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벌어서
낮잠을
7년 전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이른 봄, 우리는 이곳에 집을 짓기로 했다. 남편과 내가 사는 지역은 무화과, 고구마가 많이 나고 인구가 적기로도 유명하다.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스무 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의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올라치면 걸어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이른바 깡촌이지만 그래도 인터넷과 택배 서비스는 닿으니 ‘자연인’과는 거리가 멀다.
인터넷 없이 하루도 못 사는 뼛속부터 도시인인 우리가 시골에 정착할 생각을 한 이유는 ‘집’이었다. 남편은 직접 집을 짓고 싶어 했고 나는 이사 다니지 않아도 되는 마당 있는 집을 원했다. 그러니까 시골은 우리의 다소 ‘엉뚱한’ 필요가 맞아떨어진 곳이었다.
시골에 집을 짓는다는 생각만 했지 사실 뭘 하고 살지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그저 막연히 나중에 고구마를 길러서 인터넷으로 팔게 될 줄로만 알았다. 내 상상력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현재 남편은 영상제작자로, 나는 그림 수업과 그림 관련 프리랜서로 각자 특기를 살려 활동하고 있으니 참 신기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이런 시골에서 뜻하지 않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건 남편이 집 짓기를 마무리하느라 백수를 자처했던 시절, ‘재미있는 걸 하면서 식비라도 벌면 좋겠다’며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유튜브 덕분이다. 시골의 일상을 담은 우리 유튜브 채널은 ‘혼자 집 짓기’ 시리즈를 올리고부터 구독자 그래프 곡선이 폭발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것 봐. 어제는 구독자 수가 200명 올랐는데 오늘은 천 명이나 늘었어.”
노트북을 열어 유튜브 관리자 페이지를 펼쳐 보이는 남편 말에 눈을 비비고 그래프를 봤다. 구독자 수는 연일 갱신됐고 영상 조회 수는 실시간으로 쭉쭉 올라갔으며 채 읽지 못한 댓글이 셀 수 없이 달렸다. 유튜브 채널 ‘은는이가’의 구독자 수는 순식간에 2만여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궁금해했다. 시골 사는 사람이 영상을 왜 잘 만드느냐부터 시골에 어떻게 가게 됐느냐까지, 영상에 달린 질문에 빠짐없이 답하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짧고도 명료하게 말하기 어려워 대답을 미뤄온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시골에서 뭐 해서 먹고살아요?”이다. 이 책은 그에 대한 다소 긴 대답이기도 한 셈이다. 더불어 연고 없는 남쪽 지역의 땅을 보러 다니고 직접 그곳에 집을 지으면서 울고 웃었던 나날의 기록이자 마냥 서툴렀던 시골 생활 적응기이기도 하다.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기 전까지 남편은 버섯농장, 조경, 인테리어, 귀촌인 마을 계약직, 교통조사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시골에 대해 잘 모르거니와 애초에 뭘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정한 것이 없어서 호기심과 상황이 이끄는 대로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어딘가 소속되거나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겠다는 의지 하나는 분명했다.
제법 다양한 곳에서 우리를 찾아주시는 걸 보면, 시골살이가 막막하기만 하던 세월을 지나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말하고 보니 ‘자리 잡았다는 건 뭘까’ 하는 의문이 든다. 먹는 데 부족함 없고 부모님께 용돈을 두둑이 드리며 규칙적인 수입이 생기면 자리 잡았다 할 수 있을까. 통장에 돈이 많이 쌓이면? 마트에서 가격 고민 없이 물건을 집어 들면? 그런 것이 기준이라면 일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프리랜서에게 자리 잡은 날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앞날을 확언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바람은 있다. 일을 하되 놀 듯이 하고 싶다. 놀이 같은 일을 찾으려면 다양하게 놀아봐야 한다. 낮잠 자고 일어나 멍하니 있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시도하고 마음껏 실패하며, 질릴 때까지 원 없이 해봐야 한다. 도시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은 내일이 되면 식어버릴 텐데도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들은 대체로 ‘언젠가’로 밀리다가 이내 일상 속에 파묻히곤 했다.
이곳에 와서 이곳의 시간으로 사는 동안 알게 되었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집 짓기도 시골살이도 난생처음인 우리에게는 시골에서의 매일이 충격이고 이벤트였다.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당혹감이나 놀라움은 기록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그날의 사건과 감정을 그러모아 일기로 남기는 동안, 힘에 부친 하루를 보내고도 마음 깊이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시골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내 모습이다.
시골은 그런 사람 같다. 종종 쓴소리는 해도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게 하는 사람, 중요한 일 앞에서 ‘잘 해야지!’하기보다 ‘그냥 즐겨~’라고 말해주는 사람, 머뭇댈 때 독촉하기보다 기다려주는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프롤로그• 시간을 벌어서 낮잠을
1장
대체로 좋고 가끔 나쁘고 때때로 이상한, 시골에 삽니다
내가 이효리는 아니지만
시골에는 거지가 없다
공짜 좋아하세요?
남편의 로망이 만들어준 친구들
슬기로운 시골 생활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사람
없는 게 많아서 재주가 늡니다
오일장의 불꽃놀이
2장
멀리서 발견한 가까운 행복
우리는 안전하게 망해가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며
낙원을 찾아서
나침반이 없는 우린 자주 길을 잃지
떠나보면 알 거야, 나를
3장
내 손으로 집을 짓는 모험
사과 한 알과 초코파이 한 상자의 동상이몽
피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천천히
이 집이 네 집이냐
내 땅이 생기는 건 한순간
사랑할 준비
집 설계는 맞춤옷처럼
자존감에도 적정 수위가 필요해
둘째 돼지의 수업과 셋째 돼지의 지붕
그래도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무화과는 벌도 나비도 없이
대체불가, 고요한 크리스마스
난생처음 내 집과 생애 마지막 퇴사
4장
끝나지 않은 여행
웅크리지 않고 파도에 몸을 맡기면
제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
친애하는 나의 작은 냉장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진짜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에 숨어 있어
시간 능력자를 위한 지침서
시골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시골 가서 요가 하고 낮잠 자고. 네가 무슨 이효리냐?”
“뭐?”
“그렇잖아. 남편하고 둘이 살지, 텃밭 가꾸지, 개랑 고양이 기르지. 화장실에 문도 없는 거 아냐?”
한창 우리가 살 집 설계도면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빈정대는 언니의 말에 무슨 소린가 싶어 검색해보니 <효리네 민박>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거 방송되기 전부터 여기 살았거든?”
당시 우리 집에는 TV가 없었고 집 짓겠다고 남쪽 땅 여기저기를 전전하느라 누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 가질 여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연예인 따라서 인생을 결정한 모양새라니.
‘이효리 부부가 아닌, 30대 중반 부부가 시골에 살면 남들이 어떻게 볼까?’
우리의 시골 행은 워낙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루어져서 남들 눈은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이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다른 사람 눈에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살던 흙집 텃밭에는 수박, 호박, 오이, 참외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고 가지, 고추, 쑥갓, 브로콜리, 루꼴라, 상추가 가득했다. 그날 남편은 이장님 소개로 일당 벌이를 하러 가서 점심은 혼자 간단히 먹기로 했다. 평상에 앉아 밥이 담긴 대접에 솎아낸 어린 채소를 듬뿍 올려서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수저로 쓱쓱 비비고 있자니 어쨌든 텃밭이 있는 한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막연한 안도감이 들었다.
“어? 젊은 사람이다!”
비빔밥을 한술 입에 넣으려는 찰나 열린 대문 사이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60대쯤 되는 부부가 서 계셨고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 손가락이 몇 개인지부터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 머리를 어떻게 묶었는지까지 한눈에 파악하시더니 대뜸 본인의 호기심부터 해결하려 하셨다.
“멀쩡한 사람이 왜 여기에 있대요?”
내 집에서 밥 먹다가 동물원 원숭이 취급받은 것이 어이없었지만 마을 주민의 손님인가 싶어서 불쾌함은 일단 접고 “아, 예. 귀촌했어요”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신용불량자 아니고서야 이런 델 뭣 허러?”
“저 둘이 결혼은 했을까?”
“전과자 아니여?”
흙집 화장실 창밖으로 우리를 두고 하는 듯한 대화가 지나가면 나는 변기에 앉아 다문 입술에 힘을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 저녁, 땀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터덜터덜 들어온 남편은 만 원짜리 열한 장을 내밀고는 씻고 저녁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힘들었지. 오늘 일 어땠어? 가서 무슨 일 한 거야?”
“내 발음이 그렇게 어눌해?”
“응?”
“일 마치고 돌아오는 승합차에서 어르신들이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하고 물으시더라고. ‘서울에서 왔습니다’ 했더니 ‘아니,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정말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 그랬더니 ‘발음이 어눌한 걸 보니 중국에서 왔나 본데? 아닌가? 얼굴 보니 몽골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러셨어.”
시골에 젊은 사람이 너무 없다 보니 생긴 일들이다.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참담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별것 아닌 일로 웃어넘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젊은이에게 물음표를 그리는 거야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생각하는 대로 보인다는 게 새삼 신기할 따름이다.
최근에 나도 외국인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 마을에서 본 적 없는 젊은 남자가 트럭 창문을 내리고 대뜸 반말로 길을 묻기에 외국인 노동자로 알고 하대하는구나 싶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존댓말 모르는 외국인인 척 똑같이 반말을 해볼까 한다.
뒤늦게 <효리네 민박>을 재미있게 보다가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효리와 내가 비슷한 하루를 보낼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크게 다른 점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얼굴? 뭔데?”
“이효리는 돈을 벌지 않아도 되고 나는 벌어야 한다는 거야.”
“빙고! ……근데 좀 서글프네.”
“왜에? 이효리처럼 돈이 많지 않아도 이효리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인데 희망적이지 않아?”
시골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 내가 던진 이 말은 언니가 보기에 설득력 하나 없는 개똥철학 같았을 테다. 하지만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나는 텃밭을 일구고 요가와 낮잠을 즐기며 남편과 대화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억지 말은 아닌 게 됐다.
“농사지어요? 아니면 공무원이에요?”
시골 산다 하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하면 상대방은 선을 넘는 줄 알면서도 “그럼 뭐해서……”라고 조심히 한 발 들어온다. 이 마을만 해도 어르신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몇 없는 젊은이는 공무원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고 하면 젊은 부부가 시골에서 대체 뭐 해먹고 사는지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궁금해할 법도 하다.
우리도 농업에 미래를 걸어보려던 적이 있다. 버섯 재배에 관심이 있어서 남편이 제법 규모가 큰 버섯농장에서 1년간 경험을 쌓았는데 애석하게도 그 꿈은 이어가지 못했다. 버섯은 이미 경쟁 상대가 많아서 가격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소규모 농장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단 하루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농장 대표님을 보면 우리가 그리던 삶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실제로 정부에서 마련한 귀농, 귀촌 교육에서 성공사례를 들어보면 ‘부모님의 땅을 물려받아~ 도시의 인맥을 동원하여~’로 시작한다. 우리처럼 인맥도 자본도 소박한 빈털터리가 빚을 내서 무턱대고 시작했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확률이 높다는 얘기다. 무일푼 청춘이 연고 없는 시골에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해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집 짓는다고 작정하고 백수로 지내던 시절에도 어쩐 일인지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을 틈은 없었다.
“어이, 내일 별일 없으면 잔말 말고 나 따라나서.”
가만히 있어도 이장님이나 부녀회장님을 통해 아르바이트 제안이 이어졌다. 어쩔 때는 거절하기 죄송해서 응하기도 했다.
“컴퓨터 좀 다룰 줄 알면 여그서 관리 일 해볼랑가요?”
한번은 집 지을 때 자주 드나들던 건축자재상 대표님께서 느닷없이 남편에게 취업 제안을 하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뭐라도 심어야지, 땅이 노는 꼴을 못 본다. 같은 이치로 사지 멀쩡한 젊은이가 노는 것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하지만 쉽게 들어온 일이라고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이렇게 사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감에 무릎이 꺾일 때면 시골은 한국말이 통하는 외국이고, 우리는 지금 아르바이트로 여행 경비를 충당하면서 문화 체험하는 ‘워킹홀리데이’ 중이라고 가정해보곤 했다. 그러면 시골 문화를 잣대 없이 받아들이려는 마음도 생기고 시골로 더 깊이 들어가는 걸음이 무겁지도 않았다. 이제 와 돌아보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이 시골살이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준비운동이 되어주지 않았나 싶다.
일자리가 없다, 없다 해도 높은 급여와 사무직을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시골에도 일은 늘 있었다. 또한 젊은 인력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도시에서 중년이라 불릴 나이가 고맙게도 청년에 속해 선택권이 더 넓었다. 집을 짓던 와중에 남편은 만 40세가 넘지 않았던 덕분에 군청 홈페이지에 난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구인공고’를 통해 계약직으로 턱걸이 취업을 하기도 했다. 주민 대부분이 워낙 고령의 어르신이라 실제 체감 나이로는 60대도 청년이다.
남편이 집 짓는 동안 나는 그림 수업을 했다. 도시에서 했던 일의 연장선이다. 무턱대고 읍내에 작업실을 빌려서 SNS에 그날 그린 그림을 올리고 오며 가며 이웃과 인사도 나눴다. 금세 어린이 수강생이 하나둘 늘었고 성인 반까지 개설했다. 계약 기간 1년을 다 채우기도 전에 넓은 곳으로 이사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대단히 잘났거나 홍보에 큰 노력을 기울인 건 아니었다. 그저 서울에서 왔고 경쟁 상대가 없었을 뿐이다. 재작년부터는 4년 가까이 해온 어린이 수업은 접고 프리랜서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읍내 마트만 가면 곧잘 죄인이 된다. 며칠 전에도 마트에서 학부모님을 마주쳤다.
“어머, 선생님!”
“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준영이도 잘 지내고요?”
“요즘도 많이 바쁘세요? 선생님한테 잘 배워서 우리 첫째는 걱정 없는데 둘째가 그림에 자신 없어해서 목포까지 미술학원 알아봐야 하나 하고 있어요. 애 친구들도 미술 하고 싶어 하는데 어린이 수업 좀 다시 해주세요. 제발요.”
학부모님은 내 팔을 부여잡았고 여자아이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고 학부모님께 죄송해 연신 굽실굽실하다가 어렵게 돌아섰다. 시골이라도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과 열의는 도시와 다름없는데 교육환경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하면 근교 대도시로 가족 전체가 이사 가거나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다. 시골은 대체로 문화나 교육 관련 인재가 부족해서 관련 직종에 종사했었다면 무엇보다 환영받는다. 잘난 사람 많은 도시에서는 별 볼일 없던 내 능력도 시골에서는 유일한 하나가 되어 빛났다.
화실이 처음부터 잘됐던 건 아니다. 작업실을 막 열었을 때는 당장 월세 걱정에 이력서를 들고 도서관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도서관 문화센터 담당자입니다. 유화 강사 지원해주셨죠? 그런데 죄송하게 됐어요. 공공기관 강의 경력이 없으셔서…… 어쩌지요…….”
“네, 알고 있긴 했어요. 모집 전형 무시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원한 제가 죄송하죠. 그래도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어렵게 됐지만 이력서는 저희가 잘 보관했다가 기회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씁쓸하게 전화를 끊고 몇 달 뒤 담당자로부터 어린이 독서미술 수업을 제안받았다. 나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수업이었다. 이때 진행한 수업도 늘 하던 대로 SNS에 기록했다. 거기서 또 일이 만들어져 어린이 미술 수업 개발과 강의 및 동화책 제작 의뢰가 들어왔고 인근의 다른 지역까지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집을 짓고 돈벌이를 찾으면서 체득했다. 일단 발을 떼면 어디론가 흘러간다는 것을. 사막에 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에 안절부절못할 때도 있었지만, 매일 매순간 재미있게 놀다 보면 신기하게도 어딘가 도달해 있고 뭔가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딱히 계획이랄 것 없이 그저 마음 가는 일을 하면서 재미있게 살려고 한다. 이러다 쪽박 차는 건 아닌가 이따금 걱정이 되지만 여기는 시골이니까, 절대 굶어죽을 일 없으니까 하며 한시름 놓는다. 어디선가 시골에는 거지가 없다고 들었는데 와서 보니 그 말은 참말이다.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부터 본격적인 농번기가 시작되는 5월 전까지는 불로소득 기간으로, 이때는 아무리 바빠도 초록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온 봄나물은 애써 재배한 푸성귀보다 맛도 향도 영양가도 뛰어난 데다 무엇보다 거저다.
산기슭 몇 걸음만 올라도 취나물이 발에 채이고 쑥과 냉이가 들판 곳곳에 널려 있다. 산 중턱에서 자란 고사리는 통통하기가 코끼리 다리 같고 자생한 두릅은 초록색이 깊다 못해 검푸를 정도다. 심마니가 약재를 캐러 다니는 기분이 이럴까? 소쿠리와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누구나 최고급 봄나물 한 상을 차려낼 수 있다.
채소라면 상추, 깻잎 외에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이 마을에 이사한 다음 날부터 채집활동에 푹 빠지게 된 건 전부 ‘마담 JD’ 덕분이다. 마담 JD는 우리 마음대로 지은 뒷집 어머니 호칭이다. 이 마을에 집터를 알아보러 어슬렁거릴 때부터 흙집을 청소하는 내내 따뜻한 차를 내주셨기에 ‘마담’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는데 마을에서 장동댁이라 불리는 데서 영문 이니셜 ‘JD’를 따왔다. 전직 대통령 닮은 ‘MB 할머니’, 선글라스와 오토바이가 상징인 ‘주윤발 할아버지’, 쌍꺼풀이 예쁜 ‘쁘띠 할머니’, 교회 다니시는 ‘교회 할머니’. 어르신들은 서로를 무슨 댁, 무슨 댁 하고 칭하셨는데 우리는 그게 그렇게 헷갈려서 첫인상대로 부른다.
“뭐혀. 소쿠리 하나 들고 나 따라와. 저짝으로 가보게.”
이른 아침 마담 JD의 호출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헐레벌떡 따라나섰다.
“저 언덕배기가 농약 안 치는 데라 냉이랑 쑥 캐기 좋아. 이건 원추리, 저건 돌나물, 요건 취나물, 저그 저 냇가 쪽에 버글버글 난 건 머위, 여그가 물이 깨끗해서 돌미나리도 나온당께.”
마담 JD는 가이드가 되어 봄나물과 함께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먹는 풀이 이렇게 많다니 이걸 다 맛보기 전에 봄이 끝나버릴 것 같아 흥분과 조바심이 교차했다.
“비탈 아래에 길쭉한 잎사귀가 쪼르르 달린 거 보이지? 그건 뿌리를 먹는 둥굴레여. 근디 그거 먹으면 머리칼이 허옇게 센다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안 먹어.”
“우와, 저게 차로 우려먹는 그 둥굴레예요? 그런데 어르신들 머리칼은 이미 하얗지 않아요?”
“그라긴 하지. 아무튼 우리는 안 먹어.”
둥굴레차를 좋아하는지라 귀가 솔깃해졌다. 앞이 막힌 보라색 고무 슬리퍼를 신은 마담 JD 뒤를 쫓으니 어느새 길도 없는 뒷산 중턱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등산화에 등산복까지 갖춰 입고 오를 법한 산인데 마담 JD는 슬리퍼 안에 들어간 흙을 이따금 탁탁 털면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셨다.
도착한 곳은 코끼리 고사리와 검푸른 두릅이 나는 비밀 지대. 이런 고급 정보는 외지인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데, 이제 막 마을에 들어온 새댁을 끌고 다니며 일일이 알려주셨으니 보통 특혜가 아니었다.
“내일은 둥굴레 뿌리를 캐야겠어. 삽이랑 호미 챙겨서 같이 산에 가자.”
그날 저녁, 데쳐서 채반에 널어둔 고사리를 거두며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둥굴레차 만드는 방법을 인터넷 검색창에 얹었다. 둥굴레 뿌리를 찜통에 쪄서 말린 후 볶으면 차가 된다고?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뒤따른 연관 검색은 나를 잎차와 꽃차의 세계로 인도했다.
‘봄의 마지막 절기, 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에 딴 감잎 순으로 차를 덖어볼까요?’
푸근한 인상의 문화센터 강사님이 다정한 어투로 영상 속에서 시범을 보였다. 강사님은 잎을 익히는 ‘살청’과 차가 잘 우러나도록 잎을 비비는 ‘유념’을 반복하다가 잎이 바스락거리기 시작하자 약한 불에서 완전히 건조해 한 줌의 차를 뚝딱 완성해냈다.
‘이건 날 위한 수업이야. 지금 당장 해야 해!’
마침 흙집 마당에는 지붕을 다 덮을 만큼 큰 단감나무가 있었고 때는 곡우였다.
오후에 시작한 감잎 덖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재료와 과정은 단순해 보여도 실제로 해보니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노동이었다.
“진정 내 손이 만들어낸 맛인가! 내가 금손이었나?”
어린잎 녹차를 닮은 첫맛은 고운 벨벳 같은 질감으로 목구멍을 지나갔고 이내 떫으면서도 깊은 단맛을 남겼다. 어린 감잎 차를 처음 맛보고는 감탄을 연발하다 못해 이걸 만든 나 자신도 꽤 멋지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품격까지 높여준 차 맛에 전날의 고생은 싹 잊혔고 나는 곧 다른 차를 찾아다녔다.
알고 나서 보니 발길 닿는 곳곳에 자리한 식물 대부분이 차의 재료다. 그걸 본 이상 모른 척이 안 됐고 내 손을 거쳤을 때의 맛이 궁금해서 덖기보다 덖지 않기가 어려웠다. 아침 일찍 나가 채집하고 씻고 다듬어 오후부터 새벽 한두 시까지 덖는 작업은 5월이 넘어가도록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