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언젠가부터 말하는 사람의 메시지보다는 그가 누구의 편인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시작하기 앞서 필자가 누구의 편인지를 확실히 밝혀 둘 필요가 있겠다.
필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포켓몬스터’에서 한지우에 맞서 싸우는 로켓단의 편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로켓단은 희귀한 포켓몬을 포획하여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끈질기게 도전하지만, 이를 달성하는 데에는 예외 없이 실패하는 악당이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번번이 좌절되지만 그들은 절대 이에 굴하지 않는다. 비록 로켓단이 포켓몬스터 세계관 내에서는 악당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길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고, 정녕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도중에 포기하는 것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을 포켓몬 트레이너를 꿈꿔왔던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주었다.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이라도 로켓단과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다면, 이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로사, 로이 및 나옹과 함께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닐 것이다.
상상 속에서 로켓단 편에 서 있는 필자가 현실에서는 누구의 편인지 여전히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현실에서는 형사정의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싶었다고 조심스럽게 밝힐 것이다. 누군가의 범죄행위로 고통받고 원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피해자의 편이고 싶었고, 그래서 정의로운 판결로 그들의 고통에 응답해주고 싶었다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불법보다 더 큰 처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피고인의 편에 서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사건의 당사자 누구에게도 억울한 부분이 없도록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울러 주말 저녁에 범인을 체포하기 위하여 생전 처음으로 가본 동네에서 삼각김밥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기약 없는 잠복근무를 하고 있는 경찰관과 주말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출근하여 피의자에 대한 합당한 처분을 고민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된 검사나 판사들, 그리고 형사사법시스템 내에서 자신의 역할에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의 편에 설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필자가 실제 형사정의를 갈구하는 사람들 편에 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신하지 못한다는 점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앞에서 정의로운 재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는 기도를 습관처럼 하고는 있지만, 법정에서 난무하는 거짓된 진술과 무리한 주장들을 접하면서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짧은 기도만으로는 정의로운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치 않다는 점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법정에서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밝히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사건의 실체를 확신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누가 더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짐작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정치적 이전투구의 장에서 싸우고 있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점 또한 밝혀 둔다. 필자는 지금껏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오랜 기간 ‘사법개혁’을 부르짖으며 부지런히 쏟아온 노력과 수고는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알고 있다. 국회는 오랜 기간 동안 왠지 그럴듯해 보이는 외국의 사법제도를 일사천리로 도입하고 이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워왔지만, 별다른 검토 없이 도입된 새로운 법률과 제도가 당초 의도한 성과들을 만들어 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국회는 형사사법시스템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단지 신기하고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제도나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결과, 언제부터인가 수사나 형사재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국회가 오랜 기간 ‘사법개혁’에 집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되려 늘고 있고, 수사와 재판절차에서 납득할 수 없는 판단을 받는 피고인이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과거 형사정의에 헌신하다가 이제 좌절감을 느끼고 사직하는 수사관과 검사, 판사들 또한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사사법시스템이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이 무엇보다 ‘사법개혁’과 이를 부르짖던 정치인들에게 있다는 점은 흔히 간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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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는 “법은 큰 파리는 잡지 못하고 작은 파리만 잡는 거미줄이다(Les lois sont des toiles d’araignées à travers lesquelles passent les grosses mouches et où restent les petites)”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오래 전 우리의 형사사법시스템은 때때로 전직 대통령이나 막대한 재력을 가진 사람들을 처단할 수 있을 정도의 체계와 역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동안 막대한 범죄수익을 축적한 조직적 사기범행의 설계자와 주도자들을 추적하여 기소할 수 있을 정도로 치밀하거나 촘촘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잡지 못하고 놓쳐왔던 큰 파리는 사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과 같은 범죄기업(criminal enterprises)의 수괴였지만, 이를 제대로 알아차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국회는 큰 파리를 못잡는 거미줄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최근 형사소송법 개정과 검찰의 수사권한을 박탈하는 여러 법률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나아가 국회는 조직적 사기범행의 설계자들에게 형사법을 온전히 피해갈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유독 조직적 사기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던 바로 그때, 국회는 그렇게 부지런을 떨면서 시스템의 빈틈을 찾아 증식하고자 하였던 불의를 위해 활짝 문을 열어준 것이다(불의에 활짝 문을 열어준 그들 중 일부는 언젠가 시스템의 빈틈을 찾아다니며 증식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불의 그 자체였다는 점이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사와 기소, 형사재판 과정 전반에서 정교하게 고안되어 있는 각종 절차적 균형을 망가뜨리고,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장치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형사사법시스템이 그나마 기능하고 있었던 영역에서도 작동을 멈추어 감에 따라, 이제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큰 파리뿐만 아니라 언제나 잡을 수 있었던 작은 파리도 잡지 못하는 쓸모없는 거미줄로 변해가고 있다.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붕괴하고 있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등의 개정으로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을 막을 수 있는 주요 수단이 모두 제거된 상황에서 누군가가 형사정의를 위하여 필요한 수사와 재판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과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형사사법시스템 스스로가 범죄적 진실을 파헤치는 노력을 본격적으로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이 누더기가 된 형사사법시스템을 짓밟고 마음껏 활개칠 때, 지금까지는 불의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워온 사람들 또한 무기력하게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기가 곧 도래하게 될 것이다. 현재 개별 사건에서 합당한 결론에 이르고자 매일 피해자, 피의자 또는 피고인, 참고인 또는 증인과 씨름하는 수사관과 검사와 판사들이 간신히 터지기 직전의 둑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형사정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불의와 싸워보겠다고 매일 피의자나 증거들과 씨름하여 왔던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노력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거대한 힘에 맞서기를 포기하는 순간, 불의를 억누르고 있던 힘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불의가 온 세상을 삼켜버릴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오래지 않아 형사사법시스템이 붕괴해버린 이후에는 범죄피해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피해자나 억울한 사정이 있는 피고인이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본인들의 사정이 충분히 고려될 것이라는 기대 또한 대체로 실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형사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서의 주된 장애물은 부족한 인력과 자원, 시스템 관여자 개인의 의지와 통찰력 부족에 있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형사정의를 구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권력과 재력을 겸비한 범죄자들에게 법의 엄격한 적용과 집행을 피해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형사사법시스템 그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형사정의를 달성하는 것이 번번이 좌절되는 상황에도 불의와 싸우는 수사관과 검사, 판사들이 무기력하게 포기하지 않고 형사정의를 위하여 끝까지 노력해주기를 응원한다. 형사사법시스템이 전부 작동을 멈추고 범죄조직들이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형사정의라는 이제는 이루기 불가능한 목표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우리의 로켓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와 같은 로켓단이 필자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온다면, 필자는 기꺼이 뜻을 같이하는 수사관, 검사 및 판사들과 함께 멋진 유니폼을 입고 이 세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진실과 정의를 뿌리고 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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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가서 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견을 밝혔으나, 김성일은 임금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고하였다. 이에 류성용이 “그대가 일부러 황윤길과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물었고, 김성일은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김성일의 답변으로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을 가졌던 부분이 잠시 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적이 침략을 준비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에 잠시 스스로의 눈과 귀를 닫은 것만으로 참혹한 전란의 피해를 겪게 되는 더욱 불편한 미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책은 사기범죄조직이 창궐하고 있는 이 순간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고 쓴 것이 결코 아니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이 수많은 피해자들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고 형사사법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막상 법원에서는 조직적 사기범죄를 저지른 수괴에 대한 형사재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참지 못하고 집필을 시작한 것이기에, 이 책에는 독자들이 편하게 읽기에는 불편한 진실과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담겨 있다. 지난 3년간 평일과 주말 저녁에 스터디카페에 처박혀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발생하는 대형 사기사건들을 정리하면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진정시킬 수 없었던 필자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불편한 진실과 더욱 불편한 전망, 날카로운 비판으로 인하여, 비로소 놀라고 의혹을 갖게 될 독자들은 피해자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은 차마 글로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고, 눈과 귀를 닫는 것으로는 이러한 불편이 곧 우리 모두에게 들이닥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할 때가 된 것임을 널리 이해해주길 부탁드린다.
이 책은 “최근 한국에서 조직적 사기범행이 이토록 창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대한민국 국회가 사기범죄조직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함과 동시에 조직적 사기범행의 설계와 기획을 담당하던 수괴들에게 수사와 재판을 온전히 피해갈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형사사법시스템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사와 재판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스스로 증식할 기회를 찾고 있는 불의한 사기범죄조직이 가장 원하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상황은 가장 큰 목소리로 형사정의를 부르짖었던 국회의원들과 법무부장관들에게 온전히 그 책임이 있다. 필자는 “왜 대한민국 국회가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수사나 형사처벌을 받을 위험을 온전히 제거해주기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앞에서는 형사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사기범죄조직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어렵게 하는 납득할 수 없는 법률을 지속적으로 통과시킴으로써 누구보다도 열심히 국제적 사기조직의 발흥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 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모아서 정리한 것으로 법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하다. 이 책은 각급 법원과 검찰청, 경찰서에서 재판업무나 수사업무를 담당하면서 밤낮없이 야근과 주말근무를 반복하고 있는 분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를 알리기 위해서 쓰여진 것일뿐, 구체적 사건에서의 판단이나 결정을 한 이들을 비판할 의도로 쓰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의 내용 중 오류가 있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는 온전히 필자의 책임이다. 다만, 실제 사건의 복잡한 쟁점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사건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하거나 해설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실제 사건에서의 쟁점에 대한 논의나 진행 경과와는 다소 다른 인상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양해해주기를 부탁드린다.
저자 씀
A
조직적 사기범죄의 창궐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어딘가에 있는 불의는 모든 곳에서 정의에 대한 위협이 된다(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사회 한 구석을 잠식하고 있던 불의를 억제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불의가 빠른 속도로 차올라 모든 곳에서 정의를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오랫동안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불의에게 제대로 된 계기가 주어졌을 때 순식간에 정의를 몰아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은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곳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조직적 사기범죄는 어딘가에 있는 불의라기보다는 모든 곳에 있는 불의가 되어 버렸고, 당연히 모든 곳에 있어야 할 정의는 어느새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조직적 사기범죄가 역병처럼 창궐하면서 국민들의 삶의 기초를 파괴하고 사회 시스템에 큰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사기피해자들이 과거 전란이 일어났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다.
사기범죄조직들의 촉수는 바로 우리 옆에까지 뻗어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받게 되는 사기범죄조직의 문자메시지나 눈에 띄게 늘어나는 주변의 사기피해자들의 사례가 그들의 촉수가 바로 우리 옆에 와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지금까지 운 좋게 사기피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잠깐 방심하는 순간 사기범죄조직의 빨대가 자신의 목덜미에 꽂힐 수 있고, 그 이후의 인생은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되어버렸다. 만약 사기범죄조직의 촉수가 접근해왔을 때 단 한번이라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운을 시험하려 했다가는 아주 높은 확률로 목에 사기범죄조직의 빨대가 꼽힌 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편, 상당수의 사기피해자가 조직적 사기범죄로 인한 피해로 고통받는 바로 그 반대편에서, 사기범죄조직은 넘쳐나는 범죄수익으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조직적 사기범죄는 가장 촉망받는 비즈니스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고, 그동안 온갖 종류의 사기범죄 기법을 발전시켜 오던 사기범죄조직은 이제 조직적 사기범죄의 플랫폼을 갖춘 국제적 범죄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처럼 한 구석에 숨어 있던 사기범죄 조직들이 이제 대담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모든 곳에 촉수를 뻗어 본격적으로 정의를 위협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사기범죄조직이 지배하는 ‘사기공화국’이나 ‘사기범죄의 천국’으로 불리게 된 최초의 국가라고 평가한다거나, 사기범죄조직들이 모든 사람들의 목덜미에 빨대를 꽂았거나 또는 꽂으려 경쟁하고 있는 ‘빨대사회’라고 부르더라도, 이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기범죄 발생건수는 최근 20여 년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15년에 이미 절도범죄의 발생건수를 추월하였고, 2018년에는 교통사고 관련 범죄의 발생건수를 추월하여 이제 전체 형사사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중 중고거래 사기나 보이스피싱 사기와 같은 비대면 방식에 의한 사기범행이 가장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재산범죄의 대부분을 절도나 대면 사기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온라인이나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사기사건이 재산범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상전벽해와 같은 수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물론 세상의 변화와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전통적인 형태의 절도나 사기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이제는 재산범죄 중 범죄의 실행이 용이한 절도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라든지, 피의자와 피해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성립할 수 있는 사기범죄의 경우 대체로 피의자를 특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범행대상의 물색과 기망행위의 상당 부분을 진행할 수 있게 되어 굳이 대면으로 사기범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전세계의 사기범들에게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 비견될 정도로 무한한 범행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추가 대출을 위하여 대출금 일부 상환이 필요하다며 송금을 요구하는 보이스피싱이나 고수익이 예상되는 주식종목을 찍어준다고 유혹하는 주식리딩방 사기, 암호화폐투자 사기, FX마진거래 사기, 보험사기, 로맨스스캠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적 사기범죄와 불법 스포츠 토토나 온라인 카지노 등 요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범죄는 대부분 온라인에서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상황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미국의 사기범죄조직이 유령회사를 설립한 후 구직자를 속여 업무용 계좌를 개설하도록 하고 이를 범죄자금 세탁에 활용한다거나, 동유럽의 사기범죄조직이 온라인 쇼핑몰의 특별 할인행사를 가장하여 피싱 웹사이트(phishing website) 접속을 유도해 개인정보를 탈취한다거나, 아시아의 사기범죄조직이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해킹한 후 구매자에게 접근하여 결제 시스템 오류 등을 구실로 자금이체를 유도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기범들이 트위터를 통하여 일론 머스크를 사칭하면서 “정해진 시간 내에 이벤트에 참여해 최소 0.1개부터 최대 20개의 비트코인을 보내주면 이후 2배를 돌려주겠다”라며 비트코인 송금을 유도하는 등 과거에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사기범죄가 날이 멀다 하고 등장하고 있다. 가히 전세계적으로 온라인을 이용한 조직적 사기범죄가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1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조직적 사기범죄가 창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기범죄를 통하여 막대한 범죄수익을 남길 수 있는 사회적, 기술적 여건이 마련되었고, 마침 사기범죄조직들이 진화를 거듭한 끝에 이와 같은 상황을 십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범죄조직들은 인터넷 불법 도박사이트나 피싱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인적 조직과 물적 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발달한 텔레그램과 같은 메신저 앱을 이용하여 비대면 방식의 피해자 물색방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수사기관의 추적이 곤란한 암호화폐를 이용하여 범죄수익을 안전하게 확보해왔다. 이처럼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사기범죄조직들은 사기범행을 저지르고도 수사기관의 수사나 법원의 재판을 받지 않는 방법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다가, 드디어 수사와 형사처벌의 위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범행구조와 방법을 전부 깨우치게 된 것이다. 진화를 마친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이 유사한 사기범행을 경쟁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결과, 전 세계의 수많은 피해자가 사기범죄조직의 범죄로 인하여 입게 된 재산상 피해의 규모와 범위가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한편,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피해자만을 물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사기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실행행위의 일부를 분담할 단순 가담자 또한 계속하여 모집하고 있다. 사기범죄조직은 자신들의 조직적 범행에 단순 가담자를 관여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대신하여 수사와 처벌을 받도록 하는 묘수를 개발해냈기 때문이다. 사기범죄조직은 완전범죄를 위하여 가장법인의 설립과 계좌개설, 휴대전화 개통, 편취금 수금, 범죄수익 세탁 등의 여러 실행행위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한데, 범죄조직의 전체적인 구조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범죄행위의 일부를 실행하고, 이후 수사기관의 수사가 시작되면 수괴들을 대신하여 처벌받게 될 단순 가담자들을 긴요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피해자뿐만 아니라 실행행위의 일부를 분담할 인력이 끊임없이 조달되어야 하고,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이 성장할수록 범죄피해를 당한 피해자뿐만 아니라 수괴를 대신하여 처벌을 받는 단순 가담자 또한 끝도 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국의 수사기관과 법원에서는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사기범행에 단순가담하였다가 피의자로 구속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사람들과 고소장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피해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혹시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인터넷에서 눈길을 끄는 고수익 알바 광고를 찾아 그 업체에 전화하거나 문자메시지의 링크를 한번 클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늘 벼룩시장이나 알바몬 등에 구인광고를 내고 꾸준히 현금전달책이나 휴대전화 및 통장 명의대여자들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연락처를 남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이나 캄보디아에 있는 국제적 사기조직의 하부조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사실 그들은 당신의 바로 뒤에서 빨대를 들고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들의 꾀임에 넘어가 신분증과 이력서를 카카오톡으로 보내준 후 실제로 면접을 본 적도 없음에도 꽤 좋은 조건으로 취업에 성공하여 문서나 현금 등의 전달업무를 담당하기로 하였다면, 결국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건넨 현금을 수금하여 대포통장에 입금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봐도 좋다. 그리고 당신이 텔레그램으로 전달된 업무지시를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오래지 않아 국제적 범죄조직의 사기범행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에 체포될 것이고, 결국 피해자들과 단순가담자들이 넘쳐나는 바로 그 수사기관과 법원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들이 당신을 유혹했던 동기, 즉 주식 리딩방이나 FX마진거래에 투자하여 수익을 내고 싶었다든지, 아니면 고수익 알바를 통하여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하였는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떠한 연유로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에 연락을 하였는지 아니면 그들로부터 어떻게 연락을 받게 되었는지는 당신이 어떤 피해를 입게 될 것인지와 관련하여 사소한 차이만을 가져올 뿐이다. 단순 투자사기 또는 차용금사기의 피해를 당했는지, 아니면 단순 가담자로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피해를 당하는지의 차이는 사실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당신이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김미영 팀장’으로부터 언제든지 연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고, 잠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디론가 목돈을 입금시키고 있는 자신을 또는 누구로부터 목돈을 전달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눈을 들어 뒤를 돌아보면, 그전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의 빨대가 당신의 목덜미에 깊게 꽂혀 있는 것을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다.
1 매일경제, “[곽대경 기고] 국제공조로 보이스피싱 발본색원을”, 2021. 6. 3.자 기사
이제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이 유례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면에 보이스피싱이나 암호화폐 투자사기 등의 범죄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평생 동안 수십 번의 작은 사기피해의 순간과 여러 번의 큰 사기피해의 고비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고,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사기범죄조직의 빨대에 꽂히지 않도록 조심하겠노라며 스스로에게 매일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휴대폰이 고장났다며 수리비용을 송금해달라는 가족 사칭 문자메시지에 응답하지 않는다거나, 사기꾼이 제안하는 일확천금의 투자기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으로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빨대를 온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각종 사기범죄조직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거래나 생활 관계에서 피해자를 물색하면서 누군가의 목덜미에 빨대를 꽂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안전한 거래나 생활 관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결혼을 앞둔 서른 살의 김호구 씨라는 대한민국 청년이 있다. 최근 중고차를 구매하기로 결심한 그는 중고차를 살 때에도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뉴스를 보고 자신은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고차 사기범죄단이 팀장, 텔레마케터, 출동조, 허위딜러 등으로 역할을 분담한 다음, 인터넷 중고차 사이트에 소비자를 낚아 바가지를 씌우는 목적의 ‘미끼매물’이나 실제로 있지도 않은 ‘허위매물’에 대한 게시글을 올리고, 싼값에 나온 허위매물을 보고 연락해 온 사람을 중고차 매매상사로 유인한 다음 허위매물과는 다른 중고차를 강매한다는 점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만약 김호구 씨가 중고차 판매 사기조직이 시세보다 싸게 올려 둔 미끼매물에 속아서 그들의 사무실에 찾아가서 매물을 확인한다면, 곧 ‘일방적인 계약 파기 시 계약금 환불 불가’라는 특약조항이 기재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계약금을 건네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다른 공범이 미끼매물 차량의 연료분사 노즐과 퓨즈를 빼내는 일명 ‘덜덜이 작업’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그가 차량에 대한 계약을 마친 이후 해당 차량에 탑승했을 때 다시 시동을 걸 수 없게 된다. 그가 결국 해당 차량을 매수하는 것을 포기하면, 중고차 딜러는 지금까지의 친절한 표정을 거두어들이고 현란한 문신을 보여주면서 김호구 씨에게 계약금을 포기하고 높은 위약금까지 물어야 한다고 겁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이에 김호구 씨는 중고차 딜러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매물들을 살펴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대출 관련 서류에 서명하게 될 것이고, 시세 1,500만 원에 불과한 차량을 2,800만 원에 매수하여 이를 운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
설령 김호구 씨가 운 좋게 정직한 딜러로부터 제 값에 중고차를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중고차매매상사 주차장에서 새로 산 차량을 운전해서 나올 때 보험사기조직의 차량이 운전이 서투른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김호구 씨가 신호를 위반하거나 실선이나 점선 직진 구간에서 진로를 변경할 때 접근하여 측면을 스치듯 경미한 접촉사고를 발생시킨 다음, 과도하게 병원 치료를 받는 수법으로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이나 합의금을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만약 피해 차량이 흔히 보기 힘든 오래된 외제차량이라면, 수리 기간이 길고 부품을 구하기가 어렵기에 보험사에서 차량을 수리하는 대신 현금으로 ‘미수선 수리비’를 지급한다는 점을 노린 보험사기가 아닌지 의심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교통사고 직후 문신을 한 건장한 남자 5명이 뒷목을 잡고 ‘피해’차량에서 내리는 것과 같이 다소 의심할 만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김호구 씨의 의심을 토대로 보험사기의 단서를 확보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공범들 사이의 불화와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보험사기단은 어느 한방병원에서 2주간 숙식을 해결하고 같은 기간 동안의 휴업수당에 해당되는 보험금을 챙긴 다음에 다시 중고차판매점 앞 사거리로 나가 또다른 피해자의 신호위반을 기다릴 것이다.3
여기서 김호구 씨가 신호를 위반하거나 진로를 변경할 때 접근하는 보험사기조직의 차량을 운 좋게 피했다고 하더라도, 결혼을 약속한 예비신부와 함께 신혼집으로 꾸릴 전세매물을 보러 다닐 때에는 전세사기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공인중개사로부터 빌라 건물의 매매가가 상당히 높고 집주인이 빌라 수백 채를 갖고 있어 안전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면, 신축 빌라의 시세를 제대로 모르는 세입자들을 상대로 하는 전세 사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호구 씨가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함께 한 말에 속아 서둘러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되었다면, 그 이후에 전세보증금을 받은 집주인은 한통속인 공인중개사에게 전세보증금의 10%를 수수료로 주고 자신은 나머지를 챙겨서 잠적할 것이다. 물론 집주인은 향후 전세금을 돌려줄 능력이 전혀 없는 ‘바지’에게 빌라의 명의를 넘길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김호구 씨가 계약 당시 만났던 집주인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고, 전세금으로 건넨 돈 또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4 ‘바지’가 납부하지 못한 종합부동산세 등 당해세보다 후순위의 전세보증금 채권자에 불과한 그는 이후 경매절차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전세보증금을 한푼도 돌려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전세계약을 체결한 주택이 경매에 부쳐짐에 따라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새로운 거처를 위한 임대보증금을 마련하려고 금융기관에 대출을 신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하게 되었다면, 김호구씨는 누군가로부터 다른 금융기관의 대출을 일부 변제하여 신용을 회복하면 다른 대출을 알선해준다는 예기치 않은 전화를 받게 될 것이다. 특히 김호구 씨가 앞서의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 절박하게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일수록, 신속히 추가 대출을 받으려면 기존 대출을 반드시 ‘현금’으로 변제하여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난 후, 금융감독원의 ‘김미영 팀장’이 안내한 절차에 따라 현금전달책에게 현금을 건네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곳에서 김호구를 노리고 있던 사기범죄조직들은 이제 당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당신의 뒷목에 빨대를 꽂을 준비를 하면서 모든 곳에 덫을 놓고 당신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하나님이라도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창조한 것이다(God could not be everywhere,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하나님이라도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지만, 사기범죄조직은 확실히 그러하다(In South Korea, God could not be everywhere, but the fraud syndicates certainly are)”라는 표현이 현실에 더 잘 들어맞는다.
당신이 아무리 사기범죄조직의 빨대를 조심하겠다고 다짐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인으로 돌아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혼자 살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의지나 운만으로 모든 곳에 있는 그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기범죄조직이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하고 있고, 때때로 선뜻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감하게 사기범행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기범죄조직의 조직원이 한 솔깃한 제안이 미끼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배고픈 물고기가 눈 앞에 떠다니는 지렁이를 물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낚시바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박한 피해자들은 사기범죄조직의 낚시바늘에 걸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사기범죄조직에 낚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중하지 못해서 미끼를 물게 된 것을 후회하는 바로 그 순간이 되면,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낚시바늘이 주위에 무수히 많이 떠다니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조선일보, “‘문신한 그들…난 죽음을 당합니다’ 중고차사기 당한 60대의 유서”, 2021. 5. 11.자 기사. 한편, 중고차 딜러들이 허위매물을 올리는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고객들을 유인하는 방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었지만, 중고차 딜러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고 허위매물을 통한 고객 유인이 효과가 좋다는 점이 널리 알려진 이후에는 허위매물로 유인한 후 중고차를 강매하는 방법이 유행처럼 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직한 딜러들조차 어느 정도 저렴한 허위매물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오래지 않아 이와 같은 현상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2010년 이후 경찰청은 주기적으로 중고차사기 관련 범죄조직 구성원들을 집중적으로 검거하고 있고, 검찰청 또한 이러한 형태의 조직적 사기를 형법상 범죄단체가입 또는 활동죄로도 의율하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중고차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 여전히 속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사기관의 검거속도나 처벌의 강도가 아직 중고차 관련 사기범죄조직의 확산을 막기에 부족하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3 매일경제, “목 삐끗에 150회 통원, 치료비 1천만 원…해도 너무한 한방병원”, 2022. 10. 20.자 기사
4 2022. 8. 현재 국토부가 실제 부동산 거래를 분석해 전세 사기로 의심된다며 경찰에 제공한 정보(경찰이 단속․수사 중인 사건과 관련해 제공한 정보 포함)는 1만 건이 넘는다. 이에 해당하는 임대인은 총 825명으로 이들이 돌려주지 않은 보증금만 1조 581억 원에 달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 “깡통 전세 500채 팔고 튀었다, 보증금 1,000억 떼먹은 사기수법”, 2022. 8. 24.자 기사
전통적인 차용금사기나 다단계 투자사기는 대면으로 진행되기에 사기범과 피해자의 인간적인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게 된다. 그 때문에 피해자는 범죄피해 발생 후 바로 피의자를 특정할 수 있어 이후 사기범이 사기죄로 처벌을 받게 될 위험이 크다. 반면, 일단 신뢰관계가 형성된 피해자에 대해서만 사기범행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사기범의 입장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범죄수익을 거두기 위해서는 또 다른 피해자를 물색하여 새롭게 신뢰관계를 쌓아야 하고 그 과정에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므로, 사기범의 입장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범죄수익을 계속하여 증가시키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 않다(높은 위험, 낮은 수익).
반면, 중고거래 사기와 같은 비대면 사기범행은 각종 메신저 앱을 이용하여 피해자와의 대면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사기범의 인적사항이나 연락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이에 사기범의 입장에서는 피해자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큰 노력과 수고 없이도 다수의 피해자를 상대로 동일한 형태의 사기범행을 반복함으로써 단기간에 상당한 규모의 범죄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낮은 위험, 높은 수익).
그런데 오늘날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비대면 사기범행의 실행행위의 전 과정을 세분화한 다음, 이를 국제적 점조직의 형태로 철저하게 분담함으로써 처벌위험은 더 낮춤과 동시에 이론적으로는 무제한의 범죄수익을 꾀하고 있다(매우 낮은 위험, 매우 높은 수익).
사기범죄조직들은 상당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국제화, 온라인화 및 점조직화라는 성공의 요소들을 모두 찾아내어 범죄수익을 극대화하고, 이와 같이 확보한 범죄수익을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은닉하고 있다. 이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컨베이어 벨트 조립 라인을 활용한 양산체제를 고안해낸 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 범죄조직의 조직체계와 운영원리, 그들이 저지르는 각종 범죄의 형태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수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주로 중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서 온라인 메신저로 연락을 취하면서 철저히 분업화된 점조직으로 하여금 피해자 물색, 신뢰관계 형성, 기망행위, 범죄수익확보 및 자금세탁의 각 단계를 전담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경우 피해자 물색과 기망행위, 범죄수익확보의 과정을 나누어 국내에는 대포통장 및 대포폰 모집팀, 대면편취 및 송금팀, ATM 현금인출팀 등을 두고, 해외에는 전화사기 콜센터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에 있는 점조직들은 예금통장 및 휴대전화 확보, 피해자에 대한 기망, 현금수송 등의 업무를 나누어 맡고, 별도의 인력알선 조직과 연계하여 해외의 콜센터에서 근무할 한국인 상담원이나 한국에서 활동할 현금수거책 등을 모집하기도 한다. 그중 현금수거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될 것이기 때문에 인력알선 조직들은 끊임없이 구인공고를 내서 잠재적 현금수거책들을 유인한다. 해외에 거점을 두고 있는 보이스피싱 콜센터는 인터넷 전화로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은행, 정부기관, 지인 등을 사칭하며 각종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기망행위를 담당하게 된다. 이때 해외에 있는 콜센터에서 국내로 통화시도를 할 때 인터넷 전화번호 또는 국제전화번호가 발신번호로 표시되어 피해자들이 의심을 품게 되면 사기범행의 성공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이들은 콜센터의 발신번호를 국내의 휴대전화번호로 변경해주는 발신번호 변작기를 갖춘 별도의 사무실인 변작소까지도 운영하고 있다. 주로 국내의 주택가에 설치되는 발신번호 변작소에서는 유심을 꽂아 둔 수 백대의 휴대전화를 이용하여 해외의 콜센터에서 걸려온 전화의 발신번호를 국내의 휴대전화번호 등으로 변경해주는데, 이때 무인으로 운영되는 변작소 내부에 웹캠을 설치한 후 수사기관의 단속이 있었는지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별도의 전담 조직원을 두기까지 한다.
아울러 이들 조직은 온라인으로 조직 내 구성원 간의 대면 접촉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국제적으로 업무를 분배하고 공범들 사이의 정보공유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공범들이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괴나 핵심 구성원의 인적사항이나 전체 사기범죄의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혹시 점조직 중 일부가 수사기관에 의하여 체포되거나 발신번호 변작소가 단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동일한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다른 점조직에서 일을 배운 빠릿빠릿한 하부조직원으로 하여금 단속된 점조직의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점조직의 팀장을 맡도록 하는 비상계획(contingency plan)까지도 갖추고 있으므로, 각각의 점조직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범죄조직의 전체적인 범죄실행에는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는다.
한편, 보이스피싱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국내외 사무실과 발신번호 변작기 등의 설비, 다양한 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콜센터 상담원, 대포통장 및 대포폰 수거책, 현금운반책, 전산인력 등), 그리고 계속적으로 공급되는 대포통장과 대포폰이 반드시 필요하다. 발신번호 변작소에서 사용되는 유심칩은 대부분 노숙자나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대포 법인을 설립하여 법인 명의의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방법으로 마련된 것으로 사기범죄조직은 이를 발신번호 변작기에 꽂아 국내 번호로 변환하고 있는데, 해당 유심이 적발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쓸 수 있으므로 유심칩 또한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한다. 이때 적지 않은 수의 유심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서 보이스피싱 조직이 직접 유심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믿을 수 있는 공급조직에게 아웃소싱을 주는 것이 원활한 업무진행에 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이 갖추고 있는 조직은 이미 온전한 의미의 중견기업의 조직과 별반 차이가 없고,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치밀하고도 꼼꼼한 일처리 방식 또한 정상적인 기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국제화와 온라인화를 통해서 이미 진화된 형태의 국제적 범죄기업(criminal enterprise)으로 변모한 것이다. 지금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일회적 범죄수익만을 노리고 한탕에 성공하면 서둘러 범죄수익이 든 돈 가방을 챙겨 들고 도주하던 과거의 사기도박단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한탕주의 목표가 아닌 범죄수익의 극대화라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비즈니스 목표를 갖고 있으며, 일반 기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적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효율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 비록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이 불법적인 사업을 영위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스타트업 업계의 애자일 방법론(agile methodology)과 린 스타트업 프로세스(lean startup process)를 체계적으로 내재화하고 있고,5 점조직에 속한 공범들에게 각자의 성과에 따라 차등화된 보수를 지급하고 공범 개인에게도 스스로의 전문성을 극대화하도록 유도하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 일반 회사와 별 차이 없는 성과보상 시스템 또한 도입해두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다양한 범죄환경에서 검증이 끝난 효과적인 방법론과 프로세스로 무장하고 유니콘 사기범죄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물론 초대형 사기범죄조직들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을 하거나 공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수사관들이 이들 조직에 잠입해서 실상을 파헤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기범죄조직 중 유니콘으로 불리는 조직들의 정확한 규모나 실상을 어디까지나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성공적인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더 이상 고정된 형태의 사기범죄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사기범죄 포트폴리오를 갖춘 조직적 사기범죄의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들은 대면으로 진행되는 고전적인 형태의 일회적이고 단발적인 사기범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들이 주력으로 삼고 있는 특정 형태의 사기범죄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점을 활용하여 범죄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기범죄라면 어떠한 방법이든 즉시 이를 받아들일 의사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피해자의 자녀를 사칭하여 휴대전화가 고장났다며 문화상품권을 구매하여 PIN 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방식의 가족사칭 사기이든, 미국의 파워볼 복권을 대행하여 구입하여 준다며 복권구입비용과 수수료 명목으로 금원을 편취하는 형태의 복권구매대행 사기든 가리지 않는다. 만약 새로운 형태의 사기범행이 그리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유의미한 범죄수익을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다른 사기범죄조직들이 그 사기범행을 따라하기 전(또는 잠재적인 피해자들이 그 사기범행방식에 경계심을 갖기 전)에 최대한 많은 피해자로부터 범죄수익을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자원을 집중하여 해당 범행을 다양한 형태로 시도해 볼 것이다. 만약 발신번호 변작기라는 새로운 문물이 보이스피싱 사기에서의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그들로서는 일단 발신번호 변작기를 구입하여 빨리 활용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그동안 보이스피싱뿐만 아니라, 주식리딩방사기, 암호화폐투자, 파워볼구매대행 등 다양한 사기범죄 포트폴리오를 바탕으로 오랜 실험을 거듭하여 왔다. 그 결과 그들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여러 범죄수법을 시도하다가 범죄수익을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안정적인 범죄수익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다. 또한 이들은 편취액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면서도 수사기관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사기범죄 포트폴리오를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기범행의 기회들을 발견하고 가장 최적화된 사기범죄조직의 조직형태에 대한 해답을 찾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스스로 고도화 및 체계화를 이루어가다가, 불현듯 모든 형태의 사기범행을 마음껏 실행할 수 있는 ‘조직적 사기범죄의 플랫폼’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국제적인 사기범죄조직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경영능력과 감각을 갖춘 수괴라면 동종 업계에서 가장 성공률이 높은 사기범죄 아이템을 재빠르게 도입하여 1년에 수천억 규모의 범죄수익을 실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 사기범죄조직의 하부 조직에 속한 단순 가담자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중간 관리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있음을 보인다면 머지않아 사기범죄조직의 수괴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기범죄 플랫폼으로 진화된 사기범죄조직은 피해자의 착오를 이용해서 위법한 범죄수익을 챙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 차용금 사기범행을 저지르던 사기꾼들과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복날을 맞이하여 자신이 애지중지 키우던 닭 한 마리를 잡기로 결심한 농부와 하루에 30만 마리를 처리할 수 있는 도계공장 사이에서 살아 있는 닭을 잡아서 생닭이라는 결과물을 내어 놓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작 유사한 점을 찾기 어렵듯이, 작금의 사기범죄조직은 전통적인 사기꾼과는 객관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사기피해로 전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추가 대출을 미끼로 또다시 사기범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 사기범죄조직은 손톱만큼도 미안한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알에서 태어난 병아리 시절부터 키우던 닭을 잡게 된 농부의 경우 닭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자동화된 도계공장의 설비가 하루에 처리하는 30만 마리의 닭과 오리에 대해서 전혀 미안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경쟁 범죄조직이 피해자의 돈을 편취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그 돈을 챙긴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자기정당화를 할 필요조차 없는 범죄기계로 이미 진화를 마쳤기 때문이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이제 일반 기업과 마찬가지로 범죄수익의 규모와 증가 추이, 사기범죄 아이템별 범죄수익과 운영비용, 조직원 1인당 편취액과 같은 숫자나 그래프 등 경영지표에 주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서 무전취식을 하던 사기꾼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범죄기계로 진화한 사기범죄조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임하지 않는 곳에서도 무심히 손에 빨대를 들고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5 애자일 방법론(agile methodology)이란 뚜렷한 목표와 체계적인 계획 및 일정을 기반으로 하여 순차적으로 개발을 진행하는 폭포수 모델과 달리, 일정한 주기로 계속하여 프로토 타입을 만들고, 그때 그때 필요한 요청사항을 반영하여 끊임없이 프로토 타입을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최종적인 단계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한편, 린 스타트업 프로세스(lean startup process)란 아이디어를 최대한 빨리 제품으로 구현한 후, 고객이 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고 이를 데이터로 축적하면서 다시 개선된 제품을 출시하는 일련의 흐름을 아주 빠른 속도로 반복하는 경영방식을 말한다.
B
조직적 사기범죄로 인한 피해
우리나라에서 전체 사기범죄는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7년 23만 1,489건이던 사기범죄 건수는 2018년 27만 29건, 2019년 30만 4,472건, 2020년 34만 7,675건으로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범죄에서 사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13.9%에서 2020년 21.9%로 수직 상승하였다. 사기범죄로 인한 재산피해 또한 급격히 늘어나 2018년 32조 9,600억 원에서 2020년 40조 3,139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최근 3년간 100만 건 정도의 사기범죄가 발생하고, 그로 인한 범죄 피해액 또한 100조 원을 훌쩍 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회수금액은 3조 9,192억 원에서 1조 949억 원으로 급감하여 회수율은 2018년 11.89%에서 2020년 2.71%로 9.18%p 감소하였다.
전체 사기범죄 중 조직적 사기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또는 사기범죄조직의 총 이득)는 이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비록 사기범죄조직의 사기범행으로 인한 모든 피해에 대한 통계가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찰청이 불특정 다수를 노린 다중사기로 꼽은 세 가지 유형의 사기, 즉 전기통신금융사기(보이스피싱), 사이버사기와 다단계사기만 보더라도 그 피해규모는 최소 4조 원 대로 추산된다.6 대표적인 다중피해범죄인 △보이스피싱으로 인한 피해액은 2016년 1,924억 원에서 2021년 7,744억 원으로, △사이버사기는 2016년 839억 원에서 2020년 3,326억 원으로 급증하였다. △다단계사기로 인한 피해액은 2020년 2,136억 원에 불과하였다가 이후 암호화폐 사기와 결합하여 급격하게 증가하여 2021년 3조 1,282억 원(‘에어비트’ 및 ‘브이글로벌’ 포함)에 이르게 되었다.7 그중 다단계사기는 금융당국의 인허가를 받지 않고 투자금을 유치하는 수신행위로서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이 금지하는 유사수신 형태의 사기범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8 특히 2021년 피해액에는 최대 암호화폐 사기범죄로 꼽히는 브이글로벌 사건으로 인한 2조 2,000억 원의 피해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라임 자산운용 사건으로 인한 피해 1조 6,000억 원,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으로 인한 피해 5,000억 원을 크게 웃도는 피해액이다. 유사수신행위는 상당히 전통적인 형태의 조직적 사기범행의 한 형태로 현재 전국에 1천여 곳이 넘는 다단계 조직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9 한편, 환매중단금액만 1조 4,118억 원에 이르렀던 라임자산운용 사건(2019)의 경우 비록 금융당국의 허가를 받은 금융기관을 통하여 수신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범들이 유사수신행위가 아닌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처벌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과거의 유사수신행위가 진화하여 제도권 내에서 투자금을 유치하는 형태로 변모한 것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6 중앙일보, “경찰, 다중피해 사기범죄와의 전쟁…지난해 최소 4조 원대 피해”, 2022. 3. 29.자 기사
7 2020년대 초반 ‘코인 광풍’ 이후 다단계업체의 사기 수단으로 암호화폐가 활용되고 있다. 암호화폐 사기는 신규 투자자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떼어주는 ‘폰지 사기(Ponzi Scheme)’, 시세 조종으로 차익을 얻는 ‘펌프 앤드 덤프(Pump and Dump)’ 등 기존 금융시장의 사기 수법이 그대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중 ‘펌프 앤드 덤프’ 방식의 사기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고, 수사도 쉽지 않아 범죄통계에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한편, 암호화폐 사기 등을 방지한다며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지만,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규제와 감독만 강화됐을 뿐 실제 사기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도입하지 아니한 탓에 암호화폐를 이용한 사기 범죄는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경제, “5년간 5조 피해…암호화폐 사기, 보이스피싱 뛰어넘었다”, 2021. 1. 16.자 기사 참조.
8 유사수신행위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7만여 명의 피해자에게 5조 원 이상의 막대한 사기피해를 야기한 것으로 추산되는 ‘조희팔 사건(2008)’, 어미 돼지 1마리당 500만 원을 투자하면 새끼 돼지를 20마리 낳게 하여 다달이 일정한 수익금을 준다며 투자자 1만여 명으로부터 2,400억여 원을 가로챈 ‘도나도나 사건(2009)’, 원리금 보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제회 투자수익 등을 허위로 홍보하여 예금 명목으로 2,829억 원을 받아 챙기고, 500억 원을 횡령한 ‘교수공제회 사건(2012)’ 등을 꼽을 수 있다.
9 한국경제, “5년간 5조 피해…암호화폐 사기, 보이스피싱 뛰어넘었다”, 2022. 1. 16.자 기사
특히, 유사수신행위 중에서 암호화폐를 매개로 한 투자사기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암호화폐를 매개로 한 투자사기 피해액은 4조 7,000억 원에 달했는데(앞서 본 브이글로벌 사건 등 포함), 암호화폐 사기 피해액은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 피해액(2조 7,079억 원)보다도 73.5% 많은 규모이다. 최근에는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로 암호화폐를 매개로 장래에 출자금의 전액 또는 이를 초과하는 금액을 지급할 것을 약정하고 출자금을 모집하는 행위가 성행하고 있지만, 그동안 암호화폐에 관하여 금융자산이 아니라는 일관된 입장을 밝혀온 정부가 이제 와서 암호화폐를 금전과 동일한 것이고 암호화폐에 대한 출자금 모집행위 자체를 유사수신행위라고 보아 수사나 기소를 진행하기에는 너무나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암호화폐가 범죄조직의 범죄수익 은닉수단이라면서 암호화폐의 제도권 편입을 결단코 반대하였는데, 정작 사기피해자를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기 때문이다.10 이에 전통적인 형태의 유사수신행위에 대해서는 조사할 권한을 갖고 있는 금융감독원이 암호화폐를 매개로 한 유사수신을 조사할 권한이 있는지부터 분명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암호화폐 루나(LUNA) 및 테라(UST) 사태와 같이 유사수신 혐의 적용이 문제가 되는 적지 않은 수의 사건에서 적용법조부터 고민하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이들에 대한 범죄피해가 통계에 제대로 반영되기도 어렵다.11
다만, 다단계 형태로 다른 투자자를 데려오면 투자금의 20%를 떼어준다고 피해자들을 현혹하는 폰지 사기 형태를 띠고 있는 암호화폐 관련 투자금 모집에 대해서는 일반 사기의 요건을 충족한 경우 사기죄로 수사와 처벌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폰지 사기의 경우에는 운영자들이 도주하여 투자금 반환이 중단되었음이 명백한 경우라야 비로소 피해자들이 운영자들을 고소하여 사기혐의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실제 주범들의 신병을 확보하여 수사가 진행되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사기범죄조직들은 피해자들로 하여금 가해자의 지위를 겸하게 하는 피라미드 사기를 암호화폐 사기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투자사기 범행의 구조를 설계하여 두고 있는데, 이로써 피해자들이 피해를 인식하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공범의 범위를 최대한 확대해둠으로써 주범들이 수사나 형사재판을 받게 될 위험을 최소화하고 있다. 이는 사기범죄의 피해자 겸 단순가담자가 신고를 미루거나 피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신고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실제 피해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 해당 유형의 범죄에 대한 통계에 잡힌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보험사를 상대로 한 보험사기 적발금액은 2021년 9,434억 원, 적발인원은 9만 7,629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 보통 가짜 환자로 위장하여 보험금을 편취하는 보험사기는 자동차보험, 실손의료보험 등 손해보험에 대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최근 코로나19 대유행 및 경기침체로 허위입원은 감소하였으나 허위장애 등 단발성 보험사기와 생계형 보험사기가 증가하고 있다. 최근 5년간 보험사기 추이를 보더라도 2017년 7,302억 원에서 2018년 7,982억 원, 2019년 8,809억 원, 2020년 8,986억 원, 2021년 9,434억 원으로 기록적인 증가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12 한편, 보험연구원과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보험사나 수사기관에 적발되지 않은 전체 민영보험의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 규모가 연간 5조 8,000억 원에 달할 뿐만 아니라, 민영보험 보험사기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누수 규모 또한 1조 원 내외로 추정된다고 한다.13
여기에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 또한 서민들과 사회초년생들을 상대로 하여 상당한 규모로 증가하고 있다. 깡통전세, 무자본 갭투자, 부동산 권리관계 허위고지, 세금체납 등으로 서민과 20대와 30대 청년층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 전세사기는 여전히 진행중이어서 정확한 피해액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사고금액은 2017년 74억 원, 2018년 792억 원, 2019년 3,442억 원, 2020년 4,682억 원, 2021년 5,790억 원, 2022년 1조 1,726억 원으로 폭증하였고, 2023년에는 4조 8,808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4 실제 모든 전세계약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아니고, 전세사기로 의심해볼 수 있는 사례 중 일부만 형사적으로 입건되는 점을 감안하면, 전세사기로 인한 피해 또한 수조 원 대로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한겨레, “박상기 법무 ‘가상화폐는 도박…거래소 폐쇄 목표’”, 2018. 1. 11.자 기사
11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수단은 2023. 4. 25. 신현성 전 차이코퍼레이션 대표 등이 ‘테라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추진되는 것처럼 허위홍보 · 거래조작하는 등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테라 · 루나’ 코인이 판매 · 거래되도록 했다고 보아 테라폼랩스 창업자 신 전 대표 등 8명을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거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들이 당초 ‘테라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법적으로도 허용될 수 없고, 실현 불가능했던 것을 알면서도 사업을 추진해 투자자들에게 천문학적인 규모의 피해를 발생시킴과 동시에 해당 사업으로 모두 4,629억 원의 부당이득을 얻고, 3,769억 원을 상습적으로 빼돌린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기소에 앞서 암호화폐를 주식과 같은 ‘증권’으로 보고 자본시장법을 적용해 신 전 대표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증권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두 차례 영장을 기각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검찰, ‘테라 · 루나’ 공동창립자 신현성 등 10명 불구속 기소”, 2023. 4. 25.자 기사 참조.
12 한국경제, “보험료 오른 이유 있었네…보험사기 5년간 4조 원 빠져나갔다”, 2022. 6. 2.자 기사
13 의학신문, “민영보험발 보험사기에 건보 누수 1조 원 규모”, 2020. 5. 4.자 기사
14 서울경제, “지난해 전세금 보증사고 5,443건…1년 새 2배 급증”, 2023. 1. 17.자 기사; 동아일보, “[단독]‘전세사기 타격’ HUG 손실 4.9조 전망…내년 보증 중단될 위기”, 2023. 11. 8.자 기사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최근 대규모 전세 사기 사건의 주범은 모두 정부의 임대사업자 우대정책에 편승한 임대사업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임대사업자 7명이 보유한 주택에서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려 3천여 명에 이르는 등 임대주택 수백 채부터 수천 채를 한데 묶어서 관리할 수 있게 한 임대사업자 제도가 주거안정이라는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전세사기범들의 대규모 사기범행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도구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임대사업자 제도에 더하여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그리고 공인중개사의 적극적인 사기범행 가담의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대규모 전세사기가 가능케 되었다. 정부가 도입한 임대사업자 제도와 관대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제도에 더하여 심화된 경쟁으로 전문가 윤리를 내팽개친 일부 공인중개사의 범행 가담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전세사기범들은 자신들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하여 사기범행으로 인한 수익을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임대사업자에 대하여 납부를 유예 또는 면제해 준 각종 세금이 주택경매 시 전세보증금보다 우선하도록 하는 국세기본법에 따라, 결국 대한민국이 전세사기로 인한 주택경매로 인한 배당금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피해 중 일부도 변제받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전세사기범행으로 인한 피해를 극대화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낸 전세금은 전세사기범이, 해당 주택의 경매로 인한 배당금은 대한민국이 나눠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전세사기의 정확한 건수와 그 피해액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15
그 동안 대표적인 조직적 사기범죄 중 하나로 분류되어 왔던 △시세조종(주가조작) 등의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되거나 수사가 이루어진 사건이 급감함에 따라 적발된 범행 건수 또한 크게 감소하였다. 그렇다고 실제 발생한 범행이 줄어들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범죄와 관련하여, 2015년에 전문수사조직으로 설치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의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단은 2020년 1월 느닷없이 해체되었다. 이 때문에 상상인그룹 사건, 신라젠 사건, 라임 자산운용 사건, 옵티머스 자산운용 사건 등 대형 사기범죄 수사는 일제히 용두사미의 초라한 모습으로 종결되었고, ‘희대의 펀드사기’로 불린 옵티머스 사태의 경우 이름이 오르내린 여권 인사들은 서면조사 등 형식적 수사 끝에 일제히 무혐의 처분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융범죄나 증권범죄에 대한 검찰의 수사능력이나 의지가 사실상 사라져버린 2020년 이후에 수사나 기소가 진행된 증권범죄 사건 중 특기할 만한 사건은 없다. 통상 자본시장법상 시세조종 등의 사건에 대해서는 금융위원회로부터 수사의뢰를 받는 검찰이 주로 수사를 도맡아서 해왔었는데, 검찰이 2021년 금융위원회로부터 이첩받은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사건 61건 중 구속기소된 사건은 단 1건도 없기 때문이다.16 물론 이러한 상황이 합수단의 해체 이후 자본시장이 스스로 정화된 결과라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겠다. 하지만, 쌍용차 인수과정에서 불공정거래 논란과 함께 과거 주가조작 전력이 있는 다수의 세력들이 개입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고, 2023년 4월 주가조작 의혹 8개 종목 동반 폭락, 2023년 6월 주가조작 의혹 5개 종목 무더기 하한가와 같은 뉴스가 계속하여 나오는 것을 보면, 지금 사기조직들이 미쳐 날뛰는데도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17 이처럼 시세조종 등 자본시장법 위반 형태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를 담당해오던 수사의 주체가 해체된 후 수사가 제대로 진행된 바 없기 때문에 시세조종 등 사기피해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아울러 암호화폐 시세조종과 관련하여는 명확한 처벌규정이 없기에 그와 관련된 통계 또한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점 또한 앞서 본 바와 같다.
이외에도 △주식리딩방 사기, △FX외화거래사기, △파워볼 복권 사기, △로맨스 스캠, △산업안전교육 사기18와 같은 신통방통한 다양한 사기범행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일례로, 2021년에 발생한 ‘머지포인트 사태’도 폰지 사기와 유사하지만 정형화되지 않은 형태의 사기범행 중 하나로 들 수 있다. 머지포인트 운영자들은 액면가보다 할인된 머지포인트 상품권을 결제하면 가맹점에서 쓸 수 있는 머지머니를 충전해주는 방식의 사업을 운영하였는데, 2020년 5월부터 2021년 8월까지 회사 적자가 누적되어 사업 중단 위기에 처했는데도 돌려막기 방식으로 사업을 유지하면서 소비자 56만 명을 기망하여 2,521억 원 상당의 머지머니를 판매하였다는 사기혐의와 2020년 1월부터 2021년 8월까지 금융위원회에 등록하지 않고 선결제 방식으로 회원들을 모집해 전자지급결제 대행업을 하였다는 혐의 등이 적용되어 구속 기소된 바 있다.19
15 ‘빌라왕’ 사건의 바지 임대인 김아무개 씨가 체납한 종합부동산세 62억 5,000만 원은 2020년 12월 11일에 약 2억 5,000만 원이, 2021년 11월 19일에 약 60억 원이 고지돼 모두 납부기한이 지났다. 이 때문에 종부세 고지일보다 늦은 시점에 임차인이 확정일자(임차권 설정)를 받은 경우, 정부의 조세채권이 임차인의 보증금 채권보다 선순위가 된다{현행 국세기본법제 제35조는 조세채권 법정기일(신고 · 고지일)과 임차권 설정일을 따져 먼저 발생한 채권을 선순위로 간주한다}. 이로 인하여 위 종합부동산세 62억 5,000만 원이 전액 변제되기 전까지는 모든 경매주택에 대한 최선순위 채권자인 대한민국은 모든 전세권자보다 우선하여 배당금을 받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사전에 집주인이 세금을 체납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전세계약을 맺은 피해자들은 경매에서 한 푼도 회수할 수 없었다. 다만,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일명 ‘전세사기특별법’)」의 시행에 따라 2023. 7.부터 임대인이 체납한 총액을 보유한 주택별로 나눠서 경매를 진행하는 조세채권 안분이 적용된다고는 하나, 이러한 경우에도 대한민국이 전세권자들에 앞서 전부를 배당받던 것에서 상당 부분을 배당받는 것으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형편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전세사기특별법에 ‘조세채권 안분’ 포함…피해자 숨통 트일듯”, 2023. 4. 26.자 기사; 경향신문, “전세사기특별법 6월 1일부터 시행…조세채권 안분은 7월부터”, 2023. 5. 25.자 기사 참조.
16 법률신문,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폐지 1년…우려가 현실로”, 2021. 1. 11.자 기사에 따르면, 2020년 1월 합수단이 폐지된 후 그해 검찰로 이첩된 57건 가운데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단 1건으로, 나머지 4건은 불기소 처리되었고, 51건(89.4%)은 여전히 수사 중인 것으로 드러났는데(2020년 12월말 기준), 이는 금융 및 증권범죄에 대한 모든 수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2021년 검사가 직접 수사지휘를 할 수 있는 금융 · 증권범죄수사협력단이 설치됐지만 합수단과 같은 실적을 내지는 못하였고, 이후 2022년 5월경 금융 ·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다시 설치되기는 하였지만 과거의 전문 인력들과 그들의 노하우가 모두 흩어져버린 데다가, 검찰의 직접 수사에 적지 않은 제한이 있는 상황이어서 새로운 합수단이 과거와 같은 수사실적을 거두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17 동아일보, “주가조작 의혹 8개 종목 연사흘 최대 66% 폭락…검, 10명 출금”, 2023. 4. 27.자 기사; 연합뉴스, “제2의 ‘SG사태’?…동일산업 등 5개 종목 무더기 하한가”, 2023. 6. 14.자 기사
18 매일경제, “산업안전법 교육이라더니 약팔이…5인 미만 사업장 노리는 사기업체들”, 2022. 6. 17.자 기사에 따르면, 소규모 사업장을 상대로 ‘법정의무교육’을 하겠다면서 실제로는 광고성 영업을 하는 사기꾼들은 자신들이 고용노동부의 산하기관 또는 위탁기관의 직원이라고 사칭하면서 5인 미만 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산업안전보건법상 법정의무교육을 받으라고 한 다음, 10분 정도 산업안전법 교육을 하고는 30~40분 동안 보험이나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들의 범행은 짧게나마 산업안전보건법 관련 교육을 한다는 점, 영업활동으로 사업장에 끼치는 손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 때문에 법적 처벌이 어렵다는 것을 악용한 것이다.
19 2022년 11월 1심 법원은 머지플러스 대표에게 징역 4년, 최고전략책임자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였다. 경향신문, “대규모 환불중단 머지포인트 설립자 남매 실형 선고”, 2022. 11. 10.자 기사
이처럼 셀 수도 없이 많은 조직적 사기범행과 관련하여 매년 사기범죄조직들이 거두고 있는 전체 범죄수익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울러 조직적 사기범죄의 피해자 중 자신의 의사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고 이들이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아니한 피해 또한 상당한 데다가, 시세조종 등 복잡한 사기사건에서는 피해자별로 범죄 피해액을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도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통계가 사기범죄로 인한 피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통계와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조직적 사기범죄 피해액을 합산하면, 실제 조직적 사기범죄로 인한 피해액은 매년 20조 원을 넉넉히 초과하고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2020년 교통사고로 인한 차량손해와 대물피해의 물적 피해 비용의 추계액이 11조 28억 원(인적손해 및 사회기관비용 제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직적 사기범행으로 인한 피해가 이제 전 국민이 교통사고로 겪는 물적 피해 규모를 현저히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20
여기에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이 발표한 「2022년 금융사기 현황조사 결과」에 따른 평균 금융사기 피해액이 2,141만 원임을 참고하여 사기피해자 1인당 2,000만 원의 사기피해를 당한 것으로 가정하면, 2021년 한 해 동안 무려 100만 명의 피해자가 각각 2,000만 원의 사기피해를 당한 것과 같은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조직적 사기범죄로 인한 피해가 범죄수익으로 고스란히 환원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기범죄조직들이 1년에 벌어들이는 범죄수익 또한 20조 원을 넉넉히 초과할 것이다(물론 이는 불법도박 및 마약류 거래로 인한 범죄수익은 제외된 수치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은 대체로 인터넷 도박사이트나 음란물 및 마약류 유통조직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피해자가 없는 도박사이트나 음란물 공유사이트, 마약류 유통조직 등의 경우에는 수사기관에 적발되는 경우가 훨씬 적기 때문에 범죄조직들의 대체적인 규모나 범죄수익의 크기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인터넷 도박의 경우 국무총리실 사행산업 통합감독위원회가 추산한 불법도박 규모는 81조 5,000억 원(2019년 기준)으로 22조 4,000억 원(2018년 기준) 규모인 합법 사행산업의 약 3.6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21 현재 전체 불법도박 중 불법 온라인 도박이 총 54조 5,000억 원, 불법 스포츠토토가 20조 2,700억 원으로 온라인 도박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는데, 여기에 불법 도박사이트의 통상적인 환전 수수료율인 2% 내지 3% 정도의 금액의 범죄수익이 범죄조직에 귀속된다고 보수적으로 가정하였을 때 매년 2조 5,000억 원 내외의 범죄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물론 불법 도박사이트가 환전 수수료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자들의 돈을 편취하고 있으므로, 전체 범죄수익은 5조 원을 현저히 초과할 것으로 보는 것이 현실에 부합할 것이다.
한편, 2023. 9.경 부산경찰청은 불법 도박사이트의 자금을 조직적으로 관리 및 세탁한 혐의(도박개장 및 범죄단체조직)로 총책 3명을 구속한 바 있다. 이들은 2021. 7.부터 2022. 11.까지 64개 도박사이트에 입금된 도박자금을 관리 및 세탁해주고 수수료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계좌를 추적한 결과 해당 조직이 관리하는 모든 계좌에 입금된 도박자금은 모두 40조 원에 이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경찰은 이들이 범죄수익으로 챙긴 액수가 4,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22 모두 20대인 3명의 구속 피의자들이 64개의 도박사이트로부터 의뢰를 받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40조 원의 도박자금을 관리 및 세탁해주고 4,000억 원의 수수료를 챙겼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전체 불법 도박사이트의 범죄수익은 앞서 본 추정치를 훨씬 뛰어 넘어 천문학적 규모에 이르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마약류 전체 거래규모에 관하여도 전혀 알려진 바 없지만, 이를 추단케 할 만한 사정은 여럿 존재한다.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가 발간한 「2021년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2021년 마약류 압수량은 1,295.6㎏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필로폰 시가로 계산하였을 때 무려 4조 원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21년의 압수량이 2020년의 320.9㎏보다 303.8% 증가한 수치였다는 것이다.23 검찰과 경찰 등 단속기관에서는 검거된 마약사범 수의 10배, 마약 연구자들은 대략 그 수의 28배를 실제 마약사범의 수로 산정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실제 거래되는 마약규모 또한 최소 20조 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더라도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요즘은 매우 저렴한 펜타닐 등의 신종마약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을 고려하여, 마약거래규모를 압수된 마약류에 대한 필로폰 환산 시가의 5배 정도로 보수적으로 산정한 것이다). 결국 각종 범죄조직이 사기범죄, 불법도박 및 마약 등의 범행을 통하여 매년 45조 원 이상의 범죄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20 도로교통공단, 『’20 도로교통 사고비용의 추계와 평가(2021년판)』, 87면 참조.
21 경향신문, “불법 도박 81조 5,000억 규모…합법 사행산업의 4배”, 2020. 10. 14.자 기사
22 경향신문, “불법 도박사이트 자금 40조 관리․세탁 일당 적발…범죄수익 4,000억 사용처 ‘오리무중’”, 2023. 9. 7.자 기사
23 한국경제, “이러다 진짜 ‘마약공화국' 될라”, 2022. 5. 6.자 기사
우리나라의 각종 범죄조직이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기범죄와 불법 도박, 마약류 거래로 벌어들이는 범죄수익의 규모가 최소한 매년 45조 원을 훌쩍 넘게 됨에 따라, 이제 국내의 범죄조직들은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친 범죄조직들과도 견줄 수 있는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의 뒤를 이어 중남미를 주름잡았던 멕시코 마약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두목 엘 차포(El Chapo, 본명 Joaquin Guzman Loera)에 대한 형사재판 과정에서 미국연방검찰이 밝힌 그의 30여 년간의 범죄수익이 126억 달러(한화 16조 4,000억 원)이었고,24 그리스 무기상인 바실 자하로프(Basil Zaharoff)의 뒤를 이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리면서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친 빅토르 부트(Viktor Bout)가 2008년 방콕에서 체포될 때까지 각종 전쟁터를 넘나들며 20여 년간 벌어들인 돈이 60억 달러(한화 7조 8,000억 원) 정도라고 추정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25 이제 우리 범죄조직의 수괴들 중에서도 국제적 수준의 마약조직이나 무기거래조직의 수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24 The New York Times, “El Chapo earned $12,666,181,704, Prosecutor say. They want him to pay it back.”, 2019. 7. 7.자 기사
25 AP News, “Reviled and revered Russian arms dealer is back in spotlight”, 2022. 7. 14.자 기사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조직범죄 수괴 중에서 엘 차포(매년 4,000억 원)나 빅토르 부트(매년 3,000억 원) 정도의 범죄수익을 거두고 있는 수괴(또는 킹핀, Kingpin)들이 도대체 몇 명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물론 도박 및 마약범죄처럼 범죄조직들이 고도로 집중화된 부분도 있고, 몸캠 피싱처럼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범죄조직이 45조 원이 넘는 범죄수익을 나눠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범죄조직들이 빅토르 부트 급의 수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45조 원 규모의 전체 범죄수익을 매년 3,000억 원씩 나누어 갖는 킹핀들은 대략 150명에 이르는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을 것으로 추산해볼 수 있다.
한편, 범죄조직의 규모나 조직원 수를 어림잡아 계산해볼 수 있는 근거가 없지는 않다. 대출 권유 문자로 543명에게 대출을 알선해서 38억 원의 피해를 안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김미영 팀장’ 조직을 참고해 볼 때, 전체 사기피해액 20조 원 기준으로 다른 사기범죄조직들이 모두 ‘김미영 팀장’ 조직의 공식적인 피해액과 같은 정도의 범죄수익을 남기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매년 5,000개의 사기범죄조직이 40억 원 내외의 범죄수익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김미영 팀장’ 조직이 거둔 것으로 추산되는 범죄수익인 400억 원을 보다 현실적인 범죄수익액으로 가정한다면, 그에 따른 사기범죄조직의 개수는 500개 내외로 보는 것이 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경찰이 ‘김미영 팀장’ 조직의 조직원 수가 93명이라고 밝히고 있음을 고려하여 400억 원 규모인 범죄조직의 평균적인 조직원 수가 대략 10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현재 전체 사기범죄조직에서 활동하는 조직원의 전체 숫자는 5만 명에 이르고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서 범위를 더 넓혀 도박 및 마약 관련 범죄조직 또한 사기범죄조직과 같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사기, 도박 및 마약 범죄조직의 전체 개수는 대략 1,125개, 조직원의 수는 대략 11만 2,500명에 이르고 있다고 보더라도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의 사기범죄조직이 어떻게 엘차포의 범죄수익을 넘어서는 금액의 범죄수익을 거둘 정도로 성공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엘 차포나 빅토르 부트는 예전부터 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 수사기관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았었던 반면, 우리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킹핀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이름도 알지 못하고,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수사기관이 없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의 킹핀들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길 수 있었기에 범죄수익의 규모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범죄조직의 수괴들을 현저히 앞설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던 엘 차포나 빅토르 부트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아무도 이들의 뒤를 쫓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일례로, 불법도박으로 54조 5,000억 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판돈이 오가는 것으로 추산되는 불법 도박사이트의 경우 2018년부터 2020년 7월까지 경찰 수사 의뢰까지 이어진 경우는 27건이었고, 실제 검거로 연결된 사례는 5건에 불과했다. 이 기간 도박사이트 적발이나 신고는 4만 1,136건에 달하였지만, 대부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를 통한 사이트 폐쇄 수준에 그쳤고, 실제 처벌로 이어졌던 사례는 거의 없었는데, 이는 아무도 범죄조직을 추적하고 있지 않은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26
사기범죄조직이나 그 수괴들은 국민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들의 존재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수사나 처벌을 받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이 다른 국가의 유명한 범죄자들이 초라해보일 정도로 막대한 범죄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실제 우리의 사기범죄조직들이 이 정도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유니콘의 반열에 올라간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은 더 이상 우리나라의 수사기관에게 적발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해볼 수 있다.27 수사기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유니콘 사기범죄조직들은 수사기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범죄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경쟁할 뿐,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하는 수사기관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획력과 실행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화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26 경향신문, “불법 도박 81조 5,000억 규모…합법 사행산업의 4배”, 2020. 10. 14.자 기사
27 불법 도박조직들의 경우 하루 베팅액이 마권구매액 기준 400억 원(1년으로 환산시 14조 6,000억 원)이 넘는 불법도박장이 생겨나는 등 범죄수익이 특정 조직으로 집중되는 과점화 또는 집중화가 계속하여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은 국제화와 점조직화, 온라인화를 먼저 마친 불법 도박조직들의 성장과정이나 조직운영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왔기에 사기범죄조직의 경우에도 현재 과점화 또는 집중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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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의 최대의 속임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는 폭발이 일어난 배에서 27구의 시체가 발견되고 9,100만 달러가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세국 소속 수사관 데이브 쿠얀(채즈 팰민테리 분)은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버벌(케빈 스페이시 분)을 조사하면서 그로부터 카이저 소제의 범죄조직에 대한 진술을 청취한다. 버벌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범죄조직의 수괴인 카이저 소제와 그 범죄조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악마가 벌인 최대의 속임수는, 바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한 것이다(The greatest trick the Devil ever pulled was convincing the world he didn’t exist)”라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한다. 수사관 쿠얀은 버벌로부터 카이저 소제의 지시나 범죄조직의 실행분담 등에 대한 진술을 자세히 청취한 다음, 버벌에게 신변을 보호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버벌은 욕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경찰서를 빠져나간다. 이후 쿠얀은 사무실을 둘러보다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리고, 버벌이 한 진술에서 나온 사람 이름이 대부분 사무실 게시판의 서류와 물건에서 끌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버벌이 했던 진술 전부는 즉석에서 꾸민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한편, 버벌은 경찰서를 떠나면서 절던 다리를 펴서 똑바로 걷기 시작하고, 마비되어 못 쓰는 것처럼 보였던 왼손으로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차량을 타고 떠나면서 영화가 끝난다. 카이저 소제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속임수에 성공한 것이었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같은 상황이 우리의 조직적 사기범죄 사건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버벌이 인용한 보들레르의 시구는 우리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지금까지는 수사기관이 어떤 범죄조직의 모든 구성원을 검거한 이후에 서로 가명을 사용해왔던 검거된 공범(예를 들면, ‘박사’나 ‘부따’) 중 누가 수괴인지를 운 좋게 특정할 수 있었지만, 머지않아 피의자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는 사건이 급증하게 될 것이다.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실제로 카이저 소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만약 카이저 소제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의 범행을 밝힐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를 해두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적 사기조직은 자신들을 추적할 수 없도록 국제화되어 있는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이를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최대 약점은 바로 사기범행의 잠재적 피해자들을 물색하기 위하여 넓게 펼칠 수밖에 없는 광범위한 접촉면과 지나치게 복잡한 구성의 범죄조직이다. 사기범죄조직이 아무리 국제화, 온라인화, 점조직화를 통하여 수사기관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사기범행을 통해서 지속적인 범죄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잠재적 피해자들과 광범위한 접촉면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사기범죄조직들이 잠재적 피해자들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수많은 메시지나 거래내역과 같은 흔적들을 남길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수많은 흔적들은 그들에 대한 추적의 빌미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남길 수밖에 없는 수많은 흔적들이 현재까지 드러난 그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 사기범죄조직들은 높은 수익을 미끼로 사기피해자를 유인하기 위해서 각종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메시지, 페이스북 메시지 등을 전송하고, 이에 솔깃해하는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외관의 웹사이트, 애플리케이션 또는 투자 채널을 운용해야 하며, 무엇보다 범죄수익의 전달 도구가 되는 금융계좌 등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수사기관이 이와 같은 약점을 공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길목에서 관련 법령이 수사기관의 접근을 막고 있다. 전기통신산업법 등 각종 법령은 예외 없이 고객정보에 대한 엄격한 보호만을 선언하고 있을 뿐이고, 고객정보를 직접 취급하는 전기통신사업자나 각종 서비스제공자 등으로 하여금 사기범죄 관련 의심이 있는 거래 등을 제대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명하고 있지 않다. 이에 사기범행의 수많은 단서가 떠돌아다니더라도, 정작 수사기관으로서는 유의미한 수사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이른 시점에 수사에 착수할 수 없고, 수사에 긴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방법도 없다.
이러한 문제는 대포폰, 대포통장, 중계기, 불법 환전, 개인정보 불법유통, 미끼문자 메시지, 거짓 구인광고 등 주된 범행수단을 통해서 범죄조직을 추적해 들어가는 모든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은 언제나 사기범죄가 모두 끝난 후에 피해자로부터 수사의 단서를 받아 뒤늦은 수사를 개시할 수밖에 없고, 법원으로부터 때늦은 압수수색영장 등을 받아 통신사업자 등으로부터 해당 고객정보를 제공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고소를 기다려 사기범죄조직의 추적에 착수하는 시점까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사기범죄조직들이 이미 상당수의 흔적들을 인멸한 후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확보하는 일부 증거들은 사기범죄조직을 추적해 들어가기에 충분하지도 않고, 그나마 형사재판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사기범행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기범죄조직 스스로 과거 범행에 사용된 대포폰이나 대포통장 등의 사용을 중단함으로써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도 뒤늦게 수사에 착수한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별다른 성과를 내기 어렵게 하고 있다.
사기범죄조직들이 피해자들에게 빨대를 꽂기 위해서 범행 대상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남기는 수많은 흔적들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국가기관은 금융정보분석원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금융이나 통신 영역에서 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국가기관들 중 국제적 범죄조직의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거나, 그들이 남긴 단서를 추적하여 추가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 적극적인 기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사기관이 국제적 사기범죄조직이 남긴 흔적을 수사의 단서로 삼아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감독기관들이 기를 쓰고 수사기관에 협조를 거부하는 장면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뿐이다.
금융감독원이 수사에 대한 유기적 협조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사기범죄에 대한 대응능력을 키울 의지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수사 과정에서 압수된 1.5테라바이트(TB) 용량의 외장 하드디스크 속 개인정보를 두고 벌어진 수사협조 거부 사건이다.28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는 2019년 시중은행 해킹 피의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1.5TB 용량의 외장하드를 압수했다. 압수한 외장하드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을 진행한 결과, 외장하드에서 해당 피의자가 국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POS단말기, 멤버십 가맹점 등을 해킹해 빼낸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정보 데이터 약 61GB를 발견하였다. 경찰은 그중 카드번호, 유효기간, 비밀번호 등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해킹 등을 통한 신용카드 및 체크카드 데이터베이스 탈취사건으로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경찰은 데이터 분석에 필요한 기본정보를 보유하고 있지 아니하여 카드사별로 데이터를 분류할 수 없었기 때문에, 2020년 3월 금융감독원에 위 데이터를 카드사별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금융감독원은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신용정보법’)」 등을 근거로 경찰의 수사 협조요청을 거부했다. 당시 금감원은 ‘관련 정보가 100% 금융거래정보만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금융거래정보로 보이는 자료를 넘겨받아 카드사별 고객정보를 분류하는 것은 정보 노출 우려가 있어 불가능하다. 금융감독원이 압수물을 받아 분석하는 것은 금융위원회 설치법 등이 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