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
‘통 역사’ 시리즈의 저자이며, 현재 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자는 “고려가 세워졌을 때 외국에는 어떤 나라가 세워졌어요?”라는 아들의 질문에 한국사와 세계사를 따로따로 공부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렸고, 이를 계기로 동양사와 서양사, 한국사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통세계사』를 집필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사도 쉽고 재미있게 ‘통’으로 써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통한국사』를 집필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던 광개토대왕은 어떤 야망을 품었는지, 고려 태조 왕건은 왜 결혼을 많이 했는지, 조선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자는 많은 독자와 다양한 문답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 한국사를 바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그래서 『통한국사』에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세세한 부분을 더 치밀하게 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이 역사를 암기 과목으로 생각하고 달달 외우곤 한다. 하지만 맥이 끊긴 역사 공부는 책을 덮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통한국사』는 한국사의 흐름을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면서 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서술하여, 국제 감각을 잃지 않고 우리 역사에 대해 깊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가상 인터뷰’에 역사적 인물의 생생한 육성을 실어 당시의 역사를 실감 나게 이해하도록 했다. 또한 어려운 역사 용어를 쉽게 풀어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역사 입문서로 자리매김했다.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명쾌한 글솜씨로 맛깔나게 엮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 손에 통째로 잡아 보자.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저녁 식당에서 겪은 일이죠. 당시 옆 탁자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선후배 사이로 보였는데, 선배가 후배에게 역사 지식을 뽐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발해, 백제, 근초고왕…. 이런 단어들이 들려와서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야 말았습니다. 선배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백제의 근초고왕이 멀리 중국까지 진출했어.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는데….”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역사적 사실만 말하자면 근초고왕 통치 시절에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생긴 나라죠. 그러니 근초고왕이 중국에 진출했다 하더라도 발해가 그 땅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20대 청년이 이 기본적인 역사조차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더 황당한 것은, 후배의 답변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남쪽에 백제, 북쪽에 발해가 있었던 거네요?”
그 두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심해 보였습니다. 제 나라의 역사를 이렇게도 모를 수 있을까요? 분명히 중고교 역사 시간에 배웠을 내용입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한국사 시험을 치르자면 한국사 공부를 했겠죠? 대학생이 되니 다 잊어버린 걸까요?
다소 유쾌하지 않은 이 경험이 『통한국사』를 집필하는 큰 계기가 됐습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쓰기 전에도 많은 한국사 서적이 출간돼 있었습니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책들도 적지 않았죠. 게다가 유명 역사 강사들이 쓴 책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들은 제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너무 빽빽하게, 너무 난해하게 들어있었던 겁니다. 제가 원했던 책은 청소년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지겨워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집필하기로 마음먹었고, 2012년 『통한국사』 초판을 출간했습니다.
저는 『통한국사』를 집필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지켰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은 되도록 객관적으로 전한다. 둘째,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은 빠뜨리지 않되 흥미 있게 스토리텔링을 한다. 셋째, 보수나 진보 진영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으로 역사를 서술한다. 넷째,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용어는 최대한 풀어 쓴다. 다섯째, 세계사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한국사를 서술한다.
이 중에서 다섯째 원칙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는 교과서나 책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사 또한 한국에만 갇혀서는 안 됩니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원칙은 현대에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반도 주변 정세는 수시로 바뀌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지만, 식민 지배 역사로 인해 무척 껄끄러운 이웃 국가입니다. 그런 데다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부르며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도발이자, 역사 왜곡입니다. 최근에는 원자력 오염수 등 또 다른 문제로 우리와 갈등을 빚고 있죠.
중국은 어떨까요? 2002년 2월,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중국 동부지역 고대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국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규정했죠. 우리 민족이 세운 이 세 나라를 ‘중국 변방의 소수 민족이 세운 나라’ 정도로 위상을 떨어뜨린 겁니다. 최근에는 우리 민족의 전통 복장인 한복, 전통 음식인 김치까지 중국에서 비롯됐다고 우깁니다. 이런 모든 행위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자 도발입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는 모두 한민족이 주체가 돼 탄생한 국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세 나라의 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피에 흐르고 있죠.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이 ‘역사적 사실’을 중국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셈이죠. 이런 점 때문에 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인이 적잖습니다.
주변국들의 도발과 역사 왜곡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우리 정부의 현명한 외교가 무척 중요합니다. 다만 정부에 맡겨놓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 모두, 그중에서 특히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청소년의 올바른 역사관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요즘 시대적 환경에 맞춰 더욱 시각적으로 디자인 요소를 강화했습니다. 청소년의 눈에 익숙한 서체로 바꿨고, 연표와 지도에도 시각적 요소를 강화했습니다. 이런 구성이 청소년 독자의 한국사 이해를 쉽도록 도울 것으로 기대합니다. 청소년이 제 나라의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습니다. 『통한국사』 2차 개정판이 청소년들의 한국사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상훈 드림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자 새 왕조 창건에 반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었어. 정도전, 남은, 조준 등 강경파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어. 새 나라가 탄생했지. 이 나라가 바로 조선이야.
이성계는 조선의 태조가 됐지만 당장 나라 이름을 고치지는 않았어. 아직까지도 많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새 술은 새 자루에 담아야 해. 언제까지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계속 쓸 수는 없겠지. 게다가 개경은 왕씨 가문의 근거지였어.
결국 태조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꿨고1393년, 한양서울에 왕궁을 짓고 수도를 옮겼어1394년. 이 작업을 하는 시간에 고려의 왕족과 귀족들을 모두 제거했지. 또한 정도전을 비롯해 조선 창건에 기여한 이들에게는 개국공신의 지위를 줬어.
새로운 나라를 꾸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야. 정도전이 이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했어. 정도전 덕분에 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은 별 탈 없이 착착 진행됐지. 하지만 정도전을 못마땅해하는 인물이 있었어. 바로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야. 왜 정도전을 싫어했냐고? 기다려 봐. 곧 알 수 있을 거야.
자신의 아들과,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켰던 동지들이 갈등을 벌이는데 태조의 심사가 편안하진 않았겠지? 특히 아들들끼리 왕위를 놓고 서로 싸운다면 정말 마음이 아플 거야. 태조의 말년이 그랬단다. 아들들은 왕위를 놓고 살육전까지 벌였고, 그 싸움에 휘말려 평생 함께했던 동지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어. 바로 왕자의 난이야.
태조 이성계 어진 • 1872년 낡은 이성계의 초상화를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태조는 막내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다섯째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태조는 왕후가 두 명이었어. 여섯 명의 아들을 낳은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조선 창건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 그 후 둘째 부인 신덕왕후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어. 총 여덟 명의 아들 가운데 태조는 막내인 방석을 총애했고, 결국 그를 세자로 책봉했어.
왕이 제 마음대로 세자를 책봉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아니야. 큰 문제가 있었어. 방석은 막내인 데다 둘째 부인의 아들이었잖아? 이런 경우 보통 첫째 부인의 장남에게 세자 자리를 주는 법이거든. 그 장남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차남에게라도 세자 자리를 줘야지. 한데 태조는 그러지 않았어. 당연히 첫째 부인의 아들들이 반발하지 않겠어? 특히 조선 개국에 가장 크게 기여한 다섯째 방원의 불만이 가장 컸지.
결국 방원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어. 형제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거야. 이게 제1차 왕자의 난이지1398년.
방원은 우선 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정도전과, 또 다른 개국공신인 남은을 제거했어. 이어 다른 공신들도 모조리 죽여 버렸지.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마저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어.
세자가 죽었으니 다음 세자 자리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방원에게? 아니야. 방원은 영리했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둘째 형인 방과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했단다. 첫째 형인 방우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도 전에 정치가 싫다며 산으로 숨어 버렸어. 그러니 사실상 장남이나 다름없는 둘째 형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 주는 게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하지만 태조는 아끼던 막내가 죽자 크게 상심했어. 어쩌면 골육상쟁에 인생무상을 느꼈을지도 몰라. 결국 태조는 한 달 만에 세자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어. 이 방과가 정종2대이야.
정종은 동생 방원이 무서웠어. 사실상 방원이 왕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정종은 방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어. 방원의 뜻에 따라 도읍을 개경으로 옮기기도 했어.
사실 정종이 오래 왕 노릇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어. 모두들 방원이 곧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돌발변수가 생겼어. 방원의 넷째 형인 방간이 왕권에 도전한 거야. 방간의 반란으로 시작된 이 싸움이 제2차 왕자의 난이란다1400년.
방원은 즉각 군대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어. 결과는 당연히 방원의 승리. 친형이라 봐준 것일까? 방원은 방간을 죽이지는 않고 귀양을 보내는 걸로 사태를 매듭지었어.
이제 모든 권력은 방원이 장악했어. 지금까지도 정종은 허수아비 왕이었는데, 이제는 더 버틸 수 없겠지? 정종은 곧 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줬어. 그래, 방원이 마침내 왕이 된 거야. 이 왕이 태종3대이지.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된 정도전에 대해서는 살펴보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정도전은 “이성계가 아니라 내가 조선을 세웠다!”고 술주정을 할 정도로 대담했어. 실제로 조선의 기본 골격은 거의 정도전이 만들었어. 조선의 첫 법전으로 볼 수 있는 『조선경국전』도 정도전이 쓴 거야.
정도전은 왕이 최고의 지위에 있지만 실제 정치는 사대부가 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정치라 생각했어. 쉽게 말하자면, 사대부가 통치하는 왕국을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여기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왕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데는 당연히 반대했지.
태조는 정도전을 상당히 신임했어. 그랬기 때문에 그를 조선의 재상으로 여기고 있었지. 사실 태조가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도 정도전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어. 정도전은 신의왕후의 아들들, 그중에서도 방원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어. 정도전은 독단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방원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어. 만약 방원이 왕이 되면? 왕권만 강해지고 신하들은 그저 왕명만 따르는 초라한 신세가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정도전과 이방원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들어 볼까?
삼봉 선생정도전이 생각하는 조선은 어떤 나라입니까?
“왕이 권력의 꼭대기에 있지만 실제 정치는 정승재상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이 하는 체제다. 대신들은 왕을 견제해야 한다. 만약 왕이 통치를 잘못한다면 왕을 몰아내는 역성혁명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신하가 왕의 위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신하가 왕의 위에 서려는 게 아니다. 왕이 백성을 위한 민본통치를 하도록 우리 성리학자들이 견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방원은 개국공신들이 조선 왕조를 주무르려 한다며 싫어했습니다.
“조선은 태조가 혼자 창건한 게 아니다. 나는 한나라 시조 고조유방의 참모였던 장량 같은 존재다. 고조가 한을 세운 것인가? 아니다. 장량이 세웠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내가 실질적으로 조선을 세운 인물이다. 다시 말한다. 조선 부국강병을 위해 우리 사대부가 조선을 통치해야 한다!”
이번엔 태종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정도전은 개국공신이었습니다. 태종께서 사사로이 신하를 제거한 것이 아닙니까?
“정도전뿐 아니라 남은, 심효생 등 개국공신이 모두 문제였느니라. 조선 왕조의 왕통은 우리 이씨에게 있다. 왜 신하들이 왕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하려 하느냐? 이게 이치에 맞는 일인가?”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을 친 직접적 계기는 무엇입니까?
“1396년 명이 내정 간섭을 한 적이 있다. 정도전은 그때 요동을 정벌하겠다며 군제개혁을 추진 중이었다. 문제는, 그가 왕족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과인에게 사병을 내놓으라고 했다. 군대의 진법을 훈련하는데, 모든 사병을 중앙군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었다. 감히 나 이방원의 군대를 내놓으라니!”
강한 군대가 있어야 강한 조선이 되는 게 아닙니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정도전의 본심은 내 군대를 빼앗아 꼼짝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선수를 쳐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것이니라.”
천상열차분야지도 •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1395년(태조 4) 돌에 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탁본이다.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천문학을 정비해 제작한 것이다.
형제와 개국공신을 모두 제거하면서 왕에 오른 인물. 태종은 그야말로 권력의 화신이었어. 단호한 그의 성격은 왕이 된 후에도 그대로 드러났지.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그 누구도 왕권을 넘볼 수 없도록 만든 거야. 덕분에 조선은 태종 시절에 이르러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됐어. 이런 점 때문에 태종이 사실상 조선을 창건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지.
태종은 왕이 된 후 개인이 소유한 사병을 없앴어. 그래, 사실상 정도전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거야. 당시 왕족뿐 아니라 정도전과 같은 개국공신들도 개인 군대인 사병을 가지고 있었지. 태종은 사병을 없앤 뒤 모든 병력을 병조가 관리하도록 했어. 국가가 직접 관리하면 병사들이 왕에게 충성하겠지? 당연히 왕권은 더욱 강해졌어.
태종은 재위기간 내내 중앙 통치조직을 정비했어. 하나씩 살펴볼까?
오늘날 대통령이 국무총리, 장관들과 하는 회의를 국무회의라고 불러. 이 국무회의는 국정을 논의하는 최고 회의야. 고려시대에는 도평의사사가 그 역할을 했어. 조선으로 들어와서 정종이 이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바꿨어. 태종은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머지 여러 기구들을 통폐합시켰어. 의정부를 명실상부한 최고의 국정회의기구로 만든 거지. 태종은 또 의정부 밑에 이, 호, 예, 병, 형, 공조 등 6조를 뒀어.
의정부의 최고 지위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이었어. 원칙대로라면 정승들이 다른 관리들과 회의를 거친 뒤 최종안을 마련했어. 그러면 왕과 대신들이 회의를 했지. 의정부가 중심이 된 이런 형태를 의정부서사제라고 했어.
이 체제 하에서는 신하들의 권력, 즉 신권이 비교적 강해. 정책을 신하들끼리 논의하기 때문이야. 권력욕이 강한 태종이 그런 꼴을 두고 볼 수 있을까? 아니야. 태종은 결국 6조를 왕의 직속으로 바꿨어. 정승을 따돌려 놓고 정치를 왕이 직접 챙기겠다는 뜻이야. 이 시스템은 6조 직계제라 불러. 태종이 왜 6조 직계제를 채택했을까? 그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어.
태종은 왕권을 침범하거나 권력을 넘보는 사람은 과감하게 숙청했어. 왕권은 강해졌겠지? 하지만 대신들의 입지가 확 줄어들었어. 예를 들어 볼까?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에게는 네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어. 그들은 태종의 처남이었고, 태종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왔던 공신들이었지.
조선8도의 확정 • 태종 때에 이르러 오늘날의 전국 행정구역 모습이 나왔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을 8도로 구분했다.
문제는 처남들이 차기 왕위 선정에 개입했다는 데 있었어. 그들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을 왕세자 후보로 밀었어. 태종은 외척이 왕위에 개입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결국 태종은 네 명의 처남을 모두 죽여 버렸어. 부인인 원경왕후도 궁교태전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지.
권력을 넘본다면 피붙이도 용납하지 않는 태종이었지만 백성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 우선 토지와 세금 제도를 개혁해 백성들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어. 사찰의 횡포를 막기 위해 그 숫자를 확 줄여 버렸지. 정리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는 모두 국가가 흡수했어. 수입이 늘었으니 국가의 재정도 탄탄해졌겠지?
신문고 제도도 시행했어1402년.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북을 두들기면 그 사연을 들어 주는 제도야. 아쉬운 점은, 실제로 신문고가 울린 적은 거의 없다는 거야. 자신을 핍박한 양반과 관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백성이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겠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지.
호패 제도를 실시한 것도 태종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어. 호패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해. 16세 이상이 되면 양반이든 농민이든 호패를 신청할 수 있었어.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나이, 특징을 적어 제출하면 나뭇조각에 그 내용을 새겨 줬지. 이게 바로 호패야.
호패 • 호패는 신분에 관계없이 16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가지고 다녀야 했던 신분패이다. 신분에 따라 재료와 새겨진 내용이 달랐다.
이 호패 제도도 사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단다.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전국 어느 지역에,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지. 중앙 정부가 인구 현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은 중간에서 세금을 빼돌릴 수 없었어.
어느덧 시간이 흘러 태종도 후계자를 정해야 할 때가 됐어.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 4명의 아들을 뒀어. 이 경우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장남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게 일반적이야. 그러나 다음 왕이 된 인물은 셋째 충녕대군이었단다. 왜 그랬을까?
장남 양녕대군은 품행에 문제가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어. 태종이 왕세자로 책봉한 뒤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구나. 이를테면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어. 오죽하면 양녕대군의 스승이 태종에게 “왕세자를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라며 한숨을 쉬었겠니? 심지어 양녕대군은 기생들을 궁궐에 불러들이기도 했어. 태종이 꾸짖자 “아버지도 후궁이 많잖아요?”라고 따졌다는구나.
어쩌면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에게 반항을 해서 미움을 샀는지도 몰라. 태종은 왕권이 위협당한다고 생각하면 아들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어. 아들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을 리가 없어. 혹시 양녕대군은 그런 비정한 왕이 될 바에야 왕위를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태종은 왕세자를 버리기로 했어. 태종이 후계자로 점찍은 인물은 셋째 충녕대군이었지. 충녕대군은 책벌레라고 불릴 만큼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어. 심지어 아파 누웠을 때도 책을 읽었다는구나. 얼마나 책을 가까이 했으면 태종이 어명을 내려 책을 보지 못하도록 했겠니? 그래도 충녕대군은 몰래 책을 봤어. 지독한 책벌레가 맞지?
둘째인 효령대군은 아버지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나자 불교에 빠져들었어. 조선이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효령대군은 불교가 좋았어. 결국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효령대군은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됐단다.
함흥차사와 조사의의 난
함흥차사는 볼일을 보러 간 사람이 도통 소식이 없을 때 쓰는 말이야. 이 말은 태조와 태종의 갈등에서 생겨났단다.
형제들을 죽여 왕이 된 태종이 보기 싫다며 태조는 옥새를 들고 함흥으로 가 버렸어. 태종은 태조를 환궁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설득하게 했어. 이들을 차사라고 불렀는데, 태조는 차사가 오면 바로 죽여 버렸단다. 바로 여기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난 거야.
그러나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건 아니야. 당시 신덕왕후의 친척으로 조사의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조사의의 난이 함흥차사의 실제 모티브였어. 조사의는 태종을 끌어내리고 태조를 다시 왕에 앉히려 했어. 이때 태조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조상의 묘를 돌보겠다며 동북면 고향에 있었지.
조사의의 난은 곧 진압됐어. 많은 사람들이 태조가 조사의의 배후 인물이라 수군거렸어. 결국 태조는 고향에서 나와 평양에서 잠시 머물다, 곧 성으로 복귀했단다. 이때의 상황에 빗대 이야기꾼이 함흥차사란 이야기를 만들어 낸 거야.
충녕대군이 22세의 나이에 왕에 올랐어. 이 왕이 바로 세종대왕4대이야. 태종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나는 손에 피를 묻히겠다. 그렇게 해서 종묘사직을 탄탄하게 한다면 천 번 만 번 피를 묻히겠다. 너는 선정을 베풀어라.”
이 말이 과장됐을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해. 세종대왕이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국가 기틀이 확실하게 구축돼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야.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한 덕분에 세종이 편안하게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는 얘기지. 단호하고 냉정한 아버지 덕분에 세종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된 건지도 모를 일이야.
세종대왕 시절, 일본은 무로마치 바쿠후바쿠후가 통치하고 있었어. 바쿠후는 일종의 군사정권이야. 왕이 있지만 바쿠후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1인자였지. 참, 일본에선 자기들 왕을 천황덴노이라 불러. 우리나라에선 보통 일왕이라고 해. 알아 두렴.
무로마치 바쿠후는 해안 지대의 해적, 즉 왜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어. 해적이 들끓으면 민심이 흉흉해지지 않겠어? 그러나 바쿠후의 힘만으로 왜구를 소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어.
이 왜구들은 조선도 괴롭혔어. 왜구는 쓰시마 섬대마도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지. 세종은 왜구를 토벌하는 대신 달래는 방법을 쓰기로 했어. 쓰시마 섬의 세견선무역선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하도록 허락하려 했지. 그러나 상왕 태종이 강력하게 반대했어. 태종은 왜구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지. 이렇게 해서 쓰시마 섬 토벌이 시작됐단다1419년.
사실 쓰시마 섬 토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고려 말기에 왜구가 한반도 해안을 자주 노략질했지? 그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쓰시마 섬을 토벌했어. 창왕 시절,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한 게 처음이었어1389년. 당시 박위는 300여 척의 왜군을 박살내고 고려인 포로 1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지. 그 후로도,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태조 때 쓰시마 섬을 공격한 적도 있어.
쓰시마 섬이 타깃이 된 이유는 이미 말한 대로 그곳이 왜구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야. 그런데 쓰시마 섬의 왜구는 왜 그토록 한반도를 괴롭혔을까? 그들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야. 그곳은 땅도 좁고 척박했거든. 평소에 쓰시마 섬 왜인들은 조선에 조공을 했는데, 흉년이 들어 먹을 게 없으면 해적으로 돌변한 셈이지.
태종이 통치하던 15세기 초반에도 쓰시마 섬에 큰 흉년이 들었어. 마침 쓰시마 섬의 도주島主·왕까지 바뀌었어. 분위기가 어수선하겠지? 그 틈을 타서 왜구가 다시 한반도 해안을 습격했어.
태종이 크게 노했어.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에도 상왕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 그런 태종이 세종에게 당장 쓰시마 섬을 토벌할 것을 명했어.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쓰시마 섬을 토벌하라는 어명을 내렸지. 이제 왜 쓰시마 섬 토벌이 이뤄졌는지 잘 알겠지?
조선 초기에는 비상 상황일 때 임시로 군사령관을 임명했어. 정1품에 해당하는 아주 높은 직책인데, 이를 도체찰사라고 불렀단다. 세종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고, 그 모든 부대를 통솔하는 삼군도체찰사에 이종무를 임명했어. 이종무의 휘하에는 9명의 절제사를 배치했지. 이종무는 총 227척의 병선에 1만 7000여 명의 병사를 태운 뒤 마산포를 출발했어.
동래부산포 지도 •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 실려 있는 동래 부산포를 그린 지도이다. 세종은 일본에 대하여 포용 정책을 펴서 1426년 3개의 항구를 열어 주었다.
이 소식이 일본 바쿠후에 들어갔어. 바쿠후는 즉각 군대를 보내 쓰시마 섬을 방어하도록 했어. 자칫하면 전면전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다행히 이종무는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았어. 큰 타격을 주고 빠지는 작전을 썼지. 보름 동안 섬을 맹공격하자 쓰시마 도주가 항복했어. 이종무는 잡혀간 조선과 명의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금의환향했어.
이듬해 조선은 쓰시마 섬을 경상도에 편입시켰어.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일본인들이 우길 때 어떤 사람들은 “쓰시마 섬도 원래 한국 땅이었어!”라고 맞서지? 그 말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근거가 이 쓰시마 섬 토벌이란다.
얼마 후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났어. 이제 세종은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됐어. 세종은 일본에 대해서도 태종과 달리 포용정책을 폈어. 쓰시마 섬을 토벌한 이후에도 그곳의 도주는 조선에 교역을 허용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해 왔어. 세종이 그 요구를 들어줬어. 웅천 제포진해, 동래 부산포부산에 이어 울산 염포울산 등 삼포를 열어 준 거야. 세종은 나아가 삼포에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왜관을 짓는 것까지 허용했어.
삼포 개항은 현명한 처사였어. 왜냐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공격할 수도 있어. 왜구도 마찬가지였어. 구석으로만 몰아붙이면 그들도 죽기 살기로 싸웠을 거야. 실제로 삼포 개항 후 한반도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들이 크게 줄었단다. 때로는 무력보다 타협이 더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지.
4군6진과 국경 확정 • 세종대왕 시절,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이 북쪽의 여진을 몰아내 4군6진을 설치했다. 이로써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남쪽 해안이 정리되자 세종은 눈을 돌려 북쪽을 바라봤어. 당시 한반도의 북쪽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어. 한반도 북쪽에는 여진이 살고 있었어. 많은 유목 민족이 그렇듯, 여진 또한 미개하고 잔인했으며 전투적이었지. 그러나 여진을 토벌해 영토를 넓히겠다는 세종의 의지는 확고했어.
쓰시마 섬 토벌이 끝나고 13년쯤 흘렀을 무렵이었어.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1만 5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격파했어1433년. 같은 해 함길도함경도 관찰사 김종서 또한 두만강 일대의 여진을 몰아냈지. 세종은 두 장군에게 명해 평안도에 4군, 함길도에 6진을 설치하도록 했어. 이 4군6진을 설치함으로써 마침내 오늘날의 한반도 지도가 완성됐지. 그래, 세종에 이르러 오늘날의 영토가 확정된 거야. 여진의 반발이 컸겠지? 그 대신 교역소를 설치해 우리와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줬단다.
여기서 잠깐. 조선 전기의 외교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갈까?
일본과 여진족을 어떻게 대했지? 이웃 나라로 인정해 주고 교역은 하되 횡포를 부리거나 지나치다 싶으면 무력으로 응징했어. 이를 교린이라 불러. 반면 중국의 명나라에 대해서는 조선이 약자임을 인정하며 강자로 섬겼어. 이를 사대주의라고 했지. 둘을 합친 사대교린이 바로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 정책이었단다.
이번에는 세종대왕의 국내 업적을 살펴볼까?
쓰시마 섬을 경상도에 편입시킨 바로 그해, 세종은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했어. 사실 집현전은 그 전부터 있었던 기관이야. 그러나 별 역할이 없어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기관이었지. 세종은 그런 집현전을 확대해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키웠어.
집현전 관리들은 정1품의 영전사 2명, 정2품의 대제학 2명을 포함해 정9품의 정자 1명까지 총 14등급의 직제로 구성됐어. 총 20여 명의 관리가 여기에서 일했어. 집현전 관리들을 학사라고 불렀는데, 세종은 이 학사들을 다른 관리들보다 높이 대우했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야.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집현전에서는 학사들이 왕, 세자와 함께 유교 이념을 논하기도 했어. 집현전에서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는 것을 경연이라 불렀어. 집현전 학사들이 세자와 함께 유교 경전도 공부하면서 교육시키는 것은 서연이라고 했지. 적어도 학문 분야에서는 집현전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는 걸 알겠지? 훗날 세조는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집현전을 없애 버린단다.
어쨌든 집현전이 있어 세종은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어. 집현전 학사들은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셀 수 없이 쏟아 냈어. 대표적인 것만 추려 볼까?
정초와 변계문이 쓴 『농사직설』은 농사법을 쉽게 설명한 책이었어. 『삼강행실도』 『오례의주상정』 『팔도지리지』는 각종 예법과 전국 상황 등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내용으로 차 있었어. 『고려사』는 역사책이었어. 그 밖에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의방유취』 『치평요람』 등이 있어.
대단하지? 하지만 이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업적이 아직 남아 있어. 바로 우리 글자를 만든 거야. 그 글자가 뭐지? 맞아. 바로 훈민정음이야. 세종은 오랜 연구 끝에 우리글인 훈민정음, 즉 한글을 만들고 전 국민에 반포했어1446년.
훈민정음 • 세종은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 1446년 반포했다.
사실 많은 대신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어. 대표적인 인물이 집현전에서 근무했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떠난 최만리였어. 최만리는 상소를 올려 “중국의 한자가 있는데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단다.
도대체 최만리는 왜 그렇게 한글을 반대한 것일까? 최만리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가 생기면 사대부 양반의 지위가 위태로울 거라고 생각했어. 누구나 글자를 알게 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굳이 어려운 한자와 유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자칫 유교 이념이 무너질 수도 있겠지? 최만리는 바로 그 점을 걱정했던 거야. 물론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지.
그래도 세종은 강행했어. 죄수에 대한 판결, 국왕의 교서와 같은 중요한 문서에도 반드시 한자와 한글을 함께 쓰도록 했지. 세종의 노력으로 한글은 널리 쓰이는 듯했어. 그러나 그 이후 한글은 암클, 언문처럼 얕잡아보는 이름으로 불렸어.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주시경이 한글이라고 명명해 오늘에 이르게 된 거야.
사실 훈민정음은 반포되기 3년 전에 이미 완성됐었단다1443년. 세종은 새 글자를 다 만들어 놓고도 반포를 하지 않고 3년을 끌었던 셈이야. 왜 그랬던 것일까? 세종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
왜 반포가 늦었던 겁니까?
“사실 이 글자는 거의 전적으로 과인과 몇몇 학자들의 힘으로 만들었느니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뒤 과인은 훈민정음 창제에 전념했다. 유학자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은밀하게 추진해야 했다. 1443년 글자가 완성됐지만 3년간 반포를 미룬 것은 그 반대 세력과 싸우고, 백성들의 이해를 돕도록 후속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이 많이 도왔다.”
왜 새 글자를 만든 것입니까?
“훈민정음에 이미 취지를 밝혔느니라. 우리말이 중국과 다른 데다 표기할 언어는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한자는 어려워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없었잖은가. 모든 백성이 자신의 뜻을 표현할 글자가 필요했다. 백성을 위해 과인이 새 글자를 만든 것이다.”
새 글자 창제에는 정치적인 의미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말이란 뜻이니라. 백성에게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알려야 하는데,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그 때문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가장 처음 만든 작품이 용비어천가였느니라.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가 하늘의 뜻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찬양한 노래다.”
백성들이 새 글자를 어떻게 쓰길 원하셨습니까?
“민, 즉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이 중심이 돼야 나라가 바로 서지 않겠는가? 이것이 민본정치다. 백성이 새 글자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국왕도 백성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종 시절에는 과학도 눈부시게 발달했어. 각종 발명품이 쏟아졌어. 꼭 기억해야 할 업적들을 살펴볼까?
오늘날의 달력을 예전에는 역법이라 그랬어. 우리는 중국의 것을 가져다 썼지. 세종은 한양을 기준으로 우리의 역법을 만들었어. 그게 칠정산이야.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간의를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원나라의 혼천의를 벤치마킹한 거란다.
세종 주변에는 최고의 과학자들이 많았어.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장영실이야.
장영실의 선조는 중국인이었어. 그의 9대 조상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우리 역사와 인연을 맺게 됐지.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과학자 집안이었어. 장영실의 많은 조상들이 고려시대에 과학 분야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는구나. 그러나 장영실은 벼슬아치가 아니었어. 그의 아버지는 고려 말에 낮은 벼슬을 했지만 어머니는 기생이었어. 그 때문에 장영실은 동래현의 노비, 즉 관노로 살아야 했지.
노비가 어떻게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장영실의 재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야. 원래 장영실을 발탁한 왕은 태종이었어. 그때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세종이 그의 재능을 높이 사 기회를 준 거야. 세종은 장영실을 중국에 유학 보내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게 했어. 그 후 노비 신분을 면해주고, 정5품의 벼슬도 하사했지.
세종 때의 간의(복원품) • 간의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천체 관측이 불편하였던 혼천의를 편리하도록 개량한 것이다. 세종 때에는 천문의기뿐 아니라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 여러 가지 과학 기구를 만들었다.
금영 측우기 • 1837년(헌종 3)에 제작한 측우기이다. 공주에 있던 충청도 감영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영 측우기’라고 한다. 세종 때에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를 발명했다.
자격루 • 왼쪽부터 1920년대의 모습, 현재 남아 있는 부품, 복원한 모습이다. 자격루는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물시계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중종 때 다시 만든 자격루이다.
장영실의 발명이 본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어. 앞에서 말했던 간의를 설치한 천문대간의대를 이천과 함께 만들었어.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발명하기도 했지1434년.
천체 관측 기구에 이어 해시계도 발명했어. 앙부일구가 대표적인 해시계지. 이밖에도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와 같은 해시계도 만들었어. 세계 최초로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도 발명했어1442년. 하천의 수위를 계산하는 수표도 만들었지.
이 모든 발명품은 주로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야.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기상은 중요한 요소지. 일조량이 얼마나 되고, 비는 얼마나 내리며, 하천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이런 정보는 농민들에게 아주 소중하지.
대단한 과학자였지만 장영실의 말년은 썩 좋지 않았어. 측우기를 발명한 그해, 세종이 온천욕을 하려고 길을 나섰을 때였어. 세종이 탈 수레는 장영실의 책임 하에 만들어진 거였지. 아뿔싸. 그 수레가 도중에 박살이 나 버렸어. 장영실은 책임을 지고 옷을 벗어야 했어. 그 후 장영실의 기록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됐단다.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어. 당시 제사의식제례 때는 중국의 음악인 아악을 썼어. 세종은 박연에게 아악을 우리의 향악으로 고치고, 그에 맞는 악기를 개발하라고 지시했어. 새로운 음악에 맞는 새로운 노래도 나왔어. 집현전에서 만든 노래들인데, 오늘날에는 문학으로 더 인정받고 있지. 세종이 직접 쓴 『월인천강지곡』, 조선건국을 추앙한 정인지와 권제의 『용비어천가』가 바로 그거야.
얼마 후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이 세상을 떠났어. 그의 장남 이향이 문종5대에 올랐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었지? 세종도 이미 몇 년 전부터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단다. 이미 제왕수업을 충분히 받았다는 뜻이야.
문종은 인품이 훌륭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몸이 허약했고, 왕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단다.
왕이 직접 지시한 여론조사
오늘날에는 정부가 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국민의 뜻을 묻기 위해 종종 여론조사를 시행하고 있어. 민의를 묻는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바로 이런 여론조사가 세종 통치 시절에도 있었단다.
당시 토지에 대한 세금 제도로 공법이란 게 있었어. 원래 중국 하 왕조 때 시작된 제도인데, 세종이 받아들여 논의하기 시작했지.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토지 세금을 어떻게 매길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어. 게다가 부패한 관리들이 농민을 등쳐 배를 불리고 있는 상황이었거든.
세종은 과거시험에서 “가장 좋은 세금 방안이 무엇인가?”를 문제로 내기도 했단다. 이런저런 노력 끝에 1430년, 농지 1결마다 10두씩을 세금으로 거두는 공법이 확정됐어. 그러나 이 방안을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어. 결국 세종은 고위 관료에서부터 일반 평민까지 총 17만 명에게 찬반을 묻도록 했어. 그래, 전국적인 여론조사가 실시된 거야.
여론조사 결과 찬성이 조금 많았지만 당장 정책으로 이어지진 않았어. 당시만 해도 농사짓기는 쉽지 않았어. 태풍이라도 닥치면 수확량은 확 줄었지. 이 때문에 추가 연구가 필요했어. 1446년, 마침내 공법이 확정됐어. 땅의 품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눠 세금을 받는 전분육등법, 그해 수확량에 따라 세금을 달리 매기는 연분구등법이 채택됐단다.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아들이 단종6대에 올랐어. 단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폐위된 후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이란다.
문종의 부인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어. 다행히 아이는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지. 그 아이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왕세손으로 책봉됐어. 그러나 세종의 근심은 아주 컸어. 세종 자신이 병에 걸려 있었고, 왕세자인 문종마저 몸이 아주 약했기 때문이야. 둘 다 죽어 버리면 나이 어린 왕세손이 과연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고민 끝에 세종은 평생을 함께했던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등에게 왕세손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어.
세종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문종도 2년 4개월 만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어.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황보인, 김종서, 남지가 어린 단종을 보필했지.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어.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8명의 아들을 낳았어. 첫째 문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때 둘째 수양대군은 불만이 많았어. 장남만 왕위를 세습하는 게 못마땅했지. 그래, 수양대군도 왕이 되고 싶었던 거야.
하늘이 수양대군을 도운 걸까? 세종에 이어 문종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차지할 기회가 찾아왔어. 그러나 단종의 곁에는 천하명장인 김종서가 있었어. 또한 동생 안평대군도 수양대군을 경계하고 있었지.
우선 강한 날개부터 꺾자! 수양대군은 부하들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했어. 먼저 김종서와 그의 가족, 측근들을 모조리 죽였지. 수양대군은 곧바로 입궐해 단종에게 이렇게 보고했어.
안평대군의 글씨 •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에 붙인 글이다. 안평대군은 김종서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둘째 형인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종서가 반란을 일으켜 제거했나이다. 나머지 역적들도 처단하겠습니다.”
힘이 없는 단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수양대군은 왕명이라며 대신들에게 입궐하라는 전갈을 띄웠어.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궁으로 들어오는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지. 단종을 보필했던 나머지 대신들도 모두 유배 보낸 뒤 죽여 버렸어. 피도 눈물도 없었어. 그렇다면 동생에게는 관대했을까? 아니야.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에게도 김종서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죄를 씌워 강화도로 유배 보냈어. 그다음에는? 죽여 버렸지. 권력 앞에서는 형제도, 의리도 없는 것 같지?
이 사건이 바로 계유정난이야1453년.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계유년에 일어난 의로운 봉기란 뜻인데, 정말 그럴까?
수양대군은 반란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반란이란 단어 대신 ‘정난’이란 표현을 썼겠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는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도 현실과는 많이 달라. 단종이 무능하고 부패해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었다는 얘기야. 물론 김종서를 포함해 일부 대신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졌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정치가 극도로 혼란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어. 대부분의 학자들은 계유정난을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쿠데타로 규정한단다.
「월중도」 중 청령포 • 19세기에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의 청령포를 그린 것이다. 단종은 왕위를 세조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잇따르자 군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반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했어. 영의정은 가장 고위직인 재상이야. 이조판서는 인사권을 총괄하며 병조판서는 군사를 총괄하는 벼슬이지. 그래, 모든 권력을 장악한 거야.
모든 기반을 다졌으니 다음 차례는 왕이 되는 거겠지? 수양대군의 측근 한명회가 단종을 끌어내리는 작업을 맡았어. 단종은 버틸 수가 없었어. 결국 단종은 왕의 자리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고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야 했어. 이렇게 해서 수양대군이 세조7대에 즉위했지1455년.
세조는 조카인 단종이 남은 세월 편안하게 살다 가길 바랐을까? 혹시 모르니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싶었을까? 글쎄, 세조가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확실한 것은 역사가 비극으로 흘렀다는 거야.
단종이 폐위되자 선왕들로부터 단종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충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가 단종의 복위를 시도한 거야. 안타깝게도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여섯 신하들은 처형됐어. 이 여섯 신하를 사육신이라 부르지. 세조는 사육신의 가족 600여 명도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어. 살려 둔 여자와 친척은 모두 노비로 삼았어. 반란의 중심지 집현전은 폐지해 버렸지.
세조는 이어 단종을 지지했던 동생 금성대군을 유배 보냈어. 단종에게도 반란의 책임을 물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멀리 강원 영월로 보내 버렸지. 그러자 금성대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어. 세조는 더 이상 단종을 살려 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금성대군을 먼저 죽였어. 이윽고 단종을 평민으로 강등시킨 뒤 사약을 내렸지. 반역 죄인이니 묘도 만들어 주지 않고 가매장하는 것으로 일처리를 끝내 버렸어. 불쌍한 이 임금은 숙종이 통치하던 17세기 말에 가서야 단종이란 묘호를 얻는단다.
훗날 세조는 이때의 죄를 뉘우치고 스님이 됐어. 본인도 반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겠지? 이쯤에서 세조의 심경을 들어 볼까?
스스로가 왕의 자질을 갖췄다고 생각하십니까?
“형 문종은 아버지 세종을 닮아 학문을 즐겼다. 그렇지만 과인은 늘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고 말을 타며 사냥하는 걸 즐겼다. 무예 실력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느니라. 호탕한 성격이었던 게지. 어렸을 때부터 왕의 그릇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 태종과 산책을 나갔을 때 한 고승이 내게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다’고 했느니라. 태종과 나의 운명이 비슷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나 또한 태종처럼 골육상쟁을 벌였으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조카를 몰아내면서까지 왕이 돼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까?
“과인은 형인 문종의 정치를 보좌할 때 대신들이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히 신하가 왕권을 능멸하려 하다니! 그런 현상이 조카 단종이 왕이 된 후로 더 심해졌느니라. 김종서 같은 자는 이미 왕의 권력을 넘어서 있었다.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그 점을 용납할 수 없었느니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경국대전 • 조선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성종 때 반포했다.
그렇다면 대신들만 바로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다. 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김종서와 한편이었다. 골육상쟁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배 보낸 단종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었습니까?
“믿지 않겠지만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육신과 생육신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지 않았는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종을 죽이고 학자들의 근거지인 집현전을 없앴다. 후세 사람들이 잔인하다고 해도, 왕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세조는 여러모로 할아버지 태종을 많이 닮았어. 피를 부르면서 왕에 올랐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 태종이 신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정부서사제 대신 6조 직계제를 채택했던 거 기억하지?
후임 국왕인 세종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의정부서사제를 부활시켰어. 웬만한 정책은 대신들에게 맡기기도 했지. 그러나 세조는 신권이 커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어. 결국 세조는 다시 6조 직계제로 복귀했단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토지 제도도 개혁했어. 조선 전기 토지 제도의 골격은 과전법이었어. 고려 말에 신진사대부들이 만든 거지. 경기도 땅을 대상으로 전직·현직 관리에게 땅을 줬어. 문제는, 금방 토지가 바닥이 났다는 데 있어. 세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지급 대상을 현직 관리로만 제한했어. 이를 직전법이라 불었지1466년.
15세기 조선 전기 민란 • 아직 조선 왕조가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데다 쿠데타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민심이 많이 흔들렸다. 농민들은 15세기에 전국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이어받아 호패법을 강화하고, 북방을 개척하는 데도 힘을 썼어. 업적이 꽤 많은 편이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업적이 있어. 바로 조선의 헌법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한 거야.
물론 이미 개국 때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이 있기는 했어. 그러나 세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법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통일’시키고 싶었어. 이렇게 해서 시작된 편찬 작업은 상당히 오래 걸렸어. 결국 세조는 『경국대전』을 발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단다.
세조의 둘째 아들이 19세의 나이에 예종8대에 올랐어. 원래 8대 국왕은 장남인 의경세자가 잇기로 돼 있었지. 그런데 의경세자는 세자로 책봉된 후 갑자기 죽고 말았어. 혹시 아버지의 잔인무도함에 대한 죗값은 아니었을까?
예종도 형의 운명을 따라갔어.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 그래도 예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어. 다만 예종도 『경국대전』을 미처 반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어.
예종은 두 명의 왕자를 뒀지만 어렸어. 그 때문에 다음 왕위는 형 의경세자의 핏줄에게 돌아갔어. 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인물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었어. 그가 바로 성종9대이야.
성종은 왕에 오른 다음 해, 삼촌인 예종이 시행하지 못한 『경국대전』을 최종 시행했어. 『경국대전』은 몇 차례의 수정 작업을 더 거쳤어. 오늘날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1485년 시행된 『경국대전』이란다.
『경국대전』은 민주헌법은 아니지만 엄연한 조선의 헌법이야. 이때부터 조선의 통치는 법에 의해 이뤄지게 돼. 결혼하는 나이에서부터, 토지 거래하는 방법, 세금 내는 방법 등 모든 일상생활에 대해 경국대전이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야. 그 전의 고려와 크게 다른 점이지. 조선이 법치국가로 나아갔잖아?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성종이 왕에 오른 과정을 살펴볼까?
성종은 세 살 때 아버지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함께 궁궐 밖으로 나가 살게 되었어. 세조가 쫓아낸 것은 아니야.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한 씨 부인인수대비이 궁궐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어. 어쩌면 궁궐 안이 더 위험할 수도 있잖아?
신숙주 초상 • 세종 때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하는 등 신임을 받았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지지한 이후 성종 때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바로 이 어머니 덕분에 성종은 왕에 오를 수 있었는지도 몰라. 한씨 부인은 세조 측근인 한명회, 신숙주 같은 사람들과 꾸준히 접촉했어. 마침내 한명회의 딸을 자신의 아들 자을산군과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지.
이런 상황에서 막 등극한 예종이 사망했어. 다음 왕은 당연히 예종의 아들인 제안군 차지가 되겠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제안군이 고작 네 살밖에 되지 않았던 거야. 왕에 앉히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지?
당시 조정의 가장 큰 어른은 정희대비정희왕후로, 세조의 부인이었어. 정희대비는 아들 예종이 왕에 오른 후 대비 자격으로 섭정을 하고 있었어. 대비가 섭정하는 것은 조선 왕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 당연히 정희대비가 최고의 실권자겠지? 정희대비가 후계자를 고르기 시작했어.
정희대비는 제안군이 너무 어리니 일단 후보 목록에서 뺐어. 그다음은 의경세자의 아들 중에서 후보를 물색했지. 첫째인 월산대군은 정치에 별로 뜻이 없었어. 게다가 병까지 앓고 있었으니, 역시 후보 목록에서 제외했어.
그다음 눈여겨본 인물이 바로 자을산군이야. 자을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기상이 남다른 데가 있었어. 게다가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한명회의 사위였어. 한명회 또한 자을산군을 적극 추천했겠지? 자을산군이 13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명회나 신숙주, 정희대비 모두 뒤에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이렇게 해서 자을산군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거지.
손자가 왕에 올랐으니 정희대비는 다시 정희대왕대비로 승격됐어. 대왕대비와 한명회, 신숙주가 권력을 틀어쥐었어. 그들은 왕을 보좌하겠다며 원상제라는 것을 만들었단다. 어린 왕을 대신해 노련한 대신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모여 결정하는 제도야.
어느덧 성종이 스무 살이 됐어. 최고 권력자 한명회는 이미 은퇴한 후였지. 성종은 개혁에 착수했어. 우선 원상제부터 없애 왕이 직접 정치에 나섰어. 이어 김종직을 비롯해 새로운 계파의 관료를 등용했지. 이들을 사림파라고 불렀어.
그 전까지 조정에 있던 대신들은 거의 모두가 훈구파였어.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공을 세운 신하들과 그 측근들이었지. 반면 사림파는 고려 말기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들이야. 그들은 조선 창건에 반대하면서 지방으로 내려갔지? 정치와는 담을 쌓은 유학자들이었어. 그러니 훈구파보다 훨씬 도덕적일 거야. 성종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림파를 등용했어. 사림파가 훈구파를 잘 견제할 것이라 믿은 거야. 그러면 왕권도 강해지지 않겠어?
성종의 업적은 많아. 이미 말했던 대로 『경국대전』을 반포했고, 그의 속편 격인 『대전속록』도 반포했어. 할아버지 세조가 없애버린 집현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홍문관을 새로 만들기도 했지. 이처럼 성종이 학문에 힘을 쓰자 세종 때의 찬란했던 문화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 성종 또한 많은 책을 내도록 했단다.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악학궤범』 『국조오례의』가 바로 그것이야.
명장의 엇갈린 운명
4군6진을 개척한 명장 최윤덕과 김종서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갈렸단다.
절제사는 오늘날로 치면 군 장성에 해당하는 무신 벼슬이야. 관찰사는 도지사로, 문신에게 주는 벼슬이지. 절제사였던 최윤덕은 무신, 관찰사였던 김종서는 문신 출신인 셈이지.
고려 때보다는 덜하지만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덜 대우하는 풍조가 조선시대에도 아주 약간은 남아 있었단다. 그렇지만 최윤덕은 공로를 인정받아 재상인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승진했어. 정승의 벼슬까지 올라 최고의 영예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지. 김종서도 우의정까지 승진했어. 단종 때는 좌의정으로서 임금을 보필했지. 최윤덕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고 할 수 있어. 그러나 결말은 많이 달랐단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모반죄의 누명을 씌우고 처형한 거야. 심지어 그의 두 아들까지 모두 처형됐지. 반란의 첫 희생자로서 삶을 마감한 거야. 쓸쓸한 인생이지?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어. 사림파가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하는 삼사에 포진해 훈구파를 제대로 견제했거든. 하지만 그 결과로 훈구파의 불만은 커져 갔어. 당연히 두 파벌의 충돌이 예상되지? 이렇게 해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사화야.
1474년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부인인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났어. 그러자 서열에 따라 후궁인 숙의 윤씨가 왕후에 올랐어. 그러나 성종과 왕후 윤씨는 썩 사이가 좋지 않았나 봐. 결국 왕후 윤씨는 폐위됐어1479년. 심지어 이듬해 사약을 받았어. 이 사건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조정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지.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까?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큰아들 연산군10대이 왕에 즉위했어1494년. 연산군은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됐어. 성종이 끔찍이 아꼈다는 걸 알 수 있겠지? 연산군은 너무 어렸기에 조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어.
연산군의 친어머니는 사망한 왕후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숙의에서 왕후로 승진한 윤씨였어. 그런데 질투가 좀 심한 편이었나 봐. 성종이 다른 후궁을 총애하는 것 때문에 자주 싸움을 했다는구나. 그러다가 사고가 터지고 말았어. 왕후 윤씨가 부부 싸움 끝에 성종의 얼굴을 할퀸 거야. 왕의 얼굴, 용안에 상처를 내다니! 궁궐이 발칵 뒤집어졌어. 결국 인수대비는 왕후 윤씨를 내치라는 명령을 내렸어.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