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성경: 구약 ⓰ 에스겔, 다니엘
2024년 6월 19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김영진, 강정훈, 천종수
발행처 (유) 성서원
일러스트 김천정
교정·교열 유영일
출판등록일 1997년 7월 8일 (제300-1997-79호)
창업일 1972년 2월 1일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은로 60-12 우) 10541
전화 02-765-0011~17
팩스 02-743-6811
성서원 홈페이지 www.biblehouse.co.kr
페이스북·E-mail saebut-9106@hanmail.net
ISBN 978-89-360-2254-9 (03230)
ⓒ 김영진, 강정훈, 천종수, 2023
저작권자와 맺은 특약에 따라 검인을 생략합니다.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지하며, 이 책의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인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출처를 밝히셔야 합니다.
차 례
에스겔, 다니엘
에스겔: 주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회복
■ 프롤로그
1 에스겔이 본 환상
2 에스겔의 소명
3 파수꾼의 사명
4 심판의 예고
5 예루살렘의 죄악과 심판
6 우상을 숭배한 죄
7 임박한 심판의 날
8 성전 안의 우상숭배
9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
10 성전을 떠난 하나님의 영광
11 심판과 회복의 모습
12 바빌로니아 포로 예언
13 거짓 예언자
14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
15 쓸모없는 포도나무의 비유
16 음란한 여인의 비유
17 독수리와 포도나무
18 자기 죄로 죽는다
19 유다 왕들을 위한 애가
20 심판과 회복
21 심판의 칼
22 예루살렘의 죄악
23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24 끓는 가마솥
25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
26 두로에 대한 심판
27 두로를 향한 애가
28 두로 왕의 교만과 몰락
29 이집트에 대한 심판
30 이집트의 패배와 몰락
31 쓰러진 백향목
32 이집트 왕을 위한 애가
33 이스라엘의 파수꾼
34 두 목자
35 에돔에 대한 심판
36 이스라엘의 회복
37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합
38 최후의 대적 ‘곡’
39 침략자 곡의 패망
40 새 성전에 대한 환상
41 새 성전의 구조
42 새 성전의 부속 건물들
43 새 성전에 임하신 주
44 제사장 직분의 규례
45 토지 분배와 절기 규례
46 지켜야 할 각종 예배 규례
47 생명의 강물
48 새 땅의 분배
■ 에필로그
다니엘 : 하나님의 주권과 구속(救贖) 사역
■ 프롤로그
1 다니엘과 세 친구
2 다니엘의 꿈 해석
3 불가마 속의 네 사람
4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
5 벨사살과 왕궁 벽의 글
6 다니엘과 사자 굴
7 네 짐승의 환상
8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9 다니엘의 중보 기도
10 힛데겔 강가의 환상
11 남방 왕과 북방 왕
12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
■ 에필로그
■ 감수자의 말 / 민영진
에스겔
자신이 태어나 자란 어머니 땅에서
조국을 뒤로하고 끌려가는 신세여
이방 군대의 군화와 말발굽 아래
유다 백성은 온몸을 떠네
포로가 되어 잡혀온 땅 그발 강가에서
주께 부름받은 에스겔이여
우상숭배와 죄악의 나락에 빠진
동족에게 힘차게 회개를 외쳐라
여호와의 백성을 구원하려면
여호와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여호와의 주권을 널리 선포하여라
만방에 여호와의 빛을 발하여라
골짜기 마른 뼈가 살아나듯
황폐한 유다에 회개의 단비 내려
찬란한 구원과 회복의 날이 오면
시온의 언덕에서 주를 찬양하리라
에스겔: 주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회복
●
‘아, 저 멀리 내 조국 유다는 평안한지? 거기서든 여기서든,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죄악의 길을 떠나 어떡하든 주님의 말씀대로 올바로 살아가야 할 터인데…. 아, 진실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예루살렘 도성에 임하고야 말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쯤이나 주께서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날이 임한단 말인가….’
한 젊은이가 오늘도 그발(Chebar) 강가에 앉아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깊은 상념에 젖는다. 에스겔(Ezekiel)이다. 에스겔은 사독 계열의 제사장인 부시의 아들로 유다 땅에서 태어났다(요시야 왕 18년, 주전 622년경).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이다. 배도와 망국과 유수(幽囚)의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그를 맡은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강하게 만들어주신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제2차 유다 침공 당시(주전 597년), 유다를 초토화시킨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왕족들, 귀족들, 그리고 유력 인물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바빌로니아 땅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에스겔도 사로잡혀 함께 끌려갔다(왕하 24:10-17). 당시 에스겔의 나이는 25세가량이었고, 이때 끌려간 유다 포로민들은 대부분 그발 강가의 델아빕(Tel-Abib)에 거주하게 되었다(1:1; 3:15). 당시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포로생활 5년째 되던 해에 그곳 델아빕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다(주전 593년경).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1:1).
그리고 이때로부터 에스겔은 제사장 겸 선지자로서 포로 된 땅 바빌로니아의 그발 강가 지역, 곧 그 땅에 사로잡혀 온 유대인들의 집단 거류지인 델아빕과 님불 등을 중심 무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당시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조국 땅에 있는 성도(聖都)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성전은 절대로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믿음에서 그들은 머잖아 이방 땅에서 해방되어 본토 유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사랑하는 동포들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그런 희망은 헛될 뿐입니다. 여러분의 바빌로니아 유수(幽囚)는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죄악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고 마침내 함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길은, 우리의 죄악을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심판을 달게 받는 가운데, 즉시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것뿐입니다! 오직 그 길만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가 살 길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 같은 메시지를 포로 된 땅에서 동포들에게 선포했다. 그는 메시지를 더욱 생생하게 시청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상징적인 행동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서를 읽다 보면, 온갖 다양하고 기이한 ‘행위 예언’을 온몸으로 수행하는 에스겔의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에스겔은 말씀과 행동과 환상을 통해 온몸을 불사르며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포로 된 유대인들은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에스겔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거나 배척했다.
유다 왕 시드기야 9년(주전 588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반(反)바빌로니아 군사 동맹에 가입한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고, 1년 6개월의 포위 공격 끝에 마침내 유다의 도성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주전 586년 4월 9일). 이어 왕궁을 불사르고, 하나님의 성전도 모조리 약탈한 후에 철저히 파괴하였다(그해 5월 7일).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바빌로니아 땅의 유대인들은 큰 절망과 낙심에 빠져 모든 소망의 끈을 놓고 말았다.
“내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주께서는 제게 장차 실현될 놀라운 구원과 소망의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때가 이르면, 주께서는 여러분을 반드시 돌아보시고, 크신 능력의 손길로 여러분을 이 땅에서 해방시켜, 그리운 우리의 본토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땅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품고, 모쪼록 주님만 잘 섬기도록 하십시오!”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주전 586년), 바빌로니아 땅의 모든 유대인들이 크게 낙담하여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에스겔은 도리어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장차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실현될 이스라엘의 회복과 재건을 힘차게 외쳤다. 그리하여 절망 가운데 처한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새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골짜기의 마른 뼈’ 환상(37장)이나 ‘새 성전’의 환상(40-48장) 등은 이 같은 소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환상들이었다.
이처럼 에스겔은 배도와 망국과 유수가 마구 뒤섞여 출렁대는 노도와 격랑의 시대에, 뜨겁게 소명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다양하고 기이한 숱한 행위들과 환상들과 비유들로써 받은바 하나님의 메시지를 힘차게 선포한 능력의 선지자였다. 한편으로는 동족의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가운데 회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강조하는 가운데 장차 실현될 찬란한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심어주었다.
자, 그렇다면 실제로 에스겔이 어떤 말씀들을 선포했고 또 어떤 환상들과 비유들과 행동들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본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살펴보자.
1
에스겔이 환상을 봄 (1:1-3)
“오, 주님! 아, 주여!”
에스겔의 나이 서른 살 되던 해의 4월 5일, 당시 에스겔은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 동족들과 더불어 그발 강가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활짝 열리더니, 하나님의 환상이 보였다. 때는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지 5년째 되던 해로 그달 5일이었다(주전 593년경).
그러니까 혈통적으로 본래 제사장 신분이었던 에스겔은 바빌로니아의 제2차 유다 침공 때(주전 597년) 유다 왕 여호야긴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 땅으로 끌려왔는데, 그 땅에 끌려온 지 5년째 되던 30세의 나이에, 그 땅의 유다 포로민들을 위해 사역할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던 것이다. 제사장 겸 선지자가 된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30세의 나이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장의 임무를 공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나이였다(민 4:2-3). 바로 그 나이에 부시의 아들인 제사장 에스겔은 어느 날 갈대아 사람들의 땅인 그발 강가에서 주께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것이다. 그날에 특별히 에스겔 위에 주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했고, 그때 주님의 권능은 에스겔을 온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환상’이란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는 비몽사몽(非夢似夢)의 엑스터시(ecstasy) 상태에서 주께서 보여주시는 하늘의 기이하고 놀라운 광경을 보는 일인데, 이때 그 사람의 정신은 온전히 맑고 또렷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렇다면 선지자로 소명을 받던 그날에 에스겔이 본 환상은 어떤 것이었나? 그 환상을 실제로 본 에스겔의 말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네 생물의 모습 (1:4-14)
(4-1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큰 폭풍이 불어오고 엄청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번갯불이 번쩍번쩍하고, 그 주위 사방에는 밝은 광채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광채의 불빛 한가운데서는 벌겋게 달아오른 금속 같은 것이 번쩍이고 있었다. 바로 그 광채의 불빛 한가운데서 네 생물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생김새는 전체적으로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러나 네 생물은 각각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네 생물의 다리는 곧게 뻗어 있었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는데 광택을 낸 청동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또 네 생물의 사면에 달린 네 개의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네 생물에게는 각각 얼굴과 네 개의 날개들이 있었는데, 네 개의 날개들은 모두 서로 맞닿아 있었다. 그들 네 생물은 어디론가 움직일 때 몸을 돌리지 않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 네 생물은 생김새가 각기 다른 네 개의 얼굴들을 각자 갖고 있었다. 네 생물의 앞쪽 면은 사람의 얼굴이고, 오른쪽 면은 사자의 얼굴이며, 왼쪽 면은 황소의 얼굴이고, 뒤쪽 면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이것이 네 생물의 얼굴 생김새였다. 그리고 네 생물이 각각 가진 네 날개들 중 두 날개는 위로 펼쳐져 있었는데 그 날개 끝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자기 몸을 가리고 있었다. 각 생물들은 그들의 영이 가려고 하는 곳으로 갈 때, 사방 어느 곳으로 가든지 몸을 돌리지 않고서도 가고 싶은 대로 일제히 곧장 앞으로 갔다. 그 생물들의 생김새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숯불이나 횃불 같았는데, 그 불이 각 생물들 사이를 앞뒤로 오가며 밝은 빛을 냈고, 그 불 가운데서는 번개가 번쩍번쩍 치고 있었으며, 그 생물들은 번개처럼 빠르게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아, 저런! 저건… 거대한 먹구름?”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함께 몰려오는 큰 먹구름을 보았다. 여느 때였다면 그냥 자연의 변화 정도로 넘어갔을 텐데, 때가 때인 만큼 예사롭지 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먹구름은 조국 이스라엘의 운명이다. 북녘에서 쳐내려오는 임박한 침략의 조짐이 분명했다. 망국의 난민 신세로 살아가는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에게는 주변 상황이 모두 먹구름이다. 먹구름은 에스겔 자신에게도 덮쳐왔다.
에스겔은 제사장을 맡기 위한 교육과 가정훈련을 다 받았다. 이제 30세가 되어 제사장으로 떳떳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적령기가 되고 모든 조건은 갖추었지만 정작 사역지가 없다. 제사장에게 실력이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이며, 멋진 제사장 예복인들 무슨 소용일까. 이방 바빌로니아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없는 제사장은 그 자체가 먹구름으로 둘러싸인 암울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먹구름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인다. 단쇠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표현한다. 저게 도대체 뭔가?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 ‘네 생물’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본 ‘네 생물’에 관한 묘사다.
에스겔의 환상(네 생물, 네 바퀴, 하나님의 보좌)
네 생물의 전체적인 생김새는 일단 사람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생물마다 전후좌우로 네 개의 얼굴(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을 갖고 있고, 또한 각자가 네 개의 날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네 생물은 몸을 돌리지 않고서도 가고 싶은 데로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번개처럼 빠르게 갈 수 있었다. 그런 네 생물의 존재가 얼마나 어마무시하고 장엄하던지, 그들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는 숯불이나 횃불 같았고, 그들 가운데는 번갯불이 번쩍번쩍했으며, 주위 사방에는 밝은 광채가 가득했다.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천상의 순결하고 장엄하고 무시무시하고 능력 있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같은 네 생물의 모습을 에스겔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네 생물의 정체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지키는 4대 수호천사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네 생물’이 아니라 네 생물이 수호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시중드는 그분의 수호천사들이 그토록 장엄하고 어마무시한 존재라면, 그런 네 생물을 수하에 종처럼 부리고 있는 ‘하나님’ 그분이야말로 그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장엄한 분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주시려고 자신의 종들인 네 생물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네 바퀴의 모습 (1:15-21)
(15-21) 그때에 내가 또 그 생물들을 보니, 각 생물들 곁의 땅 위에는 바퀴가 닿아 있었는데, 그 바퀴는 각 생물의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었다. 그 바퀴들의 모습과 구조를 살펴보니 네 개가 다 똑같은 모습과 구조를 가졌는데, 모두 보석처럼 빛이 났고, 그 구조는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바퀴들이 움직일 때는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서도 사방 어느 쪽으로든 앞을 향해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바퀴들의 둘레는 무척 높은 데다, 그 네 둘레로 빙 돌아가면서 온통 번쩍이는 눈들로 가득 차 있어서 아주 무서운 모습이었다. 생물들이 움직일 때에는 곁에 있는 바퀴들도 함께 움직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곁에 있는 바퀴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 생물들은 그들의 영이 가고자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또 그 생물들이 움직일 때는 곁에 있는 바퀴들이 함께 떠올라 움직였는데, 그것은 그 생물들의 영이 바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생물들이 움직이면 곁의 바퀴들도 함께 움직였고, 생물들이 멈추면 곁의 바퀴들도 함께 멈췄으며,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곁의 바퀴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것은 생물들의 영이 바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네 생물 곁에는 네 생물처럼 각각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네 바퀴’가 있었다. 에스겔이 본 네 바퀴의 환상은 이러했다. 네 바퀴는 각각의 바퀴 둘레로 빙 돌아가면서 온통 번쩍이는 눈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눈들은 온 세상을 두루두루 감찰하는 눈들이었다. 또한 각각의 바퀴 안에는 또 다른 바퀴가 들어있어 굳이 전후좌우로 돌지 않고도 원하는 대로 사방의 어디든지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바퀴들이었다.
하지만 이 바퀴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생물의 움직임을 좇아 동작하는데, 그 까닭은 생물의 영(靈)이 바퀴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유하자면, 병거를 탄 장군처럼 생물과 바퀴는 둘이 완전히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요컨대 ‘네 생물’과 ‘네 바퀴’는 서로 페어링(pairing) 되어 한 몸인 양 움직였다. 이처럼 네 생물과 그들 곁의 네 바퀴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위대가 되어 하나님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다니엘은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오, 저리도 기묘한 생물과 신기한 바퀴를 수하에 거느리시는 하나님은 만유의 절대 주권자가 되시는 분이구나! 그래서 온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와 기쁘신 뜻에 따라 질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해.’
결국 이런 사실은, 에스겔과 그의 동족을 포로로 잡아온 바빌로니아 제국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머잖아 닥칠 유다의 멸망이나 예루살렘의 함락, 그리고 더 이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도 전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경륜 하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 보여준다. 네 생물과 네 바퀴 환상을 통해 에스겔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계속해서 에스겔은 자신이 목도한 환상을 들려준다.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모습 (1:22-25)
(22-25) 그때에 내가 또 보니, 그 생물들의 머리 위로는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같은 것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수정 같은 빛을 띠고 있었고, 보기에 심히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밑에는 각각의 생물들이 서로를 향해 두 날개를 맞닿아 펼치고 있었는데, 각각의 생물들은 나머지 두 날개로는 자기들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 생물들이 움직일 때 그 날개 치는 소리를 내가 들어보니, 많은 물이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 같은 목소리 같으며, 큰 군대의 함성 같았다. 그리고 그 생물들이 가만히 멈추어 서 있을 때는 자기들의 날개를 아래로 드리웠다. 그 생물들이 자기들의 날개를 아래로 드리우고 가만히 서 있을 때에도, 그들의 머리 위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위에서는 진동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생물들과 바퀴들의 머리 위에 넓게 펼쳐져 있는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같은 것, 곧 수정 같은 빛을 띠고 있는 그 둥근 덮개 위에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자리 잡고 있었다(26절). 그 보좌 아래에서 수호천사들인 네 생물은 언제든 하나님의 명을 받아 움직이려고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며 두 날개를 맞닿아 펼치고 있었고, 다른 두 날개로는 겸허하게 자신들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위, 곧 하나님의 보좌에서는 천둥 같은 장엄하고 우렁찬 목소리의 진동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에스겔의 환상은 이어진다.
하나님 보좌의 모습 (1:26-28)
(26-28) 또 내가 보니,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 위에는 사파이어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모양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보좌 모양 같은 것의 위에는 사람의 모습 같은 형상을 지닌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또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 곧 상반신의 모습은 벌겋게 달아오른 쇠 같아서, 그 속과 주변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았다. 그분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 곧 하반신의 모습도 역시 불과 같아서 사방으로 찬란한 광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그 찬란한 사방의 광채는 비 오는 날의 구름 속에 있는 아름다운 무지개 같았는데, 그것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는 영광의 광채였다. 내가 그 찬란한 광경을 보고 즉시 땅에 엎드리니, 그 보좌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이 내게 들려왔다.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 모양의 수정 빛깔 둥근 덮개 위에는 사파이어 보석으로 만든 것 같은 보좌 같은 것이 있었고, 그 보좌에는 사람의 모습 같은 형상을 지닌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여기서 ‘~같은’이란 표현이 계속 나오는 것은 에스겔이 본바 천상의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지상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상반신과 하반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쇠나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 같았고, 그 사방으로는 찬란한 무지개 빛깔의 광채가 영광스럽게 발산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의 모습이다.
‘보좌’는 통치 및 주권을 상징한다. 따라서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목도한 바 영광스런 하늘 보좌의 형상은, 그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야말로 만왕의 왕이요 절대 주권자로서, 온 세상 만물을 자신의 거룩하고 기쁘신 뜻대로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경영하시는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나타낸다. 선지자로 처음 소명을 받을 때 에스겔이 목도한 모든 환상은 바로 이런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준다.
2
에스겔이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받음 (2:1-7)
“오, 오, 주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기 전에 먼저 환상 가운데서 천상의 놀라운 광경, 곧 네 생물과 네 바퀴와 천장 모양의 둥근 덮개와 하늘 보좌 같은 장엄하고 찬란한 천상의 광경을 보여주셨다(1장). 그런 놀랍고 영광스런 천상의 광경 앞에 에스겔은 완전히 압도당하여,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며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때에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 하나님께로부터 에스겔에게 말씀이 임한다. 천둥 같은 장엄한 목소리다.
“너 사람의 아들아, 일어나라! 이제 내가 네게 말할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향해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라 부르신다. 여기서 ‘인자’는 단순히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 호칭은 본서에서 90번 이상이나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에스겔의 연약한 인간됨을 일깨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존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그 호칭은, 에스겔의 역할이 메시지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전달하는 데’ 있음을 에스겔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영 곧 성령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자 에스겔은 일어선 뒤에 그분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에스겔을 자신의 선지자로 불러 세우시는 소명의 소리였다.
(3-7) “너 사람의 아들아, 이제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다. 그들은 나를 거슬러 반역하는 백성이다. 예로부터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줄곧 나를 거슬러 죄를 저질러왔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나를 거역하고 있다. 그렇다. 이 백성은 참으로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고집이 아주 센 자손들이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니, 너는 그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라고 하여라. 그들은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족속이다. 그럴지라도 그들이 네 말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그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너 사람의 아들아, 네가 비록 가시와 찔레에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고 있더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에 겁먹지 말아라. 그들은 나를 거슬러 거역하는 족속이므로, 그들이 무슨 말로 너를 위협하더라도 그들의 말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조금도 겁먹지 말아라. 그들은 정말로 심히 반역하는 족속이므로, 그들이 네 말을 듣든지 듣지 않든지 너는 그들에게 내 말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무엇보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다지도록 격려하시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메시지를 선포할 대상인 이스라엘이 아주 뻔뻔하고 완악하고 패역하고 고집이 센 족속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러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께 불성실한 패역과 배반의 역사를 가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종종 이웃 족속의 사악한 풍습을 좇고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섬겼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경고했지만, 그들은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배척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그 족속은 가시와 찔레와 전갈 떼와 같았다(6절). 에스겔은 그런 완악한 족속을 메시지의 선포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이스라엘 땅에서 가시와 찔레는 빨리 자라나는 식물로서 곡물의 성장을 심각하게 훼방한다. 그리고 땅과 벽을 기어다니는 전갈은 위협을 받을 때 강렬하고 치명적인 침을 쏘는 동물이다. 에스겔의 메시지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자들은 이처럼 치명적인 독침을 가진 전갈과 같았다.
그럴지라도 에스겔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해야 했다.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라고 하면서,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하지 말고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100% 그대로 전해야 했다. 그래야 후일에 그 족속은 자신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이 받은 징벌에 대해 “왜 진즉에 경고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변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스겔이 하나님께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받음 (2:8-10)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자신의 선지자로 부르신 뒤에 에스겔에게 이르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는 저 반역하는 족속처럼 나를 거슬러 반역하지 말고, 네 입을 크게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그분의 말을 듣고 에스겔이 앞을 바라보니, 에스겔 앞으로 손이 하나 뻗쳐오고 있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구약시대의 책은 두루마리 형태였다. 양쪽에 두 개의 막대를 이용해 양피지(동물 가죽)나 파피루스(종이)를 둘둘 말았다. 그때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 책을 에스겔 앞에서 펼치시는데, 두루마리 책의 앞면과 뒷면 모두에 글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에스겔이 그 글들을 언뜻 읽어보니, 그 글들은 슬픔과 탄식과 재앙의 글이었다. 이는 향후 에스겔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선포할 메시지의 성격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죄악에 대한 준엄한 경고와 징벌,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임할 재앙, 그리고 그런 징벌과 재앙으로 인해 크게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참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 주여, 이것이… 이것이 정녕 제가 내 조국 내 동족을 향하여 선포할 주님의 메시지란 말입니까? 아, 이토록 끔찍한 살육과 재난과 재앙을 선포하란 말씀입니까?”
에스겔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앞으로 감당해야 할 선지자의 사명이 지극히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조국이 망할 것이라고 외치고, 자신의 동족이 이방 땅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는 것, 진실로 그것은 어지간한 심령과 사명감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라는 ‘에스겔’의 이름이 가진 뜻 그대로 그가 맡은바 선지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시고 굳게 붙들어주셨던 것이다.
3
에스겔이 하나님께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받음 (3:1-3)
두루마리 책의 앞면과 뒷면에 적힌 빽빽한 글들이 온통 슬픔과 탄식과 재앙의 글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고서 에스겔이 크게 탄식하고 있을 때,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신다.
(1)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지금 네게 보여주는 이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어라! 그리고 일어나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두루마리 책의 내용을 선포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에스겔이 입을 크게 벌리니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 에스겔의 입에 그 두루마리 책을 넣어 먹이시면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3)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먹여주는 이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고, 너는 그것으로 네 배를 불리고 또 네 창자를 가득 채워라.”
에스겔의 소명: 이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어라!
그래서 에스겔은 입을 벌려 그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었다. 물론, 이런 일은 환상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다. 그랬더니 그것이 에스겔의 입에 꿀처럼 달았다. 먼저, 두루마리 책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그것은, 에스겔이 자신의 입으로 먹은 것 곧 두루마리 책에 적힌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을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외에 어떤 다른 것들을 전달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그 두루마리 책이 에스겔의 입에 ‘꿀처럼 달았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 그것은, 비록 그 책에 적힌 글들이 온통 슬픔과 탄식과 재앙의 글들로 채워져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시련과 징벌의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백성에 대해 꿀처럼 달디단 아름답고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꿀처럼 달았던 것이다.
에스겔이 감당해야 할 선지자의 사명 (3:4-15)
(4-9) “너 사람의 아들아, 이제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내 말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하여라. 나는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네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구사하는 외국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네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그 말이 어려워서 네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뭇 민족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그들 민족들에게로 너를 보낸다면, 도리어 그들은 분명 네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 이스라엘 족속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하여 고집이 아주 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네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곧 내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뻔뻔한 얼굴에 능히 맞설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얼굴을 아주 억세게 만들었고, 그들의 고집 센 이마에 능히 맞설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이마를 아주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네 이마를 부싯돌보다도 더 단단한 금강석처럼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아무리 거역하는 족속이라 할지라도, 너는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겁먹지 말아라.”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신 지엄하신 그분, 곧 주께서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하시면서 선지자로서 미리 알아야 하고 또 미리 각오해야할 마음자세에 대해 일러주시는 장면이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에스겔이 메시지를 선포할 주요 대상은 이방 족속들이 아니라 바로 에스겔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 그 백성은 조상 때로부터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하며 고집이 아주 센 족속이라서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완악한 백성들에 대해 겁먹거나 주눅들지 않고 에스겔이 그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그의 심령을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어놓았다는 것 등이다. 그래야만 그 백성을 대상으로 에스겔이 선지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 자체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심’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의해 강하게 된 에스겔은 적어도 향후 22년 이상을 흔들림 없이 선지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주전 593-570년경). 이어 주께서는 다시금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10-11)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이르는 모든 말을 너는 귀 기울여 잘 듣고 네 마음에 깊이 새겨라. 그런 뒤,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사로잡혀 온 네 동족 네 백성에게로 나아가서,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상관하지 말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선포하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상관하지 말고 반드시 자신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에스겔에게 명하신다.
‘아, 백성들이 저리도 듣기 싫어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걸까? 그래, 듣기 싫어해도 계속해서 전하다 보면, 얼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회개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듣든지 듣지 않든지 계속해서 심판의 경고를 외쳤다는 사실은, 나중에 심판이 임했을 때 그 백성들이 “우린 듣지 못했다!” 하고 변명하거나 핑계를 댈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함일 것이야….’(2:5).
에스겔의 환상 체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12-14) 그때에 주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동시에 나는 내 뒤에서 땅이 흔들릴 만큼 큰 소리로 “주님의 처소로부터 나오는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뒤이어 나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와 또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바퀴들이 지축을 뒤흔들며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 이처럼 주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실 때에 나는 내 백성의 완악함으로 인해 괴롭고도 분한 심정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주님의 권능의 손길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힘 있게 붙들어주셨다.
선지자의 소명 및 사명과 관련해서, 에스겔이 엑스터시 상태에서 체험한 하늘 환상이 마무리되는 장면이다(1:4-3:14). 이런 맥락에서 본문에 언급된 바 주님의 영이 에스겔의 몸을 들어 올려 이동시켰다는 말은, 실제로 에스겔의 육체적인 몸을 들어 올려 다른 데로 이동시켰다는 말이 아니라,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자유자재로 이동시켜 어떤 사물을 보게 하고 또 어떤 사건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의미다(8:3; 11:24-25).
아무튼 천상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께로부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에스겔은 그의 심령이 주님의 권능의 손길에 사로잡혀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에스겔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때는 에스겔의 나이 서른 살 되던 해의 4월 5일로서(1:1), 에스겔이 유다 왕 여호야긴 및 다른 수많은 동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지 5년째 되던 해였다(주전 593년경).
“오, 주님, 이제 이 몸은 무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에스겔은 신비로운 환상을 체험한 장소인 그발 강가를 떠나 이제 근처에 있는 델아빕에 이르렀다. 그곳 ‘델아빕’(Tel-Abib)은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들, 곧 에스겔의 동족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바빌로니아 내 몇몇 성읍들 중 하나였다. 이처럼 에스겔은 동족들에게로 나아가서, 환상으로 인해 크게 놀라 얼떨떨한 상태로 7일 동안 그들 가운데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또한 사명까지 부여받았지만(2:1-3:11), 아직은 어디서부터 무얼 말해야 할는지를 몰라 하나님의 지시를 잠잠히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은 한 점도 없다. 에스겔은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은 맑다.
에스겔이 파수꾼으로 세움 받음 (3:16-27)
(17-21)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니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 족속에게 나의 경고를 그대로 전하여라. 가령 내가 어떤 악인에게 말하기를 ‘네가 네 죄로 인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는데도, 네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에게 경고하여 깨우쳐주지 않거나, 또는 그 악인을 말로 타일러서 그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떠나게 하여 자기 생명을 구원받도록 경고해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의 죄로 인해 자기의 죄악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지만, 나는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네게 책임을 묻겠다. 하지만 가령 네가 그 악인에게 그 사실을 경고하여 깨우쳐주었는데도, 그 악인이 자기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악인은 자기 죄로 인해 자기의 죄악 가운데서 죽을 것이지만, 너는 그 피에 대해 아무런 책임 없이 네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게 될 것이다. 또 가령 의인이 자기의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 악을 행한다면, 그가 이전에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내가 그 앞에 거치는 장애물을 놓아두면, 그가 거기에 걸려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네가 그 의인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그가 자기의 죄악 가운데서 그렇게 죽게 된 것이라면, 나는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네게 책임을 묻겠다. 하지만 가령 네가 그 의인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함으로써 그가 죄를 짓지 않으면, 그는 경고를 달게 받아들여 깨우쳤으므로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고, 너도 네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발 강가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지 7일 후, 과연 주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한다. 이때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17절). 파수꾼은 성읍의 망대나 높은 곳에 올라, 성읍으로 다가오는 대적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펴서 그 사실을 성읍 안의 백성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은 자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같은 파수꾼의 임무를 맡기셨다. 따라서 이제 에스겔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일깨우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둘째, 이제부터 파수꾼으로서 에스겔은 죄악 가운데 있는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그들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만일 이 같은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다면, 악인이 죄악 가운데서 죽더라도 에스겔은 악인의 죽음과 파멸에 대해 자기 책임을 면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에스겔은 악인의 죽음과 파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18-19절).
셋째, 의인의 타락에 대해서도 에스겔은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의인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죄에서 돌이킨다면, 의인도 살고 에스겔도 살게 된다. 그러나 에스겔이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아서 의인이 죄악 가운데서 죽는다면, 의인도 죽고 에스겔도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20-21절).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서 악인이든 의인이든 죄악 가운데 있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함으로써 그들에 대해 경고하고 그들을 깨우쳐야 한다. 에스겔의 사명은 거기까지였다. 에스겔의 메시지를 듣고 그 백성들이 돌이키든 돌이키지 않든 그것에 대한 책임은 에스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 이처럼 에스겔에게 파수꾼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일러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강력한 권능의 손길로 에스겔을 굳게 붙잡아주셨다. 그런 뒤에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신다.
(22절) “너는 일어나, 들판으로 나가라. 거기서 내가 네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에스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판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주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셨다. 그 영광은 이전에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영광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에스겔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즉시 땅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셔서 그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런 뒤,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24-27) “너는 일어나 가서, 네 집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거기 틀어박혀 있어라. 너 사람의 아들아, 장차 무리들이 너를 밧줄로 꽁꽁 묶어놓아, 네가 사람들에게로 나가서 활동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달라붙게 해서 너를 벙어리 되게 함으로써 너로 이 백성을 향해 경고하거나 꾸짖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이 백성이 너무나도 나를 거슬러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내 말을 넣어줄 때는 네 입을 열어놓을 것이니, 너는 이 백성에게로 가서 선포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하여라. 그러면 네 말을 들으려 하는 자들은 들을 것이고, 들으려 하지 않은 자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은 참으로 나를 거슬러 반역하는 족속이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깨우치는 임무, 곧 파수꾼의 임무를 에스겔에게 맡기신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단단히 다지도록 한두 가지 조처를 취한다.
먼저, 에스겔로 하여금 집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거기에 얼마 동안 틀어박혀 있도록 하셨다(24절). 그것은, 장차 에스겔이 선지자 사역을 수행할 때 악한 무리들이 에스겔을 밧줄로 꽁꽁 묶어놓아 밖에 나가 활동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표하는 행위였다(25절). 따라서 이는 실제로 에스겔의 몸이 육체적으로 꽁꽁 묶인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다만 에스겔의 선지자 사역이 악한 무리들에 의해 거센 도전을 받고 온갖 방해를 받아서 그의 선지자 활동이 여러모로 많이 제한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얼마 동안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달라붙게 해서 그를 벙어리로 만드셨다(26절). 이는 에스겔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경고하거나 꾸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겔이 말할 것이 있어 말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에스겔의 입을 열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경고하거나 꾸짖게 하실 것이었다(27절).
‘아,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아무 때나 내 의지나 내 방식으로 말할 수 없게 하시는구나….’
그렇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에스겔은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입을 열어 메시지를 선포해야만 했다. 이런 선지자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다.
4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예언함 (4:1-17)
(1-3)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납작한 흙벽돌을 가져와서 네 앞에 놓고, 그 위에다 한 성읍 곧 예루살렘 도성을 그려라. 그런 다음, 그 도성을 포위하는 행위를 시작하여라. 곧 성벽을 공격할 사다리를 세우고, 공격용 흙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성벽을 허물어뜨릴 쇠망치를 배치시켜라. 그런 다음, 얇은 철판을 또 가져다가 너와 도성 사이에 두어 철 성벽을 세우고, 대적이 그 도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그 도성을 에워싸라.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한 징조인데, 곧 예루살렘 도성이 머잖아 이처럼 포위공격을 당할 것이다.”
납작한 흙벽돌 위에 예루살렘 도성의 지도를 그린 다음, 그 주위에 그 성읍을 공격할 사다리, 흙 언덕, 진(陣), 쇠망치 등을 배치시키고, 또 얇은 철판으로 철 성벽을 세워 그 도성을 빙 둘러싸라는 지시였다.
‘무얼 뜻하는 걸까? 이건 분명 강력한 군대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여 공격한다는 것이로구나….’
에스겔의 행위 예언: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
그렇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이것은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조였다. 따라서 포로 된 유다 백성들은 에스겔이 예루살렘에 일어날 운명에 대하여 일종의 모형 제작을 통해 행위로써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 아주 분개하고 두려워했으며, 또한 에스겔을 크게 미워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에스겔이 이 같은 행위를 한 때는 그가 바빌로니아 땅에 사로잡혀 온 지 5년째 되던 해이므로(주전 593년), 과연 이때로부터 5년 후쯤에 느부갓네살 왕이 이끄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에워싼 채 포위 공격을 감행하였고(주전 588년), 그로부터 1년 6개월 뒤에 예루살렘 도성이 함락되고 말았다(주전 586년, 왕하 25:3).
(4-8) “너는 또 왼편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감당하도록 하여라. 네가 그렇게 누워 있는 날수만큼, 너는 그들의 죄악을 감당하게 된다. 나는 이스라엘 족속이 내 앞에서 죄악을 저지른 햇수대로 네가 감당해야 할 날 수를 정해두었는데, 그 날수는 곧 390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390일 동안 왼편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날수가 다 차면, 너는 이제 오른편으로 누워서 유다 족속의 죄악을 감당하도록 하여라. 유다 족속을 위해서는 내가 그 날수를 40일로 정하였는데, 여기서 1일은 1년을 가리킨다. 너는 또 그렇게 누워 있을 때에도 네 얼굴을 포위된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붙인 채 그 도성의 멸망을 예언하라. 이때 내가 네 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네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돌아눕지 못하게 할 것이니, 네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한 모든 날수를 다 채울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명하신 ‘행위 예언’이다. 여기서 ‘왼편으로 눕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 쪽을 바라보는 행위이고, ‘오른편으로 눕는 것’은 남왕국 유다를 바라보는 행위다. 북왕국 이스라엘 쪽을 향해 왼편으로 누워 있는 기간은 390일이었는데,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창건될 때(주전 930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귀환 때(주전 537년)까지의 대략적인 기간을 뜻한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 쪽을 향해 오른편으로 누워 있는 기간은 40일이었는데, 이는 유다의 멸망 때(주전 586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귀환 때(주전 537년)까지의 대략적인 기간을 뜻한다. 물론, 여기서 1일은 1년을 가리킨다. 그런데 두 왕국을 위해 누워 있는 기간을 합치면 ‘430년’이 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종살이 기간과 똑같다(출 12:40). 말하자면 남북 왕국의 430년은 이집트 종살이 같은 고난과 수욕과 죄악과 유수(幽囚)의 기간인 것이다.
한편, 이때 에스겔은 정말로 430일 곧 1년 이상을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만 계속 누워서 지낸 것은 아니다. 이 기간에 에스겔은 다른 일을 행했고(9-12절), 또한 설교와 예언과 제사장 사역을 감당했다. 따라서 에스겔은 하루 중 어떤 시간에 옆으로 눕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취하는 에스겔의 이 같은 행동은 바빌로니아 땅의 동족들에게 예루살렘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9-12) “너는 또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준비하여, 그것들을 모두 한 그릇에 담은 뒤에 그것들로 빵을 굽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가 옆으로 누워 있는 390일 동안 그 빵을 내내 먹도록 하여라. 그 빵을 먹되, 하루에 빵 20세겔의 무게만큼만 달아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먹도록 하여라. 그리고 물도 마시되, 하루에 6분의 1힌씩만큼만 재어 시간을 정해놓고 따라 마셔라. 너는 그것을 보리빵처럼 만들어서 먹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지펴 굽도록 하여라.”
온갖 곡물들을 긁어모아 빵을 구운 뒤에 누워 있는 기간(390일) 동안 시간을 정해놓고 내내 먹되, 저울로 정확하게 달거나 재어서 하루에 빵은 20세겔씩(대략 230그램), 물은 1/6힌씩(대략 0.6리터) 먹도록 하라는 지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아주 소량의 빵과 물을 먹도록 명하신 것은, 조만간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어야 할 극심한 기근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 예언’이었다. 나중에 바빌로니아 군대에 의해 18개월 동안 포위된 예루살렘 백성들은 극심한 기근을 겪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자식을 삶아먹는 처참한 지경까지 이르렀다(애 2:20; 4:10).
이때 하나님은 인분으로 불을 지펴 빵을 굽도록 했는데, 인분(人糞)은 모세 율법의 정결 규례상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고(신 23:12-14), 그래서 그것으로 구운 빵도 부정한 빵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주께서 에스겔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13절) “내가 온 세상의 뭇 민족들 가운데로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내어 흩을 것이니, 그들이 거기서 이처럼 부정한 빵을 먹게 될 것이다.”
이에 에스겔이 크게 탄식하며 응답한다. 제사장 집안 출신의 에스겔은 일생 동안 순결하게 모세의 정결의식의 법을 지켜왔기에, 부정한 빵을 아무래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4) “아, 주 하나님이시여! 어찌 제게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지금껏 저는 제 몸을 더럽힌 적이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은 동물이나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고, 또 온갖 부정한 고기들도 제 입으로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에스겔의 호소를 듣고, 하나님은 일평생 부정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던 제사장 에스겔의 열망과 처지를 십분 이해하셨다. 그래서 조금은 더 가벼운 지시를 내리신다.
(15)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에 쇠똥 사용하는 것을 허락할 테니, 너는 그것으로 빵을 굽도록 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주께서는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앞서 에스겔에게 소량의 빵과 물을 먹도록 명하신 까닭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는 말씀이다.
(16-17)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머잖아 예루살렘에 식량 공급을 모두 끊어버릴 것이니, 그때에 사람들은 근심에 휩싸인 채 빵을 조금씩 달아서 먹을 것이고, 공포에 휩싸인 채 물을 조금씩 재어서 마실 것이다. 그때에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빵과 물이 극히 부족할 것이므로, 백성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스스로 쇠약해져 말라죽을 것이다.”
5
예루살렘 백성을 치는 칼 (5:1-4)
(1-4) “너 사람의 아들아, 너는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준비하여라. 그런 뒤, 너는 그 칼을 면도칼 삼아 네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라. 그리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서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라. 네가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고 있는 날수가 다 차면, 그 털 가운데 3분의 1은 성읍 한가운데서 불살라버리고, 3분의 1은 성읍의 사방 둘레를 돌면서 네 칼로 내려치고, 나머지 3분의 1은 바람에 날려 산산이 흩어버려라. 그러면 내가 칼을 빼들고 그 뒤를 뒤쫓아 가겠다. 그러나 너는 그 털 중에서 약간을 남겨서 네 옷자락에 싸매어 두었다가, 그중에서 또 얼마를 꺼내어 불속에 던져 태워라. 거기에서 나온 불이 이스라엘 족속 전체로 번져갈 것이다.”
에스겔 이전에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도 그랬지만, 에스겔은 특히 다양한 상징적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른바 ‘행위 예언’을 많이 활용한 선지자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시청각을 통한 상징적인 행동으로써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명하신 것은 그 메시지의 효과를 훨씬 생생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오, 주여… 어찌 내게 이리도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일을 시키십니까?’
당시 유다 백성들의 심령 상태는 아주 무디고 완악해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메시지의 선포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보기에 민망하고 괴이할 정도로까지 온갖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그 행동을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깨닫도록 하려고 그처럼 행했던 것이다.
에스겔의 행위 예언: “칼로 털을 내려치라!”
본서에는 대략 12번의 그런 상징적인 행동들이 나타나는데, 본문도 그중 하나다. 본문에서 에스겔은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 행위를 취했다. 여기서 ‘칼’은 전쟁과 죽음을 상징하고, ‘머리털과 수염’은 수많은 유다 백성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에스겔의 이 행동은 장차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유다 백성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중 1/3은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고, 1/3은 적군의 칼에 의해 살육당하고, 나머지 1/3은 포로로 잡혀가 이방 땅 도처에 흩어져 거기서 죽게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깎은 머리카락과 수염 중에서 얼마는 에스겔의 옷자락에 싸매졌다(3절). 그것은 두렵고 끔찍한 심판의 와중에서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될 ‘소수의 남은 자들’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존된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계속 이어갈 계획을 가지셨다(사 10:20-22; 37:31-32).
예루살렘에 대한 철저한 심판 (5:5-17)
(5-7) “예루살렘은 이러하니, 곧 내가 예루살렘을 여러 이방 민족들의 중앙에 세워 다른 뭇 나라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그러나 그 성읍은 나의 규례를 어겨, 주변의 여러 이방 민족들보다 더 많은 악을 저질렀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다른 뭇 나라들보다 더욱 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정말로 그 성읍은 내 규례를 저버리고 내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정녕 너희가 제멋대로 소란스럽게 행동하여,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여러 민족들보다도 더욱 내 율법과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심지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여러 이웃 민족들이 지키는 올바른 규례조차도 따라 행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일에 있어, 예루살렘이 주변의 여러 이웃 나라들보다 못하고 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예루살렘(유다와 이스라엘)은 열방 중 특별히 선민으로 택함을 받아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 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배반했다.
둘째, 특별히 선택받아 먼저 부르심을 받은 예루살렘(유다와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을 맡았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힘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방해물만 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그런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했다.
(8-12)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예루살렘아, 이제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너희를 칠 것이다. 너희를 치되,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방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 가운데 벌을 내리겠다. 너희가 자행한 온갖 더럽고 가증한 일들로 인해 내가 너희에게 벌을 내리되, 너희가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영 경험하지 못할 아주 무서운 벌을 내리겠다. 그러므로 내가 벌을 내리는 그날에,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잡아먹는 아주 끔찍하고도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 내가 그런 지독한 벌을 너희에게 내릴 것인즉, 설령 너희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해도 내가 그들을 온 세상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하고, 내가 나의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각종 보기 싫은 우상들과 온갖 혐오스러운 행위들로 내 성소를 심히 더럽혀 놓았으니, 나도 더 이상 너희를 아껴 소중히 다루거나 너희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고, 너희를 심히 약하게 하고 아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백성들 가운데 3분의 1은 전염병으로 죽거나 굶주림으로 쓰러져 죽을 것이고, 3분의 1은 성읍 밖의 사방에서 칼에 찔려 죽을 것이며, 나머지도 3분의 1은 내가 온 세상 가운데 산산이 흩어버린 뒤에 내가 또 칼을 빼들고 거기까지 뒤따라가서 그들을 죽일 것이다.”
앞서 에스겔이 취한 상징적인 행동(1-4절), 곧 날카로운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른 뒤 그것을 균일하게 삼등분해서, 각각 1/3의 머리카락과 수염으로써 다른 행동을 취한 일에 대한 설명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삼분의 일(1/3)은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전염병이나 굶주림으로 죽고, 삼분의 일(1/3)은 도성 밖에서 적군의 칼에 찔려 죽고, 나머지 삼분의 일(1/3)은 먼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가 온 세상 도처에 산산이 흩어진 뒤에 죽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혹한 형벌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곧 유다 백성들에 대하여 이토록 크게 진노하시는가? 예루살렘이 자행한 ‘온갖 더럽고 가증한 일들’ 때문이었다(9절). 이는 곧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하여 갖가지 목석(木石)의 우상들을 만들어 섬겼다. 유다 땅에는 이 같은 이방 우상들을 섬기기 위해 도처에 제단들이 쌓여졌고 산당들이 세워졌다. 또한 우상숭배의 제사 의식에는 온갖 더럽고 음란한 행위들이 버젓이 자행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자녀를 불살라 희생제물로 바치는 유아(幼兒) 인신제사까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진노가 폭발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17) “내가 이렇게 내 진노를 하나도 남김없이 너희에게 다 쏟아부은 후에야, 너희를 향한 나의 분노가 풀려 내 마음이 시원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나의 진노를 다 쏟아부으면 그제야 너희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니, 곧 내가 왜 그토록 우상을 미워하고 질투하여 너희를 향해 격렬하게 말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심판의 그날에, 내가 또 너 예루살렘을 완전한 폐허로 만들어 네 이웃의 모든 민족들에게 조롱거리로 삼겠다. 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너를 비웃고 손가락질하게 만들겠다. 그날에 내가 분노와 진노와 엄중한 질책으로 너 예루살렘을 벌할 것이니, 그때에 너는 너를 둘러싸고 있는 네 주변의 뭇 나라들과 민족들에게 한낱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경고와 경악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는 나 주의 말이다. 그날에 내가 또 사람을 멸망시키는 극심한 기근의 화살을 너희에게 쏘아 너희를 다 멸할 것이니, 갈수록 점점 더 끔찍한 기근의 화살을 퍼부어 마침내 너희가 먹고 살 양식을 모두 끊어버릴 것이다. 그날에 내가 또 기근과 더불어 사나운 들짐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그것들이 너희 자식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너희가 자식 없는 외로운 신세가 될 것이다. 내가 또 너희 가운데 전염병이 널리 퍼지게 하고, 너희를 살육하는 대적의 칼이 도처에서 너희에게 닥치게 할 것이다. 이는 나 주의 말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한지, 본문에 묘사된 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을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아주 크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가혹하게 엄히 징벌하셨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의 분노와 달리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하고 의로운 것으로서, 자기 백성들의 오랜 배반과 타락과 거역에 대한 적절하고 마땅한 반응이다.
‘주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우리 유다 백성들이 주님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욕망을 좇아 헛되고 거짓된 이방 우상들을 섬겼을 때, 이에 질투하시는 주님께서 크게 진노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진노가 마침내 공의로운 징벌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음을 부디 백성들로 깨닫게 하소서….’
에스겔은 제발 그렇게 깨닫게 되기를 빈다. 따라서 심판의 그날에 예루살렘은 자신들에게 임한 가혹한 징벌에 대해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고, 오직 스스로의 죄악에 대해 원망해야 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자초한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뿌린 것을 그대로 거둬들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6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형벌 (6:1-14)
어느 날, 주님의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또 임한다. 이번에는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추어, 그 가증한 죄악에 대하여 징벌하신다는 내용이다. 에스겔의 이 예언은 이때로부터 5년 후쯤에 유다 땅과 예루살렘 도성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주전 586년).
(2-7) “너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산들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에게 내리는 나의 심판의 말을 선포하라! 너는 선포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산들아,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곧 내가 너희를 칠 재앙의 칼을 보낼 것이니, 그 칼이 너희의 산당들을 모조리 때려 부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벌하리니,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던 너희 제단들을 모두 허물어뜨리고, 우상에게 향을 피워 올리던 너희 분향단들도 산산이 부수어버리겠다. 또 내가 너희로 대적의 칼에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게 하여, 너희가 섬기던 우상들 앞에서 고꾸라지게 만들겠다. 그날에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시체를 가져다가 그들이 섬기던 우상의 발 앞에 내던지고, 너희의 해골을 가져다가 우상의 제단 사방에 흩어놓겠다. 내가 또 너희의 모든 성읍을 헐어 황무지로 만들고, 너희의 모든 산당을 파괴하여 못쓰게 만들 것이다. 너희의 제단을 깨뜨리고, 너희의 우상을 부수며, 너희의 분향단을 찍어 토막을 낼 것이다. 너희가 손으로 만든 것들, 곧 너희의 모든 우상들을 산산조각 깨뜨려버릴 것이다. 또 너희로 대적의 칼에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게 하여, 너희 가운데 칼에 찔려 죽은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있게 할 것이니, 그제야 너희가 내가 전능하신 만군의 주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의 산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향하여 심판의 말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2절). 이는 ‘우상숭배’를 정죄하기 위해서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나 사당은 대부분 산의 꼭대기나 언덕이나 시내나 골짜기나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세워졌다(왕상 14:23). 따라서 산을 향한 선포는 산속에 세워져 있는 각종 우상들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정죄하는 행위였다.
심판의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산속에 있는 모든 우상의 제단과 사당과 분향 제단을 산산이 부수고 쪼개고 깨뜨릴 것이고, 또한 적군의 칼에 살육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와 해골을 그들이 평소에 그토록 열렬하게 섬기던 각종 이방 우상들의 발아래 내던질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환난과 고통의 날에 우상들은 자신들을 열심히 섬기던 숭배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그야말로 무능하고 헛되고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 입증해 준다. 어리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떠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짜요 헛것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8-10) “그러나 나는 너희 가운데 얼마를 살려두겠다. 그래서 그들 남은 자들로 전쟁의 칼을 모면하게 한 뒤에, 그들을 산산이 헤쳐 온 세상의 뭇 나라들 가운데 흩어져 살아가게 하겠다. 너희 가운데 대적의 칼에 찔려 죽지 않고 사로잡혀 포로가 된 자들은 이방 민족들 가운데 살면서 나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그 낯선 이방 땅에서 자신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감으로써 얼마나 나를 화나게 했는지, 또 음란한 눈으로 이방 우상들을 숭배함으로써 얼마나 내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를 떠올리고, 스스로를 한탄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나 주를 버리고 이방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일을 행함으로써 참으로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비로소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밝히 알 것이니, 내가 일찍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포한 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의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가서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숭배했다고 말씀하신다(9절).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행위를 간통에 비유하신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명백히 배우자와 맺은 결혼 서약을 깨뜨리는 간통이었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서약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 백성을 지키고 보호해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 이는 남편과 아내의 ‘부부 서약’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남편’이라고 칭하면서 이스라엘을 ‘아내’로 대했던 것이다(사 54:5-6; 렘 3:14; 31:32; 호 2:19-20).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런 부부의 서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우상을 섬겼으니, 그런 행위는 일찍이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신뢰의 부부 서약을 깨뜨리는 배도 행위로서 음란한 간통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진다.
(11-14)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이 백성을 향해 외쳐라. 크게 외치기를 ‘아, 슬프다! 이스라엘 족속이 망하게 되었구나.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죄를 지었으므로, 전쟁의 칼과 흉년의 굶주림과 독한 전염병으로 멸망하게 되었구나. 멀리 도망친 자들은 전염병에 걸려 죽고, 이 나라에 살아남은 자들은 칼에 찔려 죽고, 용케 살아남은 자들은 적군에게 포위당한 채 꼼짝없이 굶어죽게 되었구나. 나 주가 이같이 너희에게 내 분노를 사정없이 쏟아부을 것이니, 대적의 칼에 살육당한 무수한 시체들이 너희의 모든 우상들 사이에, 제단들 주변의 여기저기에, 높은 산들과 작은 언덕들에, 모든 푸른 나무들 아래와 무성한 상수리나무들 아래에, 곧 너희가 너희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리며 제사를 지내던 모든 곳들에 아무렇게 버려져 나뒹굴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너희가 비로소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정녕 그날에 내가 내 진노의 손길을 그들 위에 뻗쳐 그들을 사정없이 칠 것이니, 그들이 살고 있는 온 땅 곧 남쪽의 광야에서부터 북쪽 끝의 디블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모든 땅을 황폐하게 하여 폐허로 만들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비로소 내가 ‘주 하나님’인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니, 에스겔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민망하여 얼른 나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싶으셨다.
일반적으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행위는 큰 기쁨의 표현이다(25:6). 하지만 여기선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의 악하고 가증한 행위에 대해서 준엄하게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결코 기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선포하는 에스겔의 메시지에 누구나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동감 있게 격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겔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예언하면, 사람들은 그 모습이 특이하고 신기해서라도 한 번 더 쳐다보고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처절한 징벌이었다. 전쟁의 칼과 흉년의 굶주림과 독한 전염병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통 사로잡아, 그들의 시체들로 온 땅이 가득 채워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의 광야에서부터 디블라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수습되지 못한 그들의 시체들이 마구 나뒹굴고 널브러지게 될 것이었다. 여기서 ‘광야’는 이집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최남단 광야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디블라’는 분명 ‘리블라’(Riblah)를 가리키는 듯한데, 리블라는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성읍으로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이다. 결국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에서 북쪽 경계까지를 일컫는 말로, 곧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킨다.
‘아, 주님… 주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엇 때문에 이토록 무서운 진노를 이스라엘 전역에 쏟아붓는 것입니까?’
에스겔은 속으로 질문을 해놓고도 스스로 답을 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이 ‘주(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3-14절). 이때의 ‘깨달음’은 생생한 체험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참된 사실을 알게 되는 깨달음으로,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철저히 파멸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품성과 권능을 뼈저리게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극히 미워하시고, 그 죄악에 대해 반드시 징벌하시는 공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지닌 분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징벌을 통해 아무 능력도 없는 헛되고 무능한 우상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뜻한 바대로 능히 이룰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7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7:1-9)
(2-4) “너 사람의 아들아, 이제 나 주가 이스라엘 땅을 향하여 선포한다. 보라, 마지막이 왔다! 이 땅의 사방 구석구석까지 마지막이 닥쳐왔다! 이제 네게 마지막이 닥쳐왔으니, 내가 너희에게 내 모든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내가 너희 행실을 조목조목 따져 네가 행한 행실대로 너를 심판할 것이니, 곧 네가 행한 모든 가증한 행위에 대하여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그날에 내가 너를 아껴 소중히 다룬다거나, 혹은 너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오직 네가 행한 행실대로 너를 벌할 것이고, 네가 저지른 가증스러운 행위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그제야 내가 주인 줄 너희가 알 것이다.”
하루는 주님의 말씀이 또 에스겔에게 임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제 ‘마지막’(끝)이 닥쳐왔는데, 그날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자비 없이 자신의 분노를 이스라엘 땅에 쏟아부을 것이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그들의 가증한 죄악대로 그들 위에 무시무시한 심판을 가차없이 집행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마지막’은 사태의 긴박성을 강조하는 말로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방 군대에 의해 멸망하는 때를 가리킨다(주전 586년 4월 9일, 왕하 25:3). 바로 그때가 목전에 임박했다는 의미다. 또 다른 날에 주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또 임한다.
(5-9) “재앙이다! 정말로 놀랍고 두려운 재앙이다! 보라, 그 재앙이 가까이 닥쳐왔다! 마지막이 왔다! 마지막이 왔다! 마지막이 너희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드디어 일어섰다. 보라, 그 마지막이 가까이 닥쳐왔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백성들아, 주께서 정해놓으신 재앙의 날이 네게 닥쳐왔다. 마침내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이 닥쳐왔다. 그날은 전쟁의 함성으로 온 땅이 떠들썩한 날이고, 더 이상 산에서 즐겁게 환호성을 외치는 날이 아니다. 그날에 내가 나의 분노를 너희 위에 모조리 쏟아부을 것이고, 나의 진노대로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래서 네 행위에 따라 너를 징벌할 것이니, 곧 우상을 숭배한 네 모든 가증한 행위에 따라 네게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그날에 내가 너를 아껴 소중히 다룬다거나, 혹은 너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오직 네가 행한 행실대로 너를 징벌할 것이고, 네가 저지른 가증스러운 행위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그러면 그제야 너는 너를 치는 것이 나 주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앞서 선포한 메시지와 유사하다(2-4절).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곧 그 마지막 재앙의 날이 가까이 닥쳐왔는데, 그날에는 어떤 자비나 긍휼도 없이 오로지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가증한 죄악대로 무시무시한 징벌을 집행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사실, 자비와 긍휼은 일찍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베풀어졌었다. 하지만 그날은 더 이상 자비의 때가 아니라 심판의 때였다.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참으시면서 그토록 끊임없이 베푸신 그 모든 자비와 긍휼을 멸시하고 배척한 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에게는 그날에 아무런 자비와 긍휼 없이 재앙의 심판이 집행될 것이다. 그런 철저한 심판을 통해 유다 백성들은 그제야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될 것인데, 곧 죄를 미워하시고 악인을 징벌하시는 주님의 공의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심판의 그날 (7:10-27)
(10-13) “보라, 그날이다! 보라, 그날이 닥쳐왔다! 정해진 재앙의 날이 닥쳐왔으니, 마침내 너희의 죄악을 징벌할 몽둥이에 꽃이 피었고 너희의 교만을 징벌할 방망이에 싹이 텄다. 난폭하고 잔인한 자가 일어나서 너희의 죄악을 징벌할 몽둥이가 되었으니, 그 몽둥이는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고 사정없이 내려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백성들도, 이 무리들도, 이 땅의 모든 재물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질 것이고,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도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없어질 것이다. 그때가 이르렀고, 그날이 닥쳐왔다. 그러므로 이제 물건을 사는 사람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사람도 슬퍼하지 말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예외 없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물건을 판 사람이 살아있다 해도, 그는 그 팔린 물건을 도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보여준 나의 환상은 결코 돌이키지 아니하고 그대로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악한 생활을 하면서 죄를 짓고서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굳세게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과 교만을 징벌할 몽둥이는 ‘바빌로니아 군대’를 가리킨다. 에스겔이 묻는다.
“주여, 그 몽둥이에 싹이 트고 꽃이 피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건, 때가 무르익어 그 몽둥이가 움직일 때가 이르렀다는 의미다. 곧 느부갓네살 왕이 바빌로니아 군대를 일으켜 유다와 예루살렘을 징벌할 때가 이르렀다는 의미이니라.”
아하! 그렇다면, 그런 징벌의 때가 이르면, 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가옥이나 땅이나 물건 등을 사고파는 일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먼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므로, 그런 것들이 더는 아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14-22) “이 땅의 백성들이 나팔을 불어 군사를 모으는 등 모든 전쟁 준비를 다 갖춘다고 할지라도 막상 전쟁터에 나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 진노를 쏟아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읍 밖에서는 적군의 칼에 찔려죽을 것이고, 성읍 안에서는 혹독한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들판에 있는 사람은 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고, 성읍 안에 있는 사람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삼켜질 것이다. 이 땅의 백성들 가운데 더러 살아남은 자들이 산속으로 피신할지라도,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골짜기의 비둘기처럼 탄식하며 슬피 울 것이다. 그날에 이 땅 백성들의 모든 손은 맥이 빠져 힘을 쓸 수 없겠고, 그들의 무릎은 물처럼 흐늘흐늘 아주 쇠약해질 것이다. 또 그날에 그들은 모두 굵은 삼베옷을 걸쳐 입고 두려움에 빠져 벌벌 떨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수치심이 가득할 것이고, 그들의 머리카락은 번민 중에 다 빠져 대머리가 될 것이다. 또 그날에 그들은 자기들의 은을 길거리에 버리겠고, 자기들의 금을 오물인 양 더럽게 여길 것이다. 그 까닭은, 나 주가 활활 불타는 진노로 그들에게 무서운 재앙을 베풀 때에, 자기들의 은과 금이 자기들의 목숨을 능히 건져줄 수 없고, 자기들의 심령을 조금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며, 자기들의 허기진 배를 하나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도리어 그것들이 자기들을 걸려 넘어지게 해서 죄만 짓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은과 금으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그것을 자랑함으로써 교만해졌고, 또 그것으로 온갖 가증한 우상들과 보기 싫은 가증한 물건들을 만듦으로써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은과 금을 그들에게 더러운 오물이 되게 하겠고, 또 그것들을 다른 이방 침략자들의 손에 붙여 약탈해 가게 할 것이며, 세상의 악인들에게 붙여 약탈해 가게 하고 더럽히게 할 것이다. 그날에 내가 내 얼굴을 내 백성들에게서 돌이켜 떠나갈 것이니, 이방 침략자들이 내 은밀한 처소인 성전을 마구 짓밟아 더럽힐 것이고, 난폭한 군사들이 거기로 들어와 성전의 물건들을 마구 약탈해 갈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 위에 진노의 심판을 베푸시는 날, 곧 그들 위에 재앙이 임하는 날의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었다. 실제로 과연 그러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이끄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1년 6개월 동안 포위한 채 공격했을 때(주전 588년 10일 10일~주전 586년 4월 9일), 예루살렘 주민들은 도처에서 살육당하거나 죽어 나갔다. 예루살렘 성읍 밖에서는 바빌로니아 군사들의 칼에 찔려 죽었고, 성읍 안에서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바빌로니아 군대에 맞서 싸울 군사들이 없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두려움에 빠져 벌벌 떨었다. 그날에 그들은 굵은 삼베옷을 걸쳐 입고 슬피 통곡할 것인데, 온갖 번민과 고통으로 인해 그들의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될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에게 은과 금이 더는 소용없게 되었다. 그것들이 목숨을 구하거나 심령을 만족시켜 주거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런 은금(銀金)으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우상을 만드는 등 죄만 잔뜩 지었고, 그 결과로 작금의 큰 재앙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날에는 그것들이 단지 오물이나 쓰레기처럼 취급될 것이다.
또한 재앙의 날에 가장 처참한 광경은, 침략자들이 주님의 은밀한 처소인 성전까지 쳐들어와 그곳을 마구 더럽히며 거기 있는 물건들을 멋대로 약탈해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주께서 자신의 얼굴을 그 백성들에게서 돌이켜 그곳 성전을 떠나갔기 때문이다(22절). 하나님께서 떠나가신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한 처소가 아니라, 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방 군대에 의해 더럽혀지고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23-27) “자, 이제 너는 쇠사슬을 준비해두어라. 피 흘리는 살인의 죄가 이 땅에 가득 차 있고, 남을 해치는 폭력의 악이 이 성읍에 가득 차 있으므로, 네가 기필코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자비한 자들을 데려다가 예루살렘의 좋은 집들을 차지하게 하겠고, 그 성읍의 악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버릴 것이니, 그날에 그들의 성소가 더럽혀질 것이다. 재앙이 닥치면 그들은 애써 평강을 찾겠지만, 그 땅 어디에서도 평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재앙에 재앙이 겹치고,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그날에, 이 땅의 백성들은 선지자를 찾아가 애타게 계시를 구하겠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 없는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정녕 그날에는 제사장들에게는 가르칠 율법이 없어질 것이고, 장로들에게는 조언할 지혜가 사라질 것이다. 왕은 통곡할 것이고, 지도자들은 절망에 휩싸일 것이며, 백성들의 손은 두려움으로 인해 덜덜 떨릴 것이다. 그날에 내가 이 백성들이 저지른 행위대로 다 갚을 것이고,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따라 그들을 심판할 것이니, 그제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너는 쇠사슬을 준비해두어라!”
유다를 침공한 대적들이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쇠사슬로 묶어 포로로 끌고 가기에 편리하도록 미리 자신들이 묶일 쇠사슬을 준비해놓으라는 말씀이다. 그만큼, 유다의 패망과 예루살렘 백성들의 포로 됨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유다 백성들 및 예루살렘 주민들의 교만과 죄악을 징벌하는 ‘심판의 날’이 반드시 임하고야 말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유다가 패망하고 예루살렘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의 날은 분명히 이를 것인데, 그런 환난의 때에 유다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제사장들의 율법적인 지식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이며, 장로들의 경험이나 조언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심판과 재앙의 그날에는, 유다의 왕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크게 통곡하며 두려움으로 벌벌 떨기만 할 것이다. 그날에는 온 천지 사방에 살육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여기저기 마구 널브러진 시체들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 곧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게 된 까닭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계약 의식은, 만일 계약을 어기면 죽임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희생 짐승을 담보로 삼았다(창 15:17).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계약을 맺었고, 이스라엘이 먼저 계약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셔서 몇 번이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대 위에 세우실 것이다.
8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행해진 우상숭배 (8:1-18)
“오, 오, 주… 주님!”
에스겔 일행이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사로잡혀 온 지 6년째 되던 해의 6월 5일, 그러니까 바빌로니아 군대의 제2차 유다 침공 때(주전 597년), 에스겔이 유다 왕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많은 동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끌려온 지 6년째 되던 해(주전 592년)의 6월 5일, 이때는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때로부터 만 14개월이 지난 때다.
그날 에스겔은 자신의 집에 앉아 있었고, 유다의 장로들은 에스겔을 찾아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의 손길이 에스겔을 온전히 사로잡았다. 주님의 손길이 홀연히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로 끌고 간 것이다.
“아앗! 저… 저것은…? 일전에 내가 본…?”
그때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바라보니 불 모양 같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는데, 그분의 허리 아래쪽 하반신의 모습은 불처럼 생겼고, 그분의 허리 위쪽 상반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쇠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 이분의 모습은 일전에 에스겔이 선지자의 소명을 받을 때에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의 모습과 똑같았다(1:27). 그런데 이때 그분은 손처럼 생긴 것을 에스겔에게로 쭉 뻗어 에스겔의 머리털을 꽉 움켜잡으셨다. 그러고는 주님의 영(靈) 곧 성령께서 에스겔을 하늘과 땅 사이로 쑥- 들어 올리시더니,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서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 안뜰의 북쪽 문 입구에 내려놓으셨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질투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니?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감히 이방 우상이 세워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워진 이 우상은 가나안 족속들의 모신(母神)인 ‘아세라’ 여신상인 듯하다. 사악한 유다 왕 므낫세가 통치하던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에 이 우상은 성전 안에 세워져 숭배되었는데(왕하 21:7), 이후 선왕(善王)인 요시야 때에 파괴되었다가, 요시야 사후에 그의 뒤를 이은 악한 왕들(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에 의해 다시 제자리에 복원된 듯하다.
이처럼 성전에 이방 우상이 세워져 있는데도 그곳 성전에는 여전히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는데, 그 영광의 모습은 일전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들판에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이때로부터 1년 2개월 전에 에스겔이 주께로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받을 때 주님의 명에 따라 들판으로 나갔는데, 그때 에스겔은 그 들판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이다(3:22). 그리고 그때 본 주님의 영광은 에스겔이 맨 처음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발 강가’에서 체험한 그분의 영광과 똑같았다.
말하자면,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소명 및 사명을 주시고, 또 여러 환상을 보여주시는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이제 그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물론, 비몽사몽의 환상 가운데서다. 그리고 이때 에스겔 앞에 앉아 있던 유다의 장로들은 환상을 보지 못했고, 에스겔 홀로 신비로운 환상을 체험하고 있었다.
(5) “너 사람의 아들아, 이제 네 눈을 들어 북쪽을 보아라.”
주님의 지시에 따라 에스겔은 눈을 들어 성전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번제단으로 통하는 성전 문의 북쪽 입구에 그 질투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 주께서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신다.
(6) “너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족속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고 있느냐? 저들은 이곳 성전에서 심히 가증스러운 짓을 행하여, 나로 하여금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보다 더욱 가증스러운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때에 이스라엘 족속이 성전에서 자행한 심히 가증스러운 짓은, 성전의 사면 벽에다 기어다니는 곤충들과 갖가지 짐승들, 그리고 여러 우상들을 그려놓고, 그것들을 섬기는 행위였다(10-11절). 하나님의 성전에다 이처럼 레위기의 정결법상 부정한 동물로 규정된 여러 가증한 동물들과 우상의 그림들을 그려놓고 그것들을 섬기는 행위는 정말이지 하나님께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심히 가증한 짓이었다. 이제 주님은 에스겔을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의 입구로 데려가신다. 거기서 에스겔이 보니, 담벼락에 구멍이 나 있었다. 이때 주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이 담벼락을 뚫어보아라.”
주님의 지시에 따라 에스겔이 그 담벼락을 뚫어보았더니, 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러자 주님이 또 말씀하신다.
(9) “너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