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장돈 버는 기술
2장백작의 전설
3장학교
4장보험회사의 개
5장앵무새 속이기
6장압수수색
7장위험한 복수
작가의 말
1
여섯 시가 되자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주치의가 다녀간 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몇 년 전 요가 강습 때 배운 대로 두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와 중지만 편 채 팔다리를 위아래로 쭉 늘인다. 그 상태에서 허리를 좌우로 비튼다. 머리가 시원해지며 배꼽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허벅지로 뻗쳐나간다. 샅에 힘이 쏠리며 남근이 불끈 일어선다. ……살아 있다.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적당한 압력으로 놈을 쥐어본다. 심장의 맥동에 따라 팔딱거림이 느껴진다. 터질 것 같은 이 팽창감, 언제였는지 아득하다. 아내 기자는 건넛방에 있다. 그녀는 아주머니가 아침을 가져올 때까지는 코를 골며 자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배출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몸을 일으킨다.
버티컬이 내려진 창 너머로 여명이 밝아온다. 창가에 침대가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창가에 앉는 걸 좋아했다. 수업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은 나무 책상에서 조도를 달리하며 명암으로 사라져갔다. 창틀 그림자의 기하학적 무늬가 점점 짧아지며 책상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면 어김없이 점심시간이었다.
앉은 채 기지개를 한 번 켜고 팔과 다리를 쓸어준다. 손가락 끝마디를 차례로 지압해준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손바닥과 발바닥 한가운데를 엄지손가락으로, 아플 만치 눌러준다. 아침 방송 건강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혈자리라고 가르쳐준 곳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버티컬을 걷어 올린다. 정사각의 통유리로 여름 정원수의 녹음綠陰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간밤에 비가 살짝 내린 탓인지 정원과 그 너머로 옅은 물안개가 상서롭게 피어오르고 있다. 환기용 쪽창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동시에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온다. 무음의 자연 다큐멘터리에 생명력이 가미되는 순간이다. 갈색 화분에서 뻗어 나온 초록 난이 바람에 산들거린다. 작은 자갈들 사이로 새순이 돋고 있다. 난초 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질기면서 매끄러운 감촉이 촉수로 전해져온다.
요의를 느껴 화장실로 향한다. 방이 큰 탓에 화장실까지 열다섯 걸음이나 걸어야 한다. 걷는 내내 목에 통증이 온다. 화장실 문을 열자 크레졸 냄새가 풍긴다. 어제 오후 아주머니가 소독약을 뿌려가며 청소를 한 기억이 난다. 한 손으로 변기 뚜껑을 열고 바지춤을 내려 발기가 반쯤 사그라진 놈을 꺼내 변기통에 조준한다. 밤새 신장에서 걸러낸 노폐물이 노란 오줌 줄기로 쏟아지자 하얗게 거품이 인다. 비눗방울을 불며 좋아라 하던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다 이내 톡톡 터져버린 내 삶만큼이나 허무하다.
방광이 비워지자 놈이 축 늘어진다. 나를 잠시나마 뜨겁게 달구던 놈의 팽창은 자연 방뇨를 제어하기 위한 신체의 메커니즘일 뿐이었다. 놈은 신이 주신 두 개의 기능 중 하나는 잃어버린 듯했다. 기자와의 마지막 섹스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바지춤을 올리고 레버를 내린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오수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간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변기에 새 물이 차오른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비누 없이 대충 세수를 한다.
고개를 숙인 탓인지 뒷목이 욱신거린다.
“며칠 동안은 뒷목이 뻐근할 겁니다. 그럴 때는 손바닥을 펴서 위아래로 주물러주세요. 혈액순환만 잘돼도 통증이 많이 완화됩니다.”
주치의인 정형외과 김영수 과장은 이렇게 충고했었다.
손바닥으로 뒷목을 쓸며 머리를 뒤로 젖혀본다. 우두둑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물리치료를 집중적으로 받아야 할 것 같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대신 손바닥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려준다. 그러면 어느 순간 습기가 사라지며 피부가 탱탱해진다. ‘아모레 카운슬러’인 명희가 가르쳐준 노화 방지 팁이다. ‘어쩜’이란 단어와 ‘대박’이란 단어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내 피부를 칭찬하던 명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명희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보험설계사이기도 하다.
탱탱해진 피부에 기분이 좋아진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침대로 돌아간다. 하루 전에 아주머니가 갈아준 침대 시트는 뽀송뽀송하고 깔끔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이 맘에 든다.
슬리퍼를 신은 채 침대 시트에 걸터앉아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에서 가방을 꺼낸다. 갈색 바탕에 노란 문양이 있는 루이비통 미니 백이다.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이 정도는 들고 다녀달라며 아내 기자가 선물한 것이다. 장인의 장례식 다음 날 기자는 오빠들과의 설전에서 승리해 부의금을 갈라 왔고, 그중 일부가 이 백을 구입하는 데 쓰였다. 나머지는 그녀의 명품 컬렉션에 사용되었다. 남들은 이게 짝퉁인 줄 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죽 곳곳에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고 긁힌 흔적들이 난무해 거저 준대도 안 가져갈 게 뻔한 몰골이기 때문이다.
가방을 열어 에센스와 아이 크림을 꺼낸다. 홍삼과 꿀이 들어가 125밀리리터 한 병에 30만 원을 호가한다는 설화 한방 화장품이다. 에센스를 고루 펴 얼굴에 바른 후 아이 크림을 눈가에 발라 정성스레 마사지하듯 문지른다. 행사에 불려 가려면 피부 관리는 필수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제로지만 말이다.
‘야! 정품 좀 사 써라, 제발!’ 명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명희는 신상품 샘플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찾는다. 얼른 방송 복귀해야지, 라는 말과 함께.
샘플을 가방에 다시 넣고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다.
기자는 일어났을까? 소희는?
문득 고개를 돌려 맞은편 병실 문을 바라본다. ‘703’이라는 호수와 입원환자 현황을 표시한 사각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거리가 멀어 ‘이기자’와 ‘노소희’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시곗바늘이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동쪽 소아병동 건물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눈이 부시다. 에어컨이 작동을 시작했는지 환풍기에 매달린 리본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최신식 자동온도조절 시스템 덕에 실내는 최적의 온도와 습도로 세팅되어 있지만…… 나는 춥다. 방송국에서 잘린 후 언제부터인가 몸이 으슬으슬 춥고 옷을 아무리 많이 껴입어도 뼛속까지 시린 증상이 생겼다. 닷새 전 교통사고로 이곳에 입원했을 때도 그랬다. 낮 기온이 33도까지 올랐지만 환자복 위에 스웨터를 걸쳐도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담당의에게 몇 번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찌푸린 표정뿐이었다. 마음이 추워서 그래. 이틀 전 병문안을 왔던 명희가 명쾌하게 진단을 내려주었다.
윤치영 씨가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수액걸이를 질질 끌며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다. 그는 입원한 지 6개월이 넘는, 이 병실 최장기 입원환자다. 항상 링거액을 달고 사는 것도 신기하지만, 골절도 없는 환자가 6개월씩이나 입원하고 있는 것이 더 신기하다. 다른 경환자輕患者들은 보험회사 직원의 회유와 강박에 못 이겨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퇴원하는 게 보통이다.
옆 병상의 이주삼이 다리를 쓰다듬으며 윤치영 씨 뒷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주삼은 4개월 전 지하 주차장에서 초보 운전자의 차에 다리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정강이뼈가 골절되어 핀을 박는 수술을 했는데 아직도 절뚝거리며 걷는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덩치도 있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어 삼국지의 장비가 연상된다. 이주삼 맞은편, 그러니까 내 병상 대각선에는 정호연이라는 잘생긴 얼굴의 남자가 누워 있다. 네임카드를 보면 스물아홉 살인데 그것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그는 자주 병실을 비우고, 환자복 대신 비싸 보이는 실내복을 입고 있을 때가 많다. 신기한 건 간호사 누구도 그걸 두고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호연은 병실 사람들과 대화도 별로 없는 데다, 회진 도는 의사도 그에게는 말 한마디 않고 그냥 나가기 일쑤다. 입원 첫날 말을 붙여보려 한 적이 있는데 태블릿PC에 빠져 눈길도 주지 않는 그에게 무안만 당한 후로는 나도 그를 본체만체한다. 얼굴만 미끈한 정말 재수 없는 녀석. 아니지, 재수는 내 이름이니까 ‘버릇없다’로 바꾸어야겠다. 정말 버릇없는 녀석.
입원 5일 차인 나는 병원 생활이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입장이다. 명희의 권유로 입원하기는 했지만 부러진 데 하나 없이 병실 생활을 한다는 게 녹록한 일은 못되었다. 갑갑한 것보다도 건강한 몸으로 환자 행세를 한다는 게 더 힘들었다. 3일 차부터 다른 환자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허리가 아픈 듯 다리를 절어보기도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목을 주무르기도 했지만 낯간지러워 이내 그만두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윤치영 씨처럼 완전 나이롱환자는 아니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간간이 아프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통증이 반가웠다. 이따금 가슴도 시려왔다. 의사가 내린 진단명은 ‘경추염좌 및 흉부 타박상으로 인한 2주’였다. 마음은 심장에 있고 심장은 흉부에 있는데 그 흉부에 타박상을 입었으니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했다. 만약 ‘마음 타박상’이라는 병명이 있다면 아마 12주쯤 진단이 나왔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날도 기자의 성화에 못 이겨 새로 생겼다는 H 아웃렛 매장을 가던 중이었다. 체크카드의 간당간당한 잔액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사거리에서 황색 점멸등을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뒤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앞으로 밀려 나갔다. 뒤따르던 티볼리가 내 차 후미를 추돌한 것이었다. 차에서 내려보니 쏘나타 뒤범퍼에 금이 조금 가 있었다. 중고차 매매 일을 하는 친구에게서 반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구형 쏘나타였다. 티볼리는 앞범퍼에 흠집만 조금 나 있었다. 티볼리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쏘나타 뒤범퍼와 광이 살아 있는 티볼리 앞범퍼를 번갈아 보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라고 사과하면서도 티볼리 운전자는 속 쓰린 표정으로 자신의 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티볼리 운전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나를 바꿔주었다. 상대방 보험회사 직원인 듯했다. 내 차량 번호와 연락처를 묻더니 공업사에 차를 입고시키고 자기에게 문자메시지를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어디 아픈 데 없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티볼리가 가던 길로 떠났고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조수석에는 기자가 굳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희는 뒷좌석에서 모바일게임에 빠져 있었다. 시동을 걸고 아웃렛으로 가야 할지 공업사로 가야 할지 선택을 못 하고 있는데 기자가 말했다. 기분 망쳤어, 집으로 갈래. 나는 기자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차를 돌렸다. 당분간은 체크카드의 잔액이 ‘100만’ 이상으로 유지될 거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지난 열흘간 공사장과 대리운전 일로 모은 돈이었다.
“야, 입원해! 너 바보 아냐? 어차피 지금 실업자나 진배없잖아!”
초등학교 동창 명희는 벗겨진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모진 말을 쏟아내면서도 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입원……? 어쩌면 교통사고가 난 순간부터 슬쩍 끼어들었을지 모를, 그러나 양심이라는 가리개 속으로 얼른 숨겨놓았을지 모를 이기심을 명희가 정확히 끄집어내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 세 사람은 한밭병원에 나란히 입원했다. 기자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고 여름방학 보충수업만 빠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은 소희는 자발적, 적극적으로 입원에 동참했다. 기자도 나처럼 병원 생활을 힘들어했지만, 소희는 달랐다. 냉방 잘되는 병실에서 아주머니 환자들과 수다 떠는 일에 시간 가는 줄 몰라 했고, 끼니때마다 제공되는 따뜻한 밥과 매일 바뀌는 식단에 입맛을 되찾는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두드리는 집주인의 월세 독촉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고, 매일같이 모임에 참석하느라 빵과 시리얼로 도배한 기자의 식단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소희에게는 이곳이 천국 또는 지상낙원이었다. 이곳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보험회사와 합의가 끝났을 때 소희가 퇴원을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도 들었지만, 한 사람당 200만 원씩만 받아도 6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면 그런 사소한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 돈이면 1년치 월세가 아닌가. 보험회사 문제는 명희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 했다.
명희는 언제나 내 등 뒤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어느새 나타나 나를 일으켜주었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침을 흘리고 있으면 양손에 부라보콘을 들고 나타났다. 나를 괴롭히던 덩치 두 녀석을 개천에 메다꽂은 것도 명희였다. “당신은 맨날 왜 그 모양이야?”라며 매일같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기자보다도 오히려 더 우리 가족의 미래를 책임지려는 양 발 벗고 나서는 명희의 태도는,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나 <레지던트 이블>의 앨리스보다 더 듬직한 여전사 같다. 친구들은 ‘설하마’라며 명희를 놀려댔지만 나는 그런 명희가 듬직하고 좋았다.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허, 시원하다.”
오줌 쌌다고 온 병실에 광고라도 하려는 듯 윤치영 씨가 소리를 낸다. 밤새 흡수한 수액을 죄다 배설했으니 시원하기도 할 것이다.
윤치영 씨는 무슨 재주로 6개월씩이나 입원을 하고 있는 걸까? 바로 어제만 해도 무단 외박한 환자가 보험회사에 적발되어 강제 퇴원 조치를 당했다. 윤치영 씨는 3일 전에도 무단 외박을 했고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윤치영 씨는 누구한테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보이는 것보다 윤치영 씨의 몸 상태가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간이나 콩팥이 손상되어 수술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췌한 얼굴에 검은 기운이 도는 것으로 보아 그럴 확률이 높다. 갑자기 윤치영 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에고,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나는 명희가 시키는 대로 이곳에서 2주만 버티면 된다. 흠, 600만 원이라…….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에서 미니 노트를 꺼낸다. 입원할 때 적어둔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김용남 100, 이충식 15, 박용식 50, 슈퍼 5, 소희 3…….
나는 하나하나 얼굴을 떠올리며 메모를 읽는다.
“이게 다 뭔가?”
윤치영 씨가 고개를 쭉 빼고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바짓단을 둘둘 말아 올렸는데도 환자복이 바닥에 끌린다. 나는 얼른 노트를 덮는다.
“받을 돈입니다.”
받을 돈? 맞다. 근데 이 사람들이 나한테서 받을 돈이다.
“인제 보니 노재수 씨 부자구먼!”
윤치영 씨가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근데, 소희는 노 씨 딸 아녀?”
윤치영 씨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보름 전 휘발유를 넣고 계산을 하려는데 체크카드에 잔액이 없었다. 간밤에 고향 친구가 찾아와 한우를 먹었는데 체크카드 잔액을 모두 소진하고도 모자라 주머니에서 현금 2만 원을 보태어 값을 치른 기억이 났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유원과 기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자는 흥, 하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 어린 주유원이 운전석과 주유기, 조수석을 번갈아 보며 무전無錢 주유하는 고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굴만 붉힌 채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소희의 주먹이었다. 뒤를 돌아보려는데, 주먹이 펴지며 꼬깃꼬깃 접힌 1만 원권 지폐 세 장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기자는 여전히 나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기자가 보지 않아 다행이었고, 주유를 3만 원어치만 한 게 다행이었고, 소희에게 3만 원이 있어 다행이었다. 휘발윳값을 치르고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려는데, 소희가 두 팔을 뻗어 나의 머리를 정면으로 획 돌려놓았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 라는 충고와 함께. 어찌나 세게 돌렸는지 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지금의 목 부상은 어쩌면 그때 발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씨도 돈 필요하면 이 친구한테 빌려.”
루이비통 미니 백과 노트를 힐끗 보면서 윤치영 씨가 자리로 돌아갔다. 윤치영 씨는 나를 정말 부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힐끗 이주삼을 바라보았다.
이주삼은 아무 대꾸 없이 환자복을 걷어 올리더니 수술 흉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핀을 박을 때 생긴 흉터로, 20센티쯤 돼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칼 때문에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형씨, 부자슈?”
이주삼이 흉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도전적이며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톤이었다.
“아니……요.”
나는 이주삼의 눈치를 살피며 루이비통 미니 백을 서랍에 살며시 넣었다.
이주삼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힘이 없고 어딘가 텅 빈 표정이었다.
아버지도 항상 저런 얼굴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 소장이었다. 대기업 하청 업체 소장은 허울만 좋았지 막노동꾼이나 다름없었다. 급여도 적었지만 공사 기간을 맞추느라 휴일을 반납하기 일쑤였다. 대한민국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아버지도 집 밖에서 ‘사람 좋다’는 평을 들었다. 문제는 그 피해가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친구나 일꾼들과의 술자리에선 항상 앞장서서 계산을 했고, 돈 떼어먹은 사람에게는 돌려달라는 말 한마디 못 했고, 휴일 근무를 대신 서달라는 동료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내가 대학 2학년 때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지하 3층 깊이의 터파기 공사 현장에서 안전고리도 없이 H빔 위를 걷다 새벽에 내린 서리에 발이 미끄러져 추락한 것이다. 안전모도 착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본인 과실이 크다는 이유로 산재 처리만 해주었을 뿐 다른 보상은 일절 없었다. 아버지의 동료들은 회사를 상대로 싸우라고 부추겼지만, 나는 그럴 의지가 없었다. 저항하지 않은 대가로 회사에서 내민 포상은 아버지의 일당을 조금 더 올려 신고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직업군인이 되기를 바랐다. 매사 의욕이 없고 경쟁에 뒤처지는 자식이 밥 굶지 않을 직업은 군인뿐이라고 확신해서였다. ROTC에 지원했을 때 아버지는 잘했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본 칭찬이었다. 그러나 임관 후 중위로 제대해버렸으니 아버지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었고 내게는 아버지의 걱정대로 밥 굶을 걱정이 코앞에 닥쳤다.
내가 한숨을 쉴 때마다 기자는, 제발 숨 좀 그렇게 쉬지 마! 퉁을 놓았다. 길게 한숨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속 응어리가 한소끔 빠져나간다는 걸 기자는 모른다. 이곳에서는 방을 따로 쓰고 있으니까 마음껏 한숨을 쉬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소희는 잘 잤을까?
‘선천적 낙천 과잉 증후군’을 가진 아이니 별로 걱정은 들지 않는다. 소희는 고민, 걱정, 불안, 미래 등의 단어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아이다. 그렇다고 우등, 모범, 현재, 만족 등의 단어와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걔는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중1이다. BTS 공연 티켓 산다며 모으고 있던 3만 원을 쾌척한 걸 보면 생각이 전혀 없는 애 같지는 않다. 기자가 달라고 했으면 절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 딸이 친구들 앞에서 궁상떨면 엄마 얼굴이 뭐가 되겠어, 라며 기자에게서 용돈 뜯어내는 일을, 이를테면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내지 못할 일을 척척 해내는 걸 보면 소희는 아마 천재일지도 모른다.
출입구가 열리며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두 명의 간호사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정형외과 김영수 과장이다. 간호사 둘이 경과기록지를 체크하며 김영수 과장의 입을 주시했다.
김영수 과장이 이주삼에게 다가가 환자복 바짓단을 올려 무릎을 만져봤다.
“좀 어떠십니까?”
김영수 과장이 물었다.
차도가 없다고 이주삼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발가락을 밀어 올려 발목관절을 구부려보았다. 이주삼이 통증을 느낀 듯 이마를 찡그렸다. 김영수 과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도 꺾기가 안 되시네. 수술할 때 비골신경이 좀 세게 눌린 모양입니다. EMG 한번 해보셔야겠습니다.”
김영수 과장이 간호사에게 EMG, 즉 근전도검사를 지시했다.
이주삼이 체념한 표정으로 바짓단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윤치영 씨는 어느새 자리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호연은 시트를 뒤집어쓴 채 움직임이 없었다.
김영수 과장이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어디 봅시다.”
김영수 과장이 차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침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어떠냐고 묻지 않고 왜 어디 봅시다, 라고 하는 거지? 뭐가 잘못됐나? 퇴원하라고 하는 거 아닐까?
“목은 좀 어떠십니까?”
김영수 과장의 얼굴이 점점 부풀어 코끼리만 해졌다. 저 무게에 눌리면 압사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꾀병을 부리고 있는 윤치영 씨를 보자 용기가 생겼다.
“쑤시고…… 목이 잘…… 안 돌아갑니다.”
그렇게 말하자 정말 목이 쑤시고 굳어지는 것 같았다.
“염좌는 일주일은 갑니다.” 김영수 과장이 내 등을 토닥였다. “사나흘 후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퇴원……요?”
김영수 과장이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윤치영 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명희 말대로라면 2주일은 입원해야 한다. 그래야 합의금도 제대로 받고 상해보험 ‘입원 일당’도 받을 수 있다. 내가 가입한 상해보험은 홈쇼핑에서 파는 월 1만 원짜리 저가 상품이지만 하루 입원 일당이 3만 원이다. 잘나가던 시절 명희를 통해 제법 큰 보장성 상품 여러 개에 가입했었지만 방송국에서 잘리고 모두 해약했다. 명희는 내 형편이 필 때까지 자기가 대납해준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해약환급금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영수 과장은 윤치영 씨의 상태를 확인한 후 정호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김영수 과장이 사라지자 윤치영 씨가 벌떡 일어났다.
“밥 나올 때가 됐는디.”
윤치영 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주머니가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차례로 이름을 부르며 식판을 침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하얀 쌀밥과 미역국, 닭볶음, 열무김치, 고등어전, 깍두기가 오늘의 메뉴였다. 윤치영 씨는 벌써 밥을 반이나 먹고 닭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윤치영 씨에게 중병이 있다 해도 소화기계통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이주삼은 입맛이 없는지 닭볶음과 고등어전은 그대로 둔 채 미역국만 떠먹고 있었다.
퇴원 이야기를 들으니 입맛이 싹 달아났다. 어떻게든 2주일은 입원해야 하는데, 그래야 600만 원이 들어오고 한 1년은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억지로 밥 몇 술을 입에 떠 넣었다. 입에 침이 돌지 않아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미역국 국물만 후루룩 마시고 수저를 놓았다. 남길 거면 자기가 먹겠다며 윤치영 씨가 닭볶음과 고등어 전을 자기 식판에 옮겨 갔다. 이주삼이 닭볶음을 젓가락으로 들어 자기 것도 가져다 드시라고 했다. 윤치영 씨는 순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과식은 금물이라며 거절했다.
“내 닭에는 똥이 묻었나?”
이주삼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닭볶음을 식판에 툭 던졌다.
식사를 더 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내 식판과 이주삼 식판을 양손에 들고 복도로 나갔다. 식기 반납함을 향해 걸어가는데 703호에서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았다. 나는 식판을 든 채 703호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기자가 식판 나르는 아주머니와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이게 제너럴 하스피탈에서 내올 식단이에요?”
기자가 들고 있던 식판을 아주머니에게 불쑥 들이밀었다.
“미역국에 파를 넣다니요? 파가 미역의 칼슘 흡수를 방해한다는 것도 몰라요? 영양사 불러오세요. 당장요!”
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구원자라도 찾는 표정으로 다른 환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기자의 기세에 눌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만 좀 해, 쪽팔려 죽겠어!”
모두의 시선이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소희였다.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헝클어진 단발머리가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다. 꼭 영화 <주온>에 등장하는 귀신 같았다.
“여기가 호텔이야? 우리가 밥 먹으러 여기 왔어?”
소희가 기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기자가 식판을 든 채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이를 앙다물고 화를 누르는 모습이었다.
“식단이 어때서? 맛있으면 됐지 무슨 상관이야? 엄만 나한테 한 번이라도 이런 밥상 차려줘봤어?”
순간 기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기자는 들고 있던 식판을 침대 탁자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문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기자가 내 양손에 들린 식판을 바라보았다. “잘났어, 정말!”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기자는 아무 말 없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소희가 내 손에 들려 있던 식판 두 개를 뺏다시피 해서 가져다 반납했다.
“아빠, 신경 쓰지 마. 엄만 배를 안 곯아봐서 그래.”
소희가 자리로 돌아가며 리모컨을 눌러 TV를 켰다.
옛날 교실로 꾸며진 세트장에서 MC가 교복 차림의 중년들을 모아놓고 퀴즈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동창 열전>이라는 프로로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일본 프로그램을 모방해 만든 예능프로였다. 출연자마다 학교에 다닐 때 경험한 재미난 추억거리를 작가가 사전 조사해 질문표를 만들고 진행자가 담임이 되어 질문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3학년 봄 미술 시간에 오줌 쌌다고 혼난 사람은?’ 같은 질문이다. 출연자가 답을 맞히면 크레파스 같은 학용품을 상품으로 주고 틀리면 교실 뒤로 보내 손을 들고 벌서는 방식이었다. <동창 열전>은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다. 워낙 인기가 많아 서울 본사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프로였다. 방송 사고만 아니었어도…….
나는 TV에 시선을 꽂은 채 온몸이 경직되었다. 소희가 얼른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앞이 캄캄해져왔다.
“아빠, 괜찮아?”
2
눈을 뜨고 병실을 둘러본다. 내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느낌이다.
이주삼은 재활치료를 받으러 갔고 윤치영 씨는 침상에 걸터앉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벽시계가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다. 기자와 소희는 지금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네일 아트를 하고 있거나 쇼핑 책자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터였다. 둘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친해진다. 그런 두 여자를 볼 때마다 TV 채널 돌리듯 감정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에 감탄한다.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은 쇼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감정 숨기기 쇼.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인기척을 느낀 윤치영 씨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노 씨, 괜찮은겨?”
휴대폰을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윤치영 씨가 물었다.
“소희가 노 씨 곁에서 두 시간이나 꼼짝 않고 있다 조금 전에 갔어. 좀 있으면 일어날 거라더니 딱 맞구먼. 근데, 무슨 잠을 그리 죽은 듯 자는가?”
윤치영 씨가 침대에서 내려와 수액걸이를 끌며 내게 다가왔다.
“노 씨, 혹시 무슨 병 있나?”
윤치영 씨가 누워 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머리에 뇌종양이나 간질병 같은 거 말여.”
윤치영 씨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식판 들고 나간 사람이 쓰러져 들려왔으니 신기할 만도 할 것이다.
“없는데요?”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는지 윤치영 씨가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저 친구 참 미스터리여, 안 그런가?”
윤치영 씨가 정호연의 빈 침대를 바라보며 내게 동의를 구했다.
“딱 봐도 나이롱인데 말여. 의사고 간호사고 쩔쩔매는 거 같단 말이지. 재활치료도 없는 사람이 한나절씩 어디 가서 뭘 하다 오는지도 미스터리고. 하, 진짜 그것이 알고 싶네.”
윤치영 씨가 무릎을 탁 치며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화가 왔다. 명희였다.
“잘 잤어? 밥은 먹고? 몸은 좀 어때?”
나는 대답 대신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하하하. 내가 보고 싶은가 보네? 오전에 단체보험 계약 건이 하나 있어. 나한텐 큰 건이야. 오후에 들를게.”
나는 오후 몇 시쯤에 올 거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점심을 먹고 TV를 보는데, 출입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삼영화재 박종하 과장이었다. 그는 5일 전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검은 뿔테 안경에 군청색 체크무늬 바지, 파란 와이셔츠. 그의 손에 들린 갈색 파일도 그대로였다. 입원하던 첫날 그는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었다.
중점적으로 물은 건 안전벨트 착용 여부와 운행 목적지, 그리고 직업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안전벨트는 착용했고 목적지는 아웃렛 매장이었다고 대답한 후 잠시 침묵했다. 박종하 과장이 파일에 필기를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직업은예, 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엠씨……요. 박종하 과장이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다시 물었다. 엠, 머라꼬예? 나는 그의 손에서 볼펜을 빼앗아 쥐고 마이크 잡는 시늉을 했다. 아, MC……! 박종하 과장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다소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내 손에서 볼펜을 쏙 빼 갔다. 볼펜이 손바닥에서 미끄덩 빠져나가는 허탈하고도 잔인한 촉감을 느끼며 나는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그라모 어느 방송국 소속입니꺼? 박종하 과장이 물었다. 나는 유리창에서 시선을 돌려 박종하 과장을 바라보았다. 창가로 시선을 돌릴 때의 감정은 분노였는데, 다시 되돌릴 때는 체념이었다. 분노는 나를 자른 편집부장을 향한 것이었고 체념은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였다는 데서 오는 자조였다. 지금은 프리로 뛰고 있습니다. 박종하 과장이 파일에 열심히 메모를 했다. 그라모 개인사업자입니꺼? 나는 고개를 떨구며 가로저었다.
HBC를 그만둘 때만 해도 제법 굵직한 행사가 꽤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것마저 뚝 끊겼다. 마이크 잡고 무대만 서면 울렁증에 시달리는 한물간 MC를 누가 선뜻 섭외하겠는가. 지금은 과거에 도움을 줬던 몇몇 기획사 대표의 소개로 많게는 30만 원, 적게는 10만 원짜리 행사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다. 그 외의 시간에는 건설 일용직과 대리운전 일을 한다. 한번은 전 직장 홍보국장 모친의 칠순 잔치 사회를 본 적이 있다. 홍보국장은 선물용 수건 세트 안에 봉투를 넣어주며 기름값이나 하라고 했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 지폐 일곱 장이 들어 있었다. 주유 경고등이 들어오고 나서 가득 주유하면 9만 원이 넘게 나올 때였다. 나는 몇 번이고 봉투 안을 살폈으나 벽에 붙어 딸려 나오지 않은 지폐는 한 장도 없었다. 나는 사진첩 속 비상금 봉투에 있던 3만 원을 더해 10만 원짜리 봉투를 만들어 기자에게 건넸다. 새끼손톱에 칠한 매니큐어가 행여 지워질까 봐 검지와 엄지로 봉투를 조심스럽게 받아 든 기자가 입으로 훅 불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자기 이젠 10만 원짜리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런 기자에게 나는 속으로 말했다. 찬밥 더운밥 가리다 보면 언 밥도 못 얻어먹어. 그때 나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잊힐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업자등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건설직 일용과 대리운전을 부업으로 한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러면 왠지 꿀릴 것 같았다. 어쩌면 찬밥 더운밥 가리고 있는 건 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라모 월 얼마나 버십니꺼?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루이비통 미니 백을 열어 화장품 샘플을 꺼냈다. 얼굴에서 뜨거운 열이 올라오고 가슴이 쿵쾅댔다. 나는 월 얼마짜리 인생일까. 손바닥에 샘플 통을 탁탁 두드리자 우유처럼 하얀 로션이 흘러나왔다. 나는 로션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얼굴에 발랐다. 양이 많아 미끈거릴 정도였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탁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볼에 묻어 있던 로션이 분무처럼 허공에 튀었다. 가슴속에서 화가 밀려 올라왔다. 나는 더 세게 얼굴을 두드렸다. 정신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박종하 과장이 놀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걱정하지 마이소. 소득 자료가 없으모 정부에서 발표하는 건설업 시중노임 단가로 결정하니까 괘얀심더. 월 300만 원 정도 된다 아입니꺼. 그라모 다음에 오겠심더. 그렇게 말한 후 박종하 과장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5일 만에 다시 나타난 거였다.
박종하 과장이 내 침대 앞에 서더니 볼펜을 꺼내며 물었다.
“그간 몸조리 잘하셨습니꺼?”
그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적겠다는 듯 파일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저 파일에는 뭐가 적혀 있을까?
나는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윤치영 씨가 수액걸이를 질질 끌며 박종하 과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디 보험회사셔?”
박종하 과장이 윤치영 씨를 흘끗 바라보았다. 상대가 작은 키의 허름한 노인임을 알고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재수 씨 꽤 유명하신 분이데예. 이모님이 팬이셨답니더.”
박종하 과장은 굳이 과거형을 사용했다.
“인터넷 검색해봤심더. HBC 간판 MC로 이름을 날리셨데예?”
비록 지방 방송이었지만 촉망받는 MC라며 인터넷 기사 검색어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한창때는 중앙방송국에도 곧잘 불려 올라가곤 했다. 그때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모든 인터넷 기사는 과거형이다. 과거의 영광. 과거의 사랑. 과거의 잘못.
“노 씨, 방송 탄 사람이었어? 하, 어쩐지 연예인처럼 잘생겼다 했지.”
윤치영 씨가 수액걸이를 끌고 얼굴이 맞닿는 거리까지 다가와 말했다.
박종하 과장이 비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인제 그만 퇴원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꺼?”
‘퇴원’이란 말에 몸이 움찔했다.
“얼마 드리면 될까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박종하 과장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명희는 한 사람당 200만 원씩은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닷새 치 일당하고 위자료, 향후 치료비 해서 100만 원, 어떻습니꺼? 703호 이기자 씨하고 노소희 씨도 일행 맞지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소희 씨는 아직 학생이니까 50만 원 드릴께예. 닷새 동안 잘 치료받고 250만 원이 들어오는 깁니더.”
대답이 없자 박종하 과장이 파일을 덮었다.
“사고 운전자 항의도 만만치 않심더. 범퍼에 기스만 살짝 났는데 온 가족이 다 입원했다 카면서 보험사기로 고발한다 안 캅니꺼?”
‘보험사기’란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스만 난 게 아니고…… 범퍼에 금이 갔는데요?”
모기만 한 소리로 내가 말했다. 박종하 과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기나 그기나 매한가지 아입니꺼? ‘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아시지예? 요즘은 보험사기로 의심되면 바로 고발 들어갑니더.”
사기니 특별법이니 고발이니,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사기를 당하고 살아온 인생이다. 믿었던 ROTC 동기한테 모아놓은 적금을 모두 털렸고, 중국 도자기 총판 사업에 투자했다가 원금을 모두 날렸다. 나를 메인 MC 자리에서 쫓아낸 건 가장 믿었던 홍수철 편집부장이었다. 부부 싸움을 할 때마다 기자는 사기 결혼을 당했다며 ‘이혼’이란 말을 밥 먹듯 꺼냈다. 자기는 유명 MC와 결혼한 거지 실업자와 결혼한 게 아니라는 게 그녀의 논리였다.
“혹시, 일부러 브레이크 밟은 거 아입니꺼?”
나는 박종하 과장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일부러 브레이크를 밟다뇨?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나와 박종하 과장이 동시에 출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설명희였다. 박종하 과장은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커다란 덩치를 보고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명희의 얼굴을 보자 나는 흑기사를 만난 것처럼 안도감, 편안함, 자신감 같은 게 마구 솟아나는 걸 느꼈다.
“명함 주세요!”
박종하 과장이 꼬리를 내리며 파일에서 명함을 꺼내 명희에게 건넸다.
“삼영화재 대인팀 박종하 과장.”
명희가 또박또박 명함에 있는 글자를 읽었다. 거침없는 명희의 태도에 박종하 과장은 기세가 꺾였다.
“거기 팀장님이 이석희죠? 저랑 잘 알아요. 한밭지에이코리아 설명희 팀장이라면 알아들으실 거예요.”
나는 ‘이석희’를 ‘이새끼’로 알아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방금 전 근거 없는 말로 피해자를 압박해 터무니없는 금액에 합의를 종용하셨죠?”
박종하 과장이 하얗게 질려 서둘러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그게 아이고예, 저희 피보험자께서 자꾸 항의 전화를 하셔서 그랬습니더. 마, 이해하이소.”
박종하 과장이 치료 잘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야, 바보같이 사기꾼이라고 하는데 가만있냐?”
명희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옷깃을 펄렁거렸다. 헐렁한 원피스 속에서 커다란 가슴이 출렁거렸다.
“경우 빠지고 당당한 사람 없다고 했어. 아닌 걸 기라고 하는데 당당히 맞서야지 가만있냐?”
명희가 씩씩거렸다. 맞선다는 말, 내게는 추상적 언어였다.
“두 사람 딱 봐도 동창인디 내 눈에는 어째 댁이 누나 같어?”
윤치영 씨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얼른 명희의 표정을 살폈다.
“하하, 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할아버지.”
명희는 백을 열더니 화장품 샘플을 잔뜩 꺼내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다 떨어졌지? 내가 아모레 카운슬러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다 이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서민들, 이거 정품 죽었다 깨어나도 못 써.”
명희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샘플 두어 개를 골라 윤치영 씨에게 건넸다. 안티에이징 크림이었다.
“이건 할아버지 쓰세요. 칠순 넘으면 안면 피부가 팍 썩거든요.”
화장품을 덥석 받아 든 윤치영 씨가 명희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인상을 썼다.
“보아하니 애도 안 낳은 것 같구먼,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나, 만으로 쉰아홉이여!”
명희가 팔짱을 끼며 흥,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윤치영 씨가 화장품 샘플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석희 팀장 진짜 잘 알아?” 내가 물었다.
“아니.”
어이없는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물어보면 어쩌려고?”
“절대 안 물어볼걸?”
명희가 풋, 하고 웃었다.
“넌 너무 물러서 탈이야.”
명희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바라보았다.
“딱, 나 같은 여자하고 결혼했어야 하는데.”
그제야 명희가 솔로라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사실 명희가 덩치가 좀 있어서 그렇지 얼굴은 예쁜 편에 속했다. 적당히 쌍꺼풀이 있고 적당히 콧날이 오뚝하고 적당히 입술이 두툼했다. 친구들이 명희를 못생겼다고 놀린 건 어쩌면 명희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명희는 자신의 얼굴을 늘 강한 인상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예를 들면 한쪽 눈만 크게 뜨고 입술을 그 방향으로 일그러뜨린다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앞으로 죽 내밀고 다닌다거나 하는 행동 말이다. 그러면 영락없이 여자 조폭처럼 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명희는 나를 만날 때만 얼굴에 그런 상을 만들지 않은 것 같다.
“난 기자 쟤, 처음부터 맘에 안 들었어.” 명희가 703호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가 결혼할 여자라며 친구들한테 데려오던 날 생각나니? 호프집 오는 여자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와서는 ‘전 시메이만 마셔요’라고 하는데 다들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명희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단체보험 받으러 간 건 잘됐어?”
“아, 그거?”
명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통화할 때만 해도 다 성사된 계약처럼 말하던 명희였다.
“총무부장이라는 놈이 대가를 요구하잖아.”
명희가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좀 떼주지. 큰 건이라며.”
명희가 고개를 들며 내 등을 후려쳤다. 폐 속부터 기침이 울려 나왔다.
“야, 세상엔 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
나는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명희를 바라보았다.
“넌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방송만 잘하면 뭐 해. 윗사람한테 아부도 할 줄 알고 부당한 공격에 당당히 맞설 줄도 알아야지. 나는 얻어맞거나 사기를 당한 사람한테도 20퍼센트의 책임은 있다고 봐. 일종의 원인 제공인 셈이지. 우린 나룻배고 세상은 물이야. 밑창에 조금만 틈이 생겨도 물이 밀고 들어온다고.”
“근데 왜 20퍼센트야?” 내가 물었다.
명희가 일어서더니 양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자존심 같은 거 다 버려. 마음 단단히 먹고, 알았지?”
자존심 버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마음 단단히 먹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명희가 턱으로 윤치영 씨를 가리켰다.
“저 할아버지를 봐. 딱 봐도 나이롱인데 꿋꿋하게 잘 버티시잖아.”
윤치영 씨가 버럭 화를 냈다.
“나 같은 중환자한테 나이롱이라니, 눈이 삐었구먼. 그리고 나 아직 며느리도 못 봤어. 할아버지라고 자꾸 그러지 마.”
윤치영 씨가 수액걸이를 끌며 밖으로 나갔다.
“나이롱이라는 말은 너무 심하잖아.”
질책하듯 내가 말했다. 명희가 내 손등을 살며시 잡았다.
“내 말은 2주 동안 잘 버티라는 거야. 의사들이 자꾸 퇴원하라고 하는 것도 보험회사에서 압력이 들어가니까 그런 거거든. 오늘 박종하 과장한테 한소리 했으니까 당분간 퇴원 얘기는 안 나올 거야. 그리고 100만 원이 뭐냐? 이건 순전히 너를 무시해서 그런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명희가 티슈를 뽑아 내게 건넸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명희가 문밖으로 나가다 돌아보며 말했다.
3
나는 복도로 나왔다. 소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가볼까 하다 그냥 지나쳤다.
간호사 대기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가는데, 할머니 한 명이 느리게 걸어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언뜻 봐도 팔순은 넘을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내 손을 꽉 잡더니 다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할머니는 두 팔을 휘저으며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순 잔치로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주홍색 간병사 복장의 아주머니가 급하게 달려왔다.
“아이고, 어르신, 여기 계셨네. 조금만 해찰하면 이러신다니까.”
간병사가 미안하다며 할머니를 부축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내 바짓단을 움켜잡았다.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되지요?”
간병사의 만류에도 할머니는 바짓단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할머니의 악력이 어찌나 센지 하마터면 바지가 벗겨질 뻔했다. 가까스로 할머니의 손을 바짓단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한 간병사가 연신 죄송하다며 할머니를 데리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선 다들 고정원 권사로 통해요.”
다른 간병사 아주머니였다.
“새로운 아드님 생기셨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간병사 아주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주머니의 태도로 보아 자주 벌어지는 상황인 듯싶었다. 할머니는 9층 치매병동 장기 입원 환자였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하나 있는 아들마저 레바논에 파병 나갔다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아들 또래 남자만 보면 살아 돌아왔다며 반색을 한다니까요. 아들이 살아 있대도 쉰이 훨씬 넘었을 나이인데.” 아주머니가 혀를 쯧쯧 찼다.
“노 씨, 예 있었구먼.”
윤치영 씨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매를 잡아채 반대편 복도로 끌고 갔다. 한 손에는 여전히 수액걸이를 잡고 있었다. 복도 중앙에 배선실과 휴게실이 있었는데 윤치영 씨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도 휴게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에는 기다란 인조가죽 의자가 복도와 유리창을 따라 배치되고 자판기 몇 대가 설치되어 있어, 간이 휴게실 정도 되는 곳이었다.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에 탄 열 명 남짓한 환자들이 한 사내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이주삼이 방충 스프레이 통을 들고 뭐라 떠들고 있었다. 무슨 상황이냐고 물으려는데 윤치영 씨가 내 입을 막았다. 자세히 보니 이주삼이 들고 있는 스프레이 통은 방충용이 아니었다. 통 표면에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영어인지 독일어인지 모를 언어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윤치영 씨가 재미있는 놀이라도 발견한 표정으로 잘 들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이주삼은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한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를 바라보는 환자들 모두 스승 앞에 선 제자처럼 하나같이 공손하고 진지했다.
“자 다들 똑바로 보시오!”
이주삼이 한 손으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 의자에 턱 올려놓더니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검고 투박한 근육들이 불끈거렸고 흑돼지 같은 검은 털이 하퇴부에 무성하게 나 있었다. 이주삼의 무릎에서 발목까지 20센티 정도 이어진 수술 자국이 보였다. 검은 피부에 연분홍으로 도톰하게 살이 튀어나온 수술 자국은 지렁이처럼 보였다. 이주삼은 들고 있던 스프레이 통을 서너 번 흔들더니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정성스럽게 뿌려주었다. 뿌연 연기 같은 게 분사기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기 중으로 이내 사라졌고 이주삼의 종아리가 습기로 번들거렸다. 이주삼은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 손바닥으로 자신의 바깥 종아리를 위아래로 쓸었다. 애완견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 감각이 사라지는가?”
휠체어에 앉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노인 하나가 물었다.
“한번 꼬집어보슈!”
이주삼이 장딴지를 남자 앞에 들이밀었다. 노인이 기세에 눌려 망설이자 윤치영 씨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해볼까?”
윤치영 씨가 이주삼의 종아리를 꼬집었다. 이주삼이 아무 감각도 못 느끼겠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꼬집은 거 맞으슈?”
윤치영 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결심한 듯 종아리를 정말 세게 꼬집었다. 이주삼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거 신기허네?”
윤치영 씨가 수액걸이를 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주삼이 눈을 부릅뜨고 관객들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이 떠돌이 약장수처럼 보였다.
“내가 올해로 서른다섯이오. 개장사 한 지 10년 좀 넘었수다. 미친개도 나한테는 꼬랑지를 내린단 말이외다.”
희번덕거리는 이주삼의 눈동자와 ‘개장사’라는 단어가 버무려지자 두려움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누구 하나 토를 단다면 이주삼의 저 무쇠 같은 주먹에 단방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다들 호기심과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이주삼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소희였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한참 찾았잖아.”
소희가 내 귀에 대고 질책하듯 속삭였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희는 그런 나의 신호를 무시한 채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맨 앞줄로 나갔다. 그러자 이주삼이 간이 의자를 소희에게 내밀며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이주삼의 눈치를 살피며 소희에게 앉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희가 거리낌 없이 이주삼이 내미는 의자에 앉았다.
“아저씨 약장수예요?”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경멸로 여겨질 수도 있는 ‘약장수’라는 단어에 누구 하나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도 숨을 고르며 이주삼을 바라보았다. 이주삼이 스프레이 통을 창가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소희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틀림없이 화가 나 있을 터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물건을 찾아보았다. 아주머니가 대걸레로 복도를 닦고 있는 게 보였다. 주변 환자들도 긴장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소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달려들 만한 인물이 하나도 안 보였다. 이주삼이 헝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