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坂 本 龍 一
1952년 1월 17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78년 앨범 《Thousand Knives》를 통해 솔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에 YMO를 결성해 멤버로 활동했다.
1983년 YMO가 해산한 후 《음악 도감》, 《BEAUTY》, 《async》, 《12》 등의 앨범을 발매했으며 끊임없이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자세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영화음악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해 〈전장의 크리스마스〉로 영국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고,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작곡상, 골든 글러브 최우수 작곡상, 그래미 영화TV 부문 음악상 등의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LIFE〉, 〈TIME〉을 비롯한 다양한 무대 작품을 창작했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대규모 설치 미술 전시를 여는 등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환경과 평화 문제에 대한 발언을 이어가며 삼림보전단체 ‘모어 트리스’를 창설하기도 했다. 또한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해 재난 피해 지역 아이들의 음악 활동을 지원했다.
2023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황국영
서울예술대학에서 광고를 공부하고 와세다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표상미디어론을 전공했다. 『미식가를 위한 일본어 안내서』, 『クイズ化するテレビ: TV, 퀴즈가 되다』를 썼으며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등을 옮겼다.
BOKUWAATONANKAI,
MANGETSUWOMIRUDAROU
by SAKAMOTORyuichi
–
Copyright Ⓒ KAB America Inc./Kab Inc.
Korean translation copyrights Ⓒ 2023 by Wisdom House, Inc.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2023 by SHINCHOSHA Publishing Co., 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SHINCHOSHA Publishing Co., Ltd.
through JM Contents Agency Co.
–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JMCA를 통한 SHINCHOSHA Publishing Co., Ltd.과의 독점 계약으로 ㈜위즈덤하우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국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일러두기
· 각주에 표기된 내용은 역자의 주석이다.
· 단행본은 『 』, 신문과 잡지, 음반은 《 》, 전시와 미술 작품, 영화, 방송 프로그램, 노래는 〈 〉로 표기했다.
· 국내에 소개된 작품명은 번역된 제목을 따랐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명은 원어 제목을 독음대로 적거나 우리말로 옮기고, 일부 곡명에 한해서는 원어로 표기하였다.
· 저자 이름은 본문에서는 ‘사카모토 류이치’로 표기하되, 표지의 경우 널리 알려진 영어식 표기인 류이치 사카모토를 따랐다.
· 본 책은 스즈키 마사후미(鈴木正文)와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차례
1
암과 살아간다
베르톨루치와 볼스 | 수술 직전 | 섬망 증상 | 사랑으로 구원 받다 | 친구라는 존재 | 시간에 대한 의구심 | 아들이 가르쳐준 노래 | 처음 겪는 파괴 충동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에 대한 생각 | 부모의 죽음 | 생명, 그 본연의 모습 | 사후 세계
2
어머니를 위한 레퀴엠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 북극권으로의 여행 | 《Out of Noise》 | 프랑스 정부가 수여한 훈장 | 침대 버스를 타고 하는 투어 | 연주가 달라진 밤 | ‘공즉시색’의 세계 | 텔레비전의 가능성과 한계 | 조몬 시대의 음악 | 오누키 다에코와의 추억 | 해바라기 같은 어머니 | 계절의 순환
3
자연에는 대적할 수 없다
한국과의 인연 |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 재해지에서 맛본 무력감 | ‘모어 트리스’ 활동 | 어린이 음악 재생 기금 | 서머 페스티벌에서 있었던 일 | 요시나가 사유리 씨와의 연대 | 요시모토 다카아키 씨와의 재회 | 인생 최고의 선물 | 크라프트베르크와의 유대 | ‘고작 전기’ 발언의 진의 | 트리오 자선 콘서트
4
여행과 창작
아이슬란드로부터 배우다 | 중동의 왕녀 | 관광을 싫어하는 성미 | 백남준과 존 케이지 | 영화제라는 공간 | 노가쿠에 다가가기 | 지휘자의 격식 | 단잔신사에서 본 〈오키나〉 | 삿포로 국제 예술제 | 마음속에 그리던 오프닝
5
첫 번째 좌절
노구치 정체와 매크로바이오틱 | 미국의 의료 | 뉴욕에서의 생활 | 하와이의 역사 | 만들어진 전통 | 진정한 의미의 치유 | 일로 복귀하다 | 〈레버넌트〉 | 〈어머니와 살면〉 | Trust me!
6
더 큰 산을 향해
단 하루의 교수직 | 모노파와 타르콥스키 | 《async》 | 새로운 표현 형식 | 아시아에서의 프로젝트 | 〈CODA〉 | 굴드에게 은혜를 갚다 | 베르톨루치와의 이별 | 나의 뿌리 | 외삼촌의 어린 시절 놀이
7
새로운 재능과의 만남
브렉퍼스트 클럽 | 글라스 하우스에서의 경험 | ‘카지쓰’를 위한 선곡 |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인연 | 이우환 선생님으로부터의 의뢰 | 교토 회의 | 대만의 소수 민족 | ‘오시마 나기사 상’ 창설 | 야마시타 요스케 씨와의 놀이 | 헤노코 기지 문제 | 코로나 사태의 시작 | 기묘한 시간 감각 | 암의 재발
8
미래에 남기는 것
MR 프로젝트 | 아이들에게 고백하다 | 베이징에서의 대규모 전시회 | 〈타임〉 | 최강의 서포트 시스템 | 우크라이나의 일리야 |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 D2021 | 덤 타입의 새 멤버 | 오랜만의 자택 | 사카모토 도서 | 마지막 피아노 솔로 | 《12》
저자를 대신한 에필로그
장례식 플레이리스트
연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올해로 일흔이 되어 고희를 맞이했습니다만,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영화 〈마지막 사랑〉(1990년)에 이 대사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제가 〈마지막 황제〉(1987년)에 이어 음악을 맡았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작품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원작자 폴 볼스(Paul Bowles)가 등장해 나지막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실제로 볼스는 영화 〈마지막 사랑〉이 완성되고 10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영화 작업에 참여했을 무렵 저는 아직 30대 중반이었습니다. 볼스의 그 말은 선명하고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지만, 그것이 꼭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2014년, 중인두암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자연스레 스스로의 모털리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2017년 발표한 앨범 《async》에는 〈fullmoon〉(보름달)이라는 곡을 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볼스의 한 구절을 영화 속에서 따와 샘플링한 다음, 같은 문장을 중국어와 독일어, 페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각 언어의 원어민 아티스트들에게 낭독하도록 했습니다.
가장 마지막 언어가 이탈리아어였는데, 실은 그 내레이션의 주인공이 바로 베르톨루치 감독입니다. “만약 이탈리아어를 넣게 되면 낭독해줄 사람이 당신밖에 없을 것 같은데, 해줄 수 있겠어?”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부탁했더니 금방 “아아, 그래 알았어”라는 답장이 도착했고, 얼마 후 녹음된 음성 데이터를 전송 받았습니다.
볼스는 전쟁 전 뉴욕에서 전위 작곡가로도 활약한 경력이 있는 만큼 그 목소리에 인생의 흔적과 연륜이 묻어났고, 음성의 질감 자체에서 여느 미국인과는 다른 교양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한편, 베르톨루치의 목소리는 실로 드라마틱하여 역시나 오페라의 나라 출신답다는 생각이 들게 했는데, 이 역시 근사했습니다.
하지만 베르톨루치도 그 곡을 완성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녹음의 형태였지만,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이 〈fullmoon〉에서의 목소리 출연이 되었습니다.
이쯤에서 제 현재 병세에 대한 설명을 해두려고 합니다. 다소 적나라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잠시 동안만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2014년에 발견된 중인두암은 그 이후 치료되었으나 2020년 6월, 뉴욕에서의 검사를 통해 직장암 진단을 받고 말았습니다. 지난번 방사선 치료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뉴욕에서 다니던 암 센터를 신뢰했죠. 이번에는 방사선 치료와 함께 항암제도 복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나도 암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12월, 일 때문에 일본에 가게 됐는데 그즈음 건망증이 너무 심해져 고민을 하던 터라 귀국한 김에 뇌의 건강 상태를 확인해볼까 싶어 11월 중순부터 2주간의 격리를 거친 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걱정하던 뇌는 정상이었으나 야속하게도 다른 곳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암이 간과 림프에도 전이된 것이었죠.
이때는 이미 방사선 치료가 끝난 지 3개월이나 지난 후였는데 웬일인지 뉴욕의 병원에서는 전이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9월 말에는 전이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물론, 전이 자체가 충격이었지만 미국 전체에서 1, 2위를 다투는 암 센터가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어떤 이유로든 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순식간에 불신이 싹텄습니다.
일본 병원에서 첫 번째로 진찰을 해준 종양내과 선생님은 “이대로 두면 6개월 정도밖에 더 살지 못합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게다가 이미 방사선 치료로 세포가 손상된 상태라 같은 치료를 더는 할 수도 없다고 했죠. “강한 항암제를 써서 고통스러운 화학 치료를 진행한다고 해도
5년 이상 생존율은 50퍼센트입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분명 통계를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수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진단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다고 해도 ‘환자를 대하기에 적당한 말투와 태도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솔직히 화가 났습니다. 희망의 여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비관적으로 단정 지어버리는 말에 충격을 받았고, 좌절감에 휩싸였습니다. 유명한 의사라고 들었는데 저와는 별로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다음 날, 온라인 피아노 콘서트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이후 〈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12122020〉(2021년)이라는 이름의 음원으로 공개된 그 콘서트입니다. 정신 상태는 최악이었고 영상으로 적합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몹시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연주를 잘했는지 스스로도 전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그날의 연주를 칭찬하더군요. 신기했습니다.
뉴욕에 돌아가지 않고 도쿄에서 치료를 이어가기로 결정했지만, 첫 번째 병원이 잘 맞지 않기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는 의사의 소개를 받아 다른 병원에 갔습니다. 원래는 짧은 일정으로 귀국했지만 이후로 일본에 머물고 있습니다.
소개 받은 병원에서 또 다른 의사의 소견을 들어보니 전이가 진행된 시점부터는 이미 4기에 접어든 것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추가 검사를 통해 폐에도 암이 전이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고 2021년 1월에 처음 암이 생겼던 직장을 비롯해 간의 두 곳과 림프에 전이된 암들을 제거하는 외과 수술을 받았습니다. 대장을 30센티미터나 잘라내는 대수술이었습니다. 수술 전에는 의외로 여유로웠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가족을 향해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며 태평하게 손을 흔들던 당시의 모습이 사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당초 12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수술은 결국 20시간이 지나서야 끝났습니다. 오전에 시작한 수술이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사자는 ‘도마 위의 생선’과 다름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수술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전적으로 의사를 믿고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절제 부위를 조금 짧게 해서 20센티미터 정도만 잘라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제안할 만큼 전문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수술을 받으면 체력과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술 전에는 매일 만 보 걷기를 목표로 걸었습니다. 게다가 전신 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받는 이상, 의료사고로 사망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죠. 그래서 그때까지 맛있는 것들을 잔뜩 먹어두기로 하고 약 열흘간, 매일 밤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호화로운 식사를 했습니다. 스테이크도 먹고, 이탈리안 요리도 즐기며 도쿄 내에서 먹을 수 있는 수많은 요리를 만끽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술 후 섬망 증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전신 마취가 뇌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라, 약 일주일 동안 몇 차례의 간헐적 섬망을 겪었습니다. 이것만큼은 의사도 손쓸 수 없는 것 같더군요.
가장 증상이 심했던 것은 수술 다음 날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뜬 순간 ‘지금 이곳은 한국의 병원이다’라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서울도 아닌 한국 지방 도시의 병원이라고 생각했죠. 짧은 한국어 지식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간호사와 이야기를 해보려 애썼지만 제대로 된 뜻의 한국어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인 간호사가 묘하게 일본어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서서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드라마를 자주 봤던 것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다른 섬망 증세는 수술이 막 끝난 상황에서 어시스턴트에게 ‘회의에 늦을 것 같아’라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양팔에 링거를 꽂은 상태로 몸조차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오타도 많았습니다만. 메시지를 받은 사람도 입원 중인 제가 이른 아침에 갑작스레 연락을 해서 놀랐다고 하더군요.
섬망 상태에서 자이쓰 이치로가 불렀던 “모두 두웅~글게 다케모토 피아노”라는 씨엠송이 광고 속 율동과 함께 끝없이 반복 재생되었을 때는, 떨쳐낼 수 없는 음울함에 사로잡혀 미쳐 날뛸 것만 같았습니다. 특별히 좋아한 적도 없는,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봤던 옛날 광고를 왜 갑자기 떠올렸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몹시 무서운 섬망 증세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가 다크웹에 해킹을 당해서 프로그램에 관한 이런저런 지식을 긁어모아 해결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뜻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다크웹은 일반 검색 엔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어둠의 세계죠.
컴퓨터 화면이 멋대로 조작되는 것이 확실히 보였고, 그 상황을 멈추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에어키보드’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타이핑을 하려 해도 손가락이 허공을 가를 뿐이었습니다. 평소 다크웹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아마 뇌의 어딘가에 우연히 흘려들었던 정보가 축적되어 섬망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런 증세는 3일 동안이나 계속됐고 어떤 날은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기도 했습니다.
처음 겪는 섬망이라 무척 두려웠지만 나도 열심히만 하면 드라마 극본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신기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뇌 구조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죠. 초현실주의, 혹은 비트닉1 아티스트들이 오토마티즘(automatism, 자동기술법)을 시도하며 목표했던 것도 이런 무의식적인 창작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뇌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것을 이토록 방대하게 축적하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수술 후 간호사에게 “몸이 아프시더라도 가급적 침대에서 나와 소파에 앉으세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될 수 있으면 일어나서 걸으라고 하더군요. 침대에만 누워 있으면 중력을 거스를 일이 없어 그런지, 눈 깜짝할 새에 근력이 떨어졌습니다. 고작 일주일 동안이었는데 말이죠. 게다가 한번 떨어진 근력은 좀처럼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에 호스가 다섯 개나 꽂혀 있고 양팔에 링거를 맞으면서도, 낮 동안은 최대한 병실 소파에 앉아서 지내려고 했습니다. 소파까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 거기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꾸벅꾸벅 졸곤 했죠. 옛날부터 저는 금방이라도 팔랑대며 날아가 버릴 듯 ‘나뭇잎처럼 가벼운 의지’를 지녔다는 말을 들어왔을 정도로 의지박약이기 때문에, 무심결에 침대로 들어갈 뻔한 적도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최선을 다해 참았습니다.
외과 수술 과정에서 칼을 댔던 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복되었고 통증도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합병증이 속을 썩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거의 매주 ‘팝업’처럼 새로운 합병증이 나타나는 상황이라 그때그때 대처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식사를 거의 못 해 몸무게가 13킬로그램이나 빠지고 말았습니다.
입원한 병원 근처의 하늘
선생님은 최선의 처치를 해주고 있으실 텐데 정작 제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 생각만큼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컨디션은 쭉 낮은 곳에서 평행선을 그리는 중이었죠. 앞으로 나는 평생 이 병원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두운 미래를 상상하며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암이 발견되고 난 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가장 괴로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후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병원 식사에 대한 불만이 생겼습니다. 입원했던 곳에는 감사한 마음이 크지만 나오는 음식들은 정말이지 맛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로요. 그래서 식욕을 되찾고 나서부터는 장어며, 돈가스 덮밥이며 할 것 없이 내키는 대로 사다 달라고 부탁해 먹곤 했습니다.
매일같이 파트너가 음식을 챙겨 왔지만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직접 대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병원 맞은편 차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녁에 스마트폰의 불빛을 켜고 ‘이쪽이야!’ 하고 도로 너머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그러면 10층 병실 창밖으로 콩알 같은 불빛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입니다. 파트너는 인사도 할 겸, 저를 침대에서 나오게 할 목적으로 그 방법을 생각해낸 모양이더군요.
바로 곁에 있는데도 만날 수 없다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것 같은 기분이네”라는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이 습관에 ‘로미줄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로미줄리’를 한 달 정도, 매일 반복했던 것 같은데요. 그 후에도 그녀는 제가 입원할 때마다 똑같이 해주었습니다. 뻔한 말이지만 역시 괴로울 때야말로 사랑에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2년 동안 크고 작은 것을 합쳐 모두 여섯 번의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외과 수술을 통해 손쓸 수 있는 종양은 모두 제거한 상태입니다. 큰 수술은 2021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양쪽 폐에 전이된 암세포를 적출한 수술이었습니다. 각각 서너 시간쯤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걸로 드디어 끝이구나 생각했는데 아직 몸 안에 병소가 남아 있는 데다가, 심지어 증식 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앞으로는 일일이 수술로 제거하기는 어렵고, 약으로 몸 전체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네요. 끝이 보이지 않는 투병 생활입니다.
그저 우울하기만 하던 입원 생활 동안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나는 친구가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20년 전쯤, 나름대로 친구의 정의를 내려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곤란에 처한 순간, 예를 들면 집이 불에 타거나, 도둑이 들거나, 화장실의 물이 줄줄 새서 멈추지 않는 그런 순간에 곧바로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친구라는 것이 당시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몸소 죽음과 직면하면서 새삼스레 상의하고 싶은 사람들을 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그런 사람이 여럿 있더군요. 미국에도, 유럽에도, 그리고 당연히 일본에도.
친구끼리는 사상이나 신념, 취미가 달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기댈 수 있는 사람. 그런 이들이 많지 않을지언정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친구 중 한 명이 독일인 아티스트 카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입니다. 그는 ‘알바 노토’(Alva Noto)라는 이름의 뮤지션으로도 활동 중인데 〈Vrioon〉(2002년), 〈Insen〉(2005년)을 시작으로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년)의 사운드트랙까지, 몇 편의 작업을 저와 함께하기도 했습니다.
첫 만남은 그가 사운드 아티스트인 이케다 료지와 함께 ‘아오야마 스파이럴’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을 때일 것입니다. 카스텐은 무서운 인상에 만드는 곡도 거침없이 전위적인 포스트모던 스타일이지만, ‘아빠’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가정적이고 성격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난 그날부터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구 동독은 유럽 중 비교적 시골에 속하는 곳이라 어딘가 일본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메르켈 전 총리도 동독 출신이죠. 미디어를 통해 봤던 그녀도 어딘가 ‘배짱 두둑한 엄마’2 같은 인상입니다. 어찌 됐든, 대수술을 앞두고 잘못하면 의료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곧바로 연락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베를린에 사는 카스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느 때처럼 가족 같은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일찍이 독일인 아티스트 요셉 보이스와 한국인 아티스트 백남준은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서 8,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를 뛰어넘는 우정을 키워갔습니다. 우리를 위대한 두 예술가에게 비유하는 것은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카스텐과의 관계는 두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고들 합니다.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작품의 시작점이 있고 종착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제게 시간은 오랫동안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그래도 제 몸이 건강할 때는 시간의 영원함이나 일방향성(一方向性)을 전제로 하는 면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생의 유한함에 직면한 지금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순한 철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시간이 쓰는 속임수에 그대로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