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두부』를 낸 지 5년밖에 안 됐는데 또 이렇게 그 후에 쓴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다. 거의가 다 70이 넘어 쓴 글들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한 우려가 공포분위기를 방불케 하는 요즈음 이 나이까지 건재하다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인데 책까지 내게 되어 송구스럽다. 하지만 이 나이 이거 거저먹은 나이 아니다.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내 나이에 6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아마도 삶을 무사히 다해간다는 안도감― 나잇값 때문일 것이다.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읽는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이 책을 위해 채근하고 기다려준 열림원 여러분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07년 1월 박완서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오늘도 나는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줘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일년초 씨를 뿌릴 때도 흙을 정성스럽게 토닥거려주면서 말을 건다.
한숨 자면서 땅기운 듬뿍 받고 깨어날 때 다시 만나자고, 싹 트면 반갑다고,
꽃 피면 어머머, 예쁘다고 소리 내어 인사한다.
꽃이 한창 많이 필 때는 이 꽃 저 꽃 어느 꽃도 섭섭지 않게 말을 거느라,
또 손님이 오면 요 예쁜 짓 좀 보라고 자랑시키느라
말 없는 식물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마당에서 철 따라 피고 지던 일년초 중 맨 나중까지 붉게 피던 백일홍마저 올겨울 첫추위에 얼어 죽고 나니 마당이 너무도 허전하여, 내년엔 일년초 따위 부질없는 것들 심지도 말아야지, 하다가 문득 목련나무를 쳐다보았다. 목련나무는 마당에 꽃이 없긴 왜 없냐고 시위라도 하듯이 가장귀마다 솜털 보송보송한, 내년에 필 꽃망울을 촘촘히 매달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또 졌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나서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목련나무하고 나하고는 말이 잘 통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연이 좀 있다.
그 나무는 내가 우리 집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큰 거목이었지만 목련은 성장이 빠르다니까 나이를 그렇게 많이 먹은 건 아닌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넓지도 않은 마당에 그렇게 큰 나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집을 야트막하게 지을 작정인데 집보다 높은 나무도 싫었다. 그래서 집 앞에 있는 하천부지나 뒤란 쪽으로 옮겨 심을 궁리도 해보았는데 정원 일을 하는 식물 전문가하고 의논해보니 옮겨 심는 값이 어마어마했다.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도 정원사는 그 일이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새로 사 심는 것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짓을 뭣 하러 하느냐고 했다. 별로 비싸거나 귀한 나무도 아닌데 손쉽게 베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말투였다. 정원사의 말도 말이지만 내가 원래 목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고 해서 베어버리기로 했다. 목련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꽃이 질 때 산뜻하게 지지 못하고 오래도록 갈색으로 시든 꽃잎을 매달고 있는 게 누추해 보여서 안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그럼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집을 짓고 있는 도중이었기에 어느 날 없어져버렸는지도 모르게 그 나무는 사라졌다. 그리고 곧 목련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해 5월에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고 마당 정리하면서 보니 나무를 밑둥에서 베지 않고 일 미터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말뚝으로 쓸 일도 없는데 왜 남겨놓았을까 싶었지만, 그 자리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담 모퉁이여서 신경 쓰지 않았다. 여름이 되니 새로 깐 잔디보다 잡초가 더 무성해져서 그걸 뽑느라고 마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히 목련나무 그루터기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게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그루터기 윗부분에서 푸릇푸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원치 않는 잡초 취급해 너까지 왜 속을 썩이느냐고 투덜대며 손바닥으로 훑어서 없애버리곤 했다. 그래도 줄기차게 그 그루터기는 죽지 않고 새싹을 토해냈고, 나는 그걸 또 집요하게 훑어낼 때마다 투덜대는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게 됐다. 그해 여름내 그 짓을 했다. 그러다가 겨울이 됐으니 그 나무는 확실하게 죽었으려니 안심을 했다. 그러나 웬걸, 그 이듬해 봄 좀 오래 여행을 하고 돌아와 보니 그 나무 그루터기는 사방으로 이파리가 아닌 가장귀를 뻗고 있었다. 가장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자라며 잎도 무성해졌기 때문에 키는 작지만 동그랗고 건강한 나무의 모양을 갖추어갔다. 그해 그 나무는 살아나려고 온 힘을 다하느라 그랬는지 꽃은 피지 않았다. 나는 그 나무의 왕성한 생명력에 질린 나머지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내가 너한테 졌다고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목련나무는 나의 가장 친한 말동무가 되었다. 가장귀가 너무 촘촘하게 나서 톱으로 솎아주게 될 때에도 아플까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말을 했고, 전지를 끝낸 후에는 거 봐라 얼마나 시원하냐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전지를 해주었는데도 이파리들이 어찌나 극성맞게 빈틈없이 밀생(密生)을 하는지 한여름에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앙리 루소가 그린 식물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곤 했다. 무성한 나무는 대개 이파리 하나하나의 모양은 도렷하지 않은 법인데 이 나무는 마치 이파리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시위라도 하듯이 형체가 또렷하고 두터운 질감으로 번들댔다. 그래서 더욱 루소의 그림에서처럼 그 사이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괴기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마 한때 그 나무를 해코지했다는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잎만 그렇게 무성할 뿐, 이듬해 봄에도 꽃은 피지 않아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는 또 나무에게 말을 걸게 됐다. 미안하다고, 너를 죽이려 한 것도, 너의 꽃을 싫어한 것도 사과할 테니 내년에는 꽃 좀 피라고 자꾸자꾸 말을 시켰더니 그 이듬해는 시원치는 않지만 꽃이 몇 송이 피었고, 지난봄에는 더 많은 꽃을 피웠다. 아마 오는 봄에는 더 장하게 꽃을 피울 모양이다. 벌써부터 여봐란 듯이 자랑스럽게 준비하고 있는 솜털 보송보송한 수많은 꽃봉오리들을 보니. 그래서 나는 요새도 나의 목련나무에게 말을 건다. 나를 용서해줘서 고맙고, 이 엄동설한에 찬란한 봄을 꿈꾸게 해줘서 고맙다고.
목련이 고마운 까닭은 그 밖에도 또 있다. 목련나무 때문에 나는 꽃이나 흙에게 말을 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일년초 씨를 뿌릴 때도 흙을 정성스럽게 토닥거려주면서 말을 건다. 한숨 자면서 땅기운 듬뿍 받고 깨어날 때 다시 만나자고, 싹 트면 반갑다고, 꽃 피면 어머머, 예쁘다고 소리 내어 인사한다. 꽃이 한창 많이 필 때는 이 꽃 저 꽃 어느 꽃도 섭섭지 않게 말을 거느라, 또 손님이 오면 요 예쁜 짓 좀 보라고 자랑시키느라 말 없는 식물 앞에서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일년초들은 목련나무처럼 오래 삐치지 않고 내 말을 잘 듣는다. 왜 안 피냐고 독촉하면 곧 피고, 비 맞고 쓰러져 있으면 흙을 돋워 일으켜 세우면서 바로 서 있으라고 야단치면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다. 내 마당의 꽃들이 내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노랗게 피는 꽃한테 빨갛게 피라거나, 분꽃처럼 저녁 한때만 피는 꽃한테 온종일 피어 있으라는 무리한 주문은 안 한다. 무리한 요구를 안 하는 게 아마 꽃이 내 말을 잘 듣도록 길들이는 비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꽃과 나무들을 내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걸 알면 그것들이 아마 코웃음을 치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나를 길들였다고 정정해야겠다.
요새도 새벽에 눈만 뜨면 마당으로 나가게 된다. 봄에는 이불 속의 등 따순 맛에 벌떡 일어나기가 귀찮다가도 식물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한 느낌 때문에 이부자리를 박찼던 것 같다. 밖에 나가 나날이 부드러워지는 공기와 흙의 감촉을 즐기며 마당을 어슬렁거리노라면 땅속에서 아직 움트기 전의 식물들이 부산하게 웅성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런 느낌은 고막에 와 닿는 음향은 아니지만 마음을 두드리기도 하고 무슨 영감처럼 소리 없이 사람을 깜짝 놀라게도 한다.
이른 봄 어느 날은 내 마음에만 들리는 밖의 그런 소란스러움 때문에 마당에 나가니 과연 대기중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봄 가뭄이 계속되고 잔설마저 사라지고 난 땅은 아직 양회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안에서 겨울을 난 풀씨와 뿌리들을 움트게 하려면 지표를 부드럽게 호미질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마당을 거닐다가 문득 양지쪽 꽃밭의 맨땅이 일 센티 가까이나 금이 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중장비차가 부실한 아스팔트길을 지나가면서 남긴 균열을 연상시키는 금이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파란 이파리가 보였다. 작년에 상사초가 있던 자리이니 아마 상사초 이파리일 것이다. 저 연한 이파리가 이 딱딱한 땅에 아기 손가락도 들락거릴 수 있을 만한 균열을 일으키다니, 어찌 소리 없이 그 일이 일어났겠는가.
그렇게 씩씩하게 올라와 시퍼렇게 너울대던 상사초가 지금은 자취도 없다. 죽은 게 아니라 상사초는 이파리가 시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있다가 꽃대가 올라와 홀로 청승맞게 핀다. 그게 상사초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상사초처럼 땅에 균열을 일으키며 솟아오르는 식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복수초다. 복수초는 이파리보다 앞서 꽃이 먼저 피는데 꽃판이 민들레보다 큰 노란 꽃봉오리가 직접 땅을 뚫으려면 상사초 이파리 못지않은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상사초와 복수초가 올라오고 나면 마당은 한층 소란스러워진다. 나무들이 물을 길어올리는 소리, 흙 속의 무수한 씨들이 서로 먼저 나가려고 부산을 떠는 소리가 날로 도타워지는 햇살 속에 파문을 일으키고 지표에 아지랑이를 만든다. 봄기운의 유혹을 못 이긴 산새들도 그때부터 짝짓기 철이 시작된다. 제 나름의 온갖 미성으로 지저귀기 시작한다. 새벽잠을 깨우던 소리 없는 소요가 비로소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으로 바뀐다. 그때부터 내 일손도 바빠진다.
아파트에 살 때 땅 집에 살면 무엇무엇을 해보고 싶다고 꿈꾸던 것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채마밭은 일 년만 하고 그만두었다. 약을 안 치니까 벌레만 꼬이고 잘 안 자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가는 채소장수가 온갖 과일과 채소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사주고 싶은 것도 문제였다. 무공해 채소도 좋지만, 농사 이외의 것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전문 농사꾼이 지은 걸 사주는 게 도리일 듯싶었다. 채마밭이 슬그머니 잔디가 되고, 꽃밭이 넓어졌다고 해도 손이 덜 가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맨땅을 가만 두지 못하고 꼭 뭐든지 심고 싶어하는 것처럼, 맨땅도 기온만 적당해지고 나면 한시도 맨땅으로 있으려 들지 않는다. 예서제서 푸르름을 내뿜는다. 푸른 것이 올라온다고 해서 다 상사초나 복수초처럼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잔디밭에서도 잔디보다 먼저 시퍼렇게 웃자라는 것들은 내가 원치 않는 클로버나 잡풀들이고, 꽃밭으로 남겨놓은 맨땅에서도 온갖 잡풀들이 아무리 김을 매줘도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하룻밤 새에 어쩌면 그렇게 많이 퍼지는지, 그 넓지 않은 마당이 매일매일 나에게 만만치 않은 육체노동을 시킨다. 그러나 우리 마당 아니면 누가 나를 새벽부터 불러내어 육체노동을 시키겠는가. 나무 그늘이나 꽃밭으로 남겨놓은 맨땅에서는 잡풀만 나는 게 아니다. 쑥, 씀바귀, 돌나물, 부추도 지천으로 난다. 저녁 반찬을 위해, 김치를 담그기 위해, 이슬 젖은 그런 것들을 소쿠리에 소복이 따 담는 맛을 무엇에 비길까. 우리 마당에서 난 거라고 그런 것들을 딸네나, 이웃하고 나누기도 한다. 우리 마당에서 지천으로 나는 돌나물을 건강식품이라고 반색을 하는 사람도 있다.
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마냥 자라게 할 수도 없다. 나는 우리 마당이 이랬으면 하는 꿈이 있다. 가꾼 티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한겨울 빼고는 사철 꽃이 피어 보기에도 좋고, 마음에도 위안이 되길 바란다. 남들한테 마당이 예쁘다는 칭찬도 듣고 싶다. 농사짓는 사람이 잘 된 논밭을 보고 흐뭇해하는 건, 단지 풍족한 수확의 예감 때문만이 아니라 건강한 농작물이 주는 미적 만족감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마당에 대한 그런 조급한 기대 때문에 이른 봄부터 이미 온실에서 개화한 수입 봄 화초를 내놓고 파는 꽃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판, 두 판 사다가 여기저기 배치하고 땅속에서 겨울을 난 구근들도 보살피고, 여름에 필 일년초의 씨도 뿌린다. 그러는 사이에 목련과 매화, 살구꽃, 앵두꽃, 자두꽃이 거의 같은 시기에 피고, 조팝나무 라일락이 그 다음을 잇는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피었을 때 나는 나의 작은 집과 함께 붕 공중으로 떠오를 것 같은 황홀감을 맛본다. 나는 그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 견딘 모진 추위와 눈보라의 세월을 알기 때문에 오래오래 펴 있기를 바라지만 봄꽃의 만개기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하필이면 무슨 심통인지 비바람이 불어, 그 꽃들을 무자비하게 떨군다. 딱딱한 꽃봉오리들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끈기 있게 어루만지던 따순 햇살과 부드러운 미풍을 보낸 것과 똑같은 자연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조급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낙화한 자리에 어김없이 열매가 맺혀 있는 걸 보면 바람은 벌나비가 일일이 다 하기엔 역부족인 가루받이를 도와줬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고도 한두 차례 봄추위와 강풍이 지나고 나면 달렸던 열매들이 대폭 솎아져 실하게 자랄 것들만 남는다.
지금은 한여름이다. 그렇게 자연의 자애와 폭력을 견디고 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다. 매실은 이삼 일 안에 따서 엑기스를 만들어야 할 것 같고, 청청한 이파리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깔로 익어가는 살구와 자두도 지금 한창 과육 사이에 단물을 저장하고 있을 것이다. 살구나무는 내가 따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는 걸 아는지 잘 익은 순서대로 매일 아침 한 바가지씩이나 그 예쁜 열매를 떨굴 것이다. 자두는 키가 크지 않으니까 내가 눈으로 봐서 잘 익은 걸 따먹을 수 있지만 까닥하다간 벌레들한테 먼저 먹히는 수가 있다. 그러나 내 눈썰미는 벌레한테 미치지 못한다. 내 경험으로는 벌레가 살짝 갉아먹기 시작한 걸 따먹는 게 가장 당도 높은 자두를 따먹을 수 있는 비결이다. 이렇게 나무에 매달린 것들을 수확하기도 바쁘지만, 땅 힘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 때문에 땅이 내뿜는 것들을 건사하기도 요새가 제일 바쁘다. 잔디도 아주 잘 자라기 때문에 깎아줘야 하지만 그 사이에 잡풀도 매일매일 제거해줘야 하고 봄에 씨 뿌린 봉숭아, 백일홍, 과꽃, 나팔꽃도 모종하기 알맞은 크기로 자랐으니 제자리를 잡아줘야 한다. 마침 이른 봄에 사다 심은 온실 꽃들이 시들어가니 그것들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심으면 될 것이다. 꽃밭의 이모작인 셈이다. 그러노라면 매일 아침 흙을 주물러야 한다.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냄새를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 곱씹으면서 지루해지려는 삶을 추스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어느 날부터인가 현관 처마 밑에 생긴 까만 반점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현관처마는 거의 이층 높이여서 의자를 놓고 올라가 봐도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흰 회칠이 그만큼 벗겨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회칠 밑이 그렇게 까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신경이 써졌나 보다. 신경 쓰고 보니까 처음엔 일 원짜리만 하던 점이 며칠 만에 오백 원짜리보다도 더 커지면서 도톰하게 부피를 더하고 있다는 것까지 눈에 들어왔다. 더 자주자주 쳐다본 끝에 그리로 말벌이 모여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은 말벌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말벌은 가끔 신문에도 나는 벌이다. 등산하다가 말벌에 쏘여 죽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보통 벌보다도 크고 밉게 생긴 벌을 말벌이라고 단정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니 겁이 더럭 났다. 딴 데도 아니고 현관 처마 밑에 그 위험하고 흉측한 것들이 모여들어 무슨 모의를 하는 것일까. 우리 집에 거기에 닿을 만한 긴 막대기는 없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꾀가 얼마나 간악한데 제까짓 말벌 하나 해코지 못 하겠는가. 나는 마당에 물 줄 때 쓰는, 샤워 꼭지가 달린 긴 호스 끝을 그곳으로 겨냥하고 물을 틀었다. 샤워를 직수로 고쳐놓은 물줄기는 곧장 힘차게 솟으면서 말벌이 모여드는 곳을 공격했다. 이윽고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함께 수많은 어린 말벌들이 떠내려 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그 많은 애벌레가 그 안에서 자라고 있었을까. 그건 어쩌면 애벌레가 아닐 수도 있었다. 모기만 한 크기에는 날개가 나 있는 듯도 싶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수공(水攻)을 이기기엔 아직 무력했다. 폭포수에 휩쓸려 날갯짓 한 번 못 하고 허무하게 떠내려갔다. 어미 말벌들은 저희들끼리만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애벌레들이 더는 떠내려 오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벌집을 겨냥한 수공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 시작한 김에 벌집을 아주 제거해야 후환이 없을 것 같았다. 집요한 수공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벌집이 처마 밑 천장에서 분리됐다. 그러나 땅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외가닥 전화선만 한 굵기의 선으로 천장과 연결되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2센티 정도 되는 연결고리를 겨냥하고 계속해서 강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면서 정수리가 화끈거릴 정도의 적의를 느꼈다. 말벌 그 하찮은 것들이 만든 줄이 그렇게 질길 줄이야. 그 줄 하나로 진저리가 쳐지게 악착같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나의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무분별한 적의는 공포감일 수도 있었다. 결국은 내가 이겼다. 마침내 벌집이 천장으로부터 분리되어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육각형의 여러 채의 벌집이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나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해 발로 그것을 짓밟아 으깨버렸다. 그리고 내 집에서 말벌을 발본색원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 나쁜 승리감으로 나는 한동안 어깨로 숨을 쉬며 허덕댔다. 내 인간승리는 이렇듯 비참하고 초라했다. 나는 그날 밤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물 공격을 피해 도망친 어미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의 종족보존의 본능을 모성애로까지 과장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복수심 같은 게 입력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크게 못할 짓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랬을까, 그것도 의심스러웠다. 정말 그랬다고 해도 그건 타고난 소심증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한없이 작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더 기막힐 일은 그 다음날 아침부터 일어났다. 어제 그 자리에 말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있어서 벌집이 그냥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떨어져서 붙어 있는 말벌도 보였다. 그 많은 새끼들을 다 잃고도 왜 그 자리가 명당자리일까, 기가 막혀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벌집이 있던 자리는 회칠이 벗겨진 건지 그들의 분비물이 그렇게 만든 건지 동전만 한 흔적이 아직도 까맣게 남아 있었다. 물 공격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은 그들의 폐허를 아주 없애기로 작정하고 나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기다란 장대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장대를 휘둘러 그들을 쫓아버린다. 쫓아내도 쫓아내도 그들은 한사코 그 검은 폐허 주위로 모여들고 머리를 맞대고 쉬는지 모의를 하는지 한다. 혹시라도 그들이 떠내려간 새끼들을 못 잊고 모여서 같이 슬퍼하고 있을까봐 두렵다. 그래서 장대를 휘두를 때마다 나는 소리 내어 그들에게 말을 건다. 아니 애걸을 한다.
제발 거기다 집 지을 생각 말고 딴 데로 가봐. 우리 집 뒤쪽이라도 눈감아줄 수 있어. 나 그렇게 모진 사람 아냐. 그렇지만 거기는 현관 처마 밑이잖니. 난 너희들이 무섭단다. 접때 일은 사과할게, 나 좀 이해해주라.
이런 뜻의 말을 마치 속죄하듯이 비굴하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말벌 식구들은 그 참극의 현장으로 끈질기게 모여든다. 아마 며칠만 장대 공격을 멈추어도 그들은 그 자리에 덩그렇게 예전 집을 복구시킬 것이다. 말벌 집의 발본색원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내 근심을 들은 어떤 이웃이 한 꾀를 내주었다. 장대 끝에다 솜방망이를 해달고 거기다가 독한 살충제를 묻혀서 그걸로 말벌의 집터를 반복해서 문질러보라는 것이었다. 무릎을 칠 만한 묘안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벌을 공격한 것이지, 나는 아직 말벌의 공격을 받은 일이 없다. 내 가까이 날아오지도 않는다. 공연히 지레 겁을 먹고 나에게 하등 위협이 되지 않는 미물을 그렇게 모질고도 과장되게 공격한 것이었다. 돌연한 물 공격으로 그 많은 새끼들을 일시에 몰살시켜놓은 주제에 살충제 공격만은 차마 못할 짓만 같아서 망설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전쟁 중에서도 어떤 화력이나 파괴력보다도 화생방 무기를 부도덕하게 여기는 문화적 영향인 듯싶다. 그렇다고 내가 살충제를 전혀 안 쓰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아마 살충제가 없다면 남들이 그럴듯하게 봐주는 전원생활이라는 것을 아예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말벌이나 파리보다도 작은 곤충일수록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모기도 싫지만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만 한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알을 낳고 어떻게 번식하는지 실내에 먹다 남은 과일껍질만 있어도 거기서 솟은 것처럼 순식간에 그런 것들이 꼬인다. 먼지처럼 가볍고 무력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중에는 닿기만 해도 맨살을 두드러기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도 있고, 오래도록 따끔거리거나 가렵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런 미물들의 출입을 막는 데는 망창도 소용이 없으니 살충제를 뿌려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식물들은 인간에게 우호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우리는 곧잘 자연 친화적, 자연식 따위 ‘자연’ 자 붙은 말에 마치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향 같은 그리움을 느낄 뿐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아낌으로써 여태까지 파괴만 해온 죄과에 대한 속죄의 방편으로 삼으려 한다. 어떤 식물도감을 보면 우리의 산야초치고 인간을 보하지 않는 게 없고 그것만 연구를 잘 하면 못 고칠 병이 없는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병에 약이 된다는 건 그만큼 독이 된다는 소리도 된다고 생각한다. 병도 우리 몸의 일부니까.
집 앞엔 숲이 있고 동네가 숲에 안긴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사는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그만큼 숲이 주는 위안은 도시 문화권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앉은 것 같은 소외감을 다독거려주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작은 숲이 불안에 떨 적에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특히 요새처럼 숲이 진녹색으로 두텁게 번들거릴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를 수상한 바람이 숲을 흔들 적이 있다. 그럴 때 숲은 온몸에 비늘을 뒤집어쓴 한 마리 거대한 공룡으로 변한다. 중생대의 공룡이 멸종의 예감으로 괴롭게 몸을 뒤채는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감이다. 숲의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연대하여 한 마리의 거대한 공룡으로 변신한 걸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 제발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 만일 사람들이 함께 그런 것을 느낀다면 어떡하든지 숲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다 콘크리트를 치든지 아파트를 짓든지 하고 말 것 같아서이다. 인간은 공포감을 느꼈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숲이 괴롭게 뒤채는 건 미구에 닥칠 그런 운명을 예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남들이 말하는 나의 전원생활은 조금도 평화롭지 않다. 내가 여기 정착하려 한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꿨기 때문도 도처에 도사린 불안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파트가 너무 편해서, 온종일 몸 놀릴 일이 너무 없는 게 사육당하는 것처럼 답답해서 나에게 맞는 불편을 선택하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거둬야 할 마당이 나에게 노동하는 불편을 제공해준다. 요새처럼 땅의 생명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적엔 하루만 마당을 안 돌봐도 표시가 난다. 나는 마당을 돌보되 가꾼 티 안 나게 아주 자연스럽게 가꾸고 싶다. 내가 자연스러워하는 건 내 유년의 뜰이 그 원본이다. 그래서 주로 봉숭아나 분꽃 한련 개미취 따위를 기른다. 첫해는 그런 것들의 씨를 어렵게 구해다 뿌렸었는데 해마다 저절로 나서 이제는 그것들 천지가 되었다. 아침마다 그것들하고 눈 맞추는 재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숭아가 한창인 지금에 와서야 나는 말벌들이 봉숭아꽃에 특히 많이 꼬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모진 일을 당하고도 우리 마당을 못 떠났구나, 마치 인간이 범람의 우려를 무릅쓰고 큰 강을 끼고 취락을 발달시켰듯이 말이다. 내 유년의 뜰에도 말벌이 있었을 것이다. 내 유년의 뜰엔 뱀도 살고 땅벌도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행여나 그런 것들이 숨어들까봐 하루 한 뼘씩 왕성하게 자라는, 담이나 나무 밑의 풀섶을 뽑아주고, 머위나 들깨처럼 저절로 자라는 것들도 웃자라지 못하게 솎아내는 일을 열심히 한다. 그 일은 내 반나절의 노동으로 삼기에 족한 분량이다. 더 일을 하고 싶으면 가위로 잔디를 깎아주기도 한다. 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그러나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잔디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풀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요새 같은 장마철엔 제법 콸콸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보통 때는 귀 기울여야 그 졸졸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책을 보다가 무심코 바깥을 내다보려는데 유리창에 웬 파리떼가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시(市)에서 자주 연막소독을 해주기 때문인지 여름에도 거의 파리모기 성가신 걸 모르고 살았는데 첫추위까지 겪고 난 이 늦가을에 웬 파리일까. 가까이 가보니 유리창 안쪽에 붙어 있는 건 몇 마리 안 되고 밖에 더 많이 붙어 있었다. 파리가 아니라 벌하고 무당벌레들이었다. 여름내 마당에 벌이 많이 날아왔고 한번은 추녀 밑에 집을 지은 적도 있어서 벌은 낯설지 않았지만 저 많은 무당벌레들은 도대체 어디 있었을까. 그것들을 밖으로 날려 보내려고 창문을 한편으로 밀어 나갈 구멍을 내주고 나서 신문지 둘둘 만 걸로 툭툭 건드려보았지만 그것들은 날지 못했다. 죽지는 않았는데 미약하게 날갯짓만 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극성맞고 위협적이던 벌의 생명력이 미미한 티끌이나 먼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유리창 밖에 붙어 있는 것들도 힘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쾌청한 날이라 남향의 유리창엔 따끈따끈한 볕이 들이비치고 있었다. 늙은이가 뜨뜻한 아랫목 바치듯이 너희들도 며칠 안 남은 잔명을 덥혀보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삶의 속절없음은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이나 미물이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제각기의 고운 빛깔로 마지막 영화를 자랑하던 마당의 나무들도 이제 잎을 완전히 떨군 벌거숭이가 돼 있다. 꽃만 열흘 붉은 꽃이 없는 게 아니라 단풍도 자지러지게 고운 빛깔이 나는 동안은 꽃의 전성기보다 오히려 짧다. 그러나 나무들은 잎을 떨군 후가 더 늠름하고 큰 나무일수록 계절과는 상관없이 당당하다. 나무에 비해 한철 피고 나면 그뿐인 일년초들은 한결 조급하고 옹졸하다. 올해 우리 마당의 일년초들은 잘 안된 편이었다. 여름에 워낙 비가 많이 오다 보니 쓰러진 채 그 자리에서 녹았는지 썩었는지 자취를 안 남긴 것도 있고 꽃을 제대로 못 피우고 대궁이만 웃자라다 만 것도 있다. 그래도 분꽃하고 봉숭아는 잘된 편이어서 실컷 꽃을 보고 찬바람 나고 추레해진 후에 뽑아버렸는데 그 빈자리가 파릇파릇해서 가보니 빈틈없이 봉숭아가 돋아나고 있었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있나. 뽑아버린 봉숭아가 떨군 씨들이 내년 봄을 못 참고 일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먼저 나온 것들은 제법 웃자라서 희미하게 붉은 꽃까지 달고 있었다. 때를 못 맞춘 그것들은 봉숭아가 아닌 딴 화초처럼 허약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