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여우의 빛』이 있다. 수주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이동욱 시집
문학동네시인선 164 이동욱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가 있고
시인의 말
어느 날 나는 언어와 커피를 마셨다.
마주앉은 그는
이제 막 긴 여행을 마친 후였다.
테이블에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들떠 있었고, 그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나는
냅킨 한 장을 들어 물방울 위에 얹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한 줄씩 나를 지우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이동욱
차례
1부
우리는 서로 마음에 든다
때로는 짐작보다 가까운 곳에서
물을 담은 병이 쓰러진다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외부로 나온 물은 곧 방향을 결정한다
바닥을 적시며
다른 바닥을 만든다
사람들이 피해간다
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내겐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는 몇 개의 알약을 처방받았다
몸을 한 번 뒤척이는 순간
중얼거리며 물은
내게 조금 더 가까워진다
저장된 일상을 적신다
기억 위로 알약이 떨어지면
꽃이 핀다
나는 그중에서 아는 꽃을 꺾는다
끊어진 자리가 환하다
금방 다른 꽃이 필 것 같다
쓰러진 병에서 계속 물이 나온다
빠져나온 물의 양만큼
내 몸의 공기가
자진해서 병 속으로 들어간다
집으로 돌아와
우산을 펼쳐놓았다
방안에 작은 공간이 생겼다
누군가 찾아올 것처럼,
바닥으로 고이는 빗물과 너는
밖에서 온 것들
우리는 몇 개의 표정으로
장미가 넘치는 담장을 지나고 있었을까
찻잔이 받아들이는 차가운 소리였을까
너는 우산을 쓰고 방에 앉아 있다
내가 일어나자
우산은 살을 접어 네 몸을 덮는다
곧 가을이 되었고
오랫동안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다녔다
달빛 아래 목련이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도록
맨살에 새로 산 셔츠를 입은 봄밤이다
바닥에 떨어진 목련이다
목련을 물고 있는 가로등이다
내게 아직
허기진 빛이 있어
미신처럼
나를 두고
머리를 꼬며
외로 떨어지는
목련이다
그 위로
발을 붙였다 뗀다
누군가 강물 속으로 돌을 던진다
물살은 남김없이 이물질을 껴안는다
움직이지 못하게 돌을 품어
강의 굴곡은 이토록 소란하다
며칠째 물속에 누워
돌이 풀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관계에서 떨어져 딱딱해진다
그동안 사람들은
몇 개의 감정을 더 포기할지 모른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가윗소리가 내 몸을 지나간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이 방에서
나는 실루엣처럼 수척해질 것이다
새들이 가로수마다
숯불 같은 꽃을 놓고 있다
꽃물이 밴 입술을 두고
환절기를 빠져나간다
연민을 안고 있으면 내가 먼저 차가워지네
상상하면 이루어지는,
무서운 꿈을 꾸었지
유리문에 손바닥을 남겨두고 네가 사라지면 우리는 회전하겠지 돌면서 자라겠지 막다른 골목은 혼잣말이 돌아나오는 곳 숨이 짧은 사람의 얼굴과 목젖을 지나 한 걸음, 두 걸음 생각하는 목소리마다 새를 토해냈네
창밖으로 길게, 하늘로 자라는 식물처럼 환하게 몸을 내밀었네 내려앉는 새에게 기꺼이 어깨를 빌려주려고
새는 나와
인간의 성대가 기억하는 짧은 입맞춤을 나눴다
그림을 거부한 다음부터
내 침묵은 빈 공간을 순례한다
이곳은 면도날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닮아간다 관자놀이를 눌러 생각을 키울 때 몰두한다는 것은 먹이를 향한 조용한 응시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이 표정을 풀고 반죽처럼 차분해진다 상처가 닳아 소리가 되는 밤 누군가 눈 밑에 소금을 넣고 흔들어댄다
물감은 팔짱을 풀어 다른 색을 껴안는다
바닥에 닿는 물방울은 몸을 떨었다
시선이 닿았던 자리를 하나씩 모은다
각도와의 조용한 생활이 시작된다
지금 돌아서는 황소의 각막으로
저 꽃은 투쟁이다
온몸이 피의 육질로 덮일수록
함성은
두터운 벨벳처럼 내려앉는다
전선 위의 거미는 강박을 탐구하는 자세와 닮았다
품에서 솟아난 다리가 잠시 습기 속으로 잠길 때 뾰족한 발끝에 눅눅한 공기가 하나씩 터지며 밀려난다 저기, 라고 들어 보이던 그녀의 손가락과 창문과 한여름 감기와 알약이 거미의 발에 꿰어져 있다 거미가 몸을 일으킬 때
소나기는 다시 돌아오고
바람이 분다 남아 있던 빗방울이 거미줄을 따라가면서 야위어지듯 목숨을 부추기며 바람이 분다 현수막처럼 펄럭이는 거미의 집 거미의 집엔 창이 많고 창은 모두 비어 있어서
열어놓은 창으로 비가 들이쳤다
도대체 가늘고 긴 거미의 다리가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끔씩 조그만 털이 돋아나는 피부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어쩌면 내 편지가 가족을 슬프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선 위의 거미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녀의 손가락은 공중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바람이 몰아오는 비린내 속으로 내 머릿속으로 그녀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담근다 담갔다가 다시 뺀다 다이빙 선수의 도약처럼 완벽한 직선이다 저 완고한 자세가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전부일지 모르지만
거미의 집에는 많은 창이 있지만
오늘
나뭇잎을 통과하는 햇빛은 경쾌하다
하지만 왜 나뭇잎은 그림자를 바닥에 버리는가
쉽게 자신을 반납하는
견딜 수 있다는 듯 닮은 것들은 가까이 있다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살고 생활 속에서 벌레의 더듬이는 필사적으로 길어진다
서랍을 정리하다 오래된 편지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서랍은 낡아간다
펜을 들고 견고한 필체의 한 획을 다시 열어본다
그 안의 사연을 다 받아 적는 밤에 대해서
두 사람이 싸우고, 유리병은 깨진 후 더 아름답다 액자 속 결혼사진은 건조하고 꽃은 시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죄책감을 베고 잠이 든다
기울어지지 않으면 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