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서 ‘나’로 돌아가는 길은 내 안에 있다
달리기를 하다 넘어지듯, 자녀를 키우는 엄마도 그렇게 넘어질 때가 많다. 무엇을 위해 달렸는지, 어쩌다 발을 헛디뎠는지 곰곰 돌아보는 시기가 있다. 좋은 부모가 되려 했는데 온전한 가정에서 비껴간 듯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간혹 어머니들로부터 상담 메일을 받곤 한다.
“강연 듣고 책을 읽을 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들을 보는 순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힘들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백날 책 읽으면 뭐하나요?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데요?”
대부분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호소했다. 자녀에 대한 기대치를 내려놓기 어렵고 어떻게 하는 게 진정 자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혼동된다고 했다.
지금 엄마들 대부분은 ‘열심히 사는 게 최선인 삶’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나 역시 평범한 직장맘으로 주어진 일을 감당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30년을 교사로서 일하는 중 십수 년은 승진 준비하며 일 중독에 빠져 살다 건강이 나빠져 휴직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회복하는 동안 매일 새롭게 과거의 일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의 감정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자식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가족과 타인에게 잘 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싹텄다. 그러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부와 권세와 명예를 좇는 삶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실감했다.
3년 동안 매일 쓰면서 성찰해 보았다. 마음이 많이 치유되었다. 지금까지 ‘나’보다 ‘엄마, 아내, 딸, 교사’로서 살았다.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초자아가 너무 강했던 엄마, 끊임없이 자녀를 감독해야 한다고 여겼던 엄마,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고 아들들을 훈육했던 관리자형 엄마, ‘엄마는 꼭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던 엄마였다.
살면서 많은 엄마들을 만나왔다. 학교에서 진학상담 때 만났던 엄마들의 모습, 자식이 문제되는 행동으로 처벌받게 되었을 때 엄마들의 표정,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원서 쓸 때의 고민들, 그 엄마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교사인 내 눈에 보이는 자녀의 특성을 부모는 잘 모를 때가 있다. ‘내 자식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이 항상 맞지는 않다. 학생들은 엄마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학교에서 안 좋은 일에 엮여 곤욕을 치를 때, 자신보다 엄마가 상처 입을 것을 더 염려하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다. 자녀들은 진심으로 엄마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만 매이지 않고 자기의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원한다. 엄마가 자기 인생을 찾아가며 만족할 때 자식들의 마음도 평안해지고 행복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대체로 엄마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한 적이 드물었다. ‘누군가’를 위해 결정했다. 삶이 대기모드였다. 누가 부르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만 입학하면…’, ‘연로하신 부모님이 안정된 노후를 보내시기만 하면…’, ‘아이들이 취업만 하면…’, ‘아이들이 결혼만 하면…’ 하고 자기의 삶을 뒤로 미루고 살아왔다.
그러나 엄마가 독립적으로 살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화된다. 이유도 모르고 힘들었던 나날들, 예상과 자꾸 빗나가는 성장기 자녀의 모습들, 나아지지 않는 가족과의 관계 등을 해결할 근본적인 치유책은 ‘나의 태도’에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나를 바꾸고 내 행동과 언어를 이전과 다르게 할 때 나의 세계도 변하기 시작한다. ‘아, 내가 이래서 그랬구나.’, ‘내 자녀가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가 그래서 직장에서 힘들었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타인에게 공감하려고 애썼던 힘을 엄마 자신에게도 써 보면 달라진다. 그렇다고 실제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아침에 서둘러 등교하고 출근하는 가족, 퉁퉁대는 발걸음, 냉랭한 친우들, 이웃들, 서로의 아픔에 둔감한 친척들. 괜히 우울해지는 순간들, 나만 힘들고 외로운 날들이 찾아온다. 그럴 때 미소 지으려 노력한다. 어디로든 나가서 힘을 얻는다. 움직이니까 달라졌다.
‘독립된 나’로 변한 이후에 ‘움직이게 하는 힘’이 찾아왔다. 도전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나는 그냥 나이다. 나는 좀 이기적이고 꼰대 같을 때도 있고 가끔 너그럽고 따스할 때도 있다. 하다 만 일들도 많지만 기특하게 해낸 일도 있다. ‘내로라’할 만큼 자랑할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또 꿀릴 것도 없다. 걱정을 캐 보면 갯벌의 조개만큼이나 많겠지만 내 삶에는 갯내음이 향긋하게 나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정서를 갖추니까 태어나 처음 맞는 듯한 기쁨이 찾아왔다. 지금 한창 아이를 기르느라 바쁜 엄마들, 십 대 아이들의 정서와 진로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진 엄마들, 아직 진로 결정을 하느라 애쓰는 성인자녀를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엄마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생겼다. 그동안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한 채 살아왔다. 적어도 인생을 ‘어느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나를 옭아맸다. 그동안 ‘왜 그렇게 힘들었나,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누구 때문에?’라고 질문해 본다. 내가 ‘나’를 외면하고 살아온 탓이었다.
“아니, 내가 나를 왜 그렇게 지구에서 맨 나중에 만날 사람처럼 내버려 두고 살아왔지? 죽음에 이르러서야 ‘아차, 내가 나를 까먹었네. 헛살았네!’ 할 건가?” 하고 소리쳤다. 하마터면 그럴 뻔했다.
이제 내가 나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취약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또 이렇게 느끼는구나. 흘려보내봐. 찾아온 그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보낼까. 조용히 보낼까, 아니면 한바탕 막춤이라도 춰서 보낼까. 친구와 통화하면서 떨쳐버릴까. 벽 보고 마구 소리치고 욕할까. 이젠 네게 그런 감정을 준 대상이 사라졌어. 세상에서 너만 기억하는 그 일 때문에 오늘을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고 말을 건네 본다.
나의 ‘삶’이 중요해지니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나는 나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 삶에 충실하게 살면 된다. 그동안 내게 기대하는 타인의 요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관계에 의존했다. 사람을 만나고 오면 ‘그들이 어떤 오해를 하지나 않을까’, ‘내가 너무 경솔하게 대하지 않았나’, ‘나는 왜 처세에 능하지 못할까’ 하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그 사람을 만나서 별로 좋지는 않았어. 지금 나의 모습, 상황에서는 그런 만남일 수밖에 없지. 다음에 볼 때 더 편하게 대해 보자. 안 만나게 되면 말고.’ 하고 말한다.
독립적인 엄마는 크게 우왕좌왕 힘쓰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보여 주면 된다. 엄마가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자녀는 안정된다. 엄마의 내면이 평안하니 다른 이들의 마음을 돌볼 여유가 생긴다. 엄마의 마음에 빈 방이 하나 생겼다. 쉴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 하나!
자기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만 해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는 말을 엄마들로부터 듣곤 한다. 그런 움직임은 자녀는 물론 가족과 타인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다. 상황을 평안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내 이웃이고 동료이자 친인척, 친구, 치유상담연구원의 동기들, 제자 등 여러 관계로 만난 사람들이다. 익명성을 위해 이니셜을 쓰고 상황도 각색하였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된 각 장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1장 : 자녀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이유
앞으로 살아갈 고령화 사회에서 엄마들이 성장기 자녀의 양육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인생을 어떻게 살까에 대해 썼다. 오늘날 가부장제의 전통에서 엄마의 삶을 규정하고 제약했던 역할들은 약해졌다. 인생 전부를 자녀 교육에 올인하는 풍토도 달라졌다. 엄마의 삶에 역할을 부여했던 사람들이 엄마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자녀도 배우자도 부모도 각기 자기 삶에 맞게 살고 있다. 엄마도 엄마 본래의 개성을 찾아가야 한다. 욕심과 집착, 그리고 계획 등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기 전에, 엄마가 지금 여기서 일상을 변화시켜 지속적인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나아가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
2장 : 독립의 첫 번째 걸음 - 지금 내 가족에게 충실하게
엄마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기르면서 내 자녀에게 맞는 부모 역할을 했는지 돌아본다. 자녀는 자기와 전혀 다른 인격체인데, 엄마는 자신의 부모가 살았던 방식으로 대할 가능성이 있다. 일상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중시하기보다 더 큰 가족인 친정이나 시댁의 인간관계 혹은 직장에서의 관계로 갈등을 겪기 쉽다. 엄마가 자기를 알아갈 때, 자녀는 적절하게 한계를 지어주고 격려하는 부모를 신뢰하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내 아이에게 맞는 엄마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3장 : 독립의 두 번째 걸음 – 현재를 소중하게
자녀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한 엄마에게 가장 큰 변화는 매일 더 편안하게 느끼고 생각하는 점이다. 감정이나 생각이 과거에 매여 있다면 지금 누리는 삶의 기쁨을 놓치기 쉽다. ‘엄마의 독립’은 엄마를 키워 온 좋은 점들, 선한 목적으로 인도해 온 도움의 손길들을 다시 찾는 과정이다. 현재의 삶이 소중해지면 엄마의 행동이나 언어가 변화한다. 자녀는 더욱 성숙한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엄마를 보며 여유 있게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익숙했던 페르소나를 내려놓고 본래의 성격에 맞는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그 방법을 찾아보았다.
4장 : 독립의 세 번째 걸음 – 관계와 감정을 편안하게
엄마를 힘들게 한 삶은 외적인 요소도 있지만, 엄마 스스로 만들어 낸 관계와 감정의 혼선에서 빚어질 때가 많다. 갈등 상황에 있게 한 관계를 들여다보고 새롭게 선택하는 방법을 알아본다. 자녀 세대와 소통하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 실제 예를 보며 생각해 본다. 엄마의 마음에 내재되었던 열등감, 분노, 죄책감, 불안감, 타인지향적인 사고 등을 잘 조절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해 본다.
엄마가 겪는 갈등, 육체적 아픔, 정신적 공허감 등은 하나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역할에 매몰되어 살면서 놓친 자기 자신을 찾도록 촉구하는 내면의 소리다. 여성인 엄마뿐만 아니라 아버지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때 자녀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의존과 독립이 적절히 잘 이뤄진 부모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어 더 편안하고 생기 어린 에너지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안을 소중히 가꾸는 첫 삽을 떠 보자. ‘엄마’에서 ‘나’로 가는 길에는 ‘행복’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나’의 감정과 생각이 이끄는 대로 선택하는 방향이다. 매일 백지처럼 새로이 떠오르는 하루에 내가 하고픈 일들을 그려 보고 그대로 움직여 보자.
프롤로그
‘엄마’에서 ‘나’로 돌아가는 길은 내 안에 있다
1장자녀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이유
01 ‘엄마’로서 평생 살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02 ‘엄마’의 역할이 바뀌었다
03 내 안에 있는 ‘강적’ 마주하기 ― ‘나’의 적은 ‘나’
04 열심히 살수록 엄마의 삶이 꼬이는 이유는?
05 엄마도 성장한다 ― 발달과업이 있다
06 빈 둥지 증후군, 찬 둥지 증후군 예방법
07 사라져가는 ‘현모양처 신드롬’
08 슈퍼우먼 콤플렉스 벗어나기
09 엄마의 시간 도둑을 잡아라 ― ‘잃어버린 엄마의 시간을 찾아서’
10 이미 엄마는 위대하다
2장독립의 첫 번째 걸음: 지금 내 가족에게 충실하게
11 내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12 부모가 내게 했던 말, 부모는 기억할까
13 내 부모의 부부관계를 복사하지 않기
14 원가족을 떠나 지금 나의 가족에게 집중하기
15 페르소나를 구별하기 ― ‘나, 실은 이런 사람인데요?’
16 독립적인 엄마가 자녀를 자유롭게 키운다
3장독립의 두 번째 걸음: 현재를 소중하게
17 내 안의 ‘나’와의 재회, 핵심 사건 만나기 ― 기억의 재구성
18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 찾기
19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20 내 안의 내면부모 만나기 ―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해 준다
21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 ― 엄마의 기질과 성격 찾기
22 독립하는 습관일지, 나의 승리 일기 쓰기
4장독립의 세 번째 걸음: 관계와 감정을 편안하게
23 일 때문에 관계를 포기하지 않기
24 관계는 주고받는 게 있어야 유지된다
25 내가 하고 싶은 한 가지를 선택한다 ―선택과 집중
26 타인을 의식하고 나의 감정과 별개로 맞장구치다 반백 년!
27 왜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지? ― 불안감, 죄책감 덜기
28 내가 나를 바라보는 대로 상대는 나를 평가한다 ―열등감 극복
29 때로는 최선보다 차선이 필요하다
30 내 안의 분노는 재생 에너지! ― 이유 없이 화내고 후회할 때
31 내가 키워진 방식을 돌아보며 아이를 키운다
32 고차원적인 의존 관계로 새로운 친구 찾기
에필로그
독립성을 길러주는 것이 사랑이다
01
“엄마, ◦◦◦ 노래 알아요? 엄마 때 인기였다고 하던데요?”
“응, 알지. 왜?”
“요즘 다시 핫하거든요.”
“그렇구나. 우리 때 정말 인기가 많았지. 나도 따라 부르고 그랬어.”
“진짜요? 엄마가 그랬단 말예요?”
대화 끝에 아들이 놀란다. 아들 눈에 엄마는 그저 집안일하며 나이 들어가는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나 싶다.
엄마의 시간은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점차 밑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엄마는 젊었을 때와 크게 바뀐 건 없다. 엄마도 한때 야구장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팝송 가사를 영어 교과서보다 더 열심히 외우고 따라 불렀다. 그런데 엄마가 되고부터 살림과 자녀 양육과 교육에 힘쓰다 보니 예전의 모습들이 사라져 개성이 지워지고 ‘아줌마’로 획일화되어 버렸다.
그러다 자녀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부모의 손을 떠나 제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나이가 되면 엄마의 열정이 다시 솟아난다. 드라마에 심취하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찾고 취미를 찾는다. 어떤 엄마는 군대 갔던 아들이 휴가를 나와도 “아들아, 미안. 나 지금 바빠.” 하며 좋아하는 스타의 공연장으로 나선다고 한다. 아들은 멍하니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볼 테지만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는 거니까 환영할 일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백세 시대라고 하면 광고의 한 구절쯤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진짜 현실이 되었다. 백 세, 백이십 세 시대가 오고 있다. 물론 평균 수명이야 통계일 뿐이지만 인생 곡선을 그릴 때 고려할 점이 분명 달라졌다. 평생 떠안을 역할들을 생각해 보고 덜어내야 할 역할도 골라보며 그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 시기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인데, ‘더욱 길어진 삶’에서 부모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라이프 사이클이 바뀌고 있다. 전체 인생에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사는 기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대신 부모 자식 관계로 살아가는 기간은 어느 세대보다 길어졌다. 성인 대 성인으로 지내는 기간이 이전 시대 같으면 두 세대가 더 지날 정도로 길다. 자식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도 노부모를 봉양하게 된 초고령화 사회다. 자식, 부모가 각자 성인으로서 자기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하는 관계로 변화되었다.
게다가 ‘엄마의 부모’ 역시 절대적으로 늘어난 수명을 살고 있다. 엄마로서 딸로서 중첩된 정체성 속에서 사는 기간이 이전 세대보다 훨씬 늘어났다. 그래서 지금 부모가 된 세대를 ‘낀 세대’라고 한다. 의무는 많고 후손들로부터 공대받는 것은 이전 세대에 비해 줄어들었다. 그런 라이프 사이클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에너지의 분배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정신과 의사 마크 고울스톤은 ‘인생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한 단계씩 밟아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의사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아이였다가
아이의 부모가 되고
부모님의 부모가 되었다가
아이의 아이가 된다.1
지금 자녀를 기르는 대부분의 부모는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에 있다. 이제는 엄마 역할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부모의 아이인 채로 나의 아이를 기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보호받는 존재에서 독립된 시기로 나아가는 단계가 부모 노릇을 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을 ‘독립된 성인’으로 자기 인생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지 않으면 자기 아이에게도 온전한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
‘여성은 가정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이래야 한다.’ 하는 식의 도덕적인 관습과 윤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 왔다.
고구려에선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활쏘기, 말 타기를 가르치고 무사로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여인들은 재혼이 자유로웠고 재산 상속 시 권리를 가졌으며, 가정 경제에 도움되는 사업도 진취적으로 했다고 한다.2
유목민으로 살던 시대와 고도의 정보화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같을 수는 없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덕목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엄마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 본다.
조선 시대에는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해서 어려서는 아버지께, 자라서는 남편에게, 노후에는 아들에게 순종하는 여성의 삶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성을 그에 맞게 키웠다. 우리의 부모 세대만 해도 그런 윤리관념 속에서 살다 보니 남편 내조 잘하고 자식 교육 잘 시키는 데서 여성의 삶을 평가하곤 했다. 요즘은 남자들이 새로운 삼종지도 속에서 살아간다고 한다. 어려서는 엄마 말에 순종, 자라서는 아내 말에 순종, 나이 들어서는 딸 말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스갯말이지만 시대의 풍속도가 바뀌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자녀를 독립시킬 즈음에 내 부모를 돌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금 조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양육하면서 아이의 생을 책임지는 ‘강한 부모 역할’은 잠깐이고, 긴 노후를 자녀에게 의탁해야 하는 ‘약해지는 부모’로 수십 년을 살아야 하는 추세다. 2020년 평균 기대 수명은 82.7세다. 조부모 세대는 과거보다 오래 살게 되어서 자녀와의 관계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이들은 자녀부양과 교육에 희생하느라 노후 대책이 특별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부모들은 자녀 교육과 더불어 자신의 부모의 노후를 도와야 한다. 핵가족 환경에서 자란 지금 자녀들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거나 봉양한다는 의식이 부족하다. 전통적인 효 사상에 젖은 부모 세대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낀 세대인 요즘 부모는 조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삶을 기획해야 한다. 내 부모와 나의 라이프 사이클은 달라졌다. 조부모 세대는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웠다. 여성들은 생에 대한 꿈과 야망을 자식에게 걸었다. 어떤 면에선 자식을 잘 키워 세상에 떳떳이 서겠다는 욕망들이 지배했다. 배움의 기회를 누리기도 어려웠다. 교육의 기회는 아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각 가정마다 희생하고 인내하고 최선을 다한 어머니들의 업적이 전해진다. 이전에는 집안에서 어머니의 삶을 칭송하는 경향이 짙어서 “어디 어머니한테!”, “어머니께 잘해라.” 하는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지금은 그런 지원군도 엄마 곁에 거의 없다. ‘집안’이라는 공동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역할에 충실했다. 특히 총명한 아들에게는 기대가 컸다. 유교적인 입신양명인 과거 급제를 해야 가문이 살아날 수 있었던 탓이다.
가문의 필요에 의해 명예로운 자식을 키워내면 그 여인은 삶의 보람을 느꼈을 터다. 집안에서 훌륭한 자손을 길러준 대가로 존중받았을 것이다. 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자녀 양육과 교육에서 인정받았다. 자녀가 가문의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 어머니는 대단한 평판과 권위를 갖게 된다. 이런 가족 시스템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남다른 경쟁의식도 지녔을 법하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성을 책임져 주는 가정의 울타리가 사라졌다.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엄마들은 가문의 수호자, 남성의 내조자 등으로 자신의 삶을 바칠 의무는 약해졌다. 여성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엄마들이 가장 우선으로 돌봐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부모로서 힘든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일단 숨을 크게 내쉬어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내 자녀에게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평생 엄마로서 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나 자녀와 평생 조화로운 관계로 살고 싶어 한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가 언제든 부모와 소통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한다. 자녀가 성장하면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자유롭게 성인으로 인정하고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가 ‘누구’를 위해 살기보다 엄마 몫의 삶을 충실히 살아갈 때 가족과 소통이 잘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
02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자녀 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할까?
타이거맘, 알파맘, 헬리콥터맘, 코칭맘, 매니저맘….
아이를 잘 키우는 엄마로 미화되는 그 모습이 진짜일까. 위대한 모성으로 칭송받을 만한가. 아마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엄마 역할은 없을 것이다. 아이는 자기에게 공감해 주고 격려하는 엄마가 필요할 뿐이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엄마와 갈등을 겪는 딸의 예를 들어 본다.
K씨는 알파걸3이다. 어머니 역시 원조 알파걸이었다. 어머니는 전문직종 자격을 갖췄지만 K씨를 잘 키우기 위해서 일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창 시절에 우등생이었고 성실했다. 지금은 멋진 패션 감각과 자녀 교육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열혈맘이다.
K씨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듯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기대한 대로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전문의가 되었다. 이렇게 어머니의 디자인대로 인생이 되어 갔지만 전문직 여성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요구는 이어졌다. 이번에는 좋은 혼처에 걸맞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려야 하는 과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어머니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학업을 목표로 협업하던 관계가 결혼이라는 목표 아래서는 이견이 생겼다. 그리고 일상생활의 필요를 거의 어머니가 다 해 주는 식으로 딸을 챙기는 것도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의상, 먹거리 등 모든 생활에 어머니의 지원이 있었다. K씨는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사시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엄마는 K씨 인생의 로드맵을 이미 다 짜놓고 있었다. “내 말대로 하면 너는 행복할 거야.”가 엄마의 신념이었다.
K씨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서 나갔다. 직장도 옮기고 주소도 알 수 없었다. 부모가 간섭하지 않는 곳으로 독립해 나갔다. 엄마는 혼란스러워하며 뒤늦게 사춘기 아이를 둔 것처럼 열병을 앓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뒷바라지했는데…. 이제 아름답게 열매를 얻을 단계인데 어인 일로 이렇게 되었나. 내가 뭘 잘못했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원망도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K씨의 어머니는 ‘내가 딸 하나 잘 키우려고 얼마나 많은 기회를 포기했는데….’ 하는 자괴감이 생겼다.
K씨는 전형적인 알파걸로서 전문가로 성공하고 또 여성의 행복도 갖춘 완벽한 여성으로 살도록 키워졌다.
K씨의 엄마처럼 할 수 있는 여성은 경제력과 시간적 여유를 지닌 경우다. 그 덕택에 K씨는 지금까지 목표대로 원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미 이룬 성취가 눈부시다. 그런데 K씨는 행복하지 않다. 엄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기 인생을 자율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자기가 엄마의 욕망을 대신하는 대리인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K씨의 선택은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대부분 십 대 청소년기에 이미 주변에 반항하며 던져봤을 질문이다.
엄마들은 “자식들이 철들고 성숙해져서 자발적으로 공부할 때를 기다리기에는 대입이 너무 다급하고 위중해요. 못 기다려요. 그러다 기회 자체가 사라져요. 망해요.”라고 흔히 말한다. 아이가 열 살이 되면 ‘무조건 대입에 성공하고 나서 보자’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입에 올인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우리나라 엄마들의 전략은 미국에서도 ‘타이거맘’이라는 엄마 유형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니 평범한 엄마들도 성과 위주의 교육에 거스르는 독자적인 자녀 교육을 하기 어려웠다.
자식 교육은 적어도 이십 년, 아니 삼십 년 가까이 집중해야 하는 과제다. 그 시간은 자녀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꿈 많고 정서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해야 할 시간이다. 무엇이 가장 자기에게 맞는 삶인지 묻고 실험하고 싶을 시기다. K씨처럼 목표가 주어져서 달리고 달려서 도달했더니 의문이 생기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엄마는 엄마대로 젊은 시절을 자녀에게 올인하고 나니 초로에 접어드는 나이가 된다. 평생 밀착지원하며 딸의 행복을 디자인하려던 계획이 멈춰진 K양의 어머니가 혼란스러운 것처럼 주변을 보면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동안 경쟁에서 이겨야만 성공한 삶으로 인정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 목표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안타깝다. 자녀와 부모가 코드가 맞아 둘 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진정한 목표가 아닐까.
보통 사람살이를 빗대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듯해서 고개가 갸웃해진다. 부모 자식 관계에는 그 ‘끝’이 없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 끝나지 않는다. 부모의 얼굴, 말소리, 행동이 자식의 뇌리에 평생 남아 있다. 먼 후일 자식이 “난 참 부모님께 감사해. 정말 나를 위해 주셨어. 그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내 부모는 자신의 삶에 감사하며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사셨어.”라고 회상하면 더 좋지 않을까.
‘타이거맘’, ‘헬리콥터맘’ 등 스케줄대로 계획해서 자녀를 공부시키고 각종 스펙을 준비하게 하는 엄마들은 자기 인생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엄마의 24시간은 온통 자녀의 성과에 매여 있다. 영리한 엄마일수록 과정이 제대로 되어야 결과가 좋다는 점을 알기에 자녀의 일상에서 스트레스까지 관리하고 챙긴다. 최근 바람직한 유형으로 추천되는 ‘코칭맘’은 자녀가 정서적으로 힘들지 않게 돌보면서 진정한 교육적인 내용으로 기르고 안내한다. 강제적으로 시키지는 않지만 정보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자녀의 목표 달성을 위해 집중한다. 결국 목표는 눈에 보이는 성취다. 엄마가 어떤 유형이든 자녀 입장에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엄마는 그렇게 헌신하면 후일 자식이 알아주고 고마워할 거라고 여긴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녀우선으로 살았으니 그렇게 기대한다. 자식과 분리된 사람이라는 의식조차 없을 정도로 자식에게 이입해 사니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부모’이기에 그 정도로 헌신할 수 있다. ‘내 자식만큼은 부모 마음과 애틋한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하는 생각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착각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처럼 자식은 부모로부터 어느 순간 독립하여 나가야 한다. 부모는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는 존재다. 진정으로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엄마는 아이의 자발성을 키워준다.
‘자식이 꼭 부모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애틋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저 자식이 자기 갈 길을 잘 가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효도해야 한다.’, ‘웃어른을 공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자녀에게 지나치게 강조한 감이 없지 않다. ‘~해야 한다’는 덕목이 많으면 자녀는 자유를 억압받는 느낌을 받는다. 부모와 친해지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엄마가 자기 역할을 하되 자식에게 효나 인간의 도리를 ‘강요’할 일은 아니다.
K씨의 어머니는 K씨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평안해질 것이다. K씨 역시 엄마에게 의존했던 자신을 깨닫고 독립된 삶을 시작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결단이 아닐까.
AI시대에 지금 부모는 사회 변화가 평생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여성이 ‘엄마 역할’에 자신의 삶을 국한시키면 자식이 성장한 후 오랫동안 당혹스런 현실에 맞닥트리게 된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닿게 된다. K씨 엄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지금 목적지가 안 보이는 안개 속을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자녀 교육에 올인한다. 부모가 철저하게 아이의 24시간을 관리하면 아이가 지닌 본래의 재능과 생각과 감정이 굳어져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 아이가 앞으로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어떻게 유연하게 적응해 가면서 새롭게 변화하겠는가.
우리 문화에서는 부모로부터 자녀의 정신적 독립도 중요하지만, 자녀로부터 부모, 특히 어머니의 정신적 독립이 특히 중요하다.4성인 초기에 접어든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마땅하다. 엄마는 변화된 관계를 받아들이고 이 시기를 자신의 성장의 전환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자녀가 열 살쯤 되면 엄마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자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본다. 곧 성인이 될 자녀에겐 자기 삶을 잘 가꾸고 새롭게 태어나는 멋진 엄마가 필요하다. 뭔가 거창하고 요란하게 도전하는 게 아니다. 관계를 유연하게 가지며 행복을 스스로 찾아가는 엄마의 모습이 좋다. 자녀는 그런 부모를 보며 자기에게 맞는 길을 열심히 가기 때문이다.
너새니얼 브랜든은 《자존감의 여섯 기둥》이라는 저서에서 스탠리 쿠퍼스미스의 연구를 소개했다.
“부모 스스로 높은 자존감을 즐기는 경향이 있을 때 그들은 자기 효능감과 자기 존중의 본보기가 된다. 아이는 살아 있는 사례에서 자신이 배워야 할 것들을 본다.” 그리고 “아이가 높은 자존감을 지닌 경우, 그 부모들에게서 모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양육 태도나 관련 행동은 없었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5
부모가 자녀를 어떤 방식으로 키워야 한다는 틀은 없다. 부모가 자기 자신의 삶을 존중하며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아이도 스스로 잘 살아간다. 그런 시도는 코칭맘, 타이거맘, 헬리콥터맘 역할을 하면서도 가능하다. 외부에 보이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자녀가 바라고 시도하고 도전하는 목표라면 열심히 지원해 줄 수 있다. 아이가 목표를 정해 매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기다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