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숙 /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가가 되었고, 제1회 살림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며 그 시간에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선물 받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작품으로 청소년 베스트셀러 『구미호 식당』 시리즈, 『저세상 오디션』 『약속 식당』이 있으며 『6만 시간』 『발칙한 학교』 『금연 학교』 등과 아동 베스트셀러 『수상한 시리즈』 『마트 사장 구드래곤』 『국경을 넘는 아이들』 『뻔뻔한 가족』 『시원탕 옆 기억사진관』 『아미동 아이들』 『나는 증인이 아닙니다』 등이 있다.
그날은 보름달이 떴었다.
나는 큰길 사거리에서 설문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그 비를 맞으며 설문조사 하는 게 하도 딱해 보여서 질문지를 받아들었다. 대단한 설문조사도 아니었다. 지금 간절하게 갖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묻는 설문조사였다. 큰 고민하지 않고 단숨에 써주었다.
“감사합니다.”
설문조사를 마친 사람은 주먹만 한 막대사탕을 주었다. 전단지 한 장을 유리테이프로 달고 있는 사탕이었다.
-이곳에 오면 마법과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전단지에는 이런 글귀와 함께 약도가 그려져 있었고 전단지가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는 안내도 있었다.
막대사탕을 빨아먹으며 걷는데 마침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약도에 있는 장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법 같은 일? 간절하게 갖고 싶은 걸 얻을 수 있는 건가?’
나는 그때 간절히 원하는 게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말의 힘은 컸다. 나는 뭐에 끌리듯 약도를 보며 걸었다.
그곳은 재개발 지역이었다. 이미 주민들의 이주까지 끝난 텅 빈 동네였다. 높은 습도에 잠긴 동네 분위기는 무거웠고 을씨년스러웠다. 마침 짙게 내려앉은 구름이 걷히면서 달이 둥실 떴다. 어둠 속에 잠겼던 동네는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에 잠겼을 때보다도 더 무겁고 우중충했다.
끼이익.
달빛을 타고 뒤틀리는 듯한 철제문 소리가 났다.
‘빈 동네가 아니었나?’
나는 두리번거렸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3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잠시 후 대문 밖으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대문 밖으로 나온 사람은 입간판을 세우고 들어갔다.
구미호 카페
이곳에 카페라니, 생뚱맞았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사 가고 유동 인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동네와 카페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대문 안을 바라봤다. 대문부터 현관까지 양쪽으로 은은한 조명이 있었고 마당은 조명과 달빛으로 온통 노란색이었다. 유독 지붕이 낮은 일층 카페의 벽면은 통창이었다. 통창 안으로 카페의 내부가 보였다.
나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통창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현관문이 빼꼼 열렸다.
“어서오세요, 손님. 전단지를 받았나요? 전단지의 바코드를 옆에 있는 기계에 대주세요.”
직원이 말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전단지를 꺼내 펼친 다음 기계에 댔다. 그러자 딩동! 소리와 함께 빼꼼 열렸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카페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었다. 탁자와 의자는 짙은 원목이었고 바닥은 짙은 색의 마루였다.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손님. 오늘은 오픈 기념일이라 저희 카페에서 파는 빵이 무료 제공됩니다. 저희 카페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요번에 새단장을 하고 새로이 문을 열었지요. 저희 가게 분위기가 손님 마음에 쏙 들길 바랍니다. 앞으로 고객 만족의 정신으로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저기 벽에 메뉴가 붙어 있거든요. 잠시만요.”
직원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깨알 같은 글씨가 쓰여 있는 종이였다.
“이름이 오성우! 손님에게는 포만바게트를 추천합니다. 포만바게트를 먹으면 손님이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포만바게트가 마법을 선사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빵을 준비하는 동안 카페 안을 한번 구경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직원은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주방으로 갔다.
메뉴
포만바게트
애플 말랑
달달 사이
나는 벽에 붙은 메뉴판을 쓰윽 바라본 다음 카페를 둘러봤다. 제법 긴 유리 진열장이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유리 진열장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책, 캐릭터가 그려진 컵, 털장갑, 운동화, 구두, 펜, 다이어리, 가방과 벨트, 다양한 디자인의 구두가 있었다. 얼핏 봐도 새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고 사람의 손때도 보였다.
“손님.”
어느새 직원이 다가왔다.
“끌리는 물건이 있나요? 그럼 주저하지 마시고 구매하세요. 그 물건이 바로 손님에게 필요한 거지요.”
“판매하는 건가요? 중고 거래?”
“중고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은 아니네요. 누군가 쓰던 물건이니까요. 여기에 있는 물건들은 죽은 사람들의 물건입니다.”
“뭐라고요?”
나는 분명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라고요. 저희는 팔아달라는 의뢰를 받았지요. 아이고, 이런. 빵이 타면 큰일입니다. 그럼 찬찬히 구경하세요.”
직원은 서둘러 주방으로 갔다. 고소한 빵 냄새가 카페에 가득 퍼졌다.
‘하긴 뭐…….’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물건을 죄다 버릴 수는 없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은 남은 이들이 죽은 이를 추억하기위해 가지고 있기도 하고 더러는 중고 매장에 나오기도 할 거다. 그리고 또 더러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중고 마켓에서 산 물건 중에도 죽은 사람의 물건이 있었을 수도 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훑어봤다. 죽은 사람들 물건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선뜻 마음이 가는 물건은 없었지만 눈이 자꾸만 낡은 다이어리로 향했다.
“손님. 포만바게트 나왔습니다.”
그때 직원이 말했다.
포만바게트는 비주얼이나 맛이 돈가스를 연상하게 하는 빵이었다. 하지만 튀긴 빵 안에 들어 있는 고기는 돈가스보다 훨씬 연했고 끝맛에 약간 달콤함도 느껴졌다.
“빵 맛은 어떤가요?”
직원이 물었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맛있어요.”
“하나만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지 않나요? 포만바게트가 손님의 간절함도 포만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 포만감이 영원하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요. 자, 이제 포만바게트를 드셨으니 물건 구경을 다시 한번 해보시지요.”
직원이 말했다.
‘공짜 빵을 주고 물건을 강매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물론 오늘 당장 구입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우린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주아주 길고 긴 세월, 억겁처럼 기나긴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며 견뎌왔는데 기다리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직원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유리 진열장 앞으로 갔다. 자꾸만 다이어리로 눈이 갔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어느새 나는 또 다이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뒤 내 눈앞에는 계속 낡고 낡은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그 다이어리가 나를 마법의 시간 안으로 초대할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다음 날 다시 구미호 카페로 갔다. 날은 한없이 맑았고 달은 휘영청 밝았다. 두 번째로 구미호 카페에 갔을 때 영업 방식을 알았다. 입간판에 쓰여 있었는데 첫날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안내글이었다.
구미호 카페는 달이 뜨는 날에만 문을 엽니다.
보름달, 반달, 초승달이 뜨는 날 찾아주세요.
낮달이 뜨는 날에도 문을 엽니다.
“오늘은 카페 오픈 이틀째 기념으로 메뉴가 무료 제공됩니다. 카페 안을 찬찬히 둘러보세요.”
“오늘도 공짜라고요?”
“그렇습니다, 손님.”
첫날은 오픈 기념으로 무료 제공이고 오늘은 오픈 이틀째 기념이라고 무료 제공이라니. 나는 카페 안을 훑어봤다. 손님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어쩌나. 큰돈을 들여서 리모델링까지 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카페 주인이 한없이 측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뭔가 수상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도 되었다. 하지만 그냥 나갈 수가 없었다. 다이어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강했다.
나는 유리 진열장으로 갔다. 다이어리는 나에게 결코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구닥다리 냄새도 났다. 스마트폰 하나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에 누가 저런 걸 쓴담. 그런데도 자꾸만 눈이 갔다.
“손님, 포만바게트 나왔습니다.”
직원이 말했다.
두 번째로 먹는 포만바게트는 처음 먹던 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맛이 느껴졌다. 달콤함 뒤로 약간의 비릿함이 있었다. 고기를 바짝 굽지 않았을 때 나는 특유의 비릿함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는 정육점을 했었는데 외갓집에 가면 고기를 많이 먹었었다. 그때 맛봤던 그 비릿함이 분명했다.
“오늘도 그냥 가시나요? 기다리지요, 천천히 판단하세요. 손님 눈에 들어온 물건이라면 어차피 손님이 사게 되어 있어요.”
카페에서 나오는데 직원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세 번째 구미호 카페에 간 날은 구미호 카페에 두 번째 다녀오고 나서 3일 뒤였다. 오후 수업을 하는데 창밖 먼 하늘에 하얀 낮달이 보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뭐에 홀린 듯 구미호 카페로 갔다.
그날이었다. 구미호 카페에서 지레를 본 것은. 지레가 통창 너머로 보였다. 지레는 유리 진열장 앞에서 턱을 쥐어뜯으며 서 있었다. 지레를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어서오세요, 손님.”
직원이 현관문을 열며 소리치는 바람에 지레가 돌아봤다. 나와 지레의 눈이 마주쳤다. 지레는 무슨 할 말이 있어 보였고, 나도 지레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레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고 지레 역시 그랬다.
“방문하셨던 분들은 이미 입력되어 있어서 전단지를 다시 찍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 오셨던 날 말씀드렸는데 잊으셨나 봐요. 그냥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손님, 한 가지 주의사항 말씀드릴게요.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아는 사람을 만나도 절대 알은척해서는 안 됩니다.”
직원이 문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꼭 나와 지레가 아는 사이인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구석 자리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카페 대문을 나서는 지레가 통창 너머로 보였다.
나는 직원을 불렀다.
“조금 전에 저기 진열대 앞에 서 있던 아이가 뭘 사 갔나요?”
“살까 말까 고민을 꽤 많이 하더니 그냥 갔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사 가고 말아요.”
“그 아이도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당연하지요. 다 설명해드리고 있답니다. 이곳은 사기를 쳐서 물건을 팔아먹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직원의 이맛살이 살짝 구겨졌다.
“이런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어떤 물건을 보고 고민했는지 혹시 아세요?”
나는 지레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음음, 손님들의 비밀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켜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만 오늘은 낮달이 유난히 크고 선명한 날이지요. 이런 날은 비밀을 노출해도 탈이 나지 않아요. 털장갑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지요. 애플 말랑을 먹었고요. 간절하게 원하는 것에 따라 먹는 것도 다르답니다.”
직원은 통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통창 밖 먼 하늘에는 아직도 낮달이 보였다.
나는 유리 진열대로 가서 털장갑을 바라봤다. 손등과 손바닥 부분은 짙은 빨간색이고 손가락 부분은 초록색이었다. 예쁘지도 그렇다고 특이한 구석도 없는 평범한 장갑이었다. 장갑이 필요한 철도 아닌데 왜 장갑에 관심을 보였는지 궁금했다. 나란히 놓인 장갑 옆에는 장갑에 대한 설명을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의뢰받은 날짜: 2022년 5월
-의뢰인 정보: 밝힐 수 없음
-중요한 특이사항: 20일
‘특이사항? 무슨 뜻이지?’
나는 다이어리를 바라봤다.
-의뢰받은 날짜: 2000년 6월 3일
-의뢰인 정보: 밝힐 수 없음
-중요한 특이사항: 20일
나는 직원을 불렀다.
“특이사항이 무슨 뜻이에요?”
“그건 구매하시는 분께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매하시게요?”
“아니, 아직……. 좀 더 살펴보고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라는 게 영 찜찜하지요? 얼마든지 기다릴게요. 그럼요. 잘 살펴보셔야지요. 한번 사겠다고 말을 하면 꼭 사야 하거든요. 꼼꼼히 살펴보시고 구매하세요. 그럼!”
직원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섰다.
“가격은…… 가격이 쓰여 있지 않네요.”
“가격은 구매를 하시는 분께만 말씀드립니다.”
“그건 좀 말이 안 되는데요. 한번 산다고 말을 하면 꼭 사야 한다면서요. 원래 물건을 사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과 물건값이 맞아야 하는 법이잖아요. 물건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돈이 모자라면 살 수가 없는 건데 무턱대고 산다고 했다가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해요? 사겠다고 말해도 가격이 맞지 않으면 안 사도 괜찮아요?”
“아니요. 한번 산다고 했으면 꼭 사야 합니다. 구매할 때 말씀해주세요.”
“아, 답답해. 그러니까요. 제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셨나 봐요.”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규칙입니다. 구매를 하겠다는 손님에게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낮달이 뜬 날에도 노출할 수 없는 비밀이지요. 아참, 손님. 오늘은 오픈 일주일째 기념으로 포만바게트가 무료로 제공됩니다. 우리 카페의 친절함과 고객을 귀히 여기는 정신이 부디 손님 마음에도 쏙 들길 바랍니다. 더불어 저의 말과 행동 역시 손님의 마음에 들길 바라고요. 당연히 그렇겠지만요. 저를 교육시킨 분이 카페 신화의 주인공인 강대라는 분이셨지요.”
직원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주방으로 간 다음 나는 재빨리 인터넷 검색을 했다.
강대: 우리나라에 카페 문화를 들여와 정착시킨 인물. 전국 1,000여 개에 달하는 모든 매장의 불패 신화를 써 내려간 대단한 인물. 2000년 교통사고로 사망.
‘뭐야?’
나는 직원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봤다. 직원은 서른 살 남짓으로 보였다. 강대라는 사람을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제로다. 강대라는 인물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말은 완전 뻥이다. 하긴 강대한테 교육을 받았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뭔가 좀 이상한 카페이긴 해.’
첫날 문득 들었던 불길함이 머리를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빵을 공짜로 주는 대신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강매하는 그런 시스템의 카페. 한번 사겠다고 말하면 꼭 사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판매 방식도 그랬고, 자꾸만 빵을 공짜로 먹이려고 하는 것도 그렇다. 아닌 말로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물건을 사놓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을 밥 먹듯 하는 세상이다. 몇 번 쓰다가 반품하는 사람들도 널렸다. 그런데 뭔 말도 안 되는 판매법이 다 있담. 마법이니 간절함을 이루게 해주느니 하는 말에서도 역시 사기꾼의 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났다. 세 번째 포만바게트에서는 비린 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곤도라 2호, 만두 3호.
일주일 동안 세상은 태풍에 휩싸였다. 거센 비를 몰고 온 태풍이었다. 세상이 물에 잠기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로 비는 잠시도 쉬지 않고 퍼부어댔다.
‘달이 떠야 구미호 카페에 갈 텐데.’
구미호 카페에 세 번째 갔을 때 이상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기꾼들의 집단일 거라는 추측을 했고 그곳에 휘말려 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어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에 단단히 홀린 듯했다. 언제 비가 그치고 달이 뜰 수 있을지 수시로 일기 예보를 검색했다.
금요일 밤늦게 만두 3호가 동해상으로 빠져나가고 토요일부터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지겠습니다.
“날씨, 언제 좋아진대냐?”
거울 앞에서 삼십 분째 고슴도치 털 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살렸다 죽였다, 다시 살렸다 죽였다 하던 재후가 물었다.
“내가 날씨 검색하는 건 어떻게 알았냐?”
“다 아는 수가 있지.”
“어떻게 알았냐고?”
“얘가 왜 죽자고 대들어? 야, 이게 죽자고 대들 일이냐? 어떻게 알기는 뭘 어떻게 알아? 성우 네가 좀 전에 ‘아, 이놈의 태풍은 언제 지나갈 거야?’ 이러면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잖아. 애가 그렇게 까칠해서 어디다 쓰냐?”
재후는 죽였던 앞머리를 다시 살렸다.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왜 마음대로 듣느냐고 한마디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무리 재후가 못마땅해도 그건 억지다.
“죽이는 게 낫냐, 살리는 게 낫냐?”
재후가 돌아봤다. 반듯한 이마며 날렵한 콧날 그리고 쌍꺼풀이 없으면서도 크기가 적당하고 선해 보이는 눈, 다부진 입술, 거기에다 이목구비를 완벽하게 받쳐주는 얼굴 모양과 크기. 앞머리를 죽이든 살리든 상관없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재수 없어.”
재후는 어느 날 갑자기 내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재후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리고 아니꼽고 싫었다. 재후 뒤통수만 봐도 공연히 화가 치밀어올랐다. 누가 핀셋으로 재후 머리를 콕 집어서 내 일상 속에서 꺼내버렸으면 좋겠다.
재후는 이모 아들이다. 이모부가 1년 동안 외국 지사로 나가면서 재후는 우리 집으로 와서 내 방을 같이 쓰고 있다. 이모는 중학교 3학년이 외국으로 가서 1년 살고 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외국에서는 수학을 열심히 가르치지 않는다나 뭐라나. 1년 후에 돌아오면 수학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될 거라고 했다. 그랬다가는 재후 인생이 한 번에 망한다고 했다. 그런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다. 재후는 어차피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외국에 가서 1년을 살고 오든 10년을 살고 오든 위험할 일이 전혀 없었다. 나도 그걸 아는데 재후 엄마인 이모가 모를 리 없다. 모든 정황으로 봐서 이모는 재후가 귀찮았던 거다. 이모는 노는 걸 좋아하고 여행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그냥 좋아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다. 이모는 동남아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1년을 자유롭고 쿨하게 보내고 싶었던 거다.
“에이, 설마. 엄마가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을 그런 식으로 방치한다고?”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엄마들도 다양하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엄마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엄마도 있다. 다양한 아들과 딸들이 존재하는데 엄마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이모와 엄마는 거래를 했다. 이모가 원하는 바를 눈치챈 엄마가 먼저 거래를 제안했을 수도 있고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엄마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모가 먼저 제안했을 수도 있다.
이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재후 할아버지가 재벌 수준의 재력가였고, 땅값이 어마어마한 도심 한복판의 빌딩을 이모부가 물려받았다. 엄마는 지지리도 돈도 못 버는(이건 순전히 엄마 표현이다) 아빠를 만나 궁상떨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시시때때로 가감 없이 거칠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정육점 집의 자매로 태어나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비슷한 삶을 살다가 결혼이라는 걸 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엄마와 이모는 그래도 사이가 좋았다. 재후를 떼어놓고 가는 문제에 있어서 둘은 서로의 원하는 바를 충분히 만족시킬 거래를 할 수 있었을 거다.
그 거래의 피해자는 오롯이 나였다. 좁디좁은 방을 재후와 함께 쓰는 건 말도 못하게 불편했다. 좁디좁은 방을 같이 쓰는 것도 모자라 재후와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 나를 더 화나게 만든 것은 재후가 지레에게 꽂혔다는 거다.
홍지레!
지레는 중학교에 입학하던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들어온 아이다. 늘 멀리서 지켜보는 아이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거 같아 감히 손을 내밀 생각도 못 하는 그림 속 아이 같은 존재다. 손을 내밀 기회는 있었고 그 기회는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다. 가끔 지레와 눈이 마주치면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거절당할까 봐 여전히 말을 못 붙이고 있다. 재후는 그런 지레에게 첫날부터 다가갔다. 재후는 당당했다. 나는 그 당당함이 미웠다.
‘지레가 어떤 아이인데, 너 같은 놈한테 넘어갈 아이가 아니지.’
지레는 도도했다. 성적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였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말도 별로 없었다. 말이 없어서 더 도도해 보였고 더 높아 보이는 아이였다. 모든 것은 다 갖췄지만 단 하나!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는 재후였다. 하지만 지레는 재후에게 너무 쉽게 넘어갔다. 지레가 재후와 마주 보고 웃어주던 날, 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 허탈했다. 슬펐고 화났고 억울했고 또 아팠다.
재후가 가진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재후는 잘생겼다. 그리고 재후는 돈 많은 집 아들이다.
아무것도 갖출 수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공부였다. 그래서 죽어라고 공부했다. 내 머리가 결코 좋지도 않고 공부머리도 아니라는 걸 공부하면서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어라고 공부했다. 내가 갖출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으니까. 그것마저도 갖추지 못한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을 거 같았다. 죽어라고 노력한 덕인지 성적은 겨우겨우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죽어라고 노력해서 얻은 그것보다 재후가 가진 것들이 힘이 더 셌다. 나는 재후에게 웃어주는 지레를 보며 그걸 깨달았다.
180센티미터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해 보이는 몸.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이목구비. 연예인 저리 가랄 정도로 작은 얼굴과 잔잔한 음악과도 같은 눈빛. 하지만 생김새보다 나에게 더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재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였다. 재후에게는 넘사벽! 부티라는 것이 줄줄 흘렀다. 그건 어느 날 갑자기 갖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릎 튀어나온 잠옷을 입어도 삼색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녀도 절대 감출 수 없는 것이 그 부티라는 것이다. 궁상맞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방으로 달려가 찬물을 들이켜고 나자 속이 좀 뚫리는 거 같았다. 물컵을 든 채 베란다로 나갔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밥통이 고장 날 줄이야 꿈에도 몰랐네. 전자제품도 고장 나기 전에 언제쯤 고장 날 거라고 예고를 해주면 좀 좋아. 그럼 미리 고칠 텐데. 식탁에 구운 달걀 있으니까 하나씩 먹고 딱 십 분 뒤 모든 준비 완료하고 현관에 서 있어라.”
안방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정확히 십 분 뒤 엄마는 자동차 키를 들고 나왔다. 고급 수입차 로고가 새겨진 자동차 키를 엄마는 자랑스럽게 쳐들고 있었다. 이모 차였다. 외국으로 가면서 돌아올 때까지 엄마에게 타도 좋다고 했다. 요즘 엄마는 이모 차를 마르고 닳도록 타고 다닌다.
재후는 학교 갈 준비를 완료하고 현관에 서 있었다.
“성우 너는 뭐 해?”
“나는 걸어갈 거야.”
이모 자동차에 재후와 나란히 앉아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건 궁상맞은 내 모습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 그럼 그러든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빗속에 어떻게 걸어가느냐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같이 가자고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타라고 사정을 해도 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그래주길 바랐는데 엄마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집에서 나갔다.
엄마와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