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결정적 데이터
: 나는 너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데이터를 통해 생활의 변화를 관측하는 것은 ‘선을 읽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를 과거와 다르게 구분하는 결정적 선이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선이 있었는가? 있다. 2019년 1월, 지상파 3사의 언급량을 역전한 넷플릭스의 상승선이다.(다음쪽 도표 참조)
다음 내용은 당시 〈생활변화관측지〉에 나갔던 인사이트다.
“2019년 1월, 넷플릭스가 SBS, KBS, MBC 모두를 역전했다. SBS, KBS, MBC와 같은 지상파 채널의 언급은 감소하지만 넷플릭스에 대한 언급은 급증하여 마침내 2019년 넷플릭스가 지상파 채널을 역전했다. 지상파는 실내에서 가족과 함께 예능 방송을 시청하는 특성을 보인다. 반면 넷플릭스는 추천받은 맞춤 콘텐츠를 나 혼자 즐긴다. 가족과의 지상파 시청은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지만, 혼자서 보는 넷플릭스 시청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만의 시간을 갖게 해준다. 지상파가 종편이나 케이블과 경쟁하는 동안, 넷플릭스는 시청자의 시간을 두고 유튜브와 경쟁하는 것이 아닐까?”
이 인사이트는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하다. ‘가족’보다 ‘혼자’, ‘토요일 저녁 6시 우리 집 거실이라는 한정된 시공간’에서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알고리즘으로 ‘추천’되는 ‘맞춤’ 콘텐츠라는 사실까지 하나하나가 유효함은 물론이고, 그에 따른 영향력을 생각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이 더 뚜렷해진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미디어 시청의 변화가 가져온 핵심은 공통의 경험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공동체성을 형성한다. 좋건 싫건 가족이 함께 거실에 모여 TV를 보던 때, 같이 안 보더라도 볼 것이 TV 지상파밖에 없을 때의 장면은 이러하다. 아버지는 TV 화면을 바라보며 ‘쯧쯧쯧, 말세구나’를 외치셨다. 지금은? 아버지가 보는 콘텐츠와 자녀가 보는 콘텐츠가 전혀 겹치지 않기 때문에 콘텐츠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2007년 데뷔한 소녀시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선호를 밝힐 수는 있었다. 하지만 2020년 이후 데뷔한 (여자)아이들, 아이브, 에스파, 르세라핌, 뉴진스에 대해서는 의견을 낼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2022년 하반기에 방영된 나영석 PD의 〈뿅뿅 지구오락실〉 시즌1에는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첫째, 구독자 100만 유튜버, 아이돌 등이 출연하는데 ‘부모님을 위한 소개’라는 자막과 함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출연진을 소개한다. 이 출연진은 그야말로 ‘요즘 세대’ 대표 연예인들인데도 말이다. 둘째, 인물 맞히기 게임을 하는 중에 출연진은 배우 손석구 사진을 보고 ‘누구세요?’라고 묻는다. 애초에 인물 맞히기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방증한다. 셋째, 음악퀴즈 중에 출연진은 임영웅 노래를 맞히지 못한다. 그 전에 나온 아이돌 그룹의 노래들은 전주가 나오고 3초 만에 바로바로 맞히던 출연진이 임영웅 노래가 다 끝나도록 헤매자 나영석 PD는 ‘이분 모르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임영웅은 빅데이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아이돌 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임영웅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다. 기술과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밀어낸다. 알고리즘은 내가 본 콘텐츠를 깊이로 이끌지, 너비로 이끌지는 않는다.
그래서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트렌드는 지금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르고 요즘 젊은 사람들만 아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트렌드는 삶의 방식의 변화이고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성이다. 같은 것을 보고 있지 않기에 같은 주제로 대화할 기회가 없다. 서로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애써서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수직에서 수평으로, 조직에서 개인으로, 일방향에서 쌍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회 변화는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책을 열고 우리 사회 변화의 방향성이 어느 지점에서 나타나는지 짚어보기로 하자.
P·R·O·L·O·G·U·E
라이프-스타일, 마침내 분화
대한민국 성인 대부분은 2010~11년에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새로운 정보를 만들고 볼 준비를 갖춘 것이다. 2013~14년에 오늘의집, 마켓컬리를 비롯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는 플랫폼들이 론칭했다. 이러한 플랫폼들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그림, 다시 말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엿보았다. 새로운 맛집과 카페가 오프라인에 이러한 인테리어를 구현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우리 집에 이 라이프스타일이 들어오기는 일렀다. 2016~17년을 거치며 ‘직구’라는 방법론이 소개되면서 정보에 머물렀던 북유럽 스타일이 비로소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루이스폴센 조명 직구 방법과 가격, 설치 영상과 비포-애프터 사진이 공유되었다. 인테리어 플랫폼 기업의 이름이자 사람들이 자기 집 사진을 올릴 때 사용하는 해시태그인 ‘오늘의집’이라는 키워드는 2016년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2019년 정점을 찍었다.
이런 역사를 거쳐 인테리어 분야에 ‘취향’이 들어왔다. 체리색 몰딩, 형광등 조명, 형형색색의 소품들로 채워진 집이 아니라 하얀색 배경에 마찬가지로 하얀색 원형 테이블, 프리츠한센 앤트체어, 루이스폴센 펜던트 조명, 이파리가 큰 초록 식물과 알파벳 글자가 크게 써 있는 액자가 한 켠에 놓인 이른바 북유럽 스타일의 집을 ‘취향의 집’이라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취향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취향이 나노 단위로 나뉘어 있다면 어떻게 모두가 루이스폴센 펜던트 조명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모두가 하얀색 테이블과 앤트체어, 알파벳 액자―그것도 A가 크게 써 있는 액자―를 선호할 수 있겠는가?
2010년대 중반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모두가 같은 맛집에 줄을 서고, 카페를 비롯해 많은 곳이 천장 마감을 하지 않고 골조를 드러내고 있다. 정보가 공유될수록 쏠림 현상은 강화된다. 선택지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대세는 있다. 특히 인테리어처럼 계속 성숙해가는 시장은 대세가 중요하다. 이 경우 취향이 나뉜다고 보기보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제안되고, 소비자가 그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액션, 코미디, 스릴러물처럼 취향이 다양한 갈래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인테리어, 패션, 식문화처럼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취향은 나뉘기보다 높아지고 깊어질 여지가 더 크다. 대한민국은 현재 눈높이는 높아지고 있고, 지식은 공부하고 있고, 취향은 탐색 중에 있다.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삶의 환경’과 ‘가치관’이라는 변수가 개입하면 선택지가 달라진다. 피부색이 웜톤인지 쿨톤인지에 따라 다르고, 1인가구와 다인가구의 삶이 다르고, 아이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이 다르고, 유연근무를 시행하는 직장과 아닌 직장, 친환경 지향성의 강도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진다. 마침내 취향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서로의 취향이 대단히 달라서라기보다는 본인이 처한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만 해도 직장 선택에 유연성(flexibility)은 중요한 고려 요인이 아니었다. 직장마다 유연성의 정도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회사마다 유연성을 대하는 정도에 차이가 나타났다. 이제 사람들은 이 회사가 유연근무제를 시행하는지, 재택근무가 자유로운지, 거점 오피스에서 근무할 수 있는지 등의 근로 환경 유연성을 따지기 시작한다. 유연한 근무제도가 가능한 직장을 선택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은 달라진다. 역세권에서 한발 물러나더라도 창이 크고 뷰가 좋은 곳을 선택한다.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큰 테이블을 들이고 편한 의자를 구입한다. 편히 쉬면서 책을 읽기 위한 1인용 소파가 아니라 장시간 앉아서 근무할 수 있는 오피스 의자가 집에 들어온다. 둘 다 취향은 높아졌지만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홈오피스에 집중하느냐, 홈카페에 집중하느냐가 달라진다.
가치관도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를 불러온다. 코로나 이전에 비건, 지속가능성, 친환경은 해외에서 체험하는 색다른 문화였다. 지금은? 삶의 가치관이자 지향점이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꽤 진지하게 이를 실천하고 바꿔나가는 사람들의 라이프는 예전과 달라졌다. 온라인 택배나 배달 포장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장이나 마트를 직접 방문하고 음식은 식당에서 먹고 오거나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소비를 줄이고 가능하면 재활용 가능한 것들을 구입한다. 디자인이 고급스러운 샴푸통이 아니라 고체 샴푸바를 선택한다. 취향의 눈높이를 낮추지 않으면서 집안의 풍경이 전과는 달라진다.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기업에서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해야 한다’,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상품을 제안해야 한다’,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것을 미션으로 삼았다. 이때의 라이프스타일은 예전과는 다른 스타일리시한 삶의 방식이란 뜻이었다. 단순한 필요가 아니라 취향과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것, 그냥 커피가 아니라 플랫화이트, 그냥 주전자가 아니라 티팟세트, 그냥 의자가 아니라 앤트체어가 각광받았다.
필자가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띄어 쓴 것은 삶에 스타일이 더해진 시대를 넘어서 삶의 스타일이 나뉘는 시대로 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1인가구의 증가와 함께 찾아온 1인용 삶, 코로나를 계기로 경험해본 유연한 근무방식, 코로나가 각성시킨 환경과 건강의 중요성은 2024년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 생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요인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높아진 취향과 맞물리면서 다양한 갈래를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는 갈래가 어떻게 나뉘고 어떤 갈래가 부상하는지 일상, 경험, 가치관의 영역으로 나누어 삶의 변화를 보여줄 것이다.
총론 성격의 1장은 이 책의 구성 안내서이자 트렌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트렌드는 지금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의 변화이고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성이다. 트렌드는 마음먹고 찾아가는 핫플레이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마시는 커피 한잔에도 나타난다. 이 시대 소비 트렌드를 습관(習), 경험(感), 지성(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이 영역들을 어떻게 결합해 오래 남는 트렌드가 될 것인지 제안했다. 《2023 트렌드 노트》에서 제시했던 우리 시대 가치관이 1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진화했는지도 뒷부분에 같이 실었다.
1부 ‘習, 일상의 변화’에서 주로 다룰 주제는 일과 서울이다.
새로운 제너레이션이 등장했다. 이들은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으로 실력을 쌓길 바라며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방식으로 칼퇴근을 한다. 일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결정과 선택을 통해 삶에 대한 주도권을 획득하고자 한다. 새로운 일하기 방식으로서 유연근무제와 워케이션(workcation)을, 그리고 주도적이고 밀도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세대의 로망과 염원을 살펴본다.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 서울의 변화도 1부에서 다룬다.
2부 ‘感, 경험의 변화’에서는 브랜드가 활용할 도구이며 목적지인 콘텐츠와 팬덤을 다룬다.
4장에서는 서브컬처와 주류의 차이, 더 큰 주류로 확장되는 서브의 특성, 서브와 주류를 잇는 존재인 커뮤니케이터를 중심으로 이 시대 콘텐츠가 지닌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5장에서는 세대를 넘어 공감받는 서사와 세계관의 특성을 살핀다. 6장에서는 모델의 팬덤을 브랜드의 팬덤으로 만들기 위한 관계 설정과 활용법을 제안한다.
3부 ‘知, 가치의 변화’에서는 이 시대의 욕구와 당위의 가치를 ‘해방감’과 ‘감수성’이란 키워드로 살펴본다.
시대의 언어는 시대의 욕구를 반영한다. 식문화를 시작으로 최근 일상에서 많이 보이는 ‘제로’와 ‘프리’를 통해 본 이 시대의 욕구는 ‘해방감’이다. 전통적 경계를 무력화하는 해방의 욕구가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7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욕구의 가치관이 있는가 하면 당위의 가치관이 있다. ESG에 이은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담론을 일상생활 속 사람들의 자발적 언어로 관찰했다. 이 시대 감수성 관련 논의와 언어들을 데이터로 모아본 관찰기를 8장에서 공유한다.
트렌드를 보기 위해 한 분야만 보아야 한다면 단연 ‘식(食)’이다. 식은 누구도 예외 없이 관련이 있고, 소비 빈도가 잦고,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생활변화관측소는 브린(BRIN, Brand Rising Index & Norm) 서비스를 운영하며 분야와 상관없이 매주 뜨는 브랜드를 체크하고 있는데, 2022년 한 해 동안 주간랭킹 Top10에 들어온 브랜드의 분야를 헤아려보면 식음 분야가 25%로 가장 많다.1
1)VAIV 생활변화관측소 - 브랜드 랭킹 BRIN
대한민국 트렌드를 코로나 이전, 코로나 시기, 코로나 이후로 구분했을 때 식 분야에 3가지 패턴이 보인다.
하나,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돼 코로나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코로나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패턴으로 예를 들면 ‘닭가슴살’, ‘운동 식단’, ‘모닝 루틴’ 같은 것들이다. 운동하면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꾸준히 대한민국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이다. 운동과 건강은 유사 이래로 변함없는 주제인 것 같지만 헬스를 중심으로, 몸을 가꾸고, 식단을 조절하고, 탄단지(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비율)를 따지고, 영양제를 먹고, 여행 가서도 지키는 나만의 루틴을 만든 것은 최근 10년 안쪽의 일이다.
둘, 코로나 이전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가 코로나를 겪으며 학습했고 코로나 이후에 더욱 진화하는 패턴이다. ‘밀키트’, ‘제로’, ‘웨이팅’과 같이 코로나라는 제약 조건 속에서 니즈가 발생하고, 소비자 니즈에 맞춰 제품과 서비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그 결과 소비자가 더욱 학습하게 되고, 수요와 공급이 함께 커지면서 확장과 진화가 계속되는 분야다.
셋,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등장한 패턴으로, 취향에서 지식으로 깊어지는 경험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인 예는 ‘하이볼’, ‘페어링’, ‘오마카세’다. 오마카세는 전문가에게 메뉴 선택권을 맡기는 방식이다. 오마카세에서 제공되는 음식의 종류와 순서는 셰프의 기호도 손님의 취향도 아니다. 오히려 지식과 안목의 영역이다.
식문화에 이른바 라이프스타일이라 불리는 흐름이 형성된 지 10년, 그사이 코로나를 겪으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배우고, 코로나를 끝내며 새로운 흐름이 합류했다. 식문화의 변화를 통해 지금의 소비 트렌드 전반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식음 트렌드 : 루틴, 웨이팅, 페어링
식의 목적은 3가지로 나뉜다. 습관(習), 경험/사치(感), 지식/지성(知)이다. 오늘 하루 내가 먹은 식을 돌이켜보자. 아침에 습관적으로 영양제를 먹고, 점심에 경험 혹은 소셜라이즈의 일환으로 한남동 식당에 줄을 서고, 저녁에는 탄단지를 따져가며 닭가슴살 식단을 소환한다. 물론 습관과 경험, 지성은 서로 결합하고 이전한다. 습관적으로 먹는 영양제도 처음에는 지성에서 시작되었다. 유산균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흡수율 좋은 고함량 유산균을 고르고 골라 시작해 어느새 습관이 된 것이다. 점심의 한남동 식당 또한 경험의 영역만이 아니라 비건을 실천하기 위한 지성의 선택일 수도 있다. 식 분야에서 습관, 경험, 지성의 영역은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변주되고 결합하는가?
습관으로 자리잡은 루틴
코로나 초기 2년(2020~21년)에 비해 최근 2년간 특히 두드러진 식 분야의 특징은 외식, 음주, 건강식에 대한 담론이다. 집밥과 배달음식 위주의 식사 트렌드가 강했던 코로나 초기와 달리, 최근 2년은 웨이팅까지 하는 등 외식에 적극적인 모습이 관찰된다. 식사와 함께하는 음주 또한 중요한 영역으로 들어왔다. 대한민국 집밥 트렌드를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한 그릇 음식과 물 이외의 음료, 특히 술이 함께 놓인 것이다. 음식과 음료 뒤로는 콘텐츠가 플레이되고 있다.
건강식 영역에서도 단순히 식단을 넘어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과 같은 구체적인 영양성분, 성분 간 비율, 성분의 흡수율을 높이기 위한 보조식품 등 건강식단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지고 있다. 규칙적인 루틴과 한 몸이 되는 ‘건강한’ 식사는 놓칠 수 없는 자기관리의 일환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자격 조건으로서의 ‘자기계발’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궁극적으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 위한 ‘자기관리’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메가트렌드다. 이러한 자기관리의 일환으로 식문화에서도 ‘루틴’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식문화와 연관된 대표적인 루틴은 운동 루틴과 모닝 루틴이다.
“식단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은 아침을 잘 챙겨 먹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주로 아침에 운동을 하기 땜에 근력운동에 힘쓰려면 엄청 든든하게 먹어야 하거든요!!”
모닝 루틴, 운동 루틴과 관련해 언급량이 가장 많이 증가한 식품은 잡곡밥, 그릭요거트다. 미숫가루 등 가루형 간편식품은 줄었다. 언급량이 증가한 것들의 공통점은 직접 만들어 먹는 식재료라는 점이다.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계속 먹어야 하므로 저렴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간편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직접 만들어 먹음으로써 경제성과 건강을 챙기게 되는데, 이때 도구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잡곡밥은 압력밥솥, 그릭요거트는 요구르트 제조기 등 직접 만들기 위해 전용으로 필요한 조리가전이 있다.
혼자 사는 1인용 삶에 필수적인 자기관리, 자기관리의 핵심 요소인 루틴, 루틴 중의 루틴인 모닝 루틴과 운동 루틴, 모닝 루틴과 운동 루틴을 구성하는 직접 조리하는 간단한 건강식, 이를 위한 필수 도구, 꼬리에 꼬리를 물면 1인용 압력밥솥으로 귀결된다. 잡곡밥도 짓고, 요거트도 만들고,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디자인에 1인분을 잡을 수 있다면 전기밥솥이 에어프라이어를 다시 역전할 기회가 된다. 트레이더스 에어프라이어 대란이 2018년의 일이다. 전기밥솥보다 유용하다는 명분으로 전기밥솥을 역전했던 에어프라이어, 2024년 전기밥솥이 재역전을 꿈꾼다.
경험을 찾는 웨이팅
식문화에서 웨이팅이라는 행태가 보편화되고 있다. 웨이팅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맛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것은 효율적인 웨이팅이 아니다. 효율적인 웨이팅은 ‘테이블링’ 등의 어플을 활용해 나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것이다. ‘맛집’이라는 공간, ‘웨이팅’이라는 행위, 그리고 이를 돕는 수단 ‘어플’이 삼위일체로 작동한다. 웨이팅이 있기에 맛집으로 인식되고 어플이 있기에 웨이팅을 한다. 무엇보다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새로운 외식 생태계가 가능하다.
“원래 웨이팅까지 해서 맛집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테이블링 대기는 16팀… 얼마나 맛있었는지 안 물어봐도 알 것 같다. 그리고 전복내장파스타…!! 신세계다. 그야말로 파스타계의 혁명이다…!!!”
웨이팅 문화는 우리 사회가 수직적 문화에서 수평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접대해야 하는 어려운 사람을 모시고 웨이팅하는 식당에 같이 갈 수는 없다. 이 식당은 예약을 받지 않으니 같이 기다리자고 할 수 있는 정도의 사이라야 가능하다. 웨이팅은 시간이 자원이 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효율을 중시해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지만 희소성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기다린다.
“친구나 가족,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행위, 먹기 전 웨이팅하는 그 순간 나누는 소소한 대화나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들 모두 시간 낭비가 아니라 소중한 기억이고 추억이라 생각됩니다.”
식사에 큰돈 지불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 기다려서까지 식사를 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셜라이즈를 위해서는 식당 앞에서 웨이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트렌드는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다. 웨이팅은 희소한 식사를 위해서는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보여준다.
지성이 된 페어링
페어링은 ‘배우다’라는 동사로, 여기에 ‘술’이 결합되면 ‘잘 어울리다’라는 동사로 대표된다. 식 분야는 내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기호 연관성이 가장 높지만 페어링 즉 ‘이 술과 이 안주’의 조합은 내 취향과 무관하게 정해진다. 이 조합이 내 입맛에 맞지 않을 수는 있지만, 알고 선택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페어링은 합의된 음식의 지식체계를 배우는 것이다.
페어링은 음식과 술의 어울림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라 술과 잘 어울리는 음식과 식사를 완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음식과 술의 조화, 페어링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페어링은 취향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이다. 술과 잘 어울리는 안주를 안다는 것은 곧 먹을 줄 아는 지식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케이크랑 와인 페어링해주는 곳 간 뒤로 디저트는 와인과 함께 먹는 거라는 걸 배움 ㅋㅋㅋㅋㅋ 진짜 너무 좋더라”
페어링과 관련해 가장 많이 증가한 술은 ‘하이볼’이다. 비단 페어링뿐 아니라 식 관련 어떤 키워드를 넣어도 하이볼은 급상승 키워드로 나타난다. 하이볼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하이볼 선택 요인은 비주얼, 가성비, 커스터마이징 가능성이다. 트렌드 키워드가 지녀야 하는 상징성, 접근성, 경제성, 변주 가능성을 모두 충족한다.
일종의 칵테일에 해당하는 하이볼은 제조 자체가 술과 탄산의 어울림이다. 하이볼이 포함된 음식 사진 한 컷은 하이볼에 어울리는 식사를 준비할 줄 아는 사람, 음식의 지식체계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게다가 하이볼은 접근성과 경제성도 높다.
“커클랜드 아이리쉬 위스키, 이거 갓 술 아니냐? 하이볼용으로 가성비 오짐. 맛도 있어서 3~4만 원대 위스키 마시는 것보다 이거 한 병 사서 쟁여놓고 마시는 게 최고임.”
하이볼 재료는 마트에서도 살 수 있고, 한번 사서 쟁여놓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하이볼은 혼자 먹는 매일의 식탁에 올라올 수 있다. 쉽고 싸게 구해서, 무한히 변주할 수 있고, 마음먹고 한 요리와도 어울리고 아이스크림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페어링은 식음뿐 아니라 모든 브랜드가 주목해야 할 키워드다. 페어링은 소비자가 직접 만들어내는 콜라보레이션이다. 페어링이 가능할 때 우리 브랜드의 가능성이 무한히 커진다. 콘텐츠와의 페어링, 자연과의 페어링, 식음과의 페어링, 특정 시간대와의 페어링을 관측해보자. 브랜드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림에는 한계가 있다. 변주를 위해서는 잘 어울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달라진 식문화 트렌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의 목적과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식은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으로 더 크게 인지되고 있다. 아울러 웨이팅 문화에서 대접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식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의무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지식체계로서 배우려는 태도가 나타난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것이 비단 식문화에서만 일어난 변화일까? 식문화에서 관찰된 변화가 소비 트렌드 전반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시야를 넓혀 적용해볼 차례다.
습관의 소비
트렌드는 늘 새로운 것만 있는 것 같지만 식문화 트렌드를 보고 있으면 습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 빠지지 않는 국·탕·밥, 간편식사의 대명사가 된 스팸과 햇반, 운동식단의 필수품에서 냉동실을 가장 많이 차지하게 된 닭가슴살, 카페 공화국에서도 여전히 영혼의 음료라 불리는 맥심커피, 신상품의 향연 속에서도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는 신라면까지. 심지어 업의 본질이 ‘습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패션 영역에서도 습관이 된 제품이 나온다. 스트라이프 셔츠의 정석, 출근 기본템, 스니커즈의 근본처럼 누구나 하나쯤 갖추고 있고, 제품이 떨어지면 또 사는 제품은 습관이라 할 수 있다.
트렌드는 습관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고, 습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을 짚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특별했던 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었던 것이 특별해진다. 10년 전 커피 한잔 값으로는 너무 비싸지 않냐고 뭇매를 맞았던 카페 아메리카노는 습관의 습관의 습관이 되었다. 된장찌개에 생선구이, 몇 가지 밑반찬 같은 한국인 밥상의 스테레오 타입은 이제 특식이 되었다. 한식은 사 먹고 파스타는 집에서 해 먹는다. 특히 생선구이는 혼자 사는 집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메뉴다. 한식의 특식화는 식품회사에서 주목할 만한 트렌드다.
이처럼 라이프스타일을 결정짓는 오랜 습관이 바뀌고 있다. 결혼 말고 혼자 살기, 출근 말고 원격근무가 습관의 영역에 들어왔다. 이제는 어떤 업에 종사하든 1인가구와 유연근무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습관의 결 : 의식과 무의식
습관의 결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 코로나는 무의식적인 습관에 충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매주 습관처럼 마트에서 장을 보던 사람에게 온라인 쇼핑 아이디를 찾게 만들었다. 마트 쇼핑 습관은 쿠팡 쇼핑 습관으로 전환되었고, 코로나가 끝나고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출근은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출근이 아닌 대안을 생각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다. 매일 출근하던 사람들은 코로나 때문에 인생 처음 재택근무를 맛보았다. 다시 돌아오라는 회사의 부름과 충돌이 발생하고, 회사는 하이브리드 근무, 유연근무제, 거점 오피스, 워케이션까지 새로운 근무형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의 변화는 2장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코로나는 의식적으로 습관을 만들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조직에 의한 시간표가 아니라 스스로의 시간표대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은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어 지킴으로써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고자 했다. 의식적으로 아침마다 영양제를 먹고, 운동을 하고, 식단을 지키고, 주식 공부를 했다. 디지털의 기본 속성인 기록성은 습관을 만드는 데 안성맞춤이다.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고, SNS에 매일의 식단을 기록하고, 인스타그램에 챌린지를 인증한다. 모든 디지털 플랫폼은 사람들의 습관이 되고자 몸부림친다. 모든 게임과 이를 벤치마크한 앱이 부여하는 출석 보상, 거의 모든 유튜버가 말하는 구독과 알람 설정, 상품 콘텐츠가 잡지처럼 소비되기를 원하는 많은 취향 플랫폼의 소망은 디지털과 습관의 강력한 결합성을 보여준다.
구매는 쉽게 일어나지만 브랜드 파워가 없다
브랜드 입장에서 습관의 소비가 되는 것은 꿈인 동시에 독이다. 습관의 반열에 들지 않으면 허무로 끝날 수 있고,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으면 지루하다. 구하기 어려워서 팝업스토어가 열릴 때마다 오픈런을 하고 완판 기록을 세우는 제품도 습관의 반열에 들지 못하면 한때의 유행템으로 기억될 뿐이다. 뷰티 분야에서 주로 나타나는 ‘N통째’라는 해시태그는 이 제품을 N통째 쓰고 있다는 로열티인 동시에 이제 그만 다른 제품으로 갈아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브랜드 매니저는 우리 브랜드의 효자템이 A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때문에 A 리뉴얼에 한계를 느낀다. 리뉴얼로 기존 고객을 실망시킬까 봐 두렵고, 리뉴얼을 하지 않으면 입소문이 나지 않아 신규 고객이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N통째’의 딜레마다. 습관적 소비에서 구매는 쉽게 일어나지만 브랜드 파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습관으로 자리잡고도 브랜드 파워를 잃지 않는 브랜드가 있다. 매출도 높고 소셜미디어상에서 화제성도 높은 브랜드, 그들의 특징은 ‘변주’다.
2023년 5월 5주 차, 생활변화관측소가 측정한 뜨는 브랜드 스코어에 신라면이 4위에 올랐다. 신라면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말하는 라면 브랜드로 1년에 1만 건 이상 언급된다. 이미 워낙 많이 언급되기에 새삼스레 ‘뜨는’ 브랜드에 오르기 어려운데도 신라면은 튀어 오르는 피크를 보였다. 5월 5주 차의 급상승 원인은 신라면으로 만드는 간단 마제소바 레시피가 X(구 트위터, 이하 ‘트위터’)에서 많은 RT를 얻은 덕분이다. 왜 다른 라면이 아니라 신라면일까? 마제소바를 만드는 베이스 라면으로 다른 라면이 안 될 이유는 없다. 아마도 신라면이 근본 라면으로 인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 라면을 베이스로 뭔가를 추가하여 새로운 라면을 제조해 먹는 방식의 튜닝라면이 뜬다. 요리가 필요하지만 요리 스킬은 부족한 사람들에게 라면은 가장 쉽고 편한 베이스다. 식품의 변주는 소비자의 몫이다. 소비자에게 변주를 맡기고 우리 브랜드는 가장 기본만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습관에 해당하는 국, 탕, 찌개의 베이스를 노리자.
유통 플랫폼의 변주는 계절과 맞물린 행사에서 온다. 물론 계절에 한 번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 없이 수시로, 지나갈 때마다 들르는 것이 가장 좋긴 하다. 초기 마켓컬리나 29CM처럼 시간 날 때마다 잡지 들춰보듯 들어가 보는 플랫폼,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멈춰 보게 되는 홈쇼핑처럼 특별한 목적 없이 찾아오는 것이 습관의 최종 목적지다. 최종 목적지가 되기 전에는 계절의 변주에 맞춰 우리 플랫폼에 들어올 이유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6-9-12월 올영 세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