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이노우에 아쓰오(井上篤夫)
작가이자 번역가로 시대의 인물을 깊이 파고드는 평전을 다수 집필했다. 1947년 일본 기후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 재학 중 주간지 기자로 데뷔했다. 1986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CNN의 테드 터너를 단독 취재했으며, 1987년 소프트뱅크 그룹의 손정의를 인터뷰한 이후 30년 넘게 밀착 취재하고 있다. 깊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정평이 났다.
엮은 책으로 『일본 제일 부자 손정의』, 『대업을 이루는 손정의의 新 30년 비전』, 『손정의 사업가 정신』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마타하리 전 100년 만의 진실』, 『‘오늘’이라는 이름의 선물』, 『메릴린 먼로 영혼의 조각』 등이 있다.
옮긴이 신해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랐다.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사회과학과 일본 언어문화를 전공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대기업 전략기획팀에서 M&A를 담당했으며,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서 한일 통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현재 국제회의 통역사이자 출판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뜻을 높게
손정의 평전
▲ 초등학교 시절의 은사인 미카미 다카시와 소년 손정의.
▲ 초등학교 교환 노트. 논리적인 사고가 싹트고 있다.
▲ 초등학교 교환 노트. 조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다.
▲ 가족들과 함께. 중학교 3학년이었던 손정의(왼쪽), 아버지 손삼헌과 어머니 이옥자, 남동생 손정헌(오른쪽).
▲ 음성 전자번역기 개발 멤버인 프로그래머 프랭크 하비와 함께.
▲ 미국에서 압도적인 넘버원이 되겠다고 결심하다.
▲ 정보혁명을 예견하다.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재학 중에 음성 전자번역기를 발명하다.
▲ 젊은 천재경영인으로서 언론의 총아로 떠오르다.
▲ 1986년 7월 로스앤젤레스에서 28살의 손정의(앞줄 중앙)가 테드 드록타(뒷줄 중앙)의 소개로 론 피셔(테드의 오른쪽)와 처음 만나다.
▲ 일본 프로야구 최강구단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오너.
▲ 1994년 7월 일본증권업협회에 장외주식 등록.
▲ 2006년 보다폰 일본법인 인수 회견장에서 故 이노우에 마사히로(오른쪽)와 함께.
▲ 2011년 3월 22일 동일본 대지진 직후에 후쿠시마 대피소를 찾다.
▲ 2017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를 개시하다.
▲ 두뇌를 갖춘 스트리트 파이터인 마르셀로 클라우어와 함께.
▲ 약 40년간 손정의를 보필해온 오른팔 미야우치 겐과 함께.
▲ 2019년 손정의와 비전펀드의 ‘꿈을 공유하는’ 라지브 미스라와 함께.
▲ 1981년 소프트뱅크 창업의 장소인 후쿠오카 하카타구 잣쇼노쿠마.
무번지
출발
월반
운명적인 만남
이단아
발명왕
전대미문
단 하나의 인연
기념일
결혼행진곡
계약 성립
손정의의 자긍심
동경
지사처럼
꿈을 좇는 자
버클리의 봄
손정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리운 풍경이 있다. 철길 아래로 난 굴다리 터널과 그 안을 달리는 어린 날의 자신이다.
“끝이 보이지 않던 새카만 터널이 무서워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지요.”
목이 쉬도록 울면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터널 끝에 빛이 보였다. 그 빛 너머에는 희망찬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2020년 10월 손정의는 자신이 나고 자란 일본 사가현의 그때 그 터널과 철길, 강을 찾았다. 네댓 살 무렵 형이나 사촌들도 지나다니던 터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봐도 길이가 상당했다. 입구의 크기는 생각보다 좁아 승용차가 다니기는 어려워 보였다.
컴컴한 터널을 울면서 달리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도 가슴이 조여올 때가 있다.
“무섭기는 했지만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의 기쁨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지갯빛 감정이었습니다.”
사가현 도스시 무번지(無番地). 이곳이 손정의의 원점이다.
“옛 국유철도의 소유지였습니다. 한국에서 조그마한 고깃배 선창에 숨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본에 건너왔지요.”
머물 곳은커녕 먹을 것도 없는 데다 일본어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남들과는 시작점이 달랐다. 제로 베이스도 아닌 마이너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무번지였습니다. 머물 곳이 없어 번지수도 없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한국에서 건너온 할아버지 가족은 얇은 철판을 주워 비바람을 피할 판잣집을 지었다. 그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무번지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곳이다. 국유철도 직원들은 논두렁 태우기마냥 판잣집에 불을 지르고는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판잣집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국유철도에서는 이를 반복하다가 태워봤자 소용없다며 결국 내쫓기를 포기했다.
“멋대로 눌러앉은 거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생존 본능이랄까요. 아무리 짓밟혀도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습니다.”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끝까지 버텼다.
“부모님은 그런 강인한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창업 1세대는 아래 세대인 제가 아니라 아버지인 셈이지요. 영화도 <대부>보다 <대부 2>를 좋아합니다. 부자 관계를 그렸거든요.”
같은 해 11월 14일 후쿠오카 페이페이(PayPay) 돔에서 손정의는 아버지 손삼헌과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경기를 관전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을 놀라게 했다.
“정의야, 요즘에 ‘고래’라고 불리더구나. 정어리는 먹으면 안 된다. 고래가 되어서는 작은 물고기를 삼키면 안 되지. 정 필요하면 플랫포머를 먹어야 한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입에서 ‘플랫포머(platformer)’라는 단어가 나왔다. 심지어 최근 소프트뱅크 그룹이 ‘나스닥의 고래’로 불리는 것도 알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엔비디아(Nvidia)도 괜찮지. 암(Arm)이 엔비디아와 합쳐지니 진짜 플랫포머가 될 수 있을 거야.” 85세인 아버지가 업계의 최신 동향을 꿰뚫고 있었다. 누구보다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최고의 교육자입니다.”
손정의가 초등학생인 예닐곱 살이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정의야 대신 정의 상이라고 부르도록 해요.”(상さん은 상대방을 친근하게 부르거나 존중하는 의미의 존칭 - 옮긴이)
그 후로 어머니는 줄곧 아들 이름에 존칭을 붙였다.
“여섯 살 때부터 ‘정의 씨’라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존중해주는 만큼 그럴 만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이 몸에 배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버지의 제왕학에 따른 방침이었다. 아버지는 고작 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손정의는 어른이 되면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책임감 있는 자리에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학급에서 반장을 뽑을 때도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지원했다. 어디서나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이 또한 아버지의 교육방침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는 항상 칭찬만 받았지요.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년 손정의는 왜 터널을 지나야만 했을까?
“터널 너머에 다이키가와라는 강이 있었으니까요. 아버지의 막냇동생 이름이 손성헌(손 시게노리)인데 촌수로는 작은아버지이지만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사촌 형 같은 존재였습니다. 항상 같이 놀아줬는데 강으로 고기를 잡으러도 갔었죠.”
북쪽으로는 하카타 항, 남쪽으로는 쓰쿠시 평야와 아리아케 해가 보이는 해발 약 848미터의 구센부 산, 이 산에서 흘러나와 도스시를 가로지르는 다이키가와 강은 여름이면 아이들의 물놀이 장소가 되었다.
어릴 때는 고기 잡는 모습을 강가에서 바라만 봤지만 3, 4학년부터는 강으로 따라 들어갔다. 강 끝에 어망을 설치해두고 다 같이 고기를 몰았다. 가재나 미꾸라지가 잡히기도 했지만, 피라미를 잡고 싶었다.
피라미는 예쁘고 날쌘 7~10센티 길이의 물고기였다. 할아버지(손종경)가 민물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잡은 고기는 할머니(이원조)의 손을 거쳐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소년 손정의는 할아버지에게 대접하겠다는 처음 목적은 까마득히 잊은 채 고기잡이에 빠져들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강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무번지를 벗어났지만, 휴일에는 아버지의 형제, 친척 들이 모두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 같이 식사했다. 그래서 주말이나 여름 방학이 되면 언제나 다이키가와 강에서 놀았다.
“그때 고기 잡는 법을 많이 배웠습니다. 해루질(밤에 얕은 바다에서 맨손으로 어패류를 잡는 방식 - 옮긴이)이라는 방법인데 밤 9시나 10시가 적당합니다. 물고기도 졸릴 시간이어서 잘만 하면 낮보다 많이 잡히죠. 그래서 지금도 강을 매우 좋아한답니다.”
한여름 밤의 강. 그 광경이 손정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작품 <폭포(The Fall)>로 유명한 세계적인 화가 센주 히로시에게 병풍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모험으로 가득했다. 터널을 빠져나가는 과정도 하나의 작은 모험이었다. 해루질은 그보다 더 가슴이 뛰는 모험이었다.
“요즘 유니콘 기업에 투자하고 10년 후를 떠올리면 어릴 적 터널을 빠져나와 강에서 고기를 잡던 그때처럼 가슴이 뜁니다. 무번지에서 느낀 두근거림, 설렘과 똑 닮았지요.”
고등학생이 되어 미국 단기 유학을 위해 여권을 신청하면서 손정의는 처음으로 자신의 호적등본을 확인했다. 호적에는 ‘무번지’라고 적혀 있었다. ‘왜 무번지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아, 나는 번지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난 남자구나.’
출국 절차를 밟을 때 다른 친구들은 모두 빨간색 일본 여권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손정의가 들고 있는 것은 재입국허가증, 다시 말해 외국인 여권이었다. 홀로 외국인 게이트에 줄을 서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번지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구나.’
손정의는 그때까지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왔다. 학교에서도 다른 친구들처럼 일본어로 떠들고 여느 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생활했다. 하지만 사실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번지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난 데다 친구들처럼 빨간색 여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벽을 눈으로 확인한 손정의는 깊은 절망감과 소외감에 휩싸였다.
친구들 몰래 빠져나와 다른 줄로 옮겨 섰다. 함께 단기 유학을 떠나는 친구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줄을 잘못 서지 않았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손정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떨구고는 한층 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미국에 도착해서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자 답답했던 마음이 단숨에 뻥 뚫렸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편도 6차선 규모의, 일본에서는 본 적이 없는 탁 트인 고속도로가 펼쳐졌습니다. 그걸 보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지요.”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미국 시민으로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로 고민했었는지를 깨달았다. 무번지 따위 개나 줘버리라지!
미국의 높고 청명한 하늘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 속 사카모토 료마의 높은 뜻은 손정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으로 돌아와 이름을 소개할 때 선조가 물려준 ‘손(孫)’이라는 성을 그대로 밝히기로 한 것이다. 출신이나 성 때문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누구나 꿈을 꿀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에서, 무번지에서 시작했다는 점이 저에게 굉장한 도전 의지랄까요, 에너지를 줬습니다. 지금은 신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돈을 내고서라도 고생을 해보는 편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모르니까요.”
마이너스에서의 생활도 어린 시절에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여럿이 왁자지껄하게 힘을 합쳐 고기를 잡았다. 단언컨대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어망을 설치할 사람이 필요했고, ‘와!’ 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발로 수초를 헤치며 물고기를 어망으로 몰 사람도 있어야 했다. 고기를 잡으려면 여러 명이 역할을 나누고 작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모두의 목표가 같았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팀워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잡을수록 기쁨은 배가 되었지요.”
반면 낚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낚시는 낚싯줄을 내리고 물고기가 찌를 물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공격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기잡이는 매번 다른 전략을 세우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먼저 물고기의 위치를 예측해서 망을 설치합니다. 장소와 물의 흐름을 살피고 적당한 무기를 골라 힘을 합쳐 잡아 올렸지요. 물고기가 잠든 순간을 덮친다든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보통 고기는 물이 탁할 때 많이 잡혔다. 날이 어둡고 추우면 더 쉬웠다. 그래서 비 온 다음 쌀쌀한 한밤중이 안성맞춤이었다. 물이 탁해져 있는 데다 춥고 어두워서 물고기들도 움직임이 적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첨벙대면 깜짝 놀라 도망치려고 우왕좌왕했다. 물고기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망을 세워둔 채 잠시 기다렸다가 강의 한쪽 끝부터 반대편까지 어망으로 샅샅이 훑으면 일망타진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어망의 눈이 너무 촘촘하면 도리어 그물이 엉키기도 했다. 게다가 아주 작은 물고기는 놓아줘야 했다. 그래서 그물눈이 적당히 성긴 망으로 큰 놈만 잡아 올렸다.
“일정 크기가 넘는 전리품을 독식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입니다.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도 그렇고 모두 같은 전략을 사용하고 있지요.”
근처에는 저수지가 있어서 오가는 낚시꾼들이 많았다. 강에도 낚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지만, 손정의는 낚시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하루 꼬박 들여 잡아봤자 얼마나 잡겠냐면서 코웃음을 쳤다.
“잡을 거면 강에 들어가서 망으로 한번에 다 잡아야죠. 실제로도 우리가 고기를 훨씬 많이 잡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매일 드셔도 다 못 드실 정도로 말입니다. 지금 제가 세우는 전략은 모두 그때 그 경험의 연장선 위에 있지요.”
판자촌에서의 추억은 그때의 터널, 강, 그리고 마이너스에서의 출발이었다.
깜깜한 밤이 되면 아이들은 모두 나와 숨바꼭질을 했다. 돼지우리로 들어가 돼지 사이나 지붕 뒤쪽에 숨기도 했는데, 돼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느다란 철사로 울타리를 쳐놓은 탓에 어둠 속을 허겁지겁 달리다 보면 울타리에 걸려 고꾸라져 땅에 얼굴을 박기도 했다. 얼마나 아팠던지 다시는 돼지우리에 숨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면 안 되는 곳을 떠올리거나 숨을 곳을 찾을 때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돼지우리의 지붕 뒤나 기둥 뒤, 전봇대 아래에 숨어 있다가 술래에게 들키지 않도록 기지에 다가가서 재빠르게 터치해야 했는데, 그 순간의 두근거림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을 즐겼지요. 놀이지만 매번 최선을 다했습니다.”
놀이를 시작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적당히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했다.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는 만큼 기쁨도 배가 되었다. 가난했지만 언제나 즐거웠다.
도스시의 판자촌은 철길 옆에 있었다. 밤이 되어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기차가 통과하는 소리나 기적소리는 마치 기차가 들려주는 자장가 같았다.
“덜컹덜컹하는 기차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덩달아 뛰어서 에너지나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기차는 늘 제 심장을 뛰게 했지요.” 리듬을 쪼개며 힘차게 기차가 다가온다. 기차가 지나갈 길에는 미래가 있다. “저에게는 마치 희망의 소리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리면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차를 사더니 마침내 제법 풍요로워졌다.
“아버지의 출세 과정이라 할까요, 돈을 버는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자긍심도 커졌지요. 사업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한 나라의 어엿한 성주가 되는 과정을 모두 보아온 만큼 지금도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손정의는 아버지 손삼헌과 어머니 이옥자의 사형제 중 차남으로 1957년 8월 11일 일본 사가현 도스시 무번지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던 번지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철도의 요충지였던 도스시는 특별한 주력 산업 없이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손정의는 재일 한국인 3세다(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다). 손정의의 선조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 대에 한국 대구에서 일본 규슈로 건너왔다. 족보에 따르면 집안에는 대대로 무장과 학자가 많았다.
할아버지 손종경은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 손삼헌은 생선 장사부터 양돈업, 소주 제조까지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파친코 사업과 요식업, 부동산 사업 등으로 경제 기반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셨습니다.”
손정의의 뇌리에는 판자촌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린 손정의는 할머니 이원조가 끄는 손수레에 올라타 있었다.
“주변에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서 가축의 사료로 사용했는데, 물기가 많고 축축한 그 느낌이 싫었습니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을 수밖에 없었죠.”
손수레를 끌며 돼지 먹이로 쓸 음식 찌꺼기를 모으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할머니는 손정의에게 말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로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된단다.” 많이 좋아하고 따르던 할머니의 말을 손정의는 지금도 기억한다.
“할머니는 늘 ‘우리가 지금 먹고살 수 있는 건 모두 다른 사람들 덕분이란다’라고 하셨었죠. 어릴 때는 그 말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야 그 의미를 조금씩 느끼고 있지요.”
쉴 새 없이 일하는 조부모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년 손정의는 굳게 결심했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언젠가 제힘으로 식구들을 편히 살게 하리라 다짐했었죠.”
손정의 일가는 도스시에서 기타큐슈시로 이사했고 손정의는 근처의 히키노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성적은 1등이었지만 교과서는 늘 학교에 두고 다녔기 때문에 책가방도 없이 도시락과 실내화 가방만 들고 다녔다. 동네 아이들을 우르르 이끌고 근처 산을 오르거나 매일같이 축구를 하던 골목대장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1년간은 소년의 모습을 좀처럼 밖에서 보기가 어려웠다. 소년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엇이 밖에서 뛰어놀던 소년을 책상 앞에 앉게 했을까?
당시 초등학교 교실의 한쪽 벽에는 그래프가 붙어 있었다. 노트 한 페이지 분량의 자습을 마치면 선생님은 벚꽃 도장을 하나씩 찍어줬다. 그때까지 도장이 거의 없던 소년 손정의는 어느 날 어떻게 하면 벚꽃 도장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용과 상관없이 아무 공부만 하면 벚꽃 도장을 찍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손정의는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아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적당히 하지 그래. 그렇게 공부만 하다간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될지도 몰라.”
심지어 가족들이 여행을 갈 때도 소년은 혼자 집에 남아서 공부를 했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달라진 손정의의 모습에 가족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구보다 분홍색 벚꽃 도장을 많이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소 그저 외워야 하는 공부보다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만들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손정의에게는 새하얀 도화지에 자기만의 세상을 그려내는 화가를 꿈꾸던 시기도 있었다. 창의력이 풍부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를 보고 있자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구나.”
“어떤 생각이요?”
“혹시 네가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일본에서 제일가는 천재 말이다. 너는 분명 장차 큰 인물이 될 거야.”
어린 자녀의 사기를 북돋으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우와, 정말 대단하구나!”
아버지는 온갖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칭찬을 거듭했다. 어느새 아들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 되리라고 믿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수준에서 만족할 수 없었죠. 저는 진짜 천재일지도 모르니까요.”
한번 믿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에 한층 더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당시 손정의에게는 막연한 꿈과 자신감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일본 사회가 한국인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지도 의문이었다.
규슈에서 라살 고등학교 다음으로 유명한 구루메 대학 부설 고등학교에서 평범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손정의는 1학년 때 할머니와 함께 부모님의 나라인 한국을 찾았다.
“할머니, 저를 한국에 데려가주세요. 미국에 가기 전 그동안 원망해온 선조의 나라를 직접 보고 싶어요.”
손정의는 할머니와 단둘이서 2주 동안 한국을 돌아봤다. 길가에는 빨간 사과밭이 이어졌지만 비옥한 농경지는 아니었다. 전기도 통하지 않는 마을이었다. 친척들이 모여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밝고 배려심이 넘치는 이들의 환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위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이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온 손정의는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떠났다. 소년 손정의는 왜 갑자기 미국행을 결심했을까?
1973년 1월 27일 미국과 남베트남, 북베트남, 남베트남의 임시혁명정부가 베트남 평화 파리협정에 조인했다. 미군의 ‘명예로운 퇴진’일 줄 알았던 협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잇조각으로 전락했고, 베트남 전쟁은 그로부터 2년 넘게 더 이어졌다.
그해 여름, 한 소년이 처음으로 미국 어학연수를 떠났다. 소년은 가보지 못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 설렘은 하네다 공항 출국 게이트에서 단숨에 산산조각났다.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외국인 게이트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 너만 다른 줄에 서 있어?” 의아해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소년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당시에는 일본인과 외국인의 출국 게이트가 달랐다. 평소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던 ‘재일 한국인’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순간이었다. 큰 꿈을 꾸며 출발한 미국행이 보잘것없는 현실로 인해 퇴색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기내에 들어서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손정의는 혼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더니 어느새 코까지 골아댔다. 소년은 자신의 감정을 다독이는 법에 능했다.
“아, 잘 잤다.”
비행기는 어느새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처음 올려다본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끝을 알 수 없게 높고 푸르렀다. 일본에서 보던 하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 트여 있었다. 손정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미국에 온 긴장감과 시차로 인해 안개처럼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네다 공항의 출국 게이트에서 느낀 굴욕감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어학연수는 명문 캘리포니아 대학교(UC) 버클리 캠퍼스에서 진행되었다. l과 r 발음도 어려웠지만 의외로 가장 큰 난관은 일본에서 익숙하게 쓰던 단어였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 같은 단어가 문제였다. 일본식으로 ‘마꾸도나르도’라고 발음하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맥다널즈’처럼 아예 다른 발음으로 말해야만 했다.
지금은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 많은 관중 앞에서도 당당하게 영어로 연설하는 손정의지만, 이때는 아직 영어가 유창하지 못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발음을 지적받았다.
일본계 3세인 빅터 오하시 선생님은 담임은 아니었지만 손정의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수업이 없을 때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나 요세미티 국립공원,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구경했다. 하지만 손정의는 관광 명소보다도 쇼핑센터나 고속도로의 규모에 감탄했다.
“진짜 크다! 미국이 어떤 곳인지 더욱 궁금해지는걸.”
미국의 광활함을 마주하니 그동안 머리를 어지럽혀 온 고민이 더욱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1970년대 UC버클리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다양한 형태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학문적으로는 명문대로 손꼽히며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냈다.
수업이 끝나면 손정의는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다. 저 멀리 무언가를 주제로 열변을 토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을 치는 젊은이도 있었고, 상의를 벗은 채로 초록색 잔디밭에 엎드려 책을 읽는 여학생도 보였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학창 시절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중앙도서관 앞을 지나자 UC버클리의 상징인 새더 타워(탑)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캠퍼스가 넓어서 길을 잃더라도 새더 타워를 기준으로 찾으면 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캠퍼스를 걷다 보면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사람들과 만났다. 실로 다양한 인종의 집합소라 할 만큼 피부색도, 나이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교과서에서도 배웠지만 실제로 보니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손정의에게 덩치가 큰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화려한 셔츠를 입고 회색빛 터번을 두른 남자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전하려고 했지만, 손정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말하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캠퍼스에서는 모두가 평등했고 누구나 자유롭게 말을 걸었다. 손정의는 이러한 미국의 문화가 신선했다. 국적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캠퍼스 안에서는 누구나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했다.
손정의는 양팔을 크게 벌리고 새더 게이트를 통과했다. 왠지 모르게 용기가 솟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4주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새까맣게 그을린 채 일본으로 돌아온 손정의는 환한 웃음과 함께 선언했다.
“저, 고등학교 그만두려고요.”
예상대로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너무 빠르구나.” 친척 모두도 만류했다. “이왕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졸업한 후에 시작하면 되지 않겠니?”
하지만 졸업 후면 늦을 것 같았다. 손정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저는 한국 국적이니까 일본 대학을 나와봤자 크게 인정받기 어렵겠죠. 하지만 미국에서 성과를 낸다면 틀림없이 일본에서도 인정받을 겁니다.”
머릿속에 이미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인생은 짧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요.”
버클리에서 올려다본 미국의 파란 하늘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유한한 인생인 만큼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새더 타워 앞 도서관 입구에는 도서관 문이 열릴 때까지 1분 1초를 아껴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미국인답게 자신의 미래를 믿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왕이면 그들처럼 치열하게 살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담임인 아베 이쓰오는 그래도 9월의 체육대회까지는 학교에 나오라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남겨주려는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졌다. 눈물이 고였지만 꾹 참았다. ‘남자가 쉽게 울면 안 되지.’
하지만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들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미국에 가면 이제 안 돌아오는 거 아니냐?”
손정의는 한번 말을 꺼내면 주장을 굽히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망설여졌다. 게다가 아버지가 피를 토한 직후여서 더욱 그랬다.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두고 네 생각만 하는 게야?”
“외로워할 엄마 생각은 안 해?”
“가족이 힘들어하는데 혼자 미국에 가겠다고?”
쏟아지는 비난에 손정의는 마치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사카모토 료마가 된 기분이었다.
보수적인 도사(土佐) 번(藩, 에도시대 1만 석 이상의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지배기구 - 옮긴이)을 포기하고 료마는 탈번(脫藩, 무단으로 소속 번을 이탈함 - 옮긴이)을 택했다. 당시 탈번은 대역죄로 친인척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손정의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다. 지금 미국행을 주저하면 길을 닦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의를 위해서는 누군가를 울려야만 하는 순간이 오는 법이다. 가족에게는 언젠가 보답할 기회가 오리라. 지금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온 가족이 반대했지만 정작 손을 잡아준 사람은 병석에 누워 있던 아버지였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돌아와야 한다. 결혼 상대는 동양계 사람이었으면 좋겠구나.”
십이지장이 파열되어 입원 중이던 아버지는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그런 아버지가 걱정되었지만 손정의의 눈은 이미 드넓은 미국 땅을 향해 있었다.
세계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오일쇼크가 터지는 바람에 일본에서도 화장지를 사재기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물가는 큰 폭으로 상승했다. 또 과격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캘리포니아에서는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손녀 패트리샤가 버클리 자택에서 유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4년 2월 손정의는 캘리포니아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구루메 대학 부설 고등학교의 친구들은 시내에 있는 이시바시 스포츠센터에서 손정의를 위한 송별회를 마련했다.
“힘내라, 마사요시!”
주스와 과자를 나눠 먹으며 손정의의 앞날을 축복하고는 다 같이 드라마 <젊은이들>에 나오는 동명의 주제가를 부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너는 가느냐, 그렇게까지 하면서…”라는 가사에 손정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족들이 후쿠오카 공항까지 바래다줬다.
“꼭 돌아와야 한다.” 어머니는 손정의의 등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할게요.” 일부러 무심하게 대답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하늘로 떠오르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광경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감상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손정의는 샌프란시스코 교외에 있는 홀리네임스 칼리지의 영어 학교(ELS 과정)에 입학했다. 1868년에 설립된 로마 가톨릭 학교로 개호학, 경제학 등이 유명한 곳이었다.
손정의는 필사적으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혹시 일본에서 왔어?” 누군가 일본어로 물어봐도 영어로만 대답했다. 일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영어 실력은 날로 향상되었다.
대학교 캠퍼스 안에는 기다란 돌계단이 있고 계단 끝에는 예배당 발코니가 있었다. 맑은 날에는 리치먼드 산라파엘 브리지, 골든게이트 브리지, 베이브리지, 샌머테이오라는 네 개의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는 하이테크 기업이 즐비한 실리콘밸리도 보였다. 이 실리콘밸리가 훗날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리라고는 이때는 알지 못했다.
저 멀리 태평양이, 그 너머로는 일본이 있을 것이다. 손정의의 가슴에는 일본에서부터 품어 온 사업가가 되겠다는 큰 꿈이 있었다. ‘반드시 천하를 제패하리라!’
7개월 후인 1974년 9월, 손정의는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인접한 데일리시티의 4년제 고등학교인 세라몬테 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소년은 운명의 문을 두드린 것일지도 모른다. 문은 서서히 열렸다.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닉슨 대통령이 사임했다. 10월 14일에는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살아 있는 전설’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자이언츠는 영원히 불멸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은퇴했다.
그해 신학기가 시작된 9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다소 이른 어느 날 아침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있는 데일리시티의 공립학교 세라몬테 고등학교(1994년에 폐교되어 현재는 컴퓨터 기술자를 양성하는 학교가 되었다. 필자가 방문했던 날에도 많은 이가 컴퓨터 공부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반소매 폴로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장발의 소년이 긴장한 얼굴로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세라몬테 고등학교의 앤서니 교장은 작은 체구의 친근한 얼굴을 가진 소년을 바라봤다. 앤서니 교장은 대학 시절 이름을 날리던 풋볼 선수 출신으로 다부진 체격에 굵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늘 미소를 짓고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교장 선생님은 소년을 웃으면서 맞이했다.
“교장 선생님,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Son Jung’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 손정의는 이 학교 2학년으로 편입한 상태였다. 편입하고 일주일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할리우드 영화에 나올 법한 생김새였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그 자체였다. 가볍게 말을 거는 같은 반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 생활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정의는 자신이 꿈꿔왔던 상황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 수준이 높기는커녕 기대했던 수준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저를 3학년으로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온화한 교장 선생님의 눈이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반짝였다. 줄곧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사라졌다.
“자네의 기록을 보니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던데?”
“네. 도중에 미국에 오고 싶어졌거든요.”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당당한 태도에 교장 선생님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는 아직 1학년 과정도 이수하지 않았네.”
4년제인 세라몬테 고등학교 1학년은 일본의 중학교 3학년 과정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손정의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대학에 진학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동양인답지 않은 대담한 발언과 적극적인 태도에 놀란 교장 선생님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다음 날 손정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5일 동안 식탁이나 화장실에서조차 교과서를 놓지 않고 1분 1초를 아껴가며 공부했다. 그 모습을 본 교장 선생님의 결단으로 3학년에서 4학년으로 특별 진급을 인정받은 손정의는 기세를 몰아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대학 입학을 위한 검정고시를 보기로 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불과 석 달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검정고시에 붙으면 18살 미만도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획득해 대학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다만 수학, 물리, 화학, 역사, 지리, 영어의 6과목 모두 합격해야만 했고 그중 한 과목이라도 떨어지면 다시 봐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대신 소년의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추천서를 써주면서도 소년의 영어 실력을 고려하면 단번에 붙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그의 합격을 확신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손정의 자신이었다.
검정고시는 하루 두 과목씩 총 3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아침 9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손정의는 책상 위에 놓인 문제지를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일본과는 다르게 문제지 더미가 너무도 두툼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보고 덜컥 겁부터 났을 것이다.
‘이를 어쩌지?’
손정의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무모함을 탓하기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내년까지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에 손정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저 앉아서 내년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좋은 계획도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정의는 계획을 세운 후에는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으리라.
이때만큼은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손정의라 해도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이 아닌 자신의 운명에 간절히 빌었다. 결심을 굳힌 손정의는 시험 감독관에게 사전의 사용과 시간 연장을 요청했다.
“안됐지만 자네만 예외로 할 수는 없네.”
손정의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위기의 순간에서 그의 내면의 강인함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럼 제가 직접 어필하고 오겠습니다.”
정확히 그렇게 말했는지는 본인도 기억하지 못한다. 손정의의 발은 이미 교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교무실 문을 열었다. 흥분한 상태였지만 침착함도 잃지 않았다. 비범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이었다.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소년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사정을 설명하는 손정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교사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감정에 솔직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기울었다. 한 교사가 교육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교육위원장은 소년의 열의에 탄복해 주장의 타당성을 따지지 않고 사전의 사용과 시험 시간 연장을 허가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얼토당토않은 요구였다고 손정의는 웃으면서 회상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소년 손정의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필사적이었다. 미국까지 온 목적이 이 시험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험 시간 연장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몇 시까지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손정의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로 했다. 문제가 풀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었다. 미국 학생들을 위한 검정고시인 만큼 무슨 뜻인지 감도 오지 않을 만큼 어려운 단어가 빼곡했다.
혼자만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미국 학생은 문장을 읽으면 무엇을 요구하는 문제인지 금방 파악되겠지만 손정의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답을 정확한 영어 문장으로 적어야만 했다. 정확한 영어가 아니더라도 아무튼 답이 맞아야만 했다. 하지만 문제마다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생각한 답이 정답일지 고민하면서 몇 번씩 문제를 들여다봤다.
오후 3시가 되자 시험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교실을 나섰지만 손정의는 계속해서 문제와 씨름했다.
시험 첫날, 펜을 내려놓자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감독관도 눈에 띄게 지쳐 보였다. 남은 힘을 힘겹게 쥐어짜 낸 듯한 목소리였다.
“Well done(고생했다).”
손정의는 미소를 띤 채 조용히 답했다. “감사합니다.”
몽롱한 상태로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왔다. 라디오에서는 비치 보이즈의 히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험 이틀째, 미국 역사는 거의 감으로 풀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오후 11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3일째인 마지막 날, 손정의는 가장 어려웠던 과목인 물리를 힘겹게 마치고 펜을 내려놨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오전 0시를 가리키고 날짜도 바뀌어 있었다.
그로부터 2주가 흘렀다. 홈스테이 집으로 캘리포니아주 교육위원회가 보낸 우편물이 도착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수학은 거의 만점이었다. 물리도 비교적 괜찮은 성적이었다. 영어, 화학, 역사, 지리 성적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글자는 ‘ACCEPT(합격)’였다. 손정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만세!”
최선을 다하고도 안 되면 결과를 받아들이기 쉽다. 미련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은 변명하고 싶지 않았기에 온 힘을 다해서 도전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목표를 이루어낸 사실이 내심 뿌듯했다.
이렇게 손정의는 고작 3주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세라몬테 고등학교 사무국 기록에는 이렇게만 남아 있다.
“1974년 10월 23일, 손정의 자퇴.”
사무국의 한 직원이 말했다. “비록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미스터 손 같은 인물이 우리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자마자 ELS 과정에 입학해서 2~3주가 지났을 무렵, 손정의는 긴 머리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아름다운 일본 여자를 만났다. 오노 마사미였다.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다니!’
두 번째 데이트하면서 확신이 들었다. ‘미래의 내 아내는 마사미 씨뿐이다.’ 아직 손도 잡지 않은 사이였지만 손정의는 직감했다.
“청초하지만 심지가 굳은 면도 있습니다. 이렇게 멋진 여성을 만난 저는 행운아죠.”
복도에서 그녀가 보이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은 데이트를 겸해서 함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사도 카페테리아에서 함께했다. 참고로 마사미는 손정의의 첫인상에 대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특이한 녀석’이었다고 말한다.
ELS 과정에서 반년간 공부한 손정의는 세라몬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편 마사미는 홀리네임스 칼리지에 다니고 있었다. 마사미는 두 살 연상이어서 이대로라면 3년간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하루빨리 마사미와 다시 함께 공부하고 싶다.’ 그런 간절함이 손정의를 월반이라는 강행군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손정의의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손정의는 들뜬 목소리로 마사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그쪽(대학)으로 갈 테니 기다려.”
손정의의 인생을 좌우한 또 하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만남과 마주하기도 하고, 하나의 행운이 또 다른 행운을 부르기도 한다. 마사미와의 만남이 또 다른 행운을 불러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손정의는 항상 들리는 슈퍼마켓 세이프웨이에서 과학 잡지 『퍼퓰러 일렉트로닉스』를 샀다. 그리고 잡지 속 한 장의 사진에 정신을 빼앗겼다. 인텔이 발표한 i8080 컴퓨터 칩을 확대한 사진이었다. (8자리의 0과 1을 처리하는 8bit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퍼스널 컴퓨터가 탄생했고, 이는 컴퓨터의 대중화로 이어졌다.)
“살면서 가장 크게 감동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물건이 인류의 미래를 바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사진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뻗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 힘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손가락이 파르르 떨립니다. 그 사진을 봤을 때도 그랬죠. 얼마나 감동했던지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습니다.”
기하학적 모양이 빛에 반사되어 형형색색의 눈부신 빛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손정의는 컴퓨터가 인류보다 뛰어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인류의 역대 발명품 중 단연 최고입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빛줄기였습니다. 어쩌면 인류의 지적 생산 활동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손정의가 예닐곱 살 때 TV에서는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이 방영 중이었다. 코주부 박사가 램프가 깜박깜박 점멸하는 커다란 컴퓨터를 만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까지 저에게 컴퓨터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생명체는 지금 눈부신 무지개색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손정의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오려서 클리어 파일에 소중히 넣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 넣어 한순간도 떼놓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들고 갔고 잘 때는 침대 맡에 두고 잠들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반년 만에 너덜너덜해졌다. 어떤 형태로든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인생의 충격적인 만남을 가진 또 다른 젊은 미국인이 있었다. 그 역시 손정의처럼 뜨거운 눈으로 원 칩(one chip) 마이크로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인 빌 게이츠였다. 빌 게이츠는 1955년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훗날 세계 최고의 자산가가 된 컴퓨터 천재의 탄생이었다.
대학교 2학년생이던 1974년, 잡지 『퍼퓰러 일렉트로닉스』를 본 빌 게이츠 역시 형용하기 어려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빌 게이츠는 그때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퍼스널 컴퓨터가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를 180도 바꾸어 버릴 거라 확신했지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기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알테어라는 이름의 350달러짜리 컴퓨터 키트를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는 MITS사에서 만들었다는 기사였다.
빌 게이츠는 그 길로 또 다른 천재인 폴 앨런에게 달려가 설득에 나섰다. 폴 앨런이 빌 게이츠와 처음에 만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시애틀 명문인 레이크사이드 고등학교에 PDP-10이라는 텔레타이프 단말기가 시분할 방식으로 설치된 이후 두 사람은 컴퓨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초보자용 프로그램 언어인 BASIC을 마이크로컴퓨터에 이식할 때가 왔어. 어서 서두르자!”
그 후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의 행보는 21세기 초반인 오늘날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같은 해 2월부터 3월까지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의 작은 방에 틀어박혀 개발에만 몰두했다. 햄버거와 콜라로 식사를 때우고는 책상에 엎드려서 쪽잠을 자며 버티는 날이 계속되었다. 컴퓨터 초창기의 역사를 써 내려간 또 다른 청춘의 한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야. 시대를 바꾸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그러니 더 늦어져서는 안 돼.”
마침내 두 청춘은 알테어용 BASIC 개발에 성공했다. 그렇게 컴퓨터 춘추 전국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빌 게이츠가 19살, 폴 앨런이 22살 때였다.
이듬해인 1975년, 폴 앨런은 근무하던 하니웰사를 나오고 빌 게이츠는 하버드 대학교를 중퇴했다. 그리고 앨버커키로 옮겨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차렸다.
1976년 애플 컴퓨터를 출시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도 같은 시기 업계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맥닐리, 오라클의 래리 에릭슨도 손정의와 동시대의 인물들이었다. 모두 원 칩 마이크로컴퓨터 역사의 최전선에 등장한 16~19살의 젊은 무사들이었다.
여기서 손정의가 존경하는 사카모토 료마를 떠올려보자. 료마를 비롯한 에도막부 말기의 지사(志士, 높은 뜻을 지닌 사람 혹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 옮긴이)들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검은 군함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계기로 메이지유신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손정의나 빌 게이츠에게 원 칩 마이크로컴퓨터와의 충격적인 만남은 마치 검은 군함의 등장과도 같았다.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필연적인 만남인 셈이다. 이 운명적인 만남을 계기로 전 세계의 디지털 정보혁명이 시작되었다.
1975년 9월 손정의는 홀리네임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목표가 생긴 만큼 사력을 다해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먼저 손정의는 문짝을 사러 갔다. 미국식 문은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가구점에서 손잡이가 없는 커다란 문짝을 한 장 사서 두 장의 철판 캐비닛 위에 올리자 특대 사이즈의 책상이 완성되었다. 새로운 책상 위에 교과서, 사전, 참고서 등 필요한 물건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올려놨다. 조명도 세 군데나 설치했다.
“자, 시작해볼까!”
힘찬 기합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밥을 먹거나 목욕을 할 때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목욕탕에 몸을 담근 채로 교과서를 봤다. 차를 운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테이프에 강의를 녹음해서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이동했다. 그러다 신호등에 걸리면 시간이 아깝다며 핸들 위로 교과서를 펼쳤다. 곁눈질로 교과서를 보느라 바뀐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김없이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그제야 허겁지겁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손정의는 캠퍼스에서도 독특한 차림새로 거닐었다. 등에 멘 노란색 가방에는 언제나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빼곡했다. 면바지도 직접 수선해서 입었다. 커다란 주머니를 바지에 달아 펜 15자루를 구겨 넣고 계산기까지 넣고 다녔다. 그래서 공강 시간에 뛰어다닐 때면 항상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울룩불룩한 가방을 메고 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달리는 수상한 남자가 캠퍼스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원 칩 마이크로컴퓨터라는 미지의 세계가 이 청년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1975년 10월 1일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무하마드 알리는 조 프레이저와 대결했다. 알리는 강렬한 펀치를 날려 14라운드 만에 압승을 거뒀다.
“I’m the greatest(나는 위대하다).”
또 다른 위대한 남자, 손정의는 ‘공부 귀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평균 수면시간은 3시간으로 길어봤자 5시간이었다.
“니노미야 손토쿠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공부에 전력을 쏟아부었었죠.” 손정의는 회고한다.
왜 니노미야 손토쿠와 비교했는가. 예전 일본의 초등학교에는 반드시 교정 어딘가에 장작을 지고 책을 읽는 소년의 동상이 있었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독농가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책을 읽는 소년의 모습은 손정의의 청년 시절 그 자체였다.
홀리네임스 칼리지에서의 시험 전날, 손정의는 독한 감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악성 독감에 걸렸는지 고열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고 입맛도 없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몸 상태로 시험 날이 다가왔지만 손정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시험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손정의는 설레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사미 역시 감기에 걸려 침대에 누운 채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훗날 아내가 되는 마사미는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잠시 든든함을 느꼈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때의 시험 성적은 역대 최고인 전 과목 A였다.
시험을 마치고도 여전히 몸이 무겁고 열도 그대로여서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신은 자신의 병이 중병이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습니까?”
손정의의 성적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몇몇 우수한 학생들과 함께 학장상을 받았다. 유학생으로서는 최초의 쾌거였다.
손정의에게 상장을 건네준 당시 아일린 우드워드 학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미스터 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홀리네임스 칼리지는 ‘스몰 칼리지’라고 불리는 폭넓은 교양을 갖추기 위한 대학이다. 명예(Honor), 고결(Nobility), 용기(Courage)를 모토로 하며, 교표는 중세 문장에서 따온 홀리네임스 수녀회의 교표를 계승했다. 타원 안에 둘러싸인 십자가와 백합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의 성명(홀리네임스)을 상징한다.
손정의가 입학하기 4년 전인 1971년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고 외국 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1975년 당시 학생 수는 한 반에 15~20명씩 총 800명이었다.
커다란 사회 변혁의 물결이 대학가에도 밀려왔고 시대는 손정의가 입학하기 직전에 크게 변화했다. 엄격한 가톨릭 학교였지만 수도복이 아닌 평상복의 착용을 허용했다. 교풍도 예전에 비해 자유로워져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도록 방침을 바꿨다. 미국인 교사나 학생 모두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의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1990년대에 해당 대학에서 공부한 후배인 가와무카이 마사아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롭고 분위기가 매우 좋은 학교였습니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다들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 등 15개의 전문 과정 중 일본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과는 개호학과였다.
지금은 교단을 떠났지만 마거릿 커크 여사는 손정의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월수금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이었다. 커크 여사는 1975년과 1976년에 회계학 수업에서 손정의를 가르쳤다. 손정의는 특별 제작한 바지에 고무 슬리퍼를 달그락거리며 캠퍼스 예배당 옆 기나긴 108계단을 요란하게 뛰어 내려와 늘 그렇듯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눈에 띄는 학생이었습니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거든요.”
일본, 인도네시아, 멕시코,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스무 명 남짓인 학생 중에서도 손정의는 단연 눈에 띄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자주 커크 여사를 잡고는 질문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가 하고 싶습니다.”
커크 여사는 당시 30대 후반으로 시간제 강사로 갓 부임했을 때였다. 그래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학생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직접 실천해보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태도가 돋보였다. 이 학생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손정의는 “나중에 비디오게임 관련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커크 여사는 손정의가 TV 게임의 붐을 일으키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훗날 손정의는 일본에서 인베이더 게임기를 수입하는데 그 아이디어는 이때부터 생각해둔 것이었다).
캠퍼스의 카페테리아 앞에는 기숙사 생도들을 위한 휴게실이 있었다. 작은 부엌이 있었지만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점에 착안한 손정의는 친구와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저렴하고 건강한 야식을 제공하기 위해 휴게실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손정의는 대학교 사무국에 찾아가 사용 허가를 받았다. 전단을 나눠주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휴게실 입지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학생을 두 명 고용해서 하루 두 시간씩 음식을 팔았다. 야키소바, 몽골리안 비프, 완탕스프 등을 저렴하게 제공했는데 맛도 나쁘지 않다고 입소문이 났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준비나 정리 시간까지 하루 네 시간 시급 2.5달러씩을 지급했다.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에 한껏 고무된 것도 잠시,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친구가 매출을 속인 것이었다. 믿었던 친구였던 만큼 손정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돈이 얽히면 친구도 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반년 만에 ‘손정의 식당’은 폐업했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렇게 손정의의 경영철학 하나가 탄생했다. 비즈니스는 홀로 할 수 없지만 파트너는 반드시 신중히 골라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손정의는 언젠가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가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일본 맥도날드 사장인 후지타 덴의 저서 『유대인의 상술』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고등학생 손정의는 혈혈단신으로 규슈에서 상경해 후지타를 찾아갔다. 후지타는 이 무모한 소년을 사장실로 들여 대화를 나눴다.
“만약 내가 젊다면 요식업이 아니라 컴퓨터 관련 비즈니스를 하겠네.”
미국에서 마이크로컴퓨터와 운명적으로 만난 이후로도 손정의는 후지타가 쓴 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돈을 버는 행위는 훌륭한 일이다. 돈 자체는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하고 후지타는 강조했다. 손정의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인다운 유교 윤리에 따른 ‘돈벌이는 천박하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손정의는 홀리네임스 칼리지를 2년도 안 되어 마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단기 유학에서 접한 이후로 동경해왔던 UC버클리 캠퍼스 한 곳만 지원하기로 했다. 3학년으로 편입하기 위해 손정의는 대학 경제학부 사무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교수회의에서 손정의를 1번으로 입학시키기로 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머지는 대학교 사무국 절차상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합격이었다. 홀리네임스 칼리지에서 버클리로 편입이 가능한 인원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명문인 버클리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1977년 손정의는 보란 듯이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경제학부 편입에 성공했다. 같은 해 마사미도 사이좋게 버클리로 편입해 천체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때는 이미 빌 게이츠가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세운 후였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은 향기 좋은 와인을 빚어내고 비옥한 대지는 천재를 낳는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베이 브리지를 건너면 보이는 버클리시에 자리한다. 1868년에 설립된 버클리 캠퍼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공립 종합대학으로 14개의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세계 100개국이 넘는 곳에서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캠퍼스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00헥타르(500만 제곱미터) 규모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설비 역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도서관은 단과대별로 존재하며 보유한 장서의 규모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유수의 대학 중에서도 손정의가 버클리를 고른 배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학이라는 점 외에 자유로운 교풍도 한몫했다. 그만큼 버클리에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다.
손정의가 졸업하고 25년이 넘은 지금도 당시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캠퍼스 잔디밭을 지나다 탱크톱 차림으로 담소를 나누는 여학생 무리와 수상한 망토를 두른 남자를 보고 필자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캠퍼스 주변에는 현란한 무늬의 티셔츠 가게나 향을 파는 매대가 나란히 자리해 활기를 띠었다.
손정의의 동급생 중에도 기묘한 남자가 몇몇 있었다. 얼굴의 오른쪽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왼쪽은 깨끗이 밀어서 매끈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수학 성적만큼은 항상 탑을 유지했다. “교수님, 이 공식은 틀렸는데요.”라며 수업 도중에 교수를 쩔쩔매게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정의도 교과서 속 오탈자나 공식의 오류를 가끔 지적했지만, 이 남자에게는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또 어떤 날에는 스파이더맨 분장을 하고 온종일 건물 벽을 타는 남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버클리에서 공부하면서 손정의가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컴퓨터 설비였다. 모든 학생에게 24시간 개방했다. 단말기가 건물별로 수백 대씩 늘어서 있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 컴퓨터 시스템을 손정의는 철저하게 이용했다.
손정의는 특히 수학과 물리, 컴퓨터, 경제학 과목에 힘을 쏟았다. 이 네 분야의 성적은 모두 A로 상위 5%에 해당했다. 그래서 어학 측면에서 핸디캡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정의는 누구보다 많은 과목을 이수했다.
미국 대학은 입학은 비교적 쉬운 반면 졸업은 쉽지 않다. 약 25%만이 졸업 가능한 정도다. 이수 학점이 부족하거나 C를 받으면 대학에서 강제로 퇴학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면 중퇴하거나 다른 대학으로 전교해야만 했다.
교수 평가 역시 엄격했다. 학기 말이 되면 ‘교수 평가(Teachers Evolution)’를 실시해 학생들이 무기명으로 평가했다. 강의 준비를 잘했는지, 채점 기준은 공정했는지 등 50가지 항목에 대해 1점부터 7점까지 점수를 매겼다. 학생들의 평가는 컴퓨터로 정리해서 대학교 생협에서 인쇄물로 발행되었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생들은 심사숙고해 수강 과목을 정했다. 강의 내용이나 시험 수준이 낮으면 학생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교수는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공부하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차이도 컸다. 공부하는 학생은 손정의만큼 독하게 학업에 열중했다. 교수도 분필을 칠판에 내리찍고 침까지 튀겨가며 진지하게 강의했다. 교수와 학생 간에 불꽃 튀기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버클리에서의 생활을 지탱해준 건 여자친구인 마사미였다. 어느 날 손정의는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마사미를 놀라게 했다.
“집에서 보내주시는 생활비 말이야, 이제 받지 말자. 나도 안 받을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사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자친구인 마사미와 결혼하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느껴졌다. 말을 마친 손정의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차피 결혼하면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별도의 계획이 있었던 것일까?
대학을 졸업하면 사업가로서 발을 내디딜 심산이었다. 하지만 졸업한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을까? 일반 학생이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손정의는 가능하리라고 확신했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재학 기간에 준비가 필요할 뿐이었다. 또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냉혹한 현실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미국에 가기 전 아버지는 입원 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병세와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활이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아직 미래도 불투명한 일개 대학생에게 생활비 지원까지 끊으면 과연 생활할 수 있을까. 심지어 아르바이트만큼은 절대 안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당시 손정의는 생활비로 20만 엔을 받고 있었는데 사실 가족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루 5분씩만 공부가 아닌 다른 일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5분 정도 공부를 덜 한다 해서 성적에 영향이 있지는 않으리라. 버클리 생활도 익숙해져서 약간의 여유가 생긴 시점이었다.
이때 손정의는 범상치 않은 결심을 했다. 하루 5분씩 투자해서 한 달에 100만 엔 이상 벌 수 있는 일은 없을까?
“It’s foolish(바보 아냐?).” 친구들이 비웃었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이 만연한 오클랜드, 범죄가 빈번한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위험한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정의는 그런 아르바이트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일본 유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레스토랑 설거지나 거리 청소와 같은 육체노동이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이드 정도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해도 육체노동으로는 버는 돈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손정의에게는 자본도 연줄도 없었다.
“아, 맞다!”
갑자기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무언가를 발명해서 특허를 파는 일이었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설립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작은 공장부터 시작했다. 2단 소켓이나 자전거 램프의 발명이 세계적인 전기왕으로 향하는 첫 단추였다. 마쓰시타는 손정의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마쓰시타 씨도 해냈으니까 나도 해낼 수 있을 거야. 좋아, 발명을 해보자!”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발상이었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손정의는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버클리에는 훌륭한 서점이 많았다. 그뿐 아니라 헌책방에는 매년 우수한 학생이 졸업할 때 처분하는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손정의는 시내를 샅샅이 뒤져서 특허 관련 책을 몽땅 사 모았다.
물론 발명을 해본 경험은 없었다. 초등학생 때 만들기를 좋아해서 무언가 창의적인 일에 관심은 있었지만, 발명은 온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책을 통해 어떤 물건이 특허로 인정받는지에 대한 감이 잡히자 실천에 돌입했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가지씩 발명하는 거야.”
손정의는 진지했다. 그에게는 실현 가능한 인생 계획의 한 단계일 뿐이었다. 발명왕인 에디슨조차 하루 한 가지 발명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야말로 발명의 신일 것이다.
손정의가 일기 대신 영어로 적은 발명 고안 노트(다른 이름은 아이디어 뱅크)에는 250건이 넘는 아이디어가 빼곡히 적혀 있다. 하루 한 가지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실제로 여기서 위대한 발명이 탄생했다.
“똑같은 일을 1년간 계속한 덕분에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저렴한 알람시계가 5분 후에 울릴 때까지 고민한 아이디어는 모두 손정의답고 독특했다. 손정의는 발명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문제 해결법이다. 어떠한 문제나 곤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그를 해결하기 위한 발명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단면이 둥근 연필은 테이블에 두면 굴러서 떨어진다. 그래서 ‘연필이 구르면 불편하다’라고 느낀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단면을 사각형이나 육각형으로 바꾼다’라는 해결 방법을 도출한다. 문제를 발견하고 3단 논법으로 해결책을 고안하는 유형이다.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서도 고민했다. 청결하지 않고 차가운 변기를 개선하는 방법이 없을까? 손정의는 자주 먹던 햄버거의 발포 스티로폼 용기를 응용해 화장실 시트를 발명했다.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이디어지만 앞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하려는 사람의 발명품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 포기했다. 이른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패턴이다.
두 번째 유형은 수평적 사고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발명이 이루어진다. 원래 둥글었던 물건을 사각형으로 바꿔보거나, 빨간 물건은 하얗게 해보고, 큰 물건을 작게 만들어보기도 한다. 손정의가 발명한 신형 신호등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색깔만 보이는 신호를 형태로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기존의 동그라미 세 개를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 바꾼 신호등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색맹인 사람도 구분하기 쉬울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조합이다. 기존의 물건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라디오와 테이프 녹음기를 합쳐서 라디오 카세트테이프가 되는 식이다. 미국에서 손정의가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낸 방법이 바로 세 번째 패턴이었다. 이 방법이라면 체계적으로 발명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길을 찾은 뒤로는 물 만난 고기였다. 현대에 되살아난 거대 공룡처럼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젊은 발명왕 손정의는 마침내 위대한 발명에 성공했다.
19살, 한창 청춘이었다. 대부분은 공부나 스포츠, 데이트에 여념이 없을 때다. 하지만 전체 인생에서 19살은 무엇을 해야 ...