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안
솔비Solbi로 활동하고 있는 K-Pop 가수이자 방송인.
회화, 조각, 설치미술, 행위예술, 비디오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솔비로 살아오며 불안과 변화의 연속인 삶 가운데 아프고 위축되는 시간을 오래 겪었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 새로 도전을 시작한 것이 그림 작가, 권지안으로서의 삶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는 상처받은 과거, 남과 비교되는 현재, 성공할 미래에 갇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만드는 데 집중하며 삼십 대를 보냈다. 나와 대화하고, 나만 갈 수 있는 길을 꾸준히 찾으며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를 궁금해하고 질문을 쉬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 애썼던 지난 시간의 조각들을 모아, 수많은 위기 앞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응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썼다. 고통의 시간이야말로 성장이 시작되는 타이밍이라는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다.
DESIGN 즐거운생활
표지 사진 © 엠에이피크루
나는 언제나 나로,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나’라는 작품을 그리는 중입니다
세 살 때부터 꿈이라고 외쳤던 연예인으로 데뷔한 지 십육 년이 지났다. 꿈을 이루면 마냥 행복한 매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만난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더 아팠고, 더 혼란스러웠다. 유일한 방향 표시등이었던 꿈마저 사라지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결국 벼랑 끝에 선 후에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걷고 있는 거지?’
한번 시작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질문의 수는 늘어났고, 시간은 여지없이 흘렀으며, 삶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온라인에서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늘어났고, 전 재산을 도난당했으며, 완전히 믿었던 주변 사람들은 연이어 내 뒤통수를 가차 없이 때렸다. 질문의 답을 찾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사람을 피하고 상황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그렇게 꽤 긴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주변 사람에게 더 관심이 큰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도 내가 보는 나보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제일 궁금할 뿐이었다. 이런 성향은 타인의 눈에 신기한 애, 이상한 애, 4차원인 아이로 비쳤다. 솔직한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궁금하니까 물어봤고, 모르는 것을 굳이 아는 척하며 꾸미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솔직함은 무례함이 되었다. 나다우면 되는 게 아니라, 나다운 것을 보기 좋게 포장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 나는 상처받고, 찢기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나를 버려뒀다. 그래서 작은 상처에도 겉잡을 수 없이 휘청거렸다. 끊임없이 나를 탓하면서. ‘네가 선택한 일이고, 네가 원했던 순간이야. 힘들어하지 마. 불평하지 마. 모두 그만큼 힘들고 아파. 네가 겪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도 겪는 일이야. 그러니까 힘든 척하지 마.’
작은 구멍이 뚫린 둑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고, 마음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러나 이대로 내가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증 치료를 위해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도 않고, 오히려 부정적 인식이 많았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심리 상담과 미술 치료도 병행했다. 이때 만난 미술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기회가 됐다.
그때부터 십 년간 꾸준히 미술을 통해 감정을, 생각을, 사회를 보는 시선을,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를 살리기 위해 감정을 쏟아내는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사회와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표현한다. 그 과정이 나를 성장시켰고, 조금씩 마음의 치유도 이뤄졌다.
이 책은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려고 애썼던 시간의 기록이다. 나라는 세상 유일한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되었고, 내가 나를 인정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여전히 주변에 장애물이 가득하지만 하나씩 넘어서다 보면 결국 결승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이제는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더 빠르게 도착하고 싶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멋지게 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답게, 내 방식대로 결승점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싶을 뿐이다.
예술의 본질은 공감, 공유, 공헌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과 세상을 위해 예술을 통한 건강한 방식으로 감정과 생각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답게 말이다.
‘내가 왜 이 방향으로 걷고 있는 거지?’
한번 시작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저 나답게,
내 방식대로
결승점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고 싶을 뿐이다.
“캔버스 앞에 서듯, 낯선 나와 마주본다”
P A R T1
인지하기
“너는 꿈이 뭐니?”
“연예인이요!”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은 한순간도 바뀐 적이 없다. 꿈을 적는 칸에는 한결같이 연예인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만큼 확고했고, 분명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리듬체조를, 중학교 때는 극단에서 연극을, 고등학교에서는 메이크업을 배웠다. 꿈을 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현재보다 미래를 위한 시간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 내내 바빴던 기억만 난다.
그러나 내 노력과 별개로 주변에서 나를 보는 시선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누구도 내 꿈을 환영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정해진 틀을 벗어난 딸을 못 미더워하셨고, 선생님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는 신기한 학생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내 주위의 어른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일반적인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했을 때 어린 나의 꿈은 어이없는 이야기였고, 나를 위한다고 포장한 말들은 내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을 버텨 결국 꿈꾸던 길을 걷게 됐다. 데뷔를 하며 나를 의심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선물한 것이다.
상황이 바뀌자 어른들의 말도 달라졌다. “잘한다, 잘한다”라며 나를 부추겼다. “순수하고 착하고 특이해, 너는. 참 재미있어”라며 칭찬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말을 했다. 지금 와서 하나씩 떠올려보면 칭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언제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나를 가르쳤지만, 착하다는 것은 험한 사회에서 좋은 먹잇감이 되는 조건이기도 했다. 물론 어른들의 이야기에 배워야 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라도, 나를 보호하려는 어른이라도 내가 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꿈을 꿀 수 없고, 나만큼 내 인생에 절실하지 않다. 내가 겪는 현실을 그대로 겪을 수도 없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결국 타인이라는 말이다.
최근에 데뷔 초의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던 당시의 내가 참 안쓰러워 보였다.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한 길에서 나를 지켜줘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뿐이다. 당시에는 몰랐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나에게 따뜻한 칭찬 한 번 해주지 못했기에 꽤 오래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꿈이라는 장벽 앞에서 얼마나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 내 몸을 소중히 다루고 있는지, 마음을 혹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일들로 스스로를 잃어가는 건 아닌지 꼭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꿈을 꾸는 건 아름다운 것이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은 꽃길이 아닌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하는 가시밭길을 걷는 것에 가깝다. 마음처럼 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견뎌내야 작은 성과라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길이기에 꿈 앞에서만큼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내가 먼저여야 한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꿈을 이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늘 스스로 점검해봐야 한다. 타인으로 인해 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혹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형 놀이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라는 사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남이 하니까’ ‘남이 원하니까’라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나를 잃게 된다. 아무도 나를 위해 독이 든 사과를 걸러주지 않는다. 깨물어보거나 모양을 유심히 살펴 독이 든 사과를 골라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이 생존의 길이다.
물방울 화가 고故 김창열 선생님은 오십의 나이가 돼서야 100호 그림의 가격으로 천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작품 한 점당 수억 원의 가치로 평가받는 분이지만, 그런 대가 역시 오십이 되어서야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천만 원이라는 돈을 벌 수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 열정에 대한 인정을 받는 시기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간에 멈추었다면, 자신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거뒀다면 지구상의 예술가와 예술품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란 사실이다. 인생은 장담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떤 형태로 변화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을 살아가는 자신조차도 분명한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꾸준히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남는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것, 또 다른 도전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 그래왔듯 나는 일단 직진이다. 내 소신에 투자하고, 모호한 확률보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방향을 정한다. 사람들은 안정적이고 안전한 선택을 선호하지만 나는 늘 나에게 자극이 되는 선택을 한다. 편한 길을 두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내가 진짜 원하는 선택을 하려고 애쓴다. 무엇을 하든 일단 나의 의지로 해야만 후회도 절망도 의미가 있다.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잘하던 거 계속하면서 그냥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면 안 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려운 방향을 선택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종종 일부러 숨어 지내거나 나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잘못한 게 있기는 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중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결정을 하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 나의 결정을 이상하게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사는 방식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스스로 좀 더 당당해졌다. 피하거나 숨기보다 내가 하는 모든 선택 앞에 가슴 펴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물론 여전히 선택의 순간에는 수많은 방향을 두고 고민을 거듭한다.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기에 책임의 무게가 나를 누를 때도 있다. 꼭 해야만 하는 다른 선택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걱정도 늘 따라다닌다. 결혼과 출산처럼 때가 있는 선택이 그렇다. 그러나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없고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어가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렇게 결정한 이상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쉬웠던 적은 없다. 운이 좋기도 나쁘기도 했지만,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백 퍼센트의 진심으로 살았다. 미루거나 누군가의 뒤에 숨지 않고 내 삶을 나의 의지로 채웠다는 사실은 지금도 스스로에게 꼭 칭찬해주고 싶은 일이다. 그렇게 살아오며 내 안에 쌓인 힘은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단단한 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어떤 어려운 순간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시간이 있었던 덕분이다. 마이너스로만 가득한 삶은 없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그 경험은 반드시 언젠가 삶에 큰 자양분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삶은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악플, 동영상 루머, 도난까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내 발목을 잡았다. 지금도 그 시기를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화살을 나에게 돌리기 바빴다. ‘너는 왜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거잖아’라고 나를 혼내고, 미워하고, 원망했다. 예상치 못한 시련 앞에서 늘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남에게는 잘 웃고, 남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고, 남이 힘들다고 하면 함께 울어주었으면서 왜 스스로에게는 그런 너그러운 배려들이 어색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서 시작했으니 모든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증명하려면 그 방법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사회에,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면 나를 미워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긍정적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스스로에게 만들어준 셈이다. 기부를 하고, 봉사 활동을 다니면서 누가 봐도 쓸모 있는 인간이라 여길 수 있게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을 쓰다 보니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습자지처럼 감정의 흡수가 빠른 나는, 상대의 선의의 눈빛이나 고마움을 전하는 표정에 마음이 풀렸다. 단번에 모두의 애정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모르는 다수보다 눈앞에 있는 한 명의 눈빛이 나에게 더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술을 매개로 한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만나서 십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경동원 아이들이다. 첫 방문 때는 긴장을 많이 했다. 아이들을 만나면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어 눈물을 보일까 봐 걱정도 됐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아이다운 모습일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안타까운 인식으로 아이들을 보려 했던 건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였다. 아이들이 다른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에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단 한 가지, 아이들과 한 약속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헤어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던 아이도 선생님의 한마디에 “안녕”이라고 인사하고, 가지 말라고 떼쓰기보다 익숙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이들에게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보자는 인사는 절대 흔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지키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후로 지금까지 십 년째 아이들과 함께하며 약속을 지키는 중이다.
매일 얼굴을 볼 수는 없어도 TV나 온라인 뉴스에서 나를 발견하고 아이들이 알은체하거나, 주변에 자기가 아는 누나라고 소개하며 뿌듯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수록 내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됐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손길을 내밀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그렇게 함께 손을 잡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