을 아는 브랜드
북한산 인수봉에는 ‘쉬나드길’이라는 이름의 암벽등반 코스가 두 개 있다. 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클라이머 이본 쉬나드의 흔적이다.
어려서부터 절벽을 타던 쉬나드는 클라이밍 장비를 직접 만들어 썼다. 그리고 그것을 트럭에 싣고 다니며 팔았다. 클라이밍을 위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가 만든 개량형 피톤(piton)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자기 목숨을 걸어 제품 테스트를 해야 하니 좋은 제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요가 늘어나자 아예 회사를 차렸다. 허름한 대장간에 쉬나드 이큅먼트(Chouinard Equipments. Co. Ltd)라는 간판을 달았다. 뛰어난 클라이머가 뛰어난 클라이밍 장비를 만드는 회사였다. 1970년경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장비 회사가 되었다. 그대로 탄탄대로를 가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쉬나드는 요세미티 엘 캐피탄의 봉우리가 망가져 가는 걸 목격했다. 자신이 개발한 피톤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었다.
피톤은 바위의 갈라진 틈새에 박아 넣어 중간 확보물로 쓰는 금속 못이다. 등반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바위가 손상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쉬나드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창립 이래 개발한 모든 피톤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알루미늄 초크를 개량해 대체품을 만들었다. 바위 틈 사이에 걸어서 쓰는 방식으로 바위를 거의 훼손하지 않고 등반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피톤 때문에 벌어진 환경 파괴를 알리고 초크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다음으로 이 바위에 오를 등반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바위에 망치로 피톤을 박고 빼는 일은 바위에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 다음에 오를 등반가들의 자연스러운 경험을 망가뜨립니다.
깨끗하게 올라야 합니다. 등반하는 동안 등반가는 바위에 흔적을 거의 남겨서는 안 됩니다.
_1972년 쉬나드 이큅먼트 카탈로그 중
고객들에게 카탈로그를 발송한 뒤 피톤 판매가 점점 줄었다. 대신 초크 판매가 급격히 늘어났다. 초크를 만드는 속도보다 팔리는 속도가 빨랐다.
회사 매출의 70퍼센트를 책임질 정도의 대표 상품이었던 피톤을 단종시키겠다는 쉬나드의 결정을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해야만 하는’ 결정이었다. 노인이 된 지금도 자신을 클라이머라고 칭하는 그의 정체성은 산과 자연, 그리고 지구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정체성은 이후 그가 창립한 파타고니아(patagonia)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할까
파타고니아는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의 제품을 사지 말라고 말한다. 꼭 필요한 제품인지 고민해 보기를, 적게 소비하기를 권한다. 재킷을 사지 말고 고쳐 입기를, 아버지의 재킷을 아들에게 물려주기를 권한다. 그러면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매년 매출의 1퍼센트를 환경단체에 기부한다. 수익이 아니라 매출의 1퍼센트다. 파타고니아는 이 금액을 ‘지구를 위한 1퍼센트’, 지구세(Earth Tax)라고 부른다.
쉬나드 이큅먼트 대표 상품이었던 개량형 피톤과
차세대 대표 상품이 된 알루미늄 초크
©파타고니아
모든 제품 생산/유통 과정에 친환경 기술을 도입하는 건 기본이다. 2025년까지 100퍼센트 탄소 중립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제품 공정 등 생산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겠다는 방침. ‘매장에 불을 밝히는 일부터 셔츠를 염색하는 과정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사업 행위가 환경에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자신들이 지구를 위해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파타고니아의 행보에는 ‘파타고니아답다’는 찬사가 따른다. 그리고 때때로 ‘와, 정말 이렇게까지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2019년, 창립 이래 최초로 사명선언문을 변경했을 때다.
우리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되, 불필요한 환경 피해를 유발하지 않으며, 환경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해결하는 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사업을 이용합니다.
_1991년 사명선언문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