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 CRASH
Copyright (c) Neal Stephenson, 1992
Korean translation rights (c) Munhak Segye-Sa Publishing Co.,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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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Darhansoff & Verrill through Shinwon Agency Co., Seoul
닐 스티븐슨 SF 장편소설| 남명성 옮김
문학세계사
* 소설 본문 중에서 "[ ]"는 저자가 쓴 표현이고, "( )"는 옮긴이 및 편집자의 주해임을 밝혀 둡니다.
우리의 배달부는 엘리트 계급이자 신성한 부류에 속한다. 그는 그 위치에 오를 만큼 재능이 있다. 지금 그는 오늘 밤의 세 번째 임무 수행을 준비 중이다. 활성탄처럼 새까만 유니폼은 공기 중에 섞인 빛 자체를 걸러 낸다. 거미 섬유로 만든 옷은 총알도 날아가다 파티오 문(정원·발코니로 통하는 미닫이로 된 큰 유리문)에 부딪히는 굴뚝새처럼 튕겨 내지만, 땀이 조금이라도 많이 흐른다 싶으면 방금 소이탄이 떨어진 숲을 뚫고 지나는 한 줄기 바람처럼 옷 밖으로 배출해 낸다. 유니폼은 뼈가 바깥쪽으로 드러난 몸의 모든 끝부분에 아모젤로 부드럽게 마무리되어 있다. 모래 섞인 젤리같은 느낌의 아모젤(천천히 움직일 때는 부드럽지만 외부 충격에 의해 단단해지는 액체 갑옷)은 전화번호부 몇 권을 덧댄 것만큼 몸을 보호해 준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그는 총 한 자루를 받았다. 현금은 절대 다루지 않지만, 배달차나 배달하는 물건 때문에 누구든 그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총은 아주 작고 날렵하게 생겼으며 가벼웠다. 패션 디자이너나 가지고 다닐 법한 총이다. 작은 화살처럼 생긴 총알이 날아가는 속도는 SR-71 정찰기의 다섯 배나 되는데, 전기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용하고 나면 자동차 시거잭에 꽂아 두어야만 한다.
배달부는 화가 나거나 두려움에 빠져 총을 뽑아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딱 한 번, 길라 하일랜드 지역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 고급 버브클레이브(자체 헌법, 국경, 법률, 경찰 등 모든 것을 갖춘 도시 국가)인 길라 하일랜드에 사는 어린 불량배 녀석 몇 명이 배달을 요청했는데, 돈을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녀석들은 야구 방망이로 배달부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배달부는 총을 꺼내 들고 상대방이 치켜든 야구 방망이에 레이저 조준 장치를 겨눠 발사했다. 반동이 어찌나 세던지 총이 손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야구 방망이의 중간 부분 3분의 1이 불타는 톱밥 기둥으로 변하더니 폭발하는 별처럼 온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던 녀석의 손에 남은 건, 끝에서 우윳빛 연기가 솟아오르는 방망이 손잡이뿐이었다.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녀석은 얻은 것도 없이 배달부에게 당하기만 했다.
그날 이후, 배달부는 총은 차에 넣어 두고 대신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사무라이 칼에 의지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총보다 칼을 더 좋아했다. 길라 하일랜드에서 만난 녀석들이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배달부는 총의 위력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칼은 시범을 보일 필요가 없다.
배달부가 모는 차는 베이컨 한 덩이쯤은 소행성대(화성과 목성 사이 많은 소행성이 존재하는 공간)까지 쏘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에너지를 배터리에 늘 비축하고 있다. 미니밴이나 고물차들과 달리 배달부의 차는 입을 벌린 채 번쩍거리며 빛나는 괄약근 사이로 에너지를 뿜어낸다. 배달부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면 난리가 난다. 타이어 두께가 어떠냐고? 여러분의 차에 달린 타이어 네 개가 각각 아스팔트와 닿는 면은 기껏해야 혓바닥 넓이 정도밖에 안 된다. 배달부가 모는 차에 달린 거대하고 끈적거리는 타이어들이 도로와 만나는 면은 뚱뚱한 여자의 눌린 허벅지만큼이나 넓다. 배달부는 도로와 달라붙은 채 바람처럼 출발하고 가볍게 멈춰 선다.
배달부가 이렇게 대단한 장비를 갖춘 이유가 뭐냐고?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롤 모델이다. 여기는 미국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곳. 그게 뭐가 문제인가? 미국 사람들은 그럴 권리가 있다. 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들을 말릴 수 없다. 그 결과, 이놈의 나라는 세계에서 경제가 가장 엉망인 곳이 되고 말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역 수지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단 우리의 모든 기술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서 모두가 서로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되자, 볼리비아는 자동차를, 타지키스탄은 전자레인지를 만들어 가져와 파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엄청난 규모의 홍콩 선박과 비행선들이 푼돈만 줘도 노스다코타주 전체를 뉴질랜드까지라도 옮겨 줄 수 있을 정도로 운송비가 저렴해지자, 천연자원이 많다는 강점도 아무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모든 불균형을 사라지게 했고, 이제는 파키스탄의 이름 없는 벽돌공까지 돈을 제대로 벌어 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을 정도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경제 체제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결과가 뭐냐고?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분야는 이제 네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음악
영화
마이크로코드[소프트웨어]
초고속 피자 배달
배달부는 예전에 소프트웨어를 만들곤 했다. 지금도 가끔은 그런 일을 한다. 그러나 만일 인생이 착한 교육학 박사님들이 운영하는 분위기 좋은 초등학교라면, 배달부가 받을 성적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을 것이다.
“히로는 매우 명석하고 창의적이지만 다른 학생들과 협력하는 법에 조금 더 신경 써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명석하고 창의적일 필요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협동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 원칙은 단 하나뿐이다. 배달부는 모든 책임을 지면 된다. 만일 30분 안에 피자가 도착하지 않으면, 피자를 공짜로 먹는 건 물론이고 배달 온 사람을 총으로 쏴 버리고 차를 빼앗고 소송을 걸어도 무방하다. 배달부가 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래 견딘 직업이고 벌이도 좋았다. 게다가 일을 시작한 이래 피자를 배달하는 데 단 한 번도 21분을 넘겨 본 적이 없다.
아, 물론 배달이 늦었다며 항의하는 고객들 때문에 많은 회사가 막대한 시간을 낭비하던 시절도 있다.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고 땀을 흘려 가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고약한 화장품 냄새와 함께 일터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뿜어내며 노란 등이 켜진 현관에 나와 서서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거나 부엌 벽에 매달린 시계를 가리키고 지금이 도대체 몇 시냐며 소리를 질러 대곤 했다.
이제 그런 일은 없다. 피자 배달은 중요한 산업이다. 고도의 경영 기법을 사용한다. 사람들은 코사노스트라(이탈리아어로 ‘우리의 것’이라는 뜻. 미국에서 활동하는 범죄 조직인 마피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피자 대학교에 들어가 4년 동안 피자 배달만을 배운다. 영어는 한 문장도 못 쓰는 실력으로 대학 문을 들어선 압하지야, 르완다, 과나후아토, 남부 뉴저지 출신 사람들은 베두인족이 사막을 아는 것보다 더 피자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졸업한다. 그들이 바로 이 문제를 연구했다. 문가에서 벌어지곤 하는 피자 배달 시간에 관한 분쟁의 빈도를 그래프로 그려 가며 말이다. 그들은 초창기 배달부들에게 도청 장치를 달아 상황을 녹음한 후, 고객과 배달부가 서로 말다툼을 끌고 가는 전략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그들의 말투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삶에서 겪는 모든 재미없는 시간과 김빠진 상황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라고 마음먹기라도 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버브클레이브에 사는 백인 중산층 고객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문법 구조를 분석했다. 그런 고객들은 주문 전화를 건 시간을 속여서라도 공짜 피자를 얻어먹곤 했다. 스스로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 그들에게 공짜 피자는 목숨, 자유 그리고 스스로 추구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당연했다. 도저히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집으로 심리학자들을 보내 공짜 텔레비전을 안겨 주며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다.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하기도 하고, 포르노 영화의 여주인공이나 한밤중에 벌어진 자동차 사고,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가 등장하는 정신없고 뜻을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는 동안 뇌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하며,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벽을 옅은 자주색으로 칠한 방에 집어넣고 윤리적인 질문을 잔뜩 하기도 했다. 내용이 어찌나 헛갈리는지 예수회 수사修士라고 해도 실수하지 않고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질문들이었다.
코사노스트라 피자 대학교의 분석가들은 그것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빠르고 비용이 들지 않는 기술적 대안을 내놓았다. 바로 스마트 박스였다. 배달용 피자는 이제 딱딱한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채 움직인다. 강도를 높이려고 주름을 잡은 상자 옆면에는 조그만 LED 계기판이 반짝거리며 운명의 주문 전화가 걸려 온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배달부에게 보여 준다. 상자 안에는 반도체 칩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다. 피자가 담긴 상자는 배달부의 머리 뒤쪽에 있는 몇 개의 긴 홈에 집어넣는다. 피자를 넣은 스마트 박스는 마치 컴퓨터에 들어가는 회로 기판처럼 미끄러지듯 홈으로 들어가 찰깍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배달부가 모는 차에 탑재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작동한다. 주문 고객의 전화번호에서 뽑아낸 주소는 이미 스마트 박스 안에 든 기억 장치에 전달된 상태이다. 그 이후부터 스마트 박스는 배달차의 시스템과 의사소통을 해 가며 가장 바람직한 운전 경로를 찾아내 그림으로 보여 준다. 지도는 앞쪽 차창에 뿌려지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배달부가 지도를 보느라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일은 없다.
만일 30분이 넘어가면 그 불행한 소식은 코사노스트라 피자 본사에 즉시 전달되고 다시 엉클 엔조에게 직접 보고된다. 엉클 엔조는 시칠리아섬의 샌더스 대령(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의 창업자)이자 벤슨허스트(뉴욕 브루클린의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의 앤디 그리피스(국민 보안관 역할로 유명했던 배우)로, 여러 배달부의 악몽에 등장해 긴 면도칼을 휘둘러 대는 코사노스트라 피자 회사의 최고 경영자 겸 두목이다. 그런 그가 보고를 받은 지 5분 안에 고객에게 몸소 전화를 걸어 침이 마르도록 사과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다음날 제트 헬리콥터를 타고 고객이 사는 집 마당에 내려 다시 사과하고 이탈리아 공짜 여행 티켓을 내민다. 고객이 해야 할 일이라곤 개인적 삶을 포기하고 유명 인사가 되어 코사노스트라 피자의 대변인 역할을 하겠다는 여러 서류에 서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객은 왠지 마피아에게 신세 진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일이 터졌을 때 배달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뜬소문을 들어 본 적은 있다. 피자 배달이 많은 저녁 시간에 엉클 엔조는 대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당신이라면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중간에 나와 미친 듯 날뛰는 얼간이에게 빌어먹을 피자가 늦어 죄송하다며 엎드려 빌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엉클 엔조가 골프를 치고 손녀딸이나 어르며 소일할 나이에 목욕하다 말고 젖은 몸으로 나와 페페로니 피자가 도착하는 데 31분이나 걸렸다는 이유로 스케이트나 타고 노는 열일곱 살짜리 애송이 녀석 앞에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기나 하려고 지난 50년 동안 가족과 나라에 정성을 바친 건 아니다. 오, 세상에. 생각만 해도 배달부는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없다면 코사노스트라 피자를 배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고? 목숨을 걸고 일하면 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살 공격을 앞둔 전투기 조종사가 된 기분이랄까. 정신이 맑아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뻔하디뻔한 경쟁에 의지해 산다. 가게 점원, 햄버거 가게 종업원,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개발자를 포함해 미국의 일상을 구성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온갖 직업의 사람들. 두 구역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고등학교 동창보다 햄버거를 더 빨리 뒤집는다거나, 서브루틴(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적 프로그램)의 디버깅(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수정하는 것)을 더 빠르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고,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알아주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의미 없고 지저분한 경쟁인가. 코사노스트라 피자 회사에는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이라는 말은 마피아 윤리에 어긋난다. 다른 동네에서 같은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경쟁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경각에 달렸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명성, 명예, 가족 그리고 목숨까지. 햄버거를 뒤집으며 사는 사람이 좀 더 오래 살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사는 인생이 어떨지는 스스로 물어야만 한다. 일본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코사노스트라보다 피자를 더 빨리 배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배달부는 입은 유니폼이 자랑스럽고 배달차를 모는 게 자랑스러웠으며 수많은 버브클레이브 가정의 현관 앞길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닌자처럼 까맣게 차려입은 으스스한 모습으로 어깨 위로 피자를 치켜들고 걸을 때면 피자 상자 옆구리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빨간색 LED 불빛이 빛나곤 한다. 12:32 또는 15:15. 가끔은 20:43.
우리의 배달부는 밸리 지역에 있는 코사노스트라 피자 3569호 점포에 소속되어 있다. 남부 캘리포니아는 이제 더 개발해야 할지 아니면 발전을 막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인구를 생각하면 도로가 너무 부족했다. 페어레인 도로 회사는 늘 새 도로를 닦는다. 그러려면 많은 동네를 불도저로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조성한 교외 주택 단지들은 어차피 없애 버려야 할 존재가 아닌가? 보도나 학교를 포함해 아무런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들이다. 독자적인 경찰 조직이나 출입국 관리소도 없다. 그러니 수상한 사람들이 몸수색을 받기는커녕 아무런 제재 없이 불쑥 들어올 수도 있다. 이제 사람들은 버브클레이브라는 주거 단지에 모여 산다. 도시 국가인 버브클레이브는 별도의 헌법과 국경, 법률, 경찰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걸 갖춘 곳이다.
배달부는 한때 팜스 메리베일 버브클레이브를 지키는 보안군에서 부사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범죄자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죄로 해고당했다. 범인의 셔츠를 벤 칼날은 옆으로 누우면서 범인의 목을 따라 미끄러졌고, 범인은 침입하려던 집 벽에 달린 비닐 판자에 몸을 붙인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주 정당하게 체포한 상황으로 보였다. 그러나 범인이 팜스 메리베일의 차관의 아들이라는 게 알려지자 그는 그만 해고당하고 말았다. 핑계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들은 길이가 1미터 가까이 되는 사무라이 칼이 ‘무기 사용 규약’을 위배한다고 했다. 또, ‘피의자 체포 규정’을 어겼다고 했다. 범인 녀석이 정신적 충격으로 고생한다고도 했다. 녀석은 이제 버터나이프도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잼을 바를 때도 티스푼을 뒤집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안군은 배달부 때문에 손해 배상을 해야 할 처지라고 주장했다.
배달부는 손해 배상금을 물어내느라 약간의 돈을 빌려야 했다. 사실 돈을 빌린 곳이 마피아였다. 그래서 배달부는 마피아의 데이터베이스에 온갖 신체 정보를 입력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망막 패턴, DNA, 음성의 특징에다 지문, 족문足紋, 장문掌紋, 손목의 주름을 포함한 온몸의 빌어먹을 주름이란 주름은 거의 모두 등록해야 했다. 마피아 녀석들은 배달부의 몸에 잉크를 발라 종이에 대고 찍은 다음 디지털화해 컴퓨터에 집어넣었다. 그렇지만 자기 돈을 빌려주면서 조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가 배달부 일을 하겠다고 지원하자, 마피아는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그를 채용했다. 돈을 빌릴 때 상담을 해 주었던 밸리 지역 간부급 조직원이 배달부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러니 마치 가족의 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진짜 무섭고 괴롭고 지저분한 가족이긴 하지만.
코사노스트라 피자 3569호점은 비스타가街를 따라 킹스 파크 몰을 지난 곳에 있다. 비스타가街는 과거 캘리포니아주에 속한 도로였지만 지금은 페어레인 도로 회사 CSV-5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 도로의 가장 큰 경쟁 상대는 지금은 크루즈웨이 도로 회사로 이름이 바뀐 과거 미국 도로 공사의 Cal-12라는 도로다. 밸리 지역에서 위로 올라가면 두 도로가 실제로 만나는 곳이 있다. 그 교차로에서 격렬한 분쟁이 일어난 적도 있었는데, 이후 산발적으로 저격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교차로가 아예 폐쇄되기도 했다. 결국 어느 개발업자가 교차로 전체를 사들인 다음 드라이브스루 쇼핑몰로 탈바꿈시켰다. 이제 도로는 그저 주차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떤 장소나 진입로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 주차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도로라는 원래 특성은 사라져 버렸다. 교차로를 지난다는 건 베트남전의 땅굴처럼 얽히고설킨 주차 시스템 안에서 길을 찾아내 통과한다는 뜻이다. CSV-5가 효율은 더 높지만, 도로의 포장 상태는 Cal-12가 낫다. 대개 페어레인 도로 회사는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는 걸 원하는 A 유형의 운전자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크루즈웨이사는 도로를 달리는 즐거움을 원하는 B 유형의 운전자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배달부는 미쳐 날뛸 정도로 A 유형에 속하는 운전자이다. 그는 시속 12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며 자신이 일하는 코사노스트라 피자 3569호점이 있는 곳에 온 신경을 쏟은 채 CSV-5 도로의 왼쪽 차선으로 접어들 준비를 한다. 마름모꼴인 배달차는 언뜻 보면 안 보일 정도로 새까만 색이다. 그저 도로 위 어두운 부분이 로글로 광고판 불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공랭식 자동차였다면 라디에이터 그릴이 있을 앞쪽에는 주황색 불빛 여러 개가 열을 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휘발유가 타오르는 불길 같다. 그 불빛은 앞서가는 다른 자동차들의 뒤쪽 창을 통해 실내에 달린 뒷거울에 반사되며 사람들 눈가에 이글거리는 불의 가면을 만들어 비춘다. 불빛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마치 폭발하려는 가스통 아래 의식이 말똥말똥한 채 꼼짝없이 묶여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옆으로 비켜서며 검은색의 피자 불 마차를 탄 배달부에게 길을 양보할 수밖에 없다.
CSV-5 도로 머리 위로 두 갈래 구름처럼 매달린 로글로는 무수히 많은 셀로 이루어져 빛을 뿜어내며 광고를 보여 주는데, 각 셀은 맨해튼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고안한 것이다. 그들은 광고 하나를 만들어 내는 대가로 배달부가 평생 버는 것보다 많은 돈을 받는다. 광고판들은 모두 두드러져 보이려고 애쓰지만 결국 온통 서로 뒤섞이고 만다. 특히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며 보는 모습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코사노스트라 피자 3569호점은 쉽게 눈에 띈다. 서로 경쟁하듯 광고판이 커지는 요즘 기준으로 봐도 높고 거대한 옥외 광고탑 덕분이다. 사실 엎드리고 있는 듯한 피자 가게 건물 자체는 각종 상표가 우글거리는 하늘 위로 광고판을 밀어 올린 거대한 아라미드 섬유(방탄 조끼 등에 사용되는 튼튼한 섬유) 기둥의 받침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등록 상표의 시대다.
광고판은 일시적으로 매출액을 끌어올리려고 만들어 금세 사라질 고전적인 형태의 모습이 아니다. 마치 오랜 세월을 견뎌 내라고 만든 기념탑처럼 보인다. 단순하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광고판에는 이탈리아산 양복을 말쑥하게 빼입은 엉클 엔조의 모습이 보인다. 양복의 가는 줄무늬는 힘줄처럼 구부러져 번쩍거리고, 가슴에 꽂은 손수건은 환하게 빛을 낸다. 완벽한 머리 모양은 뭘 발라 뒤로 빗어 넘겼는지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저가低價 미용실 가맹점 회사를 운영하는 엉클 엔조의 사촌 ‘이발사 아트’가 매만진 머리는 단정하게 일직선으로 자른 모습이다. 엉클 엔조는 그렇게 서 있다. 정확히 말해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눈길에서 친절한 아저씨다운 기운이 느껴진다.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삼촌 같은 태도로 서 있는 그의 모습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가족과도 같은 친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것’ 재단 제공
광고판은 배달부에게 이정표 역할을 한다. CSV-5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광고판의 아래쪽 귀퉁이가 스테인드글라스로 고딕 양식을 흉내 내어 만든 이 지역 ‘웨인 목사의 천국의 문’ 가맹점 아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지점이 되면 오른쪽으로 붙어야 한다. 오른쪽 차선에는 고물차와 미니밴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며 길을 아예 모르는지 스쳐 지나가는 가게 진입로마다 일일이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한 가족용 미니밴 앞으로 끼어든 다음 이웃 가게인 ‘후다닥 편의점’을 지나자마자 방향을 틀어 코사노스트라 3569호점으로 들어선다. 커다랗고 뚱뚱한 타이어가 투덜거리듯 소리를 내지만, 차는 페어레인 도로 회사의 특허품인 고高마찰 포장도로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고 피자 가게 배달차 대기 공간으로 들어선다. 앞에서 기다리는 다른 배달부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빨리 피자를 받을 수 있을 테고, 재빨리 움직이며 배달을 여러 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소리를 내며 차가 멈추자마자 배달차 옆구리에 달린 자동 덮개가 열리며 텅 빈 피자 투입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열린 덮개는 소리를 내며 딱정벌레의 날개처럼 뒤로 접힌다. 피자 투입구들은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피자를.
아직 여전히 기다리는 중이다. 배달부는 경적을 울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창문이 위로 열린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코사노스트라 피자 대학교에서 발간한 두툼한 업무 매뉴얼에서 ‘창문’, ‘차량 대기 공간’, ‘피자 준비 요원’이라는 세 항목을 보면 창문과 관련된 절차가 모두 적혀 있다. 창문은 절대로 열릴 일이 없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창문이 위로 올라간 걸로 끝이 아니다. 놀라 뒤로 자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라. 가게 안에서 연기가 흘러나온다. 배달차 안의 쿵쾅거리는 금속성 음악 사이로 귀에 거슬리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 알고 보니 피자 가게 안쪽에서 울리는 화재경보기 소리다.
배달부는 자동차 스테레오의 소리를 죽인다. 먹먹한 정적 속에서 고막에 신경을 집중해 듣다 보니 밖에서 울려 대는 화재경보 소리에 창문이 바르르 떨고 있다. 자동차는 시동을 건 채 기다린다. 피자 투입구 덮개를 너무 오래 열어 두었으니 안쪽에 피자 상자와 닿는 부분에 대기 오염 물질이 들러붙을 테고, 배달부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청소를 해야 할 것이다. 업무 매뉴얼에 따르면 피자의 세계에서 절대 벌어지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모든 게 흘러가고 있다.
안쪽에서는 미식축구공 모양의 몸매를 한 압하지야 공화국 출신 사내 하나가 두툼한 업무 매뉴얼을 펴든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 매뉴얼이 덮이지 않도록 늘어져 내리는 옆구리 살로 누른 채, 그는 숟가락에 달걀을 얹어 든 사람처럼 조심스레 뛰어다니는 중이다. 사내는 압하지야 공화국 사투리로 소리를 질러 댄다. 이 동네에서 코사노스트라 피자 가맹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모두 압하지야에서 이민을 왔다.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배달부는 팜스 메리베일에서 화재다운 화재를 본 적이 있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불이 나면 연기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오직 연기뿐이다.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연기가 나고 타는 소리가 들리며 가끔 멀리 떨어진 구름 속에서 치는 소리 없는 번개처럼 바닥 쪽에서 주황색 불빛이 번쩍거리곤 한다. 지금의 불은 그런 식은 아니다. 화재경보기를 간신히 작동시킬 정도인 불로 보인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니, 배달부는 어이가 없다.
배달부는 경적을 계속 눌러 댄다. 압하지야 출신 관리자가 창문으로 다가온다. 그는 배달부들에게 인터콤을 통해 의사를 전달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면 뭐든 하고픈 말은 말하는 즉시 배달부의 차량 내부에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마치 배달부가 무슨 달구지를 끌고 가는 사람이라도 되는 듯 서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려 한다.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흘리는 그는 영어 단어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면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댄다.
“불. 작은 거.”
그가 말한다.
배달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비디오테이프에 담기는 걸 알기 때문이다.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동시에 코사노스트라 피자 대학교로 전송되고, 그곳에 있는 피자 경영 과학 연구소는 내용을 분석한다. 분석 결과는 피자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교재로 사용하게 되는데, 어쩌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해고당해 생기는 빈자리를 메울 바로 그 학생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망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교과서적인 예로 사용될 수도 있다.
“새로 온 사람, 저녁 식사를 전자레인지에 넣었어. 알루미늄 껍데기까지. 펑.”
관리자가 계속 떠든다.
압하지야 공화국은 과거에 빌어먹을 소련 연방의 일부였다. 압하지야에서 막 이민 온 사람이 전자레인지를 만지는 건 심해에 사는 대롱 벌레가 뇌 수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대체 이런 녀석들을 어디서 데려오는 걸까? 미국 사람 중에는 망할 놈의 피자 하나 제대로 구워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
“피자나 하나 줘요.”
배달부가 말한다.
피자 이야기가 나오자 사내는 퍼뜩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는 창문을 닫더니 미친 듯 울려 대는 화재경보기를 끈다.
일제 로봇 팔이 피자를 하나 꺼내 다가오더니 피자 투입구 맨 위에 집어넣는다. 덮개는 피자를 보호하려고 다시 닫힌다.
배달부가 가게에서 빠져나온 후 속도를 높이며 앞창에 떠오르는 고객의 주소를 확인하고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결정하려는 순간 일이 벌어지고 만다.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또 멈춘다. 이번에는 차량에 탑재된 시스템이 스스로 멈춘 것이다. 운전석 조명이 붉은빛으로 바뀐다. 붉은색. 경고음이 계속 울려 댄다. 피자 상자에서 전달된 시간 정보가 유리창에 번쩍이며 나타난다. 20:00
녀석들은 배달부에게 시간이 20분이나 지난 피자를 준 것이다. 그는 주소를 확인한다. 2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이다.
배달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가속 페달을 밟는다. 성질대로 하자면 돌아가서 관리자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칼 두 자루를 꺼내 조그만 가게 창문으로 닌자처럼 뛰어든 다음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전자레인지 사이에서 녀석을 찾아내 피자 빵조각이 타들어 가는 순간에 해치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차 앞으로 끼어드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생각만 그렇게 할 뿐 차를 돌리지는 않는다. 아직은.
해낼 수 있다.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배달차 앞부분에 드러나는 주황색 불빛을 최대로 밝히고 전조등을 자동 모드로 바꾼다. 울려 대는 경고음을 무시한 채 스테레오를 택시 스캔에 맞춘다. 택시 스캔은 택시 운전사들이 사용하는 모든 주파수를 훑으며 특별한 교통 정보가 있는지 찾아낸다. 빌어먹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구나 원하면 택시 링가 강의 테이프를 사서 운전 중에 배울 수도 있다. 택시 운전을 하려면 택시 운전사들의 언어라 할 수 있는 택시 링가를 배워야 한다. 택시 운전사들은 그 말이 영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하지만, 백 마디를 들어도 단 한 마디조차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도 대충 분위기는 알 수 있다. 만일 도로에서 큰 사고라도 나면 택시 운전사들은 택시 링가로 떠들어 댈 것이다. 그런 경고를 받으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교통 지옥에 빠져
두 눈이 점점 더 커지다 못해 해골 뒤쪽으로 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거나,
아니면 느려 터진 이동 주택 뒤에서 꼼짝도 못 하다가
방광이 가득 찬 상태로 제시간에 맞추지 못하고
오, 신이시여
피자를 늦게 배달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차창에 나타난 시간은 22:06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생각나는 건 오직 30:01밖에 없다.
택시 운전사들이 뭔가 마구 떠들어 댄다. 택시 링가는 가끔 거친 외국어 발음이 섞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감미롭게 지껄이는 소리로 들려서 마치 깨진 유리 조각이 섞인 버터 같다. 계속 ‘손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손님이 뭔 대수라고. 손님을 목적지에 좀
늦게 데려다주면?
팁이 적어진다고? 그것 참 큰일이로군.
CSV-5 도로와 오아후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평소보다 엄청나게 밀린다는 말이 들린다. 그곳을 피하려면 ‘원저 하이츠’ 버브클레이브를 가로질러 가는 수밖에 없다.
모든 윈저 하이츠 주택 단지는 구조가 같다. 버브클레이브를 새로 조성할 때, ‘윈저 하이츠 개발 주식회사’는 도로 설계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산은 밀어 뭉개고 큰 강줄기는 물길을 돌려 버리곤 한다. 좀 더 안전한 운전을 위해 생명 공학적으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직업이 배달부라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윈저 하이츠에 가더라도 길을 잃는 법은 없다.
그러나 윈저 하이츠에 있는 집집마다 피자를 몇 번씩 배달하고 나면 그 안에 숨은 비밀을 알게 된다. 우리의 배달부처럼 말이다. 전형적인 윈저 하이츠라면 한쪽 출입구로 들어와 다른 쪽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앞을 막는 잔디밭은 하나밖에 없다. 그 단 하나의 마당 때문에 자동차는 버브클레이브를 가로질러 곧장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잔디밭 위를 차로 달리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윈저 하이츠 안을 10분 동안 꼬불꼬불 돌아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하나밖에 없는 잔디 마당에 바퀴 자국을 남길 배짱만 있다면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단번에 동네를 빠져나갈 수 있다.
배달부는 마당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피자를 배달하러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당을 잘 봐 두었고 꼼꼼히 분석했다. 그래서 창고나 야외용 탁자가 어디에 놓여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물론 어둠 속에서도 모든 걸 식별할 수 있다. 구워 낸 지 23분이나 된 피자를 들고 아직 갈 길이 먼 상태에서 CSV-5 도로와 오아후 도로가 막히기까지 한 상황이 되었을 때 써먹으려고 미리 익혀 둔 것이다. 일단 윈저 하이츠로 들어간 다음[배달부라는 전자 인식표를 확인한 출입구는 자동으로 열릴 것이다], 헤리티지 대로를 질주해 내려가다가 스트로브릿지 플레이스로 급회전한다[‘막다른 곳’이라고 쓴 표지판이나 속도 제한 따위는 무시하고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걸린 ‘아이가 놀고 있어요’ 표지판도 못 본 척해야 한다]. 과속 방지 턱을 어마어마한 타이어로 두들기듯 달린 후 스트로브릿지 서클 15번지 진입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 뒷마당 창고를 끼고 왼쪽으로 돈 다음 야외용 탁자를 살짝 피하면서[이 부분이 어렵다] 메이애플 플레이스 84번지 뒷마당 쪽으로 달리면 벨우드 밸리 도로로 나갈 수 있다. 그 길을 곧장 따라가면 바로 출입구가 나온다. 혹시 윈저 하이츠 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지만, 경찰이 벌려 놓은 타이어 파괴 장치는 한쪽으로만, 외부의 침입자를 막는 쪽으로만 향하고 있을 것이다.
배달차는 엄청나게 빨리 달릴 수 있다. 만일 배달부가 헤리티지 대로에 들어섬과 동시에 경찰관이 도넛을 한 입 베어 문다면, 그가 미처 입에 든 걸 삼키기도 전에 배달부는 오아후 도로로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이다.
쿵. 뭔가 느낌이 들더니 앞창에 경고하듯 붉은빛이 더 많아진다. 배달부가 탄 차의 바깥쪽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신호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누군가 그를 따라오고 있다. 왼쪽으로 약간 뒤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탄 녀석 하나가 그의 차 바로 뒤에 붙어 고속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배달부는 막 헤리티지 대로로 들어설 준비를 하던 참이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배달부는 그만 작살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작살은 거미 섬유 케이블 끝에 커다랗고 둥근 전자석이 달린 모습이다. 그렇게 생긴 녀석이 배달부가 모는 차 뒤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빌어먹을 작살을 던진 녀석은 서너 걸음 뒤에서 마치 배에 매달려 수상 스키를 타는 것처럼 파도타기를 즐기며 공짜로 달리고 있다.
거울로 뒤를 보니 주황색과 파란색이 보인다. 매달린 녀석은 그냥 길에 놀러 나온 애송이가 아니다.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다. 주황색과 파란색으로 된 옷은 여기저기 아모젤을 덧대어 울퉁불퉁할 정도인데, 그런 옷은 쿠리에들이 입는 작업복이다. 래딕스, 그러니까 ‘래디컬 쿠리에 시스템’에서 일하는 자이다. 쿠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중요한 물건을 전달하는 사람과 다를 게 없지만, 스스로 페달을 밟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달리는 차에 들러붙어 그들의 속도를 떨어뜨린다.
당연한 결과였다. 다급한 상황에 부닥친 배달부는 불빛을 번쩍거리며 내달리던 중이다. 도로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차였다. 쿠리에가 그에게 달라붙기로 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윈저 하이츠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시간은 충분하니까. 배달부는 가운데 차로를 달리는 느린 차 한 대를 추월한 다음 바로 그 앞으로 끼어든다. 쿠리에가 작살을 떼지 않으면 느린 자동차 옆구리에 세게 부딪힐 게 틀림없다.
됐다. 서너 걸음 뒤에 있던 쿠리에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뒤쪽 창문에 바짝 달라붙어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배달부가 그렇게 나올 걸 예상했는지 쿠리에는 작살 손잡이에 달린 전동 줄감개를 사용해 케이블을 감았고, 지금은 바로 배달차 위에 매달린 상태이다. 스케이트보드의 앞바퀴가 배달부의 자동차 뒤 범퍼 아래로 들어와 있다.
주황색과 파란색이 섞인 장갑을 낀 손이 뭔가 얇고 투명한 비닐 같은 걸 들고 앞쪽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운전석 쪽 창문을 철썩 때린다. 녀석이 차 유리창에 스티커를 붙인 것이다. 길이가 한 뼘 반은 되어 보이는 스티커에는 커다란 주황색 글씨가 깔끔하게 쓰여 있는데 차 안에 앉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글씨가 거꾸로 쓰여 있다.
배달부는 윈저 하이츠로 들어서는 입구를 놓칠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며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를 뚫고 제일 바깥쪽 차선을 가로질러 버브클레이브로 들어선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경계 초소에는 경비 요원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몸수색을 준비하고 서 있다.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면 알몸 수색도 불사할 것이다. 그러나 배달부가 탄 차가 코사노스트라 피자의 배달차란 걸 보안 시스템이 알아차리자 출입문은 마술처럼 열린다. 그가 출입구를 통과하는 사이 차 뒤에 진드기처럼 들러붙은 쿠리에 녀석은 국경을 지키는 경비원들에게 손을 흔든다! 미친놈! 늘 드나드는 것처럼 구는군!
어쩌면 여기 늘 들락거리는 녀석일 수도 있다. 윈저 하이츠에 사는 중요한 사람들에게서 중요한 뭔가를 받아 세관을 지나 다른 준準 국가 자치 지역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쿠리에는 그런 일을 한다. 그래도 그렇지.
속도가 떨어져 생각보다 느리게 달리는 바람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 가고 있다. 쿠리에는 어디로 갔지? 아, 다시 줄을 약간 푼 채 뒤에 매달려 있군. 배달부는 녀석을 깜짝 놀라게 해 줄 참이다. 부서진 채 버려진 아동용 세발자전거 위를 시속 100킬로미터로 지나가도 보드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볼까? 이제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쿠리에는 수상 스키를 타는 것처럼 몸을 뒤로 젖힌다. 배달부는 거울로 뒤를 힐끔거리며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쿠리에는 보드를 타고 멀리 떨어지며 길게 원을 그리더니 바로 옆으로 붙어 헤리티지 대로를 따라 차와 나란히 달리며 다른 스티커를 꺼내 든다. 이번에는 앞창에 붙인다! 내용은
배달부는 이런 스티커가 어떤지 들은 적이 있다. 떼어 내려면 몇 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차를 깔끔하게 손보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야 한다고 한다. 이제 배달부는 할 일이 두 가지로 늘었다. 뒤에 달라붙은 쓰레기를 어떻게든 떼어 내야 하고, 빌어먹을 피자를 배달해야 한다.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은
24:23
그러니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37초밖에 되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운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할 시간이다. 그는 아무 예고 없이 차를 골목길로 몬다. 혹시나 쿠리에가 길모퉁이에 선 표지판에 부딪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통하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자동차의 앞바퀴를 본다. 바퀴가 방향을 바꾸는 걸 주시하는 놈들은 절대 놀라는 법이 없다. 스트로브릿지 플레이스의 길을 달린다!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길게 느껴진다. 마음이 바쁠 때 흔히 그런 생각이 든다. 멀리 앞서가는 번쩍거리는 차들, 도로변에 비스듬히 주차해 놓은 차들이 보인다. 원래는 이렇게 길거리에 차를 세워 두면 안 된다. 이정표가 되는 집이 나타난다. 연한 푸른색 비닐 자재로 지은 이층집 옆에 차고가 딸렸다. 배달부는 앞에 나타난 좁은 진입로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쿠리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엉클 엔조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어쩌면 목욕 중일 수도 있고, 화장실에 앉아 있거나 어떤 여배우와 뒹굴고 있거나 아니면 스물여섯 명이나 되는 손녀딸 중 한 명에게 시칠리아의 고향 노래를 가르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 도로에서 좁은 진입로로 들어서는 부분이 경사가 져 있어 자동차 앞바퀴에 붙은 완충 장치가 엔진 쪽으로 밀려들어 오지만, 원래 완충 장치는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진입로에 주차한 차를 피해 낮은 관목 울타리를 뚫고 마당으로 방향을 튼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렉서스 자동차가 진입로에 서 있는 걸 보니 오늘 손님이 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마당으로 가면 창고를 피해야 하는데…….
창고가 없네. 부숴 버린 게로군.
그럼 다음 문제는 옆집 마당에 놓인 야외용 탁자지.
잠깐, 웬 담이지? 여기 언제 담이 생긴 거야?
그렇다고 브레이크를 밟아서는 안 된다. 더 속도를 높이고 기세를 몰아 담을 뚫고 나가야만 한다. 겨우 허리 높이밖에 안 되는 나무 담벼락일 뿐인데.
담은 쉽게 뚫리고 자동차는 속도가 10퍼센트 정도 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나무 담벼락이 새로 생긴 게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든 것일 수도 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물도 없는 뒷마당 수영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다.
만일 수영장에 물이 가득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최소한 자동차는 부서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랬더라면 코사노스트라 피자에 새 차를 빚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영장 맞은편 벽을 향해 폭격기처럼 날아간다. 에어백이 터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커튼이 열리면서 새롭게 열린 그의 삶이 드러나듯, 부풀어 올랐던 에어백에서 바람이 빠져나간다. 그는 텅 빈 수영장 속에 멈춰 버린 자동차에 앉아 경찰이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기요틴의 날처럼 머리 뒤쪽에 자리 잡은 피자 상자 겉에는 25:17이란 숫자가 번쩍거리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누군가 말한다. 여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찌그러진 창틀 너머를 바라본다. 안전유리로 된 창문은 똑같은 결정체 모양으로 금이 간 상태로 창문 가장자리에만 간신히 남아 있다. 말을 건 사람은 아까 그 쿠리에다. 쿠리에는 남자가 아니고 젊은 여자다. 이제 고작 스무 살도 넘지 않은 여자아이다. 다친 곳도 없이 깔끔한 모습이다. 보드를 탄 채 수영장 안으로 뛰어든 그녀는 이쪽저쪽을 번갈아 오가며 수영장 한쪽 벽 끝까지 지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반대편으로 미끄러져 올라가곤 한다. 오른손에 작살을 들었는데 케이블을 모두 감아 전자석이 손잡이에 붙은 모습이 마치 우주에서 사용하는 광선총처럼 보인다. 수백 개의 리본과 메달을 단 장군처럼 가슴이 반짝거리는데 그 조그만 직사각형 물체들은 리본이 아니라 바코드다. 번호가 새겨진 바코드는 여기저기 사무실이나 고속 도로 또는 준 국가 자치 지역에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이봐요!”
여자가 말한다.
“그 피자 어디로 가느냐고요.”
배달부는 죽게 생겼는데 여자는 까불어 대고 있다.
“화이트 컬럼, 오글소프 서클 5번지야.”
그가 말한다.
“내가 배달할 수 있어요. 덮개를 열어요.”
그는 심장이 두 배로 커지는 느낌이 든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목숨을 건질 수도 있다. 그는 버튼을 눌러 피자 투입구 덮개를 연다.
수영장 바닥을 지치며 지나던 쿠리에가 날쌔게 피자를 빼낸다. 배달부는 마늘 맛을 풍기는 양념이 피자 상자 한쪽으로 온통 몰릴 생각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 순간, 여자는 피자 상자를 옆구리에 세로로 끼워 든다. 배달부는 도저히 눈 뜨고 그 장면을 볼 수가 없다.
그래도 그녀는 피자를 배달할 것이다. 엉클 엔조는 차갑게 식고 엉망이 된 피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오직 늦게 배달한 피자에 대해서만 사과하면 된다.
“이봐, 이거 가져가.”
배달부는 단단하게 차려입은 팔을 깨진 창으로 내민다. 흐릿한 뒷마당 불빛 아래, 하얀 직사각형 물건이 빛을 발한다. 명함이다. 반대편으로 지치고 올라갔던 쿠리에가 곁을 스치며 명함을 채가더니 읽는다. 명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명함 뒤에는 어떻게 그와 연락할 수 있는지 너절하게 쓰여 있다. 일반 전화번호. 세계 어디서나 연결할 수 있는 휴대 전화번호. 사서함 번호. 대여섯 개나 되는 통신 네트워크상의 주소들. 그리고 메타버스의 주소까지.
“멍청한 이름이네요.”
여자는 옷에 달린 백 개도 넘는 주머니 가운데 하나에 명함을 집어넣으며 말한다.
“하지만 잊을 수는 없겠지.”
히로가 말한다.
“당신은 해커라면서…….”
“왜 피자를 배달하고 있느냐고?”
“맞아요.”
“프리랜서 해커니까 그렇지. 이봐,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빚졌군.”
“난 와이티[Y.T.]에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 발로 바닥을 밀어 힘을 모은다. 그러더니 튀어 나가듯 수영장 밖으로 날아올라 사라져 버린다. 그녀가 올라탄 스케이트보드 바닥에 달린 스마트 휠은 바깥쪽으로 뻗은 무수히 많은 살이 땅바닥 모양에 맞게 변하면서 움직인다. 그래서 그녀는 불에 달군 프라이팬 위로 미끄러지는 버터 덩어리처럼 매끄럽게 잔디밭 위를 달린다.
배달부 일을 그만둔 지 30초가 지난 히로는 차에서 나와 트렁크에서 꺼낸 칼 두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윈저 하이츠 영토를 두 다리로 가로지르며 한밤의 가슴 뛰는 탈주극을 벌일 준비를 한다. 조금만 가면 오크우드 에스테이트 버브클레이브와 맞닿은 국경이 나타날 것이다. 주변 지형은 깡그리 외우고[완벽한 건 아니지만] 있다. 게다가 그는 버브클레이브의 경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안다. 그 역시 경찰 일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아마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아슬아슬할 것이다.
위쪽 수영장 주인집에서 불빛이 하나 켜지더니 침실 창문에서 아이들이 그를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잠이 덜 깬 표정을 짓는 아이들은 모두 ‘닌자 뗏목 전사’ 캐릭터가 그려진 따뜻한 잠옷을 입었다. 잠옷은 불에 타지 않도록 방염 처리가 되었거나 항발암 물질 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두 가지 처리가 모두 되지는 않았겠지만. 뒷문으로 아이들 아빠가 겉옷을 걸치며 나오는 게 보인다. 따뜻한 가족이다. 불이 환하게 켜진 집에 사는 안전한 가족. 그도 30초 전까지는 그런 가족의 일원이었는데.
히로 프로타고니스트와 비탈리 체르노빌은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에 있는 넓은 ‘임대 창고’ 안에서 마음 편하게 함께 살고 있다. 방 크기는 폭이 7미터 정도고 깊이는 10미터가 조금 안 된다. 바닥은 두툼한 콘크리트에 벽은 주름진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다른 옆 창고와 달리 사치스러운 건 북서쪽을 향해 위로 밀어 올리는 철판 문이 달려 있다는 점이다. LA 국제공항 너머로 태양이 지는 이 시간쯤이면 창고 안으로 붉은 석양빛이 약간 비치기도 한다. 가끔 777 여객기나 수호이/가와사키 극초음속 대형 화물기가 유도로 위에서 움직이다가 꼬리 날개로 석양을 가리거나 배기가스를 내뿜어 붉은 햇빛을 이리저리 퍼지게 하면 빛으로 된 얼룩무늬가 벽에 수를 놓는다.
이보다 더 못한 곳도 있다. 바로 여기 임대 창고들 가운데에도 이들이 사는 방보다 훨씬 사정이 못한 곳도 많다. 별도로 문이 있으려면 이들 둘이 사는 곳처럼 크기라도 커야 한다. 다른 창고 대부분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하역장으로 들어가 주름진 철판으로 만든 복도와 화물 엘리베이터들이 미로처럼 얽힌 곳을 통해 드나들어야 한다. 창고 안쪽 폭이 1.5미터에 깊이가 3미터밖에 안 되는 그런 빈민굴에서는 남아메리카 인디언 출신 이민자들이 수북이 쌓인 복권에 불을 붙여 콩 요리를 하거나 코카나무 이파리 한 줌을 데치곤 한다.
임대 창고를 원래 목적으로 사용하던 옛날[다시 말해 살림살이가 넘쳐나는 캘리포니아 주민에게 물건을 보관할 장소를 싼값에 제공하던 시절]에 어떤 업자들이 창고 사무실을 찾아와 가짜 신분증을 보여 주고 폭과 깊이가 3미터씩인 창고를 여러 개 빌린 후에 유독성 화학 폐기물이 가득 든 강철 드럼통을 잔뜩 집어넣고 나 몰라라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그 처리를 임대 창고를 운영하는 회사가 떠맡았는데, 소문에 따르면 창고 회사는 문제의 창고들에 자물쇠를 채운 후에 장부에서 지워 버렸다고 한다. 창고에 사는 이민자들 사이에 그런 곳에서 화학 폐기물을 뒤집어쓴 귀신이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한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잠긴 창고에 숨어들어 가려고 하면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히로와 비탈리가 사는 창고에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침입하려고 한 적이 없다. 훔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 두 사람은 살해당하거나 납치를 당하거나 심문을 받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히로에게 아주 좋은 일본도가 두 자루 있지만, 그는 칼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게다가 그렇게 엄청나게 위험한 무기를 훔친다는 건 훔치려는 자에게 논리적으로 매우 불리하다. 왜냐하면 칼을 뺏으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이기는 쪽은 늘 손잡이를 잡은 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로는 상당히 괜찮은 컴퓨터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어딜 가든 대개 가지고 다닌다. 비탈리가 가진 거라곤 럭키 스트라이크 담배 반 갑, 전기 기타 하나 그리고 숙취뿐이다.
지금 비탈리 체르노빌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쭉 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고, 히로 프로타고니스트는 일본식의 낮은 탁자 앞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다. 탁자라곤 하지만 콘크리트 벽돌을 몇 개 쌓은 위에 화물 받침대를 얹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해가 지면서 임대 창고촌의 일부인 이런저런 가맹점들의 네온 간판이 내뿜는 빛이 붉은 석양빛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보기 흉할 정도로 짙은 색인 로글로 간판 불빛이 두 사람이 사는 창고 안 어두운 구석을 밝힌다.
카푸치노 커피 같은 피부색의 히로는 머리를 여러 가닥으로 가늘게 땋아 내렸다. 예전처럼 머리칼이 수북하지는 않지만, 아직 젊어서 머리가 벗어졌거나 벗어지는 중은 아니다. 이마가 아주 약간 넓어지면서 광대뼈가 약간 두드러져 보일 뿐. 반짝이는 고글처럼 생긴 큰 안경을 썼는데 머리 앞부분 절반 정도를 가렸다. 고글의 테에 달린 조그만 이어폰은 귀에 꽂혀 있다.
이어폰에는 일종의 소음 제거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그런 장치는 규칙적인 소음에 매우 잘 작동한다. 길 하나 건넌 곳에서 대형 제트 여객기가 이륙하려 활주로를 내달릴 때도 그 소리는 별 의미 없는 나지막한 웅얼거림으로 들릴 정도다. 하지만 비탈리 체르노빌이 실험성 짙은 기타 연주를 뿜어낼 때면 여전히 귀가 아프다.
고글 속에서 퍼져 나오는 빛 때문에 눈가에 흐릿하게 엷은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고 고글에는 안갯속으로 끝없는 어둠 속을 향해 길게 이어진 큰길이 비쳐 보인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불을 밝힌 큰길은 마치 광각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비틀린 모습이다. 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그려낸 가상 공간이다.
거리의 모습 아래로 보이는 히로의 눈은 동양인처럼 보인다. 눈은 일본에서 살았던 한국인 엄마를 닮았다. 눈을 제외한 외모는 텍사스 출신 흑인이자 군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군대가 짐 장군이 이끄는 ‘방위 시스템’이나 밥 제독의 ‘국가 보안대’ 같은 서로 경쟁하는 여러 조직으로 나뉘기 전의 일이다.
화물 받침대로 만든 탁자 위에는 네 가지 물건이 보인다. 히로가 사 먹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퓨젯 사운드’ 지역에서 생산된 고급 맥주 한 병. 일본에서는 카타나라고 부르는 긴 칼과 와키자시라고 하는 짧은 칼 한 자루씩. 이 두 자루의 칼은 히로의 아버지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본에서 노획한 것들이다.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보인다.
컴퓨터는 검은색으로 단순한 삼각기둥 모양이다. 전원 코드는 보이지 않지만, 뒤쪽 구멍에서 튀어나와 나선형으로 꼬인 가느다란 반투명 플라스틱 관이 탁자 위와 바닥을 지난 다음 잠든 비탈리 체르노빌의 머리 위쪽 벽에 허술하게 설치된 광섬유 소켓에 꽂혀 있다. 플라스틱 관의 중심에는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광섬유가 들어 있다. 이 광섬유를 통해 히로의 컴퓨터는 나머지 세상과 수많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같은 양의 정보를 종이에 인쇄해 전달하려면 747 화물기에 전화번호부와 백과사전을 가득 담아 히로가 사는 창고에 몇 분 간격으로 계속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영원히.
이 컴퓨터 역시 히로에게는 과분한 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 컴퓨터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해커 사회에서 히로는 재능이 뛰어난 방랑자로 알려졌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히로는 그런 삶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어른이라고 할 정도로 나이를 먹자 그런 삶이 뭘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와 이십 대 초반은 일요일 아침과 토요일 밤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그는 실업자 신세에 돈도 한 푼 없다. 게다가 몇 주 전 장래성 없는 무의미한 직업 가운데 유일하게 좋아했던 피자 배달부라는 일자리마저 잃은 상태다. 그는 그날 이후 비상시 예비로 하곤 했던 다른 일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CIC를 위해 프리랜서 정보 조사 요원으로 일하는 것이다. CIC는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중앙 정보 회사’를 말한다.
일은 간단하다. 히로는 정보를 수집한다. 소문이나 비디오테이프 또는 오디오 테이프, 컴퓨터 디스크에 든 정보 조각, 서류를 복사한 것. 최근에 일어난 큰 사건에 관한 농담 같은 것도 괜찮다.
그는 그런 정보를 CIC 데이터베이스에 올린다. CIC의 데이터베이스는 ‘도서관’이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의회 도서관’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대부분 ‘의회’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지경이다. 게다가 ‘도서관’이란 말까지도 의미가 사라지는 참이다. 과거에 도서관이라고 하면 대개 오래된 책들이 가득 들어찬 곳을 의미했다. 그런 도서관에 비디오테이프나 음반, 잡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모든 정보는 기계로 읽을 수 있는 형태, 다시 말해 0과 1로 변환되기 시작했다. 매체의 수가 증가하면서 정보는 점차 최신 것들로 바뀌었고, 도서관의 정보를 검색하는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졌으며 결국 의회 도서관과 중앙 정보국[CIA]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가 사라지고 말았다. 우연히도 정부가 붕괴하던 시점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두 기관은 어마어마한 양의 주식을 발행하며 합병했다.
수백만 명이나 되는 다른 정보 조사 요원들도 히로처럼 수백만 개나 되는 다른 정보를 전송하고 있다. CIC의 주요 고객인 대기업이나 국가 단체들은 유용한 정보를 찾아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곤 한다. 그러다 만일 히로가 올린 정보가 쓸 만하다고 생각하면 히로에게 대가를 지급하는 것이다.
1년 전, 히로는 버뱅크에 사는 영화 관계자가 쓰레기통에 버린 영화 대본 초본을 통째로 훔쳐 도서관에 전송했다. 대여섯 군데의 영화사가 그 정보를 열람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돈으로 6개월 동안 먹고 살며 휴가를 즐겼다.
그때 이후로 생활은 궁핍해져 갔다. 도서관 안에 든 99퍼센트의 정보는 전혀 이용되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체험한 시간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쿠리에로 일하는 누군가로부터 비탈리 체르노빌을 소개받은 후, 그는 몇 주 동안 열심히 새로운 음악 경향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LA 지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폭발적인 우크라이나풍 퍼즈 그런지 음악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철저히 분석한 내용에 비디오 자료와 오디오까지 담아 도서관에 올렸다. 하지만 음반사나 대행사 또는 록 비평가들 가운데 누구도 그 자료를 열어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매끄러운 평면인 컴퓨터 윗면에 튀어나온 어안 렌즈는 반짝거리는 반구 형태를 띠고 있는데, 자줏빛으로 광학 코팅이 되어 있다. 히로가 컴퓨터를 사용할 때면 늘 이 렌즈가 딸깍 소리와 함께 위로 튀어나와 자리를 잡는데, 그러면 렌즈 아랫부분과 컴퓨터의 표면이 함께 붉은색으로 변한다. 동네 광고 간판들의 불빛이 컴퓨터 표면에 조그맣게 비친다.
히로는 그런 모습이 관능적으로 보인다. 몇 주 동안이나 여자와 제대로 즐기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그럴 이유는 있다. 일본에서 여러 해 근무한 히로의 아버지는 카메라에 미친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