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 김소월, 「개여울」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먼저 그해 여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89년, 초등학교 4학년인 한스와 나는 경기도 부영리에 있는 기린천에 몸을 반쯤 담그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딸기잼처럼 녹아 흐르는 열기. 군인들을 태우고 가는 거대한 군용 트럭. 먼지가 이는 비포장도로. 돌멩이와 담뱃갑. 종이 뭉치. 그리고 납작하게 말라 죽은 개구리. 여름방학식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뒤로 걷기도 하고, 눈을 감고 걷기도 하고, 눈을 감은 채 뒤로 걷기도 했다. 책가방은 열려 있었고, 신맛이 나는 불량 식품을 질겅질겅 씹었다. 씹고 삼키는 것보다 씹고 뱉은 맛이 좋았다. 어떻게 하면 더 불량하게 보일 수 있을까 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봐 주지 않았다. 염색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에서는 이상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이 냄새 왠지 좋지 않아. 나도 그래. 좋은 거 같아. 어버버버. 한스와 나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다가 기린천에 이르렀다. 들어갈까. 들어가자. 쨍한 더위에 훌렁훌렁 옷을 벗고 강물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어떤 말에도 미친 듯이 웃어 댔다. 멀리 도로 위로 간간이 차가 지나갈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에 버려진 아이들처럼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우리들의 웃음이 여름의 과일을 더 알록달록하게 만들고 곤충들을 더 멀리 뛰게 할 것이다. 우리들은 간지럼과 부끄럼을 잘 타는, 태생적으로 겁이 많은 귀여운 물고기들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을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름 저편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군용 헬리콥터가 지나갔다. 헬리콥터가 어디서부터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루에도 두세 번씩 날아갔다. 헬리콥터는 사라지고 소음의 잔향만 남았다. 허공에서 한스와 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한스의 가느다랗게 찢어진 눈이 더 찢어져 보였고, 투명한 뺨은 내 얼굴이 비칠 정도로 환했다. 한스의 두꺼운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넌 작은 가지 입술이 되었구나. 어버버버. 한스가 추워,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의 입술도 보라색으로 변해 있을까. 태양은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같은 자리에 있고, 물 위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추워. 아니, 안 추워.”
나는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부딪쳤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못할 거야. 어버버버.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속으로 말했다. 내 입술의 움직임을 읽었는지 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숨 막힐 것 같은 침묵과 갈증의 시간이 흘렀다. 물방울이 맺힌 한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한스가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면서 잔물결이 일었다. 물결 위로 빛이 쏟아졌다. 눈에 비친 세계가 일렁였다. 나는 그 빛의 조각들을 셀 수 있는 기억의 천재 조니가 될 수도 있었다. 물속의 수초인지 거머리인지가 종아리로 기어 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강물의 중심으로 좀 더 들어갔다. 배꼽 높이만큼 물이 차 있었다. 나는 발가락으로 흙덩이를 움켜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다시 짧은 시간이 흘렀다.
한스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으려던 찰나 나는 무릎을 세워 한스의 배를 툭 쳤다. 그건 결코 거부의 몸짓은 아니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한스는 내 머리를 잡고 물속에 집어넣었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나보다 작은 체구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왜 그래, 미친놈아. 내가 몸부림을 칠수록 나를 찍어 누르는 한스의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부유물이 뒤섞인 더러운 물의 소용돌이가 나를 집어삼키려 했다. 넌 나를 죽일 거니. 한스는 나의 말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가져가려고 한 것일까. 나는 이제 기린천의 물고기가 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물속 세계와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흔들림, 흔들림뿐이었다. 나는, 한스는 하나의 흔들림이었다. 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다. 결국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머릿속에서 주사위를 던졌는데 계속 같은 숫자가 나왔다. 하나의 점. 하나의 점이었다. 한스의 왼쪽 눈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점이 떠올랐다. 한스는 사라지고 그 점만 머릿속에 둥둥 떠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죽기 직전의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입으로 개구리물을 토해 내며 눈을 뜨자 한스 대신 해태 타이거즈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 어쩌다 그렇게 늙었니?! 넌 야구를 싫어하잖아?! 그 얼굴을 보고 다시 기절했다가 눈을 떴다. 이번에는 남자 옆에 부엉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또다시 기절한 뒤 깨어난다면 기린천이 꽝꽝 얼어붙어 있고 부엉이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기린천의 겁쟁이 물고기가 된 것일까. 눈을 비비며 시야의 초점을 되찾자 남자 옆에 앉아 있는 것은 부엉이가 아닌 부엉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갈색 가방이었다. 어째서 가방이 부엉이로 보였던 것일까. 나는 지금 누군가의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일까. 기린천 주변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몇 겹의 열풍이 천변 주위의 이름 없는 풀들을 훑고 지나갔다. 풀벌레 몇 마리가 날아다녔다. 윤기를 뽐내는 풀이 있을 것이다. 바람에 젖은 풀이 있을 것이다. 시든 풀이 있을 것이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풀이 있을 것이다. 자라고 싶어도 자랄 수 없는 병든 풀이 있을 것이다. 풀도 아니면서 풀인 척 풀 속에 숨어 풀이 되기를 기다리는 풀도 있을 것이다. 풀이 되기 싫어 풀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풀 짓을 다 하는 풀도 있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난 아니야. 풀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연은 위태로운 적이 없다. 나는 공포감을 느끼지 말아야 했다. 나는 불안감을 느끼지 말아야 했다. 한스야, 너는 어디 있니?! 어디로 갔니?! 나는 울어야 했다. 부엉 부엉 부엉.
“죽은 줄 알았어요.”
남자가 물에 빠진 나를 구한 것일까. 남자가 팔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목소리가 불쏘시개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귓속에서 물이 출렁거렸다. 왜 존댓말을 하는 것일까. 처음으로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어른을 만난 것이다. 혹시 남자는 어느 마을에나 있다는 바보가 아닐까. 배가 고프면 바보들은 아이를 잡아먹기도 한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내 몸에 닿았다. 나는 손을 대기만 해도 피쉬쉬 까라지고 마는 연약한 생물체처럼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요?”
목소리가 불쏘시개다. 몹시 부끄러웠다. 축축한 팬티 한 장으로는 내 몸을 다 가릴 수 없었다. 어버버버. 부엉 부엉 부엉. 남자는 자동차 정비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물에 젖은 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은 처음 봤다. 얼핏 봐도 위에 여섯 개, 아래에 네 개였는데, 내가 모르는 곳에, 가령 겹주머니나 안주머니 같은 것이 더 있는지도 몰랐다. 주머니마다 뭔가가 들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오른쪽 윗주머니의 붉은 안감이 혀를 내밀 듯 삐져나와 있었다. 포켓맨이라는 단어가 혀끝에 맴돌았다.
포켓맨이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소리가 나의 목을 조여 왔다. ‘도망쳐도 다른 길은 없다.’ 나머지 공부가 싫어 몰래 달아나려던 나의 목덜미를 잡은 선생님이 말했었다. 선생님의 옆구리에서 핫도그 냄새가 났었다. 어째서 지금 그 말이 떠오른 것일까. 도망치면 포켓맨이 나를 잡아 납작하게 만든 다음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찢어진 나의 한 조각을 전리품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것이다. 포켓맨의 주머니 속에는 찢어진 아이들의 조각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누가 그 조각들을 맞춰 볼 수 있을까. 주변엔 포켓맨과 나밖에 없었고 뜨거웠던 태양의 열기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포켓맨이 가방 속에서 노란 수건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받지 마라. 받으면 안 된다. 받지 않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수건은 뽀송뽀송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닦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수건을 문대며 주변의 내 옷들을 찾았다. 나쁜 자식. 한스가 내 바지를 입고 가 버렸다. 할 수 없이 한스의 초록색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내가 옷을 챙겨 입자 포켓맨이 강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얼굴에 보기 싫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한스의 반바지가 앞뒤를 조여 왔다. 가만두지 않겠다. 바지 속 피쉬를 터뜨려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겠다. 한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몸에 돋아난 물방울이 녹아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잘 썼습니다,라는 뜻으로 인사를 하곤 수건을 돌려주려고 하자 포켓맨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머리에 아직 물이 많아요.”
잠시 후 포켓맨이 가방에서 비29 두 봉지를 꺼내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비29가 두 봉지나 가방에 있다니. 부엉이 가방 속에는 얼마나 많은 비29가 들어 있을까. 의심과 달리 나의 손은 이미 비29의 봉지를 뜯으려 애쓰고 있었다. 잘 뜯어지지 않았다. 포켓맨이 자신의 것을 뜯어 나에게 주고 내 것을 가져가 뜯은 뒤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누군가와 함께 과자를 먹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포켓맨이 말했다.
“과자도 같이 먹으면 맛있구나.”
비29를 소리 나게 씹으며 또다시 혼잣말을 했다. 나는 포켓맨의 혼잣말과 함께 비29를 입안에 넣었다. 카레 향이 입안에 퍼졌다. 모양은 꼭 벌레의 유충 같고, 특이하게도 카레 맛이 나서 한번 먹어 본 뒤로 쳐다도 보지 않았었는데 비29가 이렇게 맛있었나. 그렇게 나는 노란 수건을 머리에 쓰고 포켓맨과 함께 눈앞의 기린천을 바라보며 비29를 먹고 있었다. 포켓맨이 나의 이름을 물어보면 한스의 본명을 말해 줘야지 하고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포켓맨의 이름은 주머니일 것이고 주머니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고 어머니는 그러니까 엄마는 에그머니나라는 말을 자주 했고 에그머니나는 왠지 계란주머니를 연상하게 했다. 계란 하나가 들어가는 계란주머니는 아주 귀엽고 부드러울 것이다. 밤마다 손에 쥐고 입술에 부비며 잠들 수 있고, 주머니에 넣고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한스의 반바지 주머니는 너무 작아서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스와 같이 먹던 과자는 모두 불량 식품이었다. 과자도 같이 먹으면 맛있다. 앞뒤가 납작한 생각들이 과자처럼 입안에서 부서졌고 짜고 맵고 달았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비29를 씹으며 포켓맨이 돌 하나를 주워 강물에 던졌다. 퐁 소리를 내며 돌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돌을 주워 강물에 던졌다. 퐁 소리를 내며 돌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세 번째 돌을 주워 강물에 던졌다. 퐁 소리를 내며 돌이 물속으로 사라지기 전 허공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번엔 내가 돌을 주워 강물에 던졌다. 퐁 소리를 내며 돌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물속에 돌을 던졌을까. 얼마나 많은 돌이 물속에 가라앉아 있을까.
“이걸 다 먹기 전에는 넌 집에 갈 수 없다.”
포켓맨이 책을 읽듯이 말했다. 내 입술 끝에 과자 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느꼈다. 얼굴이 온통 과자 가루 범벅일지도 몰랐다. 나는 비29 봉지를 움켜잡았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까. 뭐라도 잡을 게 필요했다. 바지도 입었으니 여차하면 포켓맨의 얼굴에 돌을 던지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포켓맨이 뒤로 물러서는 나를 의식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입. 저 입이 문제다. 입속에 불쏘시개가 가득하다. 불쏘시개가 나를 위협하고 나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당신처럼 작았을 때였습니다. 이걸 다 먹기 전에는 넌 집에 갈 수 없다. 갑자기 그 말이 생각이 납니다. 어린 시절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나는 다 먹지 못했고, 집에 갈 수 없었어요. 그리고 여전히 나는 집에 갈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포켓맨이 바보가 아니면 누가 바보일까. 여전히 나는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거나 꿈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집이 어디입니까?”
목소리가 불쏘시개다. 나는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으로 아무 데나 가리켰다. 멀리 언덕 교회 십자가가 보였다. 친구의 꾐에 빠져 따라간 교회에서 받은 둥글납작한 빵과 남기지 말고 다 먹고 가라던 어린이부 여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뼈만 있는 것 같은 마른 몸에 자로 잰 듯 길이가 일정한 단발머리 선생님은 언제나 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있었다. 실종된 선생님은 야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고 셔츠 단추도 모두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한동안 선생님의 유서에 적힌 구절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사랑 시』에 실린 바이런이라는 영국 시인의 시라고 밝혀졌고, 선생님이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 누구인지 어른들과 아이들이 수군대며 추리를 했다. 결국 선생님이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은 목사님이었다는 결론이 났고, 더 이상 나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교회 주변에는 떠돌이 개들이 많았다. 나는 나대로 선생님은 자살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며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채웠다가 풀곤 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영혼으로 떠돌며 산 사람의 손가락에 주문을 걸어 자신이 있는 위치를 가리키게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심코 팔을 뻗을 때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라는 『코스모스 괴담 백과』의 글도 떠올랐다. 나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머리에 쓰고 있는 노란 수건을 벗었다. 비29 봉지를 들고 있는 포켓맨의 까만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포켓맨의 알 수 없는 기억에 나의 기억을 얹혀 놓고 나는 내 유년의 기묘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나에게도 집을 가리킬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